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위한 공간: 데이비드 봄의 '비어있는 공간'과 서클의 '안전한 공간'
-서클 대화 활동가를 위한 공간 의미의 철학적·실존적 성찰-
서론: 공간과 존재의 존재론적 관계
현대 철학에서 공간(space)은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연장이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거주하는 공간(dwelling space)'을 통해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공간 안에서 드러난다고 역설했듯, 그리고 메를로-퐁티가 '체현된 공간(embodied space)' 개념으로 우리의 신체가 세상을 경험하는 근본적인 장(場)임을 밝혔듯이, 공간은 존재가 자신을 현현시키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대화와 소통의 영역에서도 깊은 의미를 갖는다. 서클대화 실천가로서 우리는 그러한 철학적 개념을 몰랐어도 서클 진행에서 ‘안전한 공간’은 누누이 언급된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도 그의 책에서 ‘비어있는 공간’으로서 대화실천을 매우 중요시 하였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그와 서클 대화 실천가들이 각각 추구하는 '비어있는 공간'과 '안전한 공간'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개념들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존재가 자신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드러내고, 상호적인 관계가 창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현존의 장(場)이 된다는 뜻이다.
이 글은 봄의 대화론과 서클 프로세스에서 공유하는 공간 개념의 철학적 기반을 탐구하고, 대화에 있어 이 두 접근방식의 만남이 서클 대화 실천가들에게 자신의 현장 실천에 어떤 깊이 있는 성찰과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하는 지에 대해 고찰해 봄으로써 서클 진행자들의 인식과 태도 그리고 역량에 도움을 주고자 마련하였다.
1. 데이비드 봄의 존재론적 대화론: 의식의 파편화에서 전체성으로
1) 파편화된 사유의 존재론적 진단
봄의 대화론은 현대인의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진단에서 출발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의 의식은 심각한 파편화(fragmentation)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인식 구조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문제이다. 봄은 그의 저서 『전체와 숨은 질서(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고는 현실을 조각조각 나누어 파악하려 하지만, 현실 자체는 분할될 수 없는 전체성(wholeness)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오류가 모든 갈등과 소외의 근원이다."
우리는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 '생각'과 '현실'을 분리하여 사고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보여주듯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대화에서도 화자와 청자, 의미를 전달하는 자와 받는 자는 실제로는 하나의 의미장(semantic field) 안에서 서로 침투하고 있다.
2) 대화의 존재론적 전환: 소유에서 참여로
봄이 제안하는 대화(dialogue)는 일반적인 토론(discussion)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활동이다. 토론이 각자의 관점을 '소유'하고 방어하려는 투쟁이라면, 대화는 의미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서로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대화란 무엇인가(On Dialogue)』에서 봄은 이렇게 설명한다.
"진정한 대화에서는 아무도 의견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의미가 우리 사이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허용한다. 우리가 대화에 깊이 참여할 때, 우리는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공동의 의미가 창조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근대 인식론의 패러다임을 뒤집는다. 근대 인식론이 주체가 객체를 파악하고 소유하는 것을 지식으로 이해했다면, 봄의 대화론은 주체와 객체가 상호침투하는 참여적 인식(participatory knowing)을 지향한다.
3) 비어있는 공간: 가능성의 존재론적 조건
봄이 말하는 '비어있는 공간(empty space)'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 유사하면서도, 더 정확하게는 하이데거의 '여백(Lichtung)'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개방성(openness) 그 자체이다.
봄은 『사고는 하나의 체계다(Thought as a System)』에서 이 공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 공간은 우리의 기존 관념들이 잠시 작동을 멈추고, 새로운 인식이 출현할 수 있는 여백을 의미한다. 이는 무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이 비어있는 공간에서 가능한 것은 '유보(suspension)'이다. 이는 단순히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사유 메커니즘을 관찰하는 메타인지적 의식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개인적 의식들은 하나의 집단적 지성으로 수렴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2. 서클 대화의 현상학: 안전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사건들
1) 안전한 공간의 현상학적 구조
서클 대화에서 말하는 '안전한 공간(safe space)'은 단순한 심리적 편안함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안전함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존재 전체가 조건 없이 수용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신뢰의 경험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참가자들은 내면에 억눌러왔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용기를 얻는다.
이러한 공간의 현상학적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시간성의 변화: 일상적인 시계적 시간(chronos)에서 벗어나 체험된 시간(kairos)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참가자들은 종종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또는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보고한다. 이는 존재의 현존이 시간을 압도하는 경험이다.
- 공간성의 변화: 물리적 공간이 실존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원형으로 앉은 자리는 단순한 좌석 배치가 아니라, 상호주관성이 현현되는 관계적 장(場)이 된다. 이 원형의 배열은 모두가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 타자성의 경험: 타인이 더 이상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대상(object)이 아니라, 함께 존재를 나누는 공동-주체(co-subject)로 경험된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후설의 감정이입(Einfühlung)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상호주관적 공명이다.
2) 회복적 정의의 존재론적 기반
서클 대화의 한 주류인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는 단순한 갈등 해결 기법을 넘어 존재론적 회복을 지향한다. 이는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윤리적 사건과 유사하다.
크리스티나 볼드윈은 『서클 부르기(Calling the Circle)』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서클은 우리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을 창조한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타인의 온전함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적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실성(authenticity)의 현시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격한다(witnessing)'는 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확인하는 무제약적인 존중의 윤리적 행위이다. 그러기에 서클에서 우리는 종종 ‘진실을 울리다(Ring True)’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그것은 주객을 넘어서는 공명의 상태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공통 의미의 흐름’(데이비드 봄의 용어)을, 각자가 개체성을 넘어 전체성에 참여하는 상호주관성의 경험에서 오는 더 큰 진실의 울림을 뜻한다.
3) 말하기 막대의 상징적 의미: 발화권에서 존재권으로
서클에서 사용되는 말하기 상징물(talking piece)은 단순한 발언권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주권을 상징한다. 막대를 든 사람은 그 순간 자신의 전 존재로 말할 권리를 갖는다.
이는 합리적 논증을 통한 합의를 추구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상적 담화 상황'과는 다른 차원의 소통이다. 서클은 존재적 공명을 통한 심층적 이해를 지향한다. 파커 파머는 『숨겨진 전체성(A Hidden Wholeness)』에서 이러한 소통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와 어둠까지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고 느낄 때 형성된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전체성을 보게 되고,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3. 두 공간의 존재론적 수렴: 현존과 가능성의 변증법
1) 공통의 철학적 지반: 관계적 존재론
봄의 '비어있는 공간'과 서클의 '안전한 공간'은 모두 관계적 존재론에 기반한다. 이는 개체를 관계에 앞서는 실체로 보는 실체론적 존재론과 대비된다. 관계적 존재론에서 개체는 관계의 결절점(node)이며, 개체의 정체성은 고정된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적 패턴에서 창발한다. 따라서 관계의 질이 바뀌면 개체의 존재 양상도 변화한다.
두 공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 시간성: 봄의 '비어있는 공간'은 사유의 파편화가 멈추고 현재 순간에 충만한 현존(presence)을 경험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서클의 '안전한 공간'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며 삶의 서사를 통합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 공간성: 봄의 공간이 고정된 관념이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가 창발적으로 흐르는 장의 개념이라면, 서클의 공간은 관계의 단절이 회복되고 공동체가 형성되는 장의 개념이다.
- 타자성: 봄의 대화에서 타자는 상호침투하는 의식의 주체로서 이해된다. 반면, 서클의 대화에서는 타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상대의 존재를 **증언(witnessing)**하는 윤리적 관계를 형성한다.
- 진리성: 봄의 공간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멈추고 새로운 통찰이 창발되는 것을 추구한다. 반면, 서클의 공간은 개인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정성(authenticity)**을 드러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2) 인식론적 전환: 표상에서 현존으로
두 전통 모두 근대 인식론의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 패러다임을 넘어선다. 표상주의 인식론에서 인식은 외부 대상을 내면에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하지만 봄과 서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현존(presence)의 경험이다.
현존적 인식에서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의 현존적 장(field of presence) 안에서 상호침투한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정보의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공명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flesh)'의 개념이 여기서 유용하다. 살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만지는 자와 만져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 통일성을 가리킨다. 봄과 서클의 공간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초적 상호주관성이 현현된다.
3) 존재론적 치유: 파편화에서 전체성으로
두 전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존재론적 치유이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 치유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존재론적 치유는 파편화된 존재가 자신의 근원적 전체성(wholeness)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봄에게 이는 의식의 전체성 회복이고, 서클에게는 관계의 전체성 회복이다.
『전체와 숨은 질서』에서 봄은 치유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치유는 전체로 만드는 것(making whole)이다. 그리고 전체성은 부분들의 합이 아니라, 부분들이 그 안에서 의미를 얻는 근원적 맥락이다."
4. 활동가를 위한 존재론적·인식론적 성찰
1) 촉진자의 존재론적 위치: 중심에서 경계
전통적인 교육학이나 상담학에서 촉진자는 지식이나 기법을 소유한 중심적 주체로 상정된다. 하지만 봄과 서클의 관점에서 촉진자는 오히려 경계적 존재(liminal being)이다. 촉진자는 공간의 중심에 있지 않고, 공간의 경계를 지키는 자이다. 그의 역할은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조건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의 '목자(shepherd)' 개념과 유사하다. 목자는 양떼를 소유하지 않지만, 양떼가 안전하게 풀을 뜯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마찬가지로, 촉진자는 참가자들의 대화를 통제하지 않지만, 진정한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돌본다.
2) 판단 유보의 현상학: 에포케에서 서스펜션으로
봄이 강조하는 '유보(suspension)'는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에서 말하는 '에포케(epoché; 판단 중지로서 괄호치기)'와 유사하지만, 더 실존적인 차원을 갖는다. 에포케가 학문적 관심에서 나오는 방법론적 태도라면, 유보는 존재 자체의 위기에서 나오는 실존적 태도이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확신을 괄호 안에 넣고, 근원적인 미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용기가 된다.
『봄의 창의성(On Creativity)』에서 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보는 모르는 상태를 견디는 용기이다. 우리는 즉시 답을 찾으려 하지만, 때로는 질문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태도는 활동가에게 인식론적 겸손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내려놓고, 상황 자체가 자신의 해결책을 드러내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3) 침묵의 존재론적 의미: 부재에서 현존으로
서클에서 일어나는 침묵은 단순한 말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충만한 현존이며, 대화가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존재론적 공간이다. 이러한 침묵에 대한 이해는 동서양의 영성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동양의 선(禪) 전통에서 침묵은 무언의 가르침이고,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에서도 침묵은 신적 현존의 체험이다.
활동가는 이러한 침묵을 견디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이 불편하다고 해서 성급하게 개입하는 것은 창발의 순간을 놓치는 것이다.
4) 몸의 지혜와 체현된 인식
봄과 서클 모두 육화된 인식(embodied knowing)을 중시한다. 진정한 대화는 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사건이다. 메를로-퐁티의 말처럼, 우리는 몸을 '가지고(have)'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다(is)'. 따라서 대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몸의 변화로 나타난다. 호흡의 깊이, 근육의 긴장도, 목소리의 떨림 등이 모두 의미의 신호이다. 숙련된 활동가는 이러한 육화된 정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5. 실천적 통합: 존재론적 공간 창조의 방법론
1) 공간 생성의 존재론적 단계들
봄과 서클의 지혜를 통합하여 공간 생성 과정을 존재론적 단계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1단계: 존재론적 도착(Ontological Arrival)
참가자들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 실존적 공간으로 진입하는 단계이다. 일상적 정체성이나 역할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자기(Self)로 회귀하고, 목적지향적 의식에서 현재의 과정에 집중하는 의식으로 전환된다. 이는 "여기에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 2단계: 상호주관적 개방성(Intersubjective Opening)
타자를 단순히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버리고 '공동-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개인적인 관점의 방어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열린 자세로 확장되며, 모두가 연결된 의미장이 형성된다. 방어적인 자세가 수용적인 자세로 바뀌면서 관계의 문이 열린다.
- 3단계: 의미적 보류(Semantic Suspension)
기존의 생각이나 판단을 잠시 '괄호 안에 넣는' 현상학적 환원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즉, 결론을 내리려는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발화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지각한다. 이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의미의 흐름 자체에 집중하며, 새로운 통찰이 떠오를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한다.
- 4단계: 창발적 현존(Emergent Presence)
개인적 의식을 넘어서는 집단적 지성이 출현하는 단계이다. 참가자들이 서스펜션을 통해 기존의 틀을 깼을 때,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분들의 합을 넘어선 전체적 패턴을 인식하게 되며, 공동의 의미가 새롭게 창조되는 경험을 한다.
- 5단계: 존재론적 통합 (Ontological Integration)
서클에서 경험된 통찰을 일상적 삶과 연결하는 단계이다. 공간 안에서 발견한 존재론적 의미를 자신의 실존에 통합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가져간다. 개인의 변화가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로 확장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2) 활동가의 현상학적 훈련
봄과 서클의 통합적 실천을 위해서는 활동가의 현상학적 감수성 개발이 필수적이다.
- 의식의 메타인지적 관찰: 자신의 사고 과정, 감정 패턴, 신체 반응을 마치 관찰자처럼 모니터링하는 능력.
- 상호주관적 공명: 개인적 경계를 넘어 집단적 의식의 장에 동조하고, 그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감수성.
- 비선형적 사고: 인과관계적 논리를 넘어 패턴과 전체성을 인식하는 직관적 능력.
- 임계점 감지: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민감성.
3) 위기 상황의 존재론적 해석
서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저항은 단순한 방해 요소가 아니라, 존재론적 정보로 읽혀야 한다. 그것들은 현재 공간의 질에 대한 진단적 신호이며, 더 깊은 층으로 나아가기 위한 초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참가자의 강한 저항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 아직 충분히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경고.
- 더 깊은 진실이 드러나기 전의 마지막 방어.
- 집단 전체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임계점의 신호.
6. 결론: 존재론적 혁명으로서의 대화
- 공간에서 세계로: 미시적 변화의 거시적 의미
봄과 서클이 창조하는 공간은 단순히 일시적인 치유의 장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을 위한 씨앗이다. 이 공간에서 실험되고 체험되는 새로운 존재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소통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갖는다. 하버마스가 '소통적 합리성'을 제도와 규범의 차원에서 시도했다면, 봄과 서클의 접근은 존재 자체의 질적 변화를 통해 이를 추구한다. 이는 더 근본적이면서도 더 급진적인 접근이다.
- 활동가의 존재론적 소명
서클 활동가가 되는 것은 단순히 기술을 습득하는 직업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소명이다. 활동가는 새로운 존재 양식의 증인이자 산파로서, 그 공간을 지키고 돌보는 존재이다.
케이 프라니스(Kay Pranis)는 소책자『서클 프로세스(The Little Book of Circle Process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클은 우리가 함께 미지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용기를 준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 하지만 함께라면 갈 수 있는 그 신비로운 땅으로."
이 '신비로운 땅'이란 다름 아닌 진정한 인간성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나 수단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만난다.
-철학적 유산과 실천적 미래
데이비드 봄이 남긴 철학적 유산과 서클 대화의 실천적 지혜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21세기적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기술적 진보나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질적 변화를 통해 실현되는 소통이다. 이러한 소통에서는 정보가 아니라 존재가 전달되고, 설득이 아니라 공명이 일어나며, 승부가 아니라 공동창조가 목표가 된다.
데이비드 봄은 『대화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
"우리가 함께 대화할 때,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서클 활동가가 봄의 지혜와 만날 때 발견하게 되는 궁극적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존재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들이 하나씩 늘어갈 때 세상은 조금씩 더 인간다운 곳이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