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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지기

73. 오리게네스의 원리론(5)

작성자마음지기|작성시간21.02.03|조회수247 목록 댓글 5

4. 원리론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는 암브로시우스의 권유로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가 즉위한 222년부터 성경을 주석하기 시작했으며,(참조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23,1) 『원리론』은 그가 231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에 저술하였다.(참조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24) (141쪽)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최초로 신학적으로 펼친 『원리론』은 오늘날 철학에 관심 있는 현대의 모든 이에게 풍부한 보고(寶庫)다. 오리게네스 시대 이후 지금까지도 신학자들은 줄곧 이 저서에 관심을 보여
왔는데, 오리게네스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명제들을 처음으로 폭넓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리론은 모든 신학적 논증 작업과 그 토대인 성경을 상세하게 다루면서, 교회의 신앙 규범인 당시의 정경 사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오리게네스는 성경 해석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였는데, 무엇보다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내적 관계에 관한 그의 논증은 오늘날에도 주의를 끈다. (144-144쪽) 

 신학사에 관심 있는 이들은 고대 교회의 이단과 정통신앙에 관한 논쟁 과정, 곧 유스티니아누스가 『원리론』에 바탕을 두고 543년과 553년에 단죄한 오리게네스주의의 명제들이 과연 오리게네스와 연관되는지 따져봐야 한다. 나아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구상하려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원리론』에서 영에 관해 다룸으로써, 그는 영성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주목받았다. (144쪽) 

 오리게네스가 『원리론』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고유한 교의학을 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리론』의 체계와 다루는 내용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그러나 『원리론』은 전문지식이 있는 청중 가운데서 선발된 무리를 위해 구상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고백과 관련된 핵심적인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답변을 시도하면서 저자 자신의 견해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원리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인 명제 모두를 상론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대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144쪽) 

 그러면 『원리론』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고 그런 이유로 실패한 저서인가? 이는 안키라의 마르켈루스가 『원리론』을 비난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오리게네스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아퀴노의 토마스가 『신학대전』을 저술할 때와 비교할 수 있는 신학적 연구 전통이 없었다. 대부분의 신학적 문제에서 그는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원리론』은 시대를 앞선 저서가 맞다. 그러나 결코 실패한 저서라고 볼 수는 없다. 저자는 자신이 죽은 뒤 이단자들이 펼친 신학활동을 예측할 수 없었으며, 교회가 이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통신앙의 개념을 강화할 것도 예견할 수 없었다. 당시 영지주의 여러 분파가 그리스도인에게 지성적인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당면한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였다. 그가 『원리론』으로 이러한 시도를 하며 교부 시대의 신학 발전에 토대를 놓았듯이, 이에 관한 연구는 오늘날의 신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45쪽) 

 당시 이 저서가 대상으로 한 이들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과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철학적’ 관점에 관심이 있는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영지주의자 및 이교인 철학자들과의 논쟁처럼 구약성경의 신앙과 논쟁하고 있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곧, 『원리론』은 오리게네스가 교리교육 학교의 등급을 들로 나누어 초급반 학생들은 헤라클라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양 있는 상급 학생들을 맡아 가르치던 시절의 엄격한 틀 안에서 교육받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145-146쪽) 
☕ 『원리론』의 대상은 오리게네스가 가르치던 학생인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교과서라 할 수 있겠다.

 오리게네스가 붙인 제목은 철학 교육을 받았으며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독자들에게는 이 제목이 비교적 명확하고 익숙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원리론』이라는 제목은 의도적으로 두 의미 사이에서 어떤 모호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모호성은 저서의 구성 자체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구성 방식은 오리게네스 고유의 특징이다. 그는 종종 한 낱말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면서 으뜸음 같은 하나의 의미 주변에서 배음과 같은 다른 의미들이 울려 퍼지게 하였다. 그는 학교의 문학 장르를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옮겨 놓으면서 한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나아간다. 『원리론』은 일관성 있게 모호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계시에 관한 부분은 오늘날의 의미로 신학적이지만, 그 시대의 철학에서 유래하는 개념과 논증법을 사용하면서, 분명하게 말하기보다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148쪽) 


 『원리론』의 그리스어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오리게네스의 저서에서 발췌한 선집인『필로칼리아』에 『원리론』의 7분의 1 정도가 그리스어로 남아 있다. (154쪽)

 루피누스는 397년 말경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는 팜필루스의 『오리게네스를 위한 변론』 제1권을 번역했고, 398년 사순시기에 『원리론』의 첫 두 권을, 여름이 끝나기 전에 뒤의 두 권을 번역했다. 루피누스의 라틴어 역본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판본이기 때문에 『원리론』에 관한 지식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155쪽) 

 그는 『원리론』 머리말에서 자신의 번역 원칙을 제시하며,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첨삭 없이 온전하게 라틴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다는 뜻을 밝힌다. “내가 머리말에서 이 점을 밝혀 두는 까닭은 〔오리게네스를] 비방하는 자들이 비난거리를 새롭게 찾아냈다고 여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악하고 다투기 좋아하는 자들이 무슨 짓을 하였는지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대들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도와주셨기에 나는 이처럼 엄청난 노고를 받아들였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비방자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는 하느님께서 하시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장차 도래할 나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죽은 이의 부활 신비를 통하여, 그리고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영원한 불을 마련하신”(마태 25,41)분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앞에서 권고하고 간청하노니, 이 책들을 필사하거나 읽으려는 모든 이는 "울고 이를 가는"(마태 8,12)곳,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마르 9,48; 이사 66,24 참조) 곳을 영원한 유산으로 차지하지 않도록 이 책에 그 무엇도 덧붙이지도, 빼지도, 끼워 넣지도, 바꾸지도 말 것이며, 자기가 필사한 것을 원본과 대조하면서 철자를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원리론』 1권, 루피누스의 머리말, 4) (155-156쪽)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고, 따라서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관한 자신의 지식으로 이 저서의 내용을 규명하면서 번역했다. 그리스어 원문과 루피누스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그가 일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특히 성경 구절을) 덧붙이고 바꾸었으며, 어려운 구절에는 해설을 곁들이면서 때때로 매우 자유롭게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본문이 너무 장황하다고 여겨지는 곳은 요약했다. 하지만 내용을 확대하는 경향이 요약하려는 경향보다 더 강했다. 루피누스의 번역은 대부분 원본보다 길다. 특히 그리스어 낱말 하나를 두 개 이상의 라틴어 동의어로 옮긴 점이 눈에 띈다. 그가 번역한 다른 본문들에서 입증된 특징은 모두 『원리론』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필로칼리아』의 그리스어 본문과 비교하면 루피누스가 『원리론』을 매우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했으며 사고의 과정을 명료하게 전개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7-158쪽) 


5. 오리게네스의 인간 이해

 오리게네스는 인간을 영, 영혼, 육체로 구분하는 '삼분법적 인간학’ 또는 삼중 인간학’을 보여 준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5장 23절에서 언급한 삼분법적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영혼)과 몸(육체)을 온전하고 홈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63쪽) 

 오리게네스는 『원리론』 제1권에서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기며*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 곧 복음서와 서간들을 비롯하여 율법과 예언서들 외에 (인식에 대한)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원리론』 1,3,1)라고 적었다. (164쪽) 

㈜ : *오리게네스는 이성 능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으며, 이성이 불확실하다는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에 관해서는 비록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지만”(마태 11,27), 인간은 성경을 통해 그분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에게 성경은 가장 뛰어난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164쪽) 

 따라서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면 오리게네스의 삼분법적 인간학이 헬레니즘의 인간 이해와 구별될 수밖에 없는 간접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영혼’은 히브리어 '네페쉬’와 그리스어 '프시케’로 표현되는데, ‘네페쉬’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몸의 기관으로서 음식을 섭취하는 식도와 숨을 쉬는 기도를 통칭하는 목. 둘째, 물질을 향한 갈망이나 인간 실재 또는 인간 행동에 대한 열망 또는 하느님을 향한 동경을 포함하는 인간의 열망과 감정. 셋째, 생명 자체, 넷째, 살아 있는 존재인 인격.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칠십인역에서 ‘네페쉬’에 해당하는 개념은 ‘프시케’다. 성경의 저자는 ‘육체(몸)’를, 자신이 이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리라는 약속의 지평에서 이해한다. 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부활로 수정되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육체가 구원의 장소라는 사실은 한 번도 부인되지 않는다. (164-165쪽) 

 오리게네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 자신의 삼분법적 구조 가운데 어떤 요소로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과 소통하는가?”다. 오리게네스가 성경을 가장 뛰어난 인식의 원천이라고 확신했다면, 그의 삼분법적 인간학은 인간 안에 내포된 구별되는 세 가지 실재에 대한 철학적 규명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는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166쪽) 

 오리게네스 이전에도 많은 저자가 체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삼분법적 인간학을 제시했다. 한편에서는 리옹의 이레네우스가, 다른 한편에서는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이 이 삼분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레네우스는 당시 이단자들의 학설체계를 논박하는 『이단 반박』에서 ‘완전한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 “성부의 손을 통해서, 곧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부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영혼과 영은 인간의 부분이 될 수 있지만 결코 인간 자체는 아니다. 완전한 인간이란 아버지의 성령을 받은 영혼과 결합된 그리고 일치된 인간을 말한다.”(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5,6,1) 유스티누스도『부활론』에서 "몸은 영혼의 집이고, 영혼은 영의 집이다”라며 인간을 삼분법적으로 이해한다. 삼분법적 인간 이해가 교부들의 사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든 하지 않든 대부분의 교부는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이를 전제로 하였다. (166-167쪽) 

 영혼은 자유의지와 선택 능력의 자리다. 따라서 영혼은 자아의 자리다. 영혼이 영의 인도를 받아 영과 동화되면 영혼의 하위 인자도 완전히 영적 성질을 띤다. 그러나 영혼이 영을 거부하고 육으로 돌아서면, 영혼의 하위 인자는 상위 인자로부터 영혼에 대한 지배적 역할을 넘겨받아 영혼을 완전히 육적으로 만든다. (170쪽) 

 오리게네스의 이론에 따르면 상위 인자인 얼, 마음 또는 지배적 능력은 선재(先在) 시기에 영혼 전체를 이루었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에 참여하면서 신과 비슷해지기에 영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갈수록 점점 더 신성을 닮게된다. 영혼은 영의 가장 탁월한 제자다. 영은 신성한 선물로서 은총의 활동적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얼’은 은총의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영혼은 도덕적이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기관이며, 관상(觀想)하고 기도하는 기관이다. 이 활동들은 모두 영의 인도를 받는다. 영혼은 신적 감각, 곧 영적 시각과 청각·촉각·후각·미각을 낳는다. '영’과 ‘얼’은 이 세상 삶에서는 구별되지 않지만 세심한 논리로 묘사할 경우 두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둘은 은총의 근본적인 관점, 곧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의 그 수용으로 구별된다. (170쪽) 

 육은 육체와 달리 늘 경멸적인 의미를 지녔다. 곧, 육은 영혼을 육체로 유혹하는 힘이다. 이 모든 명칭은 후대의 신학에서 욕정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육적인 것에 대한 생각’은 죄에 대한 유혹 이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자연스런 작용까지 포함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사악하지 않으며, '얼’이 영과 결합할 때 파멸되지 않고 영화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고찰에서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선재(先在)시기에 말씀(로고스)과 결합된 영혼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었다. 영혼이 말씀의 지극한 사랑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어느 정도 그분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불속에 던져진 철이 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 결합은 신성이 그러하듯이 실체적으로 선을 소유하며,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신”(필리 2,6) 말씀과 어느 정도 같게 된다. 이는 피조물에게 우발적인 방식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께서 육화하셨을 때 그분의 영혼은 이 하위 인자를 지니셨다. 하위 인자가 없었다면 말씀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공유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하위 인자는 그분께 유혹의 원천일 수는 없었으나, 성경이 증언하듯이 고뇌와 슬픔, 고통의 원천이었다. (171-172쪽) 

 육체의 의미와 대부분 경멸적으로 사용되는 육의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육은 육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뜻하기에 영혼의 하위 인자와 관련된다. 물론 선재 시기의 영묘한 육체는 인간이 타락한 뒤 지상적 특성을 지닌다. 이 특질은 모든 감성적 존재가 그러하듯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육체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자신의 모상인 신비로 다가가려는 영혼의 상승을 방해한다. 그러나 모든 감성적 존재처럼 지상적 육체 자체는 선하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육체는 실체의 심원한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고 성경에서 말한 그 실체들에 속한다. 오리게네스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모형론에 따르면, 육체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같이 신적 실재의 모상이다. 만일 하느님의 모상에 인간의 참여가 육체가 아닌 영혼에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 가치는 모상을 담고 있는 성소처럼 육체에 부여된다. 그러므로 코린토 1서 6장 13-20절에서 말하듯 육이 짓는 죄는 거룩한 이 육체에 대한 모독이다. (173쪽) 

 선재 시기의 영묘한 육체는 인간이 타락한 뒤에도 지혜의 씨앗(‘씨뿌려진 로고스’) 형태로 지상의 육체 안에 살아남아 있다. 그 씨앗에서 영묘한 육체는 영광스런 육체를 형성하기 위해 싹틀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육체의 실체는 동일한데 특질만 천상적 육체, 그 다음에 지상적 육체, 그다음에 다시 천상의 육체로 변한다. 예언자들에게 작용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하여 오리게네스가 지적하였듯이, 의인은 아직 세상에 살고 있지만 흙으로 된 육체는 영의 광채를 알았기 때문이다. (173-174쪽) 
 오리게네스의 삼분법적 인간학을 지배하는 환경은 신비보다는 도덕과 금욕, 곧 영적 투쟁이다. 영혼은 지상의 육체를 유혹하는 처지에 있는 육과 영 사이에서 고민한다. 영혼은 이 투쟁의 현장이다. 영과 육 가운데 하나를 승자로 결정해야 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갖춘 영혼이다. 영혼은 자신을 나눈 두 인자 또는 두 성향 때문에 육과 영 양측과 동시에 손잡고 있다. (174쪽)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고 세 번 언급한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인간이 동물을 다스리는 것을 하느님 모상과 연결시키고, 5장 1-3절에서 그 모상은 친자 관계를 나타내며, 9장 6절에서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피 흘림이 허락되지 않는 신성한 존재라고 말한다. (174-175쪽)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증언을 바오로 서간의 많은 구절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는 콜로새서 1장 15절이 자주 인용되었다. 오리게네스에게 구약과 신약을 일치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만 하느님의 모상이며, 완전한 모상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모상’일 수 있다. 비가시적이고 비육체적인 하느님께는 비가시적이고 비육체적인 하나의 모상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75-176쪽)

 니케아 이전의 교부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 만들자"라는 말이 복수 표현이며 창조 때 협력자인 성자와 성부가 나눈 대화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이 경우 하느님 모상은 말씀이시며 인간 창조의 대행자이자 모형(母型)이셨다. 한편 그분은 세상을 창조할 때 다른 방식으로 다른 역할을 하셨다. 이는 오리게네스가 용어를 일관되게 사용하는 몇 가지 관점 가운데 하나다. 곧, 성자만 하느님의 모상이라 불리며 인간은 그저 ‘모상을 따르는 존재’ 또는 ‘모상의 모상’이다. 오리게네스는 '모상을 따르는 존재'라는 표현을 인간이 하느님 모상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하였다. (176쪽)

 오리게네스는 창세기의 첫 두 장을 창조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창조로 이해한다. 첫째는 영혼의 창조다. 영혼은 비육체적이고 보이지 않는 말씀의 모상을 따라 비육체적이며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육체의 창조다. 육체는 단순히 모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오리게네스는 『창세기 주해』에서 창세기 2장을 선재 시기의 영묘한 육체를 창조하는 이야기로 여겼다. (177쪽)

 ‘모상에 따라’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에 참여하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꽃이 이는 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가 들은 말에 따르면 ‘있는 나’인 분(탈출 3,14), 곧 성부에 참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존재의 근원인 성부에 참여한다. (178쪽)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악은 ‘비존재’이며, 요한 복음 1장 3절에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 그 ‘없는 것’이다. 악마는 한처음에 하느님이 창조한 '존재’였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비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모상에 따름’은 하느님이신 하느님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성적 피조물은 피조물로 존재하는 우유성에도 불구하고 신격화되고 신성 안에서 성장한다. 성자의 활동으로 이성적 존재들은 시편 제81편에서 말하는 ‘신들’, 말하자면 만들어지는 신이 된다. 그들의 신격화는 ‘모상에 따라’ 하느님과 ‘유사함’을 완전히 이룰 때 영원한 지복 속에서 완성된다. (179쪽)

 그리스도께서는 ‘모상에 따라’ 우리에게 아들의 특질을 물려주신다. 우리는 외아들 성자의 활동을 통해 성부께 입양된 아들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진리, 생명, 빛 같은 그분의 특질들을 주신다. 마침내 로고스로서 성자는 우리를 '로기카’로 만드셨다. 로기카는 무엇보다도 초자연적 존재를 뜻하며, 오리게네스는 성인만 '로기코스’(이성적인)라고 분명히 말한다. 악마들은 한때 로기카였으나 하느님을 거부하여 '알로가’, 곧 이성이 없는 존재가 되어 동물과 비슷해졌다. 영적인 짐승이 된 것이다. (179-180쪽)

 '모상에 따르’는 것은 ‘지식의 근원’이다. 물론 하느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계시지만, 이 계시 가운데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심오한 요소인 이 모상을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180쪽)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하느님을 선택하는 대신 하느님을 거역할 수 있고 실제로 거역한다. 이때 죄와 씨름하는 경우 ‘모상에 따름’은 어떻게 될까? 죄는 ‘모상에 따름’을 거역하는 모상으로 감싸고, 거역하는 모상의 더미 아래 숨겨 버린다. (180-181쪽)


 지상의 모상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5장 49절에서처럼 아담이 아니라 선재 시기 지성의 타락 원인이 된 악마다. 인간은 지금 악마의 모상 안에 있고 악마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는 자연스런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만이 본디 인간의 아버지이고 악마는 하느님의 자녀를 훔치고 있다. 주화에 기념으로 장식된 카이사르의 초상(마태 22,15-22 참조)은 이 세상의 왕자, 곧 악마를 나타낸다. (181쪽)

 ‘모상에 따름’은 싹이 돋고 자라나야 할 일종의 씨앗 상태, 곧 출발점이다. 이와 같이 자라나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하느님과 유사함’인데, 이는 종말의 지복 안에서만 완성된다. (182쪽)

 오리게네스는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모상과 ‘하느님과 유사함’에 대해 언급하지만, 인간의 창조가 완료되었 음을 보여 주는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과 유사함’이 언급되지 않고 모상만 언급된 점을 주목한다. 이는 ‘하느님과 유사함’을 종말을 위해 유보해 놓은 것이다. 곧 ‘하느님과 유사함’은 모상의 완성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그의 첫째 서간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면(재림하신 그리스도), 우리도 그분과 비슷하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하고 기술한다.(참조 『원리론』3,6,1) ‘모상에 따름’이 이제 하느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면 유사함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뵙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알고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2쪽)

 ‘모상에 따름'에서 출발하여 ‘유사함’에까지 이르는 여정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길이다. (183쪽)

 덕의 실천을 통해 말씀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스스로 꼴을 갖추신다. 실로 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명칭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분은 각각의 덕행이고 덕행들은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완전하고 약동하며 살아 있는 덕’(참조 『요한 복음 주해』 32,11)이라는 한 주목할 만한 명제에서, 앞의 두 형용사는 일반적인 덕행과 개별적 덕이 성자의 신적 위격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덕의 실천은 그리스도의 위격안에서 실존적 명령에 참여하는 것이다. (183-184쪽)
☕ 덕의 실천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관상하는 이는 관상하는 바로 그 모상으로 바뀌어 간다(2코린 3,18 참조). 이런 관상 행위를 하는 주체는 ‘얼’, 지배적 능력 또는 영혼의 상위 인자인 마음이다. 이 주체는 주님께 의탁하면서 관상을 통해 옛 법의 참된 뜻을 가리고 있는 너울, 지각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너울, 죄의 너울, 성경을 조악하게 이해하는 너울을 벗겨 낸다. 따라서 몇몇 구절에서 오리게네스는 성령의 행위를 씨앗이 열매 맺도록 하는 힘이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인간을 하느님 모상에 따라 하느님과 완전하게 유사하게 자라도록 한다. (참조 『루카 복음 강해』 13,27) (184쪽)

 ‘하느님과 유사함’은 부활과 지복의 상태에서 하느님을 완전히 알게 되는 것으로 성취된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과 유사함’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귀결된다. (184쪽)
☕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하느님과 유사하게 되어야 한다.

 외아들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는 성자가 성부를 보는 것과 똑같이 성부를 보게 될 것이다. 말씀이신 의로움의 태양 안에서 하나의 태양이 된 모든 이는 같은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그때는 말씀이 더 이상 중재하지 않는다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말아야 한다. 말씀의 중재는 늘 있지만 단지 그 방식이 변화하였을 뿐이다. 성인들은 성자처럼 성부를 뵙고 그분 영광과 함께 빛나게 되는데, 이는 성자 안에 머물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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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쉬어감님 | 작성시간 21.02.04 덕의 실천을 통해 말씀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스스로 꼴을 갖추시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 작성자예지어린이집 | 작성시간 21.02.04 오리게네스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명금당 | 작성시간 21.02.04 악마를 표현할 때 인간의 탈을 썼다고 하는 말을 쓰는데 악의 유혹은 동물적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배우고 암을 통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신 마음지기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작성자베르나 | 작성시간 21.02.04 '모상에 따름'에서
    출발하여
    '유사함'에 까지 이르는 여정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길이다.(p.183)

    '모상에 따름'이 이제 하느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면
    '유사함'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뵙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알고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182)
    ......
    '하느님과의 유사함'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귀결된다.(p.184)
  • 작성자Abel2011 | 작성시간 21.02.06 관상...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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