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비결”에 대해 글을 남기고자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성공의 비결”이라는 글을 쓰도록 했습니다. 학자들이 쓴 글을 모으니, 12권이나 되었습니다. 왕은 분량이 너무 많다면서 줄이고 줄여 한 줄로 만들었습니다. 그 한 줄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노력없이 되는 것은 없다”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노력으로 인해 얻어집니다. 재물도, 건강도, 권세도 모든 것이, 자신이 노력한만큼 얻어집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이 사방으로 하여금 태평시대를 이루게 된 것은, 선 왕이었던 다윗의 노력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노력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태평성대”란, “나라에 혼란 따위가 없어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시대”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조선의 9대왕이었던 성종이 치리하던 때가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요왕과 순왕이 다스렸던 시대가 “태평성대”였습니다. 또, 로마시대를 “태평성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라고 하는데, 이 때는, 로마 내부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왕이었던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혼란을 정리하고 제국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 시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광범위한 도로망과 해상 교역을 통해 경제가 활발했습니다. 그리고, 문학,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기에, 로마는 정복한 그리스 문화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여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력하게 유지함으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평성대는, 천국 생활, 에덴 생활 또는, 하나님의 동산에서의 생활로 표현되며, 통치자나 국민들, 백성들 모두가 원하는 삶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태평시대를 이루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즉, 성도된 우리가 복 받고, 만사형통한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인해, 주변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 때, 성도된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나태하거나, 교만하고 방탕한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고,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서 솔로몬 때까지 이어진 태평성대 후에, 이방의 포로된 것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고, 멸망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의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맞춤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사방의 태평”이라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선 왕이었던 다윗의 소망이었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선 왕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도된 우리도 다윗과 본문의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모든 것이 태평성대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라고 합니다. 성도의 태평성대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이 만큼 했는데, 내가 어떻게 했는데”라며, 내 만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소망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노력여하에 의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따라, 자신의 소망을 위해 열심으로 노력합니다. 여러분, 비 기독교인에게는 이 말이 정언으로 들릴 수 있지만, 성도된 우리에게 이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주체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라는 겁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삶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었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을 성도된 우리가 놓치기에,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상처를 받거나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길 원한 것은, 세계사 속의 여러 왕들처럼,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려고 건축물을 남기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은 화려한 궁에서 지내는 데, 하나님은 성막에서 지낸다며, 하나님을 모실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겁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고 즉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성취는 다윗이 아닌,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전건축에 필요한 도구와 방편만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대상 22: 8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며, 하나님께서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막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이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볼 때, 대상 22: 8은, “그를 둘러싼 전쟁에 직면하여”입니다. 즉,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 아니라, 수 많은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전쟁을 하느라 지쳤고 또, 주변국의 침략에 대해 철저한 대책도 행하는 가운데, 성전건축이라는 엄청난 자금과 수 많은 인력이 동원된다는 것은,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매우 힘겨운 일이었기에,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의 성전건축을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성전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불허는 다윗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다윗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으며,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공간이나 건물에 구애받지 않으심을 인지시켜 주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사도들에게 절실한 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강림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로마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지만,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가서 전하고자 하는 것을 글로 써서 전했는데,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한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복음을 전파하고자 함이었지만, 이 길이 막힌 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애 3: 25 - 26을 보시면,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선한 뜻을 이루는 것에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기억함으로, 그 베푸심에 감사하며, 기도와 충성과 기다림 속에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때를 준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태평성대는 성도된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선 일찍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성전건축은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에 대해 많은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업적이나 야심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부친 다윗의 뜻을 따르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선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요나의 경우를 보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민족적 감정에 의해 그 반대인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그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사 6: 8을 보시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라며,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부르심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 모든 부르심과 사명, 그리고 그 사명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삶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기독교 역사에서 무수하게 반복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명자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길들여져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져서는 안 됩니다.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각 시대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불러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신앙이 부패하고 교회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루터와 칼빈을 개혁자로 세우신 것처럼,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를 각각을 부르고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부여받은 사명은, 이 시대에 완수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사명과 목적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에 솔로몬을 쓰신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은, 신학을 함으로, 목회자가 됨으로, 선교사가 됨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우리 각 자가 가진 그 재능을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위해 솔로몬을 쓰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세상의 태평성대를 위해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성도의 태평성대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전건축에 사용된 백향목은 성장하는데, 수백 년이 걸리고 곧고 아름다우며 목재의 쓴맛 때문에 병충해가 적다는 특징으로 매우 값진 건축재입니다. 그러기에, 백향목으로 건축된 성전에는 백향목의 향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백향목과 기술은 두로왕 히람이 제공하고 필요한 돈은 솔로몬이 제공하여 합작으로 성전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에는 백향목을 벌목하기 위한 전문 기술자가 없었기에,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노동력과 두로 백성들의 기술력을 결합시켜 벌목 사업을 진행시키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언뜻 솔로몬의 단순한 협상 제안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에 사용될 자재를 함께 준비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이나 안티 기독교에게도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음은 시대와 공간,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세상 어디에나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타락하고 부패하여 자기중심적이 된 인간의 마음은 세상 가운데서 항상 자기를 자랑할 만한 것들을 찾고 또 자랑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들은 하나님없는 자들이 행하는 참으로 소망이 없는 짓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자기자랑을 삼가고,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구하고,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것을 “주 안에서 자랑”하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론”에서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 대해, “두 개의 자랑이 두 가지의 나라를 이루었다. 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기 자랑이 지상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참 사랑이 천국을 세운다”라고 구분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자이며 무엇을 자랑하는 자입니까? 모든 것의 공급자되시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다 받은 것인데도 자기가 모든 것을 이룬 것인 양 우쭐대는 자입니까? 우리의 자랑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기 때문이며, 우리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된 우리는 가끔, 우리의 형편과 상황만을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소망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이토록 어렵고 힘든 형편이나 상황에 있다면,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의 형편과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방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 그들의 형편과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이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그 곳에 계시며, 그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성자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화려한 궁중에 출생하지 않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영광된 자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세례 요한을 통해 겸손히 세례를 받으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짐을 기억하심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루어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