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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2: 10 - 14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15.03.10|조회수574 목록 댓글 0

어제 우리 교회의 청년 결혼식이 있었죠?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나도 저런 때가 언제 있었나?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가사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제가 좋아하는 가사의 일부를 들려드리면,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김종환씨의 “사랑을 위하여” 입니다.

 

이집트에는 4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드피스’라는 여인과 ‘미케노리스’라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로드피스가 하루는,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녀의 신발을 물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로드피스가 목욕하던 곳으로부터 수백 키로 떨어진 멤피스에서, 당시 이집트 왕인 미케노리스가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로드피스의 신발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미케노리스 왕은, 하늘에서 떨어진 신발을 보고, 그 주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신발의 주인인 로드피스를 만나, 이집트의 왕비로 삼았답니다.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와 비슷하죠? “신데렐라”가 여기서 본뜬 것이랍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이 담긴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이 아가서를 표면적으로만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두고, 성경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거룩한 성경에 남녀 간의 애정행각을 담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9년에는 “하나되는 기쁨”이라는 책이 나와, 성경의 권위를 삼류소설 이하로 추락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가서를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만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이런 표면적인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에스더서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인 모르드개와 아각 사람인 하만의 대립 속에서,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겉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의 부림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하만의 철저한 계략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에서, 하나님께선 그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잊지 않고, 어디서나 돌보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가서에서도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표면적으로 나오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있습니다. 즉,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와 성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초청은, 살아계셔서 언제나 그의 백성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며, 우리를 그 분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초청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보시면,

 

첫째로,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10절을 보시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말하길, 솔로몬이 지금 자기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지금 신랑된 솔로몬은, 사랑으로 흠뻑 취한 가슴으로, 신부인 술람미를 부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기에,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제 부모와 타인의 슬하에 있을 때, 어디에서 편안함과 자유함을 느끼겠습니까? 아무리 활발한 아이도, 제 부모가 아닌 타인에게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실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채찍을 맞는 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틀이 없이, 내 마음, 내 감정을 가지고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줄 아세요? 가장 황홀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이 느낌이 없으면, “십자가는 아름답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무껍질이 거칠게 붙은 거친 주목 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십자가를 만들어 놓았더니, 흉측하니 저 십자가를 치우라고 말하더군요. 그 흉측한 십자가가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을 한 분도 빠짐없이 느끼시길 축원합니다.

 

성도는 이 사랑을 알 때, 가장 행복합니다. 성도는 이 사랑의 샘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그 사랑, 나를 위한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요, 보혈의 사랑이며, 죽음에서 나를 건져낸 구원의 그 사랑을 알 때, 우리의 영혼은 자유한 것입니다. 지난 설날, 전날인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을 지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감격이며, 이 사랑을 다시 느끼고자하는 바램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훅 불면 이 시간 속에서 사라질 무익한 자를, 왜?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요? 아닙니다. 홍수심판 때, 구원받은 노아는 당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도 성질부리는 것을 보니, 우리보다 더 심한 사람이었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수치를 주었다고 둘째 아들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를 향해 처참한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종의 종이 되라고 했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손주가 있으신 분들은 손주들이 예쁘죠? 그 손주들이 살짝 웃기만 해도 녹죠? 그런 손주를 향해서 저주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대 완전한 자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착각하셨나요? 아뇨. 노아가 우리보다 나은 것은, 하나님 말씀에 완벽하게, 퍼펙트하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거 하나로, 완전한 자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니, 우리가 십자가의 구원을 받을 가치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1: 5절을 보면, 술람미 여인은 흑인이었습니다. 게달의 장막과도 같다고 합니다. “게달의 장막”이란, 목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매우 거칩니다. 절대로 희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바람과 오랜 사용으로 인해, 낡고 버려진 것이 게달의 장막이며, 늙고 병든 양의 가죽입니다. 이 가죽은, 구멍이 나고, 털이 숭숭 빠졌고, 뻣뻣해서 못 쓰는 가죽입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헛간의 바람막이로만, 쓸 수 있는 것이 게달의 장막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살결은 검죠. 얼굴은 개성있죠. 솔로몬 주변에 있는 어떤 여자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과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며, 그 사랑에 깊이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에 그 무엇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 사랑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주님과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지금 나를 사랑하며, 나를 찾아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13절을 보시면,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초대합니다. 11 - 12절 상반절을 보시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라고 합니다. 겨울이 막 지나고, 봄이 온 것 입니다. 온 세상에 생명의 움트는 기운이 퍼져있습니다. 이때, 솔로몬 왕의 포도원에서는, 무화과나무의 푸른 열매가 익으며,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 향기가 포도원 전체에 가득했습니다. 곧, 생명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열매가 있고 향기가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동산으로, 솔로몬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라며, 술람미 여인을 초청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며, 그 아름다움을 함께 공유하려는 사랑에 빠진 자의 고백입니다.

 

10절과 13절 두 곳에 걸쳐,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씨의 이야기입니다. 지방에 내려가서, 화장실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 칸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서 엉겁결에 “예, 안녕하세요.”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유명하니까 화장실에 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보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 말을 걸어옵니다. “점심식사 하셨어요?” “아닙니다. 볼일 보고 나서 식사할 예정입니다.”

잠시 잠잠해지더니, 조금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 전화 끊어야겠습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자꾸 옆 칸에서 말대답을 하네요.”

 

여러분!

자기를 부르는지, 남을 부르는지 모르고 대답하다가는, 이렇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고 부르실 때는 곧바로 “예!”하며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은,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며, 부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르는지 마귀가 부르는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모하며,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했던 경우보다,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어리석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성도는 결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일어나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대중들과 지나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때, 예수님이 부르자 어떻게 했죠? 겉옷을 벗고 즉시로 달려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즉시로 달려가야 합니다.

 

창 19: 22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피할 수 있는, 소알 성을 주셨는데도, 죄악의 도시인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시 1: 1을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속히 그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하나님은 우리바보”라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의하면, 솔로몬을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모습에서 이 사랑이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께선, 우리가 죄악 속에서 살다가 지옥에 가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세상에 계실 때의 기록을 적은 복음서의 내용들을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뜨겁게, 간절하게, 애타게 천국의 이야기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열어주고자,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며, 들려주시고, 경험케 하신 천국의 표상을 따르는 곳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들은, 제각기의 특성만을 나타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산을 표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이제, 우리가 맞이한 계절도, 본문의 계절과 거의 같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본문에서는, 봄을 맞아 술람미 여인을 깨워, 자신의 동산으로 가자고 솔로몬이 부르듯,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곧,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교회로 부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합니다. 네 얼굴을 좀 보게 하라고 합니다. “얼굴”을 직역하면 “모습”입니다. 너의 모습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주께로 향하여, 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며,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주께로 있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을 “나의 비둘기”라고 표현합니다. 비둘기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거할 때가 언제인가요? 평안하고, 즐겁고 기쁠 때 그런 곳에서 지내나요? 아닙니다. 자신을 감추어야 할 때, 아니면, 자신을 감추고 싶을 때 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둘기가 바위틈 깊은 곳에 사는 습성을 말했다기 보다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감추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라도,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게만큼은 그의 얼굴을, 그의 음성을 들려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곧, 이 말은, 성도된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에게서 얼굴을 숨기거나, 돌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18년 동안, 교회를 봉사로 잘 섬겼던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믿음 좋은 집사님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렵게 유지하던 회사가 결국 부도로 넘어가고, 대학시험을 본 아들이 시험에 떨어지고, 갑자기 아내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본인 또한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두어 달 지속되자, 교회를 멀리하게 되고, 결국엔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자신을 믿고 편안히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게 됐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명일동에 있는 성결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참으로 기뻐했던 안수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피택되고 얼마 있다가 직원이 그만 두었습니다. 이 직원이 그만 두면서 자신이 관리하던 고객들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판매량이 급격히 떨어져 회사가 폐업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집사님은 신앙에 있어서도, 사업에 있어서도 심각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를 두고, 약 1년간 기도 하던 집사님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욥기 1: 21의 말씀을 기억하고, 더 열심으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업이 다시 일어서고, 그 전보다 매출이 더 많아져, 든든한 재정을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찬양을 원하시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얼굴을 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창 8: 22을 보시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거두는 것이 좋다하여 거두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더운 것이 좋다하여 더위만 있는 것 아니며, 나는 낮이 좋다하여 낮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계절을 만나든, 어떤 시기를 만나든,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내가 있는 그 곳에 계심을 기억하시어, 언제나 주께로 얼굴을, 언제나 주께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며 부르듯,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고, 우리를 찾으십니다. 창 3: 8에서 아담을 부르신 주님께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름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한 부름이 아니요, 우리를 징계하기 위한 부름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부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름을 듣고 응답하심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영원토록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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