우리가 자주 부르는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이 이 가사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품으로 나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즈”가 쓴 작품가운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그는, 믿음이 뛰어난 대주교였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 저녁, 습관적으로 예배당에서 “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라며, 기도했습니다.그런데, 하루는 하늘에서 “그래, 말해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대주교가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웰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깊은 생각의 자리로 이끕니다. 대주교는 평생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대주교의 신앙은, 지식적으로의 신앙일 뿐,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었고, 확신의 신앙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야말로, 바리새인의 신앙이었습니다. 웰즈는, 이렇게, 확신없는 신앙, 바리새인처럼 사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미지적 신앙은, 하나님이 찾는 성도의 모습이 아님을 풍자했습니다. “주만 바라볼지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시는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출 6: 5을 보시면,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어야 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한결같지 않은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호세아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며, 호 4: 6에서 말합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 속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본문 3절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며, 강조합니다. 여기서의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안다”는 겁니다. 즉,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안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았습니까? 그저, 사탄의 유혹이라고 얼버무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웰즈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대주교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사데교회의 신앙입니다. 계 3: 1을 보시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러한 호세아의 외침을 들으며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웨나슈바”입니다. 그 의미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품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덕규 목사의 “가시나무”라는 곡의 가사를 보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라고 합니다. 그는, 이 짧은 가사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방탕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그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고백합니다. 이것이 어찌, 하덕규 목사뿐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험하기 전에는, 우리 속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너무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본문의 뒷부분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낫게 하실 것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웨이르파에누”로,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습니까? 가족, 형제, 지인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닌, 권세와 지식과 명예와 부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약 1: 5을 보시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에게 지혜 뿐 아니라, 부귀와 영광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지난 주중에,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해, 규탄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를 읽는 가운데, 제 눈에 쏙들어오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가 되었다”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국가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도된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신앙에 대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고난의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도로 낫게 하고 고쳐주겠다고 본문에서 약속하십니다. 시 147: 2 – 3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사 30: 26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고, 감성의 풍성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의지로 인한 행동으로 실천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본문 끝의 “살리라”는 히브리어로, “웨니흐예”입니다. 이는, “살리는 역사로 생명이 영위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들을 소생시킬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리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새 생명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시며, 그 약속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바로, 무지개에 두셨습니다. 요즘, 무지개에 대한 여러 의미들이 있습니다. 일곱 빛깔의 색들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었다며, “세상의 연합”을 말하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반려동물들이 죽었을 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무지개의 본래 의미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새 생명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 분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이틀 후”는, 매우 짧거나 적은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장 중요하거나 확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빠르고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어서 본문을 보시면,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이는, “그의 얼굴 앞에서”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4: 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본문에서 약속하신 영원한 새 생명이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안에서 나의 죽음이요, 나의 부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을 왜곡된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주고 약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간과했을 때의 시각입니다. 렘 29: 11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고,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과 기다림을 기억하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느 자리에서나,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께 나감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새 생명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 안에서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새벽 빛”에 비유합니다.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는, 히브리어로 “케솨하르 나콘”인데, 이는, “새벽빛처럼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면 빛이 비추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며, 풍요로운 복을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본문의 시작에서,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의 “힘써”라는 말은, “달음질하여 따라간다”는 의미로, “최선을 다하여” 또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딤후 2: 4에서,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며, 빌 3: 14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결단을 드러내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찬 527장 “어서 돌아오오”의 가사를 보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힘껏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그곳에 회복이 있다는 겁니다. 또, 그 곳에서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풍요를 누린다는 것을 기억하심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힘껏 돌이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