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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하 6: 12 – 23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다윗처럼.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1.08.29|조회수1,186 목록 댓글 0

지난 2012년에,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어, 유튜브 조회수 10억 뷰를 돌파했고, 2014년에는, 21억 뷰를 돌파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공연할 때, 그 곳에 모인 약 80,000명의 군중들이 말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현대 무용가 안은미 씨는, 어머니가 관광버스에서 뽕짝에 맞춰 춤을 추며, “엄마가 춤 잘 추지?”라고 한 것에 대해, 정말로 “춤을 잘 춘다”는 것이 무엇이고, 한국인의 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춤은 해방공간”이라고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춤은,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춤을 해방공간이라고 정의한 것은, 회식이나 잔치에서나 또는, 개인의 흥을 따라,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막춤을 출 때는, 술에 취한 사람이 술기운에 지배되듯, 그저 흥에 겨워 어깨를 덩실거리며 흥겨움에 지배된 채로 춤을 추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지게 되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흥에 따라 추는 막춤과 본문 속의 다윗의 춤은, 형태로는 같으나 질 적으로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을 위해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춤은, 백성들 앞에서 흥에 겨워 춘 막춤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추었고, 전능하신 창조주 앞에 있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랬기에, 본문 속에서 “여호와 앞”이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여러분, “여호와 앞”이라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피조물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대해, 사 43: 21을 보시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며, 출 15: 20에서는, 출애굽을 행하고, 맹렬히 추격하는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에 수장시킨 하나님 앞에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 11: 17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진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현대에는 지난 과거보다 더 많고 다양한 춤들이 소개되고, 생활화가 된 가운데, 모두가 즐기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전에는, 저녁에 성내천 주변을 산책하다보면, 청소년들이 삼삼오오모여, 가수들의 춤을 따라 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이러한 춤을 많이 알며, 잘 추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춤을 출 때 느끼는 그 기쁨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예배라는 형태로 춤을 추는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본문 속의 미갈에게는 그러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다윗을 경멸했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이,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할 때마다, 성가대원들이 즐거워 춤을 추며, 찬양을 했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도 즐거움 속에서 찬양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소문에 당신은 성가대를 지휘할 때 춤을 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질문을 받자, 하이든은,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고, 기쁘고, 즐겁고,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작곡할 때에는 연필도 춤을 추고, 노트도 춤을 춥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본문 속의 다윗이나 하이든과 같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춤을 추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 - 1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본문 앞의 상황은, 사울 왕 때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6: 1절을 보시면,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라고 하며, 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김에 있어서, 다른 이방민족이 행하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수레에 실어서, 레위지파가 아닌 자로 하여금 옮기게 했습니다.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신은 우상이기에, 그들의 뜻대로 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기에, 다윗의 뜻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것은, 민 4장에서 레위 지파,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고핫 자손으로 명시되었기에, 성경의 기록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를 어김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서 떨어뜨리고자 했고, 웃사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 곧, 하나님의 궤에 손을 뻗음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모두가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지 못하고, 중간에 있는 오벧에돔의 집에 맡깁니다. 그리고는, 약 3개월 후,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경의 기록을 따라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이 때, 다윗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또다시, 웃사의 경우와 같은 일이 발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을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띄고, 일곱 걸음을 걸었을 때까지, 숨죽이고 조마조마했는데, 염려했던 일이 발생하지 않자,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허락하셨음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을 보시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웃사의 사고가 있을 때 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던 겁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도 다윗과 같이,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고, 세상의 방법을 따라 행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많이 찾습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교회에 있어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만족을 채우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윗이 베 에봇을 입은 것은,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성도로서의 몸가짐을 했다는 겁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함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함이며, 성령의 이끌림에 의함이라는 겁니다. 그랬기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추었던 춤은 막춤이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의 신앙고백적 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고백하는 가운데,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의 춤을 추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고 합니다. 미갈은,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춤을 추는 것을, 죽 지켜보던 미갈은, 다윗의 행위를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 앞에서 체신도 지키고, 엄숙함을 지켜야 백성도 왕을 존중하며 따를 텐데, 왕의 행위가 백성보다 더 했기에,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이러한 미갈은,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앞세움으로, 다윗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미갈이 친정 아버지인 사울 왕으로부터 하나님의 궤를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랬기에, 본문을 다시 보시면, “다윗의 아내 미갈”이라 하지 않고,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업신여겼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바자”라고 하며, 그 의미는, “멸시하다, 경멸하다, 모욕하다”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아주 경멸했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때로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는 가운데, 그 기쁨과 감사를 억제하지 못함으로, 겉으로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나타내야 하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변의 다른 성도들로부터 상처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미갈에게 있었다면, 다윗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갈에게, 자신은 이보다 더 기뻐하며 춤을 추고, 더 낮아질 것이라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미갈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지난 2016년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곡성”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가 “뭣이 중헌디? 뭣이 중혀?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신종단어 가운데,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말만 하면, 불편거리를 내 놓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언제든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이고, 소크라테스도 아니면서, 기쁨과 만족보다는 항시, 불만불평으로 가득찬 사람을 말하는 데, 그들 중에서도, 프로급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미갈이 프로불편러였습니다. 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미갈은 전혀 다른 말을 하며, 다른 마음, 다른 생각을 했을까요? 본문 전체를 다시 세세하게 보시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반복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겁니다. 미갈은, 다윗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는 가운데, 그 기쁨과 감사를 억제하지 못하여 겉으로 행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귀를 씻고 잊으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안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가득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와 기쁨을 마음 가득히 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 – 22절을 보시면,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다윗이 모든 행사를 마치고, 궁으로 들어오자, 그를 맞은 미갈은 다윗의 피로를 풀어주며, 다윗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업신여김으로,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윗이 어떻게 대처합니까?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투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삼으신 것이라며,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는, 미갈의 말대로 백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더 뛰놀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이 이겁니다. 다윗은 미갈의 말에 대해, 믿음의 선언이요, 고백적인 말로 대답하면서, 그의 심장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뛰놀고 있었다는 겁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육신에 집중했더라면,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흔들렸을 겁니다. 어쩌면, 그의 믿음은 여기서, 파선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에 있어서 파선을 하는 것은, 본문의 미갈처럼, 육신적인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빌 3: 20을 보시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 땅에 있었지만, 이미, 천국에 거하는 별세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은 이 땅에 있었지만, 그 또한, 별세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 역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또한 별세의 사람임을 기억하시고, 다윗과 같이,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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