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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상 3: 3 – 5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1.08.22|조회수435 목록 댓글 0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된 것은,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비록 청년의 나이로 왕이 되어 부족했지만, 그가 왕으로서, 어디에 구심점을 두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버지 다윗의 삶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구심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우리 삶의 구심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구심점이 하나님께 있었기에, 비록, 정략결혼으로 애굽의 공주와 결혼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의 1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고 합니다. 이는, 백성들과 나라의 중심으로서,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성전 건축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고 해도, 거기에, 우리의 중심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자세는, “교회 중심생활”, “예배 중심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성도의 믿음이 개인적이기에,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간절하게 기다린 이유는, 당시에는, 산당만 있어서,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곳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할 때, 우상에게도 제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릴 때, 이 곳에서 드렸던 겁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솔로몬이 하나님께 그의 구심점을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께 먼저, 기도했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무디는 “기도는 내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야금에 심취하여 일평생을 국악에 바친, 황병기 박사는 1989년 에밀레종을 보호하기 위해 타종을 금지하자, 마지막으로 에밀레 종소리를 듣기 위해 경주로 갔습니다. 그러자, 그 곳의 박물관장이 황 박사님께, 함께 타종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타종을 했지만, 그 곳에 모인 군중들의 함성으로 인하여, 박사님은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곳에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박사님은 그 곳에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박물관장이 “선생님, 맞은 편 반월성 언덕으로 가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박사님은 그 말에 시큰둥하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군중들의 함성으로 들리지 않던, 여운이 길고 은은한 에밀레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자신의 구심점을 하나님께 두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삶의 구심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목포 하늘비전교회의 박영일 목사는, 그의 신앙시, “희망을 노래합니다”에서 성도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때문에 언제나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 18: 20을 보시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며, 히 10: 25을 보시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도, 본문의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 삶의 구심점을 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몬 3절을 보시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시작은,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에서 출발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첫 계명입니다. 신 6: 5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은 것은, 신명기의 쉐마를 기억하여, 삶 속에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길 바랍니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을 사모하는 모임을 가리켜, “문사모”라 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모하는 모임을 가리켜, “박사모”라고 합니다. 이렇듯, 교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하사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성도”입니다. 아마, 솔로몬이 오늘날에 있었더라면, 전 세계 하사모의 회장이 되었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보시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합니다. 즉, 솔로몬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인 다윗의 법도를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 부와 명예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 본문인, 왕상 3: 3 – 5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3절입니다. 당시로서는, 어느 나라든,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왕의 말이 법이고, 왕의 행위는 법의 행위였습니다. 그러기에, 백성의 생사 또한, 왕에게 있었고, 왕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자였습니다. 그랬기에, 왕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거룩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통치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났고, 형제들 중에서도 서열이 낮아, 왕위 계승이 매우 희박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에게는,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넉넉한 힘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가 태어나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아담 이후로 “죄”와 “저주의 자녀”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불러주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모든 성도들은, 요일 4: 10절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으니, 본문의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싹이 트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소망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기브온으로 올라가 일천 번제를 드린 겁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 속에, 본문의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던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m에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라는 대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좀 멀지만, 놋단이 있는 기브온을 선택해서, 신하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과연, 왕이 이 거리를 일천번이나 왕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라의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조선시대의 왕이었던 정조로 인해 생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원 팔십리”입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한양에서 팔십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는, 왕이 출타했을 때, 나라에 변란이 발생하면, 하루 안에 궁에 도착해서 정사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조가 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가 수원에 있어서, 성묘하러 가고자 했지만, 팔십리가 조금 넘기에, 조정의 대신들은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때, 정조가 왕권으로 특명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수원 팔십리”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마음이, 본문에서 보여진 하나님을 향한 솔로몬의 마음이었습니다. 일천번제는, 제물을 고스란히 태워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것은, “제사횟수로서의 일천”이라는 주장과 “제사규모로서의 일천”입니다. 즉, “일천번의 제사를 드렸다”와 “일천마리의 제사를 드렸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규모로서의 제사가 맞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천번제 기도나 일천번제 예배를 드려보신 분 계십니까? 예전에 만났던 교우들 가운데, 이러한 일천번제를 작정한 분들이 많이 계셨지만, 그것을 지키신 분은 불과 몇 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횟수로든, 규모로든 일천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과 인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모로 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체에서 바라본다면, 횟수를 의미하는 일천번제역시, 인생전체에 있어서 거대한 제사, 곧, 솔로몬이 드린 천 마리의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천번제는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 생애에서 최대의 예배가 됩니다. 성도의 신앙은 논리나 숫자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산제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롬 12: 1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합니다. 구세군을 이끈, “윌리엄 부스”가 그의 지도력과 성공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제 주변에는 저보다 더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 하나님은 제게 위대한 능력을 감당하고 행하도록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제사의 횟수도 아니요, 제사의 규모도 아닌, 제사를 드리는 솔로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헌신의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고, 응답하셨습니다.

 

본문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천번제의 횟수나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고 응답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이는,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예배드림에 있어서, 또, 하나님의 일에 헌신으로 참여함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중심을,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쁘게 받으심 같이 기쁘게 받으실까?에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만족, 우리의 기분, 우리의 감정으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본문 끝에,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백지수표를 주며, 네가 원하는 금액을 금액란에 적으라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가 드리는 예배로, 기도로, 헌신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듣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즉, 철학적 신앙이나 인문학적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일 1: 1을 보시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참된 신앙은, 경험을 동반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을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서, 또, 기도함에 있어서, 그리고, 헌신함에 있어서, 요 4: 23에서의 말씀과 같이, “신령과 진리”로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솔로몬처럼 응답하여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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