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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 28: 10 – 22 벧엘에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1.08.15|조회수354 목록 댓글 0

오늘은 76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광복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어서 속히, 코로나19가 종료되어, 거리마다 상점마다 모두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각 교회의 예배도 속히 회복되어, 모든 성도들이 출석하여, 기쁨으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다시 회복되길 바랍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게 된 경우들을 보면,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나면서 교회를 다니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생활 속에서 벧엘의 돌베개를 베고 자는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교회를 다니게 된 경우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로든, 또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다니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지만,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우들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평생 다녔어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 중심이 내 자신이 되어,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되기에,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복신앙이거나 다른 이방종교의 신앙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비인격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점장이를 찾아가는 경우에도, 점괘가 맞아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리고, 무당 굿을 하더라도 굿이 맞아야 또다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 10: 17에서 전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처럼,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을 주관하는 “신 중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신앙은, 점장이나 무당을 찾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인격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또,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상대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알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와 삶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에 있어서도, “인격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만나는 모세,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다윗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추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야곱 역시, 고향에서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는, 추상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고, 부모를 떠난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격적인 신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국 의회정치의 발전을 이룬, “윌리암 글래드 스턴”은, “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 삶의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벤허”의 저자인 “루 웰리스”를 보면, 그는 우리가 알듯이,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논리를 펴고자, 성경을 살피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어,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행 17: 11을 보시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야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의 현재 상황은, 야곱이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이 계시는 밧단아람의 하란으로 가는 가운데, 밤이 되자, 돌을 베개 삼아 노숙하는 상황입니다. 형 에서는,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에 대한 분노 속에서, 야곱을 죽이면, 야곱에게 옮겨진 축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는 생각과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약 800km 떨어진 하란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때까지의 야곱은,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어머니 리브가가 곁에 있었기에,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또, 돌베개를 베고 노숙하는 현재까지, 늘 야곱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야곱이 어두운 밤에 홀로 있는 이 곳에서, 야곱을 만나주심으로, 이제까지 야곱과 늘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신 겁니다. 수 1: 9을 보시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며, 또, 마 28: 20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행위에 의해, 또는, 야곱의 조상에 의해, 야곱이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행위로 볼 때,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의 계승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언약의 계승자로 삼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이루어 가심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성도된 것 역시,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선행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비기독교인이거나 안티 크리스챤이라 할지라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고, 안티 크리스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를 선택하였기에, 그는, 성도가 되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성도로 지명하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과 성도된 우리가 열심있는 성도, 믿음의 확신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서든, 어떤 상황으로든, 야곱의 경우와 같이, 캄캄한 밤에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노숙하는 것같이,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해도,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증거들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 – 17절을 보시면,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라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십니다.

 

이곳 광야에 이르기까지, 야곱은 줄곧, 자기 혼자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면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사건을 통해, 야곱이 새롭게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은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본문 16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이 고백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외로움과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계시는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디서나, 어떤 자리,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그 곳에 임하시어,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성경의 여러 곳에 있지만, 대표적으로 보면, 다니엘의 경우입니다. 다니엘이 믿음을 지킴으로,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어떠했습니까? 사자들의 입이 봉해짐으로, 다니엘은 안전했습니다. 또,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역시, 믿음으로 인해, 결박된 상태로 용광로에 던져졌지만,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닐며 안전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지만,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 119: 71을 보시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고난이 왜? 유익이 됩니까? 이것이, 논리로 가능한 말입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신 것처럼,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가능합니다. 시 139: 7 – 8을 보시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을 가짐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 – 22절을 보시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이제, 벧엘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노숙하던 야곱이,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남으로 어떻게 변했습니까? 본문을 보시면,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서원은, 성도가 구두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맹세를 한다든지, 다짐을 함으로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의 중심구절은, 본문 21절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는 서원입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과 1: 1의 독대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 즉,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우리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 “내 부모님의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등 제 3자의 하나님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곧, 나의 주관적인 하나님으로 불러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야곱의 이러한 다짐이 약간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 46장을 보시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있나이다”로 대답함으로, 그의 믿음이 완숙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말씀하실 때,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야곱의 믿음은, 본문에서 보여진 불완전한 믿음의 상태로 굳혀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 22절을 보시면,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서원합니다. 이로 인해, 본문의 중심을 “야곱의 십일조 서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야곱의 열매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같이 인생의 벧엘에서,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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