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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지기

19. 주여, 왜?

작성자마음지기|작성시간14.01.28|조회수354 목록 댓글 6

 

 

까를로 까레또 지음 / 김형민 옮김 / 생활성서

 

1. 작가소개

 

- 지은이 : 까를로 까레또

 

1910년 이탈리아 알레싸드리아 삐에몬떼에서 태어나서 연구와 교직생활을 거쳐, 1952년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 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54년 샤를르 드 후꼬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0년간 사하라 사막에서 관상 생활을 하였다.

1964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씨시에 기도 및 묵상 센터를 설립하였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이며 저술가인

그는 1988년 78세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가시나무 덤불이 타는 곳>,<복되다 믿으신 분>,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도시의 광야>, <사막에서의 편지>, <오시는 주님>등이 있다.

 

- 옮긴이 : 김형민

 

1941년 출생.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어느날 갑자기 언어장애, 음성장애, 글씨장애에 안면신경 마비까지 겹친 완전마비의 중풍병을 앓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인간의 한계와 무기력을 뼈저리게 겪게 되면서 잘못된 지난날의 삶을 뉘우치고 가톨릭 신앙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후 주님께서 영적 치유, 내적 치유, 언어장애와 음성장애의 치유 및 점진적인 신체적 치유의 은총과 함께 전교의 은사까지 허락하시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주여, 왜?>, <기적은 일어난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말씀이신 예수>, <환난에 대한 진리>가 있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작은 이야기

 

내 친구는 나에게 잘해 주려는 뜻으로 나의 허벅다리에다가 주사를 한 대 놓아 주었는데, 그 주사에는 마비시키는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주사를 맞고 나서 하루도 채 안 되어서 나의 한쪽 다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친구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지요.(p12)

☞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잘못된 결과를 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때 불평하지 않았고, 잘못을 저지른 간호사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일념에서 쾌활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나만큼 감정적으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평생 마비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p12)

 

왜 하느님은 이처럼 간단한 일 때문에 생긴 어처구니없는 잘못에 개입하시어 멈추게 하시지 않았는가? 왜 하느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느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왜 하느님은 …… (p13)

☞ 잘못은 인간이 하고 원망은 하느님께 하게 된다.

 

왜 하느님은, 이른바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분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일까? 왜 하느님은 그 멍텅구리 같은 녀석이 일 인치도 못되는 것으로 나를 찔러 다시는 내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없게 될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보고만 계시는 것일까?(p13)

☞ 이런 경우에는 절규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하느님은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p14)

☞ 누구나 이런 경우에 처하면 던지는 질문이다.

 

그 사고는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사고 자체는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불행하고 불운한 사고를 은총으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입니다.(p15)

☞ 이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불구가 된 내 다리는 내가 ‘시련을 이겨 내고’ 꿋꿋이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야고 1,12) 언제나 달리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서 있었습니다. 언제나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 보려고 허둥대던 내가 이제는 서 있었습니다.(p15)

☞ 이 사고로 달리던 수사님은 서있게 된다.

 

이제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고는 나에게 보탬이 되었던 것입니다.(p15)

☞ 돌이켜보면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뀐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고 한 말을 나는 직접 내 몸으로 체험했습니다.(p16)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분은 악을 선으로, 무기력을 관상으로, 고통으로 인한 울부짖음을 기도로, 슬픔을 사랑의 행동으로 바꾸어 놓고자 꿈꾸시는 분이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꿈입니까!(p16)

☞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

 

나의 체험으로 보건데 가난과 고통의 상처는 특별하고 매우 값진, 그리고 무척이나 달콤한 꿀을 만들어냅니다. 이 꿀은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진복팔단의 꿀입니다.(p16)

☞ 그러기에 가난과 고통 때문에 너무 낙담하지는 말자.

 

삶의 신비스러운 비유

 

“내가 없는 그분은 무엇인가?” 사실, 그분이 없으면 나는 어둠, 공허 속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낍니다. 그렇다면 내가 없으면 그분은 어떻게 느끼실 것인가?(p25)

☞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고 말한 케에르케고르의 말은 진리다.

 

분명 나는 그분을 찾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분명 그분도 나를 찾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p25)

☞ 나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도 나를 찾는다. 사랑하는 연인처럼.

 

이렇게 서로가 상대방을 찾는 것을 사랑, 소통, 대화, 경청, 노래, 외침, 기다람, 포옹, 잔치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하늘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p25)

☞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는데 우리가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화의 단절이며 소통의 부재다. 아마도 하느님은 상심하실 것이다.

 

고통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냐고 이상하게 여길 권리가 있습니다.(p27)

☞ 당연하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분은 그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p29)

☞ 왜요? 하느님. 여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있다고요?

 

그분은 미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미친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미치신 것입니다.(p30)

☞ 어쩌면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미쳤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어둠 속을 지나 사랑하는 분의 팔에 안기는 행위, 즉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행위는 없습니다.(p30)

☞ 어린이는 엄마에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어린아이들의 것이다.

 

아버지

나는 나 자신을 당신 손에 맡겨 드립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시든지 나는 감사드립니다.(샤를르 드 후꼬) (p30)

☞ 여기에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있다. 하느님에게 온전히 내맡기는 것.

 

주여, 왜?

 

누구든지 많은 고통을 받게 되면 마침내는 구약의 욥처럼 말합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욥기 3,3) 무거운 고통의 손아귀 아래 있게 되면 우리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삶을 희망 없는 불행으로 저주합니다. 그것이 심연의 구렁이고, 신앙의 희미한 빛마저 완전히 없어져 버린 철저한 어둠인 것입니다.(p32-33)

☞ 나도 그랬다. 그냥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 나왔다.

 

바다가 거기에 있어 나는 바다를 봅니다. 하늘이 거기에 있어 나는 하늘을 찬미합니다. 열이 거기 있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음식이 거기에 있어 나는 그것을 맛봅니다.(p3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

여기에 진정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고통의 경험이 전에는 우리에게 없었던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야말로 절대자에 대한 지식, 곧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 ” (p36)

☞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발가락을 돌부리에 채여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돌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또는 더위와 추위 가운데에서 살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절에 대하여 알 수 있겠습니까? (p36)

☞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질적으로 다르다.

 

잠시 동안 긴장이 없는 우주를 상상해 보십시오. 고뇌가 없는 삶, 땀 흘리지 않는 세상, 기쁨이 없는 육체, 밥솥이 없는 밥, 창의성이 없는 예술 작품, 기다림이 없는 사랑 등.

이것은 미이라가 된 우주일 것이고 변화가 없는 세상이요, 벌레 먹은 나무로 된 인간이요, 꼬임이 없는 이야기요, 경이(驚異)가 없는 어린아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죽음이요, 살아 본 적이 없는 삶이고,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은 학교요, 깨달음이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p37)

☞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이상(李箱)이 말했듯 권태다.

 

무엇보다도 내 삶의 끄트머리에는, 나의 노고와 피와 땀의 마지막에는, 꿈을 다 꾼 다음에는, 무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더욱 고약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철저하게 부서뜨립니다.(p37)

☞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이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틀림없이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비밀은 아직도 감추어져 있습니다.(p37)

☞ 그것이 무엇일까?

 

교만한 자들이 승리하고 가난한 자들이 굶주릴 때에, 나는 다시 한 번 선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됩니다. 내가 나의 불행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쇠약해진 눈으로 바라다볼 때에, 유쾌한 기분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p38)

☞ 그러면 정의가 아니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좋으신 분이라면 어째서 그분은 나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다면, 어째서 나를 비탄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까?(p38)

 

하느님, 당신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어째서 당신의 뜻이 내 뜻과 다른 것인지요? (p38)

 

마치 당신께서는 나의 고통, 나의 고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련을 나에게 보내신 분은 당신, 그래요, 바로 당신인데도 말입니다. 주님! 왜입니까? (p38-39)

☞ 순종만이 능사가 아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는 소리쳐야 한다. 왜?

 

이제야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소문으로가 아니라 이제 나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나는 나를 찌르신 분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p39)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고 빌건만 멀리 계시나이다.

진종일 외쳐 봐도 들은 체 않으시고

밤새껏 불러 봐도 안식을 찾을 수 없나이다(시편 22,1-2)

☞ 주석(註釋)은 기도라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버림받은 자의 절규다.

 

주여, 왜?

주여, 왜?

왜? (p41)

 

메시아의 꿈

 

메시아의 꿈은 하느님 백성이 사막을 거쳐 가는 여정에서 극히 중대한 받침이 됩니다. 즉 불안정 가운데의 안정, 종살이 안에서의 자유, 시련 중의 힘, 바빌론의 끔찍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견디고 생존하는 수단인 것입니다.(p43)

☞ 꿈이 있다는 것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꿈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 나를 구하러 오십니다. 나를 도와주러 누군가 오십니다. 나를 감옥에서 되찾아 내고자 누군가 오십니다.(p43)

☞ 그 누군가가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 꿈을 품고 산다.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인 나에게 있어 이 꿈은, 희망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이루어질 현실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면서, 영원히 나의 것이 될 내 삶의 그림을 바꾸어 놓는 꿈입니다.

모든 것이, 심지어는 사막의 메마름이나 지나다닐 수 없는 길, 그리고 슬픔이나 울음까지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p44)

☞ 그 꿈이 있기에 현세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선포를 듣지만 그 선포를 묵상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선포는 먼 곳에서 오지만 그것을 실제화 하는 것은 여러분 쪽에서의 일입니다.(p47)

☞ 메시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이사 43,18)

☞ 과거는 흘러간 물과 같은 것, 옛날 일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들에게 아주 가깝게 계셔서, 그분은 여러분을 ‘나의 신부’라고 부르십니다.(p50)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 그래서 저 세상에서는 시집, 장가를 가지 않는구나. 나의 배우자가 하느님이신데 따로 결혼할 일이 없겠구나? 그러면 지금 아내는 어떻게 되지……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54,10).

물론 그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의심하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이사 49,14)고 훌쩍거리며 하소연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후렴처럼 응답이 돌아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p51)

☞ 나는 주님의 이 약속을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서 그분은 여러분에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16)

그 이상 무엇을 더 원합니까? (p51)

☞ 이 보다 더한 약속이 어디 있는가?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고자 하는 바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p51)

☞ 아멘.

 

하느님 나라는 실제적이고 우리의 출애굽도 실제적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들, 모든 것에 만족하게 사는 사람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신비이며,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p52)

☞ 이미 그들은 만족하며 살고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간절하지 않다.

 

오직 하느님만 계실 뿐!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모퉁잇돌입니다. (p53)

 

당신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당신 자신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덕은 겸손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삶의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보살피는 지속적인 죽음의 영상이 있는 것입니다.(p53)

☞ 고통과 죽음의 의미.

 

만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면, 고통과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과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과 죽음은 도무지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p55)

 

너는 영원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위하여 하늘나라를 준비하여 놓았고 너는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선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들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p56)

☞ 이것은 또한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의 신비까지도 혼자만의 신비가 아닙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시며 성부와 성자는 사랑을 낳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나라를 선포하시고 인간들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p57)

 

하느님께서는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는 가서 문을 엽니다. 후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는 잔치이며 우리는 한 식탁에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단순합니까? (p57)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들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p57)

 

인간은 자녀이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알맹이입니다.(p58)

☞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오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사람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잔치를 준비하시니 인간은 없어서는 안 될 손님입니다. 하느님의 행위는 인간의 응답이 없으면 헛된 것입니다.(p58)

☞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이미 초대되었다. 가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다른 한쪽’이시고, 즉 파트너이시고, 인간은 참으로 하느님의 ‘다른 한쪽’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p59)

 

하느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신명 30,15). 여기에 선과 악이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p59)

☞ 당연히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우선 먹기에 달기 때문이다.

 

이것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시고, 우리의 자유는 이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59)

☞ 이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랑은 요구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p60)

☞ 생명의 길을 갈 것인가. 죽음의 길을 갈 것인가. 먼 행복인가, 가까운 쾌락인가?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구나!”라고 예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권리가 있습니다.(p60)

☞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가난을 사랑한다. 너는 어떤가? 너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p61)

☞ 주님은 하필 가난을 사랑하시는가? 나도 최소한 가난을 싫어하지는 않겠습니다.

 

출애굽이란 인간이 하느님의 취향을 경험으로 배우기 위하여 하는 여행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학교이고 하느님 나라의 훈련장이며, 부모처럼 되기 위한 아이들의 성장입니다.(p61)

☞ 이 세상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다. 졸업할 때까지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철저히 끝까지 사랑하라는 요구를 수락하고, 벗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기 전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p62)

☞ 이정도로 사랑 하는데 치열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즉 보통은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시작되어 여러분 자신의 피로써 세례를 받을 때에 끝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p62)

 

우리는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느님에 의하여 자유에로, 완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 영원한 자유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p63)

 

그러나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된 임무와 얼마나 많은 투쟁과, 얼마나 많은 정화가 필요한 것입니까?(p63)

☞ 출애굽의 여정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리라. 하느님은 감당 못할 과제를 주시지는 않으신다.

 

영혼의 밤은 그리움 때문에 몸부림칠 지경이 될 때까지 사랑이 우리를 그분에게 몰아붙일 때조차도, 어둠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보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불평하지 않고 견디는 인간의 성숙한 능력인 것입니다.(p64)

 

나의 출애굽은 내가 침대에서 죽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에 끝납니다.(p65)

☞ 사랑과 용서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한다. 그때 나의 출애굽은 끝난다.

 

이제 두려워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말로는 쉽지만 아무도 실제적으로 예수님처럼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말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는 분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또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p65)

☞ 내 속에서 ‘나도 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하느님만 믿고 의탁해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

 

참된 비밀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패배 당하신 하느님이시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나의 발을 씻겨 주신 하느님이시고 나자렛의 예수이십니다.(p66-67)

☞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낮춤에 있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리들이 추구하던 하느님 대신에 어린 아기로 나타나셨고, 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신성(神性)을 이용하시지 않고 당신 자신을 가난한 노동자로서 드러내셨습니다.(p67)

☞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낮추어 오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사람으로서, 참 사람으로서, 진정한 사람으로서 그분은 판결을 받아 들였고, 당신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해골산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비틀비틀 걸으셨습니다.(p67)

☞ 그분께서는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태어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없었고, 메시아가 교수대 위에서 다스리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계시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입니까? (p70)

 

이제부터는 우리가 짐으로써 이겨야 한다고 믿는 것은 상식에 도전합니다. 하느님께는 거저 주어진 사랑의 왕국을, 즉 가난한 자들이 첫째가 되고 부자들이 그 쓸모없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쫓겨나게 되는 그런 나라를 시작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그러한 가치 전도를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까마득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p70)

☞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가치는 완전히 다르다.

 

나자렛 예수가 나타내보이는 그런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기를 버림으로써 이긴다는 것을 믿는 것!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임을 믿는 것! 권력은 커다란 위협이고, 부(富)는 노예상태이고, 안락한 생활은 불행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p70)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이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나라이고,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 꼴찌이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돈은 용서이고 은행은 인간의 사랑과 고통에 의하여 생산된 보물들만 쌓아두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돈과 안락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은 존재하지 않고 상호간의 섬김과 이웃 사랑을 위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나라입니다.(p75)

☞ 그야말로 이상향, 유토피아다.

 

마리아가 마니피깟에서 노래하듯이 우리들의 모든 가치가 뒤바뀌고, 권세있는 자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내쳐짐을 보게 되는 것은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p75)

☞ 진정 바보들의 모임이며, 바보들의 행진이다.

 

성혈의 댓가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온 참된 비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인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없애시는 하느님, 그렇게 해서 피조물들의 구원에 대한 댓가를 치르시고자 당신 피를 쏟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p77)

☞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벌주시는 무서운 하느님, 저주하시는 하느님을 그린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림을 없애 버리고, 그분 대전에 무릎 꿇고 그분을 벌주시는 분으로 본 데 대하여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p77)

☞ 벌주시는 하느님, 저주하시는 하느님은 생각할 수가 없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에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루가 6,27) 하고 말씀하신 분이 당신 자신은 또다른 기준에 따라 행동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지 도와 주고, 재창조하고, 기다려 주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에게 돌아온 죄인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p77)

☞ 사랑의 하느님이 벌주시는 하느님도 된다는 것은 솔직히 상상이 안 된다.

 

만일, 범법자들이고, 범죄자들이고 배반자들인 우리에게 이 엄청난 말씀, “오늘, 오늘, 바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려 줄 복음서가 우리 손에 없었다면 역시 우리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p78)

 

생명의 법정에서 범죄자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이 불명예스러운 하느님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하느님은 불명예스러운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중요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는 신성한 것을 흐트러뜨리기를 주저치 않으시는 그런 하느님이십니다.(p78)

☞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다 알 수 있겠는가?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일부의 모습일 뿐이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율법을 깨고 밀이삭 몇 개를 자름으로써 당시의 종교에 금지되어 있는 행위를 했을 때 일어난 통렬한 논란을 기억하십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p78)

☞ 하느님에게는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중요하다. 이것이 하느님의 비밀이다.

 

우리들은 법을 어긴 사람들을 죽이고, 만일 그들이 죄를 지었으면 고문하고, 정의를 좇아 그들을 지옥으로 넘겨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십니다. 안식일이 그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지켜 주시고 하느님의 피로써 값을 치르고 산 인간에게 이 얼마나 큰 존엄성이 부여되고 있습니까!(p79)

☞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가늠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교황 비오 10세 시대에 현대주의자였던 사제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생각하면, 항상 뒤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예수의 용서의 길을 받아들이기를 그토록 힘들어했던 교회에 대하여 서글프게 생각합니다.(p79)

 

나는 종교 전쟁이나, 이교도들과 마녀들에 대한 교황청의 이상한 논리를 생각할 때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p79)

☞ 아주 오랜 세월동안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지극히 반 복음적이었다.

 

사람은 피로써 값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법보다 우월합니다. 용서는 예수께서 세우고자 하신 공동체의 첫째가는 법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p80)

☞ 용서와 사랑이 예수님의 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 마귀가 만든 지옥이 아닌 그들 자신의 지옥에 들어가서는 그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장치에 얽매여 자기들의 잘못과 오만과 이기심, 그리고 하느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의 쓰디쓴 잔의 찌꺼기들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p81)

 

그 누구도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은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p81)

 

세상, 그 세상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스스로를 벌하고 있고, 자신의 손으로 지옥을 파고 있으며, 미친 상태로 스스로의 절망을 준비하고 있다고, 또 그들 스스로 끔찍한 감옥을 만들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의 붕괴를 준비하고 있다.(p82)

 

만일 일하던 사람이 실직하게 되고 어린아이가 굶주린다면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묻지 말고 권력이, 즉 형편없는 정치가들과 부정직한 관리들이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p83)

 

만일 어머니가 암에 걸리고, 자녀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숲이 죽어가고, 바다가 오염되어 악취를 풍기고, 강에는 고기가 더 이상 살지 않게 되면 자연이 적대적이 되었는지를 묻지 말고 재물을 획득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할 정도가 되어 버린, 인간의 탐욕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으십시오.(p83)

 

무질서와 오만과 돈이 악과 전쟁을 쌓아가는 이 세상은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조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p83-84)

 

그분은 갈바리아에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죽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조금은 죽는 것을 배워다오. 죽음으로써 너는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처럼 사랑을 위하여 죽을 때에만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p85)

☞ 진정 예수님을 본받으려면 나도 사랑을 위하여 조금은 죽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 가볍게 볼 수 없는 것

 

이는 확실히 기도가 되기에 적절한 감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가능하겠습니까? 기도 도중에 “네 어린 것들을 붙들어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되리라”(시편 137)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까?(p87)

☞ 도대체 이런 기도가 시편에 있다니!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나의 노력으로써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것도 압니다.(p88)

 

"모든 것은 하느님께 달렸다“라고 나는 외칩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렸다“는 것도 깨닫습니다.(p88)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 쫓겨난 자들,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의 편인 것입니다.(p89)

 

바빌론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아이들의 머리를 성벽에 메어칠 때에 그 일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어린이들이 바위에 메어쳐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알 때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메어쳐지는 아이들이 바로 자기들의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자기들이 한 짓의 비교 기준을 갖게 될 것입니다.(p90)

☞ 자신도 같은 고통을 겪어보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끔직한 일입니다! 쓰라린 경험이 아니고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은 끔찍한 것입니다.(p90)

 

나는 이제 왜 그토록 고통과 눈물이 이 세상에 많은지 압니다. 고통과 눈물은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불러들인 것은 우리들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을 선택한 것은 우리라는 말입니다.(p90)

 

폭력과 증오와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은 가난한 나라들의 피를 빨아먹는 우리 부강한 나라들인 것입니다.(p90)

 

우리가 질주하고 있는 길을 차단하는 방법은 고통으로써인데 그분은 그 고통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일단 누구에게 배반을 당해보면, 자신이 했던 배반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이 굶주림과 질병과 전쟁을 겪어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악함과 잔인함을 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림받고 나면, 우리 자신도 누군가를 버린 적이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p91)

 

우리 자신의 육신으로 받는 고통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우리에게 하느님께 관한 사정에 있어 성숙해지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의 육신에 작용하십니다.(p91)

 

중요한 것은 지옥에 안 가야 한다는 것과 너무 늦기 전에 멸망을 향하여 달리는 내 길을 차단하여 줄 누군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 도망자는 굶주림 때문에 차단되었습니다. 그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p92)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것이므로 굶주림이라는 방법을 써서 그렇게 하십니다. 때때로 그분은 굶주림보다 더 큰 상처를 주는 방법들도 사용하십니다.(p92)

☞ 하느님에게는 우리의 구원보다도 더 큰 일은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시면 하느님의 사랑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잃어버리시기보다는 차라리 산산조각을 내시고 짓이겨서라도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p92)

☞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하느님은 고통도 이용하신다.

 

전쟁, 사회적인 투쟁, 종족간의 충돌, 굶주림, 생태학적 불균형 등의 어마어마한 재앙들은 분명하고도 단순한 하느님의 법, 곧 자연과 생명에 불순종한 우리의 탓 때문인 것입니다.(p93)

 

순교의 최우위성

 

이사야는 의로운 이의 신비, 고통받는 종, 야훼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묘사해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방법으로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시려고 죽으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쳐없애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당신의 후손’을 보기 위하여 죽으십니다. 그 후손들은 얼마나 많이 있어 왔습니까! 그분은 “오래오래 살기 위해서”(이사 53,10) 죽으십니다.(p97)

그리고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권력이 아닌 섬김이, 복수가 아닌 용서가, 교만이 아닌 겸손이, 문화의 힘이 아닌 피의 힘이 되었습니다.(p97)

☞ 하느님 나라는 섬김과 용서와 겸손으로 전해진다.

 

우리들은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이 채워야 합니다.(p98)

☞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섬김과 용서와 겸손으로 채워야 한다.

 

오늘 당신의 순교는 당신 자신을 부로부터 떼어 놓아야 합니다. 당신이 만일 행복하기를 원하거든 물질에서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는 당신 마음의 평화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p98)

☞ 부가 목표인 오늘날 부를 포기한다는 것은 순교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첫째는 감미로우신 예수님, 당신께서 가장 쓰라렸던 수난의 시간에 받으셨던 아픔을 가능한 한 나의 영혼과 육신에 느끼게 해 주시고, 둘째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하여 그 큰 수난을 기꺼이 견디어 내실 정도로 뜨겁게 타올랐던 그 특별한 사랑을 가능한 제 마음에 느끼게 해 주십시오. (성 프란치스꼬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기도) (p99)

☞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과 사랑을 간청한 프란치스꼬 성인.

 

사랑으로 죽을 때에만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의 우상들로부터, 나의 콤플렉스로부터, 나의 쇠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죽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자기 헌신과 평화와 기쁨과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p99)

☞ 사랑으로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의아해하고 전율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한 움큼의 쌀이 없어서 그들의 자녀들을 굶기고 있을 때에 중남미의 한 가족이 하나의 주(洲)를 몽땅 차지하고 그곳의 농부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p100)

☞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악의 숨겨진 모습이다.

 

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죽는 아이는 복있는 아이요, 불의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위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그분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인류의 거대한 행렬의 선두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p100)

☞ 그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이다.

 

헤로데의 잔인함 때문에 학살당한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이들이여, 너희들은 복되도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말이 아닌 피로써 증거한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한고! 참 사랑을 택했고 그 참 사랑 때문에 그대들의 피를 바친 모든 시대의 순교자들이여, 그대들은 복되도다! (p100)

☞ 성경을 읽을 때마다 거북했고, 궁금했다. 어린 아이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피를 뿌렸구나!

 

비폭력을 실천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복되도다!

프란치스꼬여, 그대는 복되도다!

로메로 대주교여, 그대는 복되도다!

포피에우스코여, 그대는 복되도다!

동서양의 모든 전제주의 국가의 무명 순교자들이여, 그대들은 복되도다!

권력의 철장화 밑에 짓밟혀 무죄하게 투옥당한 이들이여, 그대들은 복되도다! (p101)

☞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지만 하느님에게는 복된 자들이다.

 

왜? 왜 복된가?

왜냐하면 그대들의 존재와 그대들의 순교로서 그대들은 구원과 사랑의 길을 우리에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복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대들보다 더 참된 학교가 있겠습니까?(p101)

☞ 구원과 사랑의 길은 옳은 일을 위하여 기꺼이 죽는 것이다. 그들은 그 도구가 되었기에 복된 것이며, 아무나 할 수 없기에 복된 것이다.

 

나병환자가 없는 프란치스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성 프란치스꼬가 나병환자에게 입맞췄기에 그를 복되다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병환자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프란치스꼬보다 훨씬 더 복되도다”라고. (p102)

☞ 온 몸이 고통의 봉헌물이기에 그는 복된 것이다.

 

마지막 날의 진정한 복은 가장 낮은 자리의 복으로, 그 자리에서 인간의 불의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청하는 부르짖음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강하게 느끼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가장 비천한 자리를 서슴치 않고 취하신 것입니다.(p102)

☞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기뻐할 것이다.

 

길을 가다가 장애자나 앞 못 보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대들은 복되도다, 그대들은 복되도다!”하고 말하는데 익숙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풍요와 부(富)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과 어리석음을 한껏 차려입은 여인들에게 복되다고 말하던 버릇을 버리십시오.(p103)

☞ 그들의 뒤에는 얼마나 큰 복됨이 기다리고 있는가! 하느님께 선택되었기에 복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고, 그 나라가 영원한 것이라면 성 프란치스꼬가 한 다음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선은 너무 큰 것이어서 모든 고통이 나의 기쁨이 된다.”(p103)

☞ 현세의 고통은 하느님 앞에서 복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셨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도 게쎄마니 동산의 그 무시무시한 밤에 당신 아버지와 분투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혈관으로부터 피가 스며나와서 땅 위에 뚝뚝 떨어졌다고 루가 복음사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카 22,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이 말씀은 싸움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하시는 것입니다.(p107)

☞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온 몸으로 받으셨다.

 

야곱을 설득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십니다. 그의 엉덩이뼈를 치시어 절뚝거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자, 이제 너는 너의 약점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하느님께 의지하여라.” (p108)

☞ 하느님은 이제 야곱이 하느님에게 의지하도록 그를 부서뜨린 것이다. 그는 약함으로 하느님을 의지하게 된다.

 

새로운 인간 이스라엘, 하느님과 싸워 절름발이가 된 사람이지만, 그는 이제 역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곧 고통에 의하여 겸손해진 사람, 나눔의 사람, 동료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 진복팔단의 인간이 될 것입니다.(p109)

☞ 자신의 한계를 겸손되이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 의지하게 된다.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아주 추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나쁜 일은 인류가 더욱 악해져서 거의 악마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p109)

☞ 그러므로 고통과 눈물과 죽음은 이 세상이 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상처를 입음으로 나는 평온 가운데에 머물게 되었고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눈물로써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가난의 복됨을 배웠습니다.(p111)

 

만일 인간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인내의 한계에까지 밀려가지 않았다면, 그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더라면, 모세가 절대로 해방의 행진을 시도하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p111)

 

우리들에게 내일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데에 고통보다 더욱 효과적인 박차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신 이유입니다.(p112)

☞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가난을 두려워하지만, 가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통 받기를 두려워하지만 고통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p114)

☞ 고통과 마찬가지로 가난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문제와 신적인 문제에 관해 성숙한 인격체가 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본래 그의 생활이 하느님이신 인간, 나자렛 예수의 생활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좀 더 쉽고 인간 본성에 좀 더 맞는 모범을 보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즉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열심히, 명랑하게, 검소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사는 사람들의 열심히 일하는 가난이 그것입니다.(p115)

☞ 열심히 일하는 가난,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다. 가난을 사랑하도록 하자.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더 많이 사랑하라

 

사랑은 여러분을 태어나게 하고, 여러분이 떨어지면 끌어올려 주며, 잘못하면 고쳐 주고, 달아나면 기다려 줍니다. 사랑은 여러분이 사랑을 찾으려고 하면 끌어안아 주고, 여러분이 사랑에 입 맞추면 사랑도 역시 여러분에게 입 맞추어 줍니다.(p118)

☞ 사랑만이 정답이다.

 

사랑은 또한 여러분에게 고통받게 합니다. 이렇게 고통받게 하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고통을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에 관한 한 우리들은 모두 죄를 짓기 때문에 미성숙하게도 우리는 ‘하느님이 나를 벌주셨다’고 말합니다.(p119)

 

하느님은 아무도 벌주시지 않으십니다. 나는 그분을 조금 알게 되자 내가 고통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미숙하게 생각했던 때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결국,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벌주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나쁘고, 나쁘고, 또 나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p119)

 

누가 한쪽 빰을 때리거든 다른 쪽 빰마저 돌려대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예수님께서 그와는 달리 행동하셔서 다른 빰 대신 받아서 마땅한 벌을 우리에게 주십니까?(p119)

 

우리들에게 다른 빰마저 돌려대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우l들에게 빰뿐만 아니라, 못 박히시기 위하여 당신 몸 전부를 때리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p119)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의 죄는 용서하셨을지라도 우리들의 고통을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p119)

그분이 보시는 바로는 그분이 주시는 고통, 그토록 풍부하게 주시는 고통은 벌이 아닙니다. 고통은 학교입니다. 그것도 사랑의 학교입니다.(p120)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밖에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고통은 우리들이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줍니다.(p120)

☞ 고로 고통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다. 고통은 사랑을 배우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만일 그분이 우리들을 고통받게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들은 일생동안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피로가 없이 휴식을, 슬픔이 없이 기쁨을, 어둠 없이 빛을, 미움이 없이 용서를, 오류가 없이 진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필요를 느끼게 하십니다.(p120)

☞ 고통을 통하여 필요를 깨닫게 되고, 또한 다른 이의 필요를 사랑으로 채워주게 된는 것이다.

 

그분은 여러분을 당신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즉 사랑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여러분을 벌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건강을 빼앗음으로써 여러분을 작고 겸손하게 만들고, 여러분에게 어둠을 주심으로써 빛을 갈구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을 외롭게 하심으로써 당신을 찾게 하시고, 여러분의 육신에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육신의 고통을 느끼게 만드십니다.(p120-121)

 

사랑과 고통, 죽음과 부활의 연계를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척 어렵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p121)

 

나는 여러분에게 조그만 비결을 하나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줄이려고 애쓰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비결이란 이것입니다. 즉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p121)

☞ 고통을 줄이는 비경은 더욱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상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계된 것을 미친 듯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p124)

☞ 행복하고 싶은가? 하느님을 더 사랑해라. 미친 듯이 사랑하라.

 

혹심한 고통을 줄이고자 예수님께서는 더욱 더 기도하셨고, 아버지께 더욱 열렬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더욱 열렬하게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더 많이 기도함으로써 고통을 줄이고 참아 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p125)

☞ 고통은 하느님을 더 찾게 만드는 좋은 기회다.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하라

 

마리아넬라

 

엘 살바도르의 젊은 여성, 마리아넬라 가르시아 빌라스는 1983년 3월 13일에 정부군에 의하여 피살되었습니다. (p132)

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엘 살바도르의 농부들을 살육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의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반향하면서(마태 14,4)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p135)

☞ 악에 대항하여 ‘아니오’라고 말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변호사 마리아넬라는 다른 변호사들이 정부당국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변호하지 않으려 하는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위협과 가족에 대한 보복, 재산 몰수와 마구 짓밟고 약탈하는 군인들과 도둑떼들에 의해 박살이 난, 가옥에 대한 무장 습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p135)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에 굶주린 도살자들의 손에 의해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세상에 알리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p136)

 

바로 그것이 마리아넬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이, 습관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유일한 재주라고는 교회를 가득 메우고 행렬을 지어 가면서, 처벌받지 않은 살인자들과, 짓밟히고 유린된 가난한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주는 그녀의 메시지였습니다.(p136)

☞ 진정한 신앙은 악한 일에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군조사관은 물 한 컵을 달라고 요청하는 그녀의 목구멍에다 끓는 물을 들어부었는데, 거기다가 또 휘발유를 적신 걸레조각을 그녀의 입에 처박음으로써 욕지기가 일어나 그녀를 거의 질식시키도록 했습니다.(p136)

☞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녀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고국을 떠났지만, 이내 그녀는 자기가 벗들의 고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는 고문당하고 피살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자 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p136)

☞ 그녀는 고통을 피하기보다 고통을 감싸 안았다. 예수님처럼.

 

로메로 대주교

 

“우리 주교들은 양떼의 목자가 되는 순간에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고 말씀하셨기 때문일세.”(p134)

☞ 목자는 이미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검은 사제복을 입는다.

 

소심하고, 전통주의자라고 비난받고, 대중 앞에서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진 인물, 역사에 기록될 일을 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 그는 보통 “나는 모든 사람들의 주교이다. 나는 중립니다”라고 말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는 군대의 폭행에 맞서 용감하게 외쳤습니다.(p137)

☞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는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라는 말에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소심한 사람이었으나, 무장하지 않은 농부들에게 발포하는 데 대한 양심의 불편 때문에 그에게 와서 조언을 구하는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살인을 하라는 그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에 복종해야할 의무는 없습니다. 부도덕한 법은 그것에 복종해야할 의무를 수반하지 않습니다.(p137)

☞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하느님의 법보다 우선인 것은 없다.

 

군(軍)은 다른 순간을 찾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교로서 말했고 그들은 주교로서 죽였습니다. 미사에서 봉헌기도를 하는 동안에.(p137)

 

당신은 전에 엘 살바도르의 당신 본당에서 얼마 안 되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당신은 당신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흘린 당신 자신의 피로써 다시 세례를 받았습니다.(p138)

☞ 그는 참 예언자였고, 참 목자였고, 순교자였다.

 

베네데따

 

베네데따 비앙끼 뽀로는 1936년 8월 8일에 포를리 근처 도바돌라에서 태어나 1964년 1월23일에 브레시아 근처 시르미오네에서 죽었습니다.(p141)

 

태어난 지 불과 몇 달 안 되어 소아마비에 걸렸으므로 베네데따는 학교를 다니다 말다 했습니다. 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밀라노 대학교의 의과대학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때쯤에 그녀는 귀머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고, 이는 그녀에게 많은 굴욕감을 주었으나 그녀는 집요하게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귀머거리가 된 다음에는 장님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병은 진행성 신경섬유종양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p141)

☞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도 같은 병이었다. 무서운 병이다.

 

이 갈바리아 위에서 베네데따는 자기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했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p141)

☞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는 믿음.

 

우리 모두는 성 이냐시오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내어맡기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네데따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겼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당신 팔에 안아 주시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실 하느님의 꿈에 자신을 내어맡겼습니다.(p142)

☞ 그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것이다.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뭔가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의사가 되기로, 즉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살고 투쟁하고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좀 돌았다고도 할 만한 용기로 밀라노의 의과대학에 등록했습니다.(p143)

 

귀머거리가 된 것은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젊은 육체를 곧 황폐화시킬 신경섬유종양이 이미 발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장님이 되고, 촉각을 잃게 되고, 마비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리에, 점차 전신에 마비가 왔습니다.(p143)

“삼 개월 전만해도 아직 나는 꽤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캄캄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갈바리아 위에 희망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 끝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p144)

☞ 찡하다.

 

“나는 처음에는 큰 의자에 앉아서 살았으나 지금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인간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랑이시고, 신실하시며, 기쁨이시오, 확실함이시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p144)

☞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과 베네데따. 누가 더 복된 사람인가?

 

"오래지 않아 나는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여기 내 가족들 가운데서,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즉 나는 헛되이 고통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p144)

☞ 고통은 사랑의 표징으로 남을 것이다.

 

"나의 나날은 쉽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삶은 감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고통 가운데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고독 가운데에서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p144-145)

☞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고통도 감미롭다.

 

“인생은 짧습니다. 일순간에 지나갑니다. 인생이란 아주 짧은 다리와 같아서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하지만 우리의 본향에 도달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협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전합니다."(p145)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기다리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분은 허공에 계시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 따뜻한 별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나의 손을 따뜻하게 할 때 느낄 수 있는 저 태양 안에도 계시며,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는 비 속에도 계십니다."(p147)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저는 이미 신랑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저는 지금 기도를 별로 잘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쳐드립니다. 저를 태어나게 하신 분이 끝까지 저를 인도해 주시기를, (p148)

☞ 참으로 복된 베네데따!

 

베로니까

 

베로니까 쥴리아니는 마르께스에 있는 메르까멜로에서 1660년에 태어났습니다. 열 일곱 살 때에 움브리아의 씨따 디 카스펠로에 있는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거기에서 그녀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녀는 1727년 7월 9일 금요일에 죽었습니다.(p154)

 

나는 가끔 베로니까 수녀의 일기를 펼칠 때에 이 세상의 피조물이 아닌 어떤 존재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도로 덮어 버리곤 한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154)

 

쾌락에 대한 댓가로는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굴러 떨어져 나둥그라질 것이니, 이는 도덕적 풍조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p156-157)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십자가를 껴안으십시오. 고통을 통하여 삶의 기쁨으로 돌아설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버리십시오. 세상의 헛된 기쁨을 버리고 나와 함께 갑시다. 당신은 자유와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p157)

☞ 고통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현세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혐오감을 가득 안겨줄 뿐이어서 나는 성 바오로와 함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필리 1,23)라고 자꾸자꾸 되뇌이곤 했습니다.“(p159)

 

예수님 자신이 최초로 지구상에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셨고, 이 최상의 광기는 아무리 쾌락에 갇혀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굳어진 마음에 대장간의 큰 망치처럼 떨어져 그것을 부숴 버릴 수 있음을 나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p159)

 

고통을 사랑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겪을 수 있는 결렬한 고통은 종종 악의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p160)

 

"나는 뛰었고, 노래했고, 충격을 받아 멍해졌습니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고통받도록 나를 초대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전부였습니다.“

쾌락에 대한 승리와,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 자유는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p161)

☞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또한 복된 일이다.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용서와 사랑을 배우기 위한 기회로 생각하기

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기

② 용서와 사랑을 하기위한 기회를 준 그 사람을 위하여 감사하고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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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마음지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1.29 하늘인연님도 기쁜 명절 되십시오..^^*
  • 작성자명금당 | 작성시간 14.01.29 이제 다 읽었네요. 신앙 생활을 돌아 보게 하는 좋은책 입니다. 욕심을 비우고 사는 삶을 묵상하고 갑니다. 긴 글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설 잘 지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주님의 평화가 가득한 가정 되십시요.
  • 답댓글 작성자마음지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1.30 언제나 정성스레 읽어 주시는 명금당님, 고맙습니다...저는 읽으면서 몇번이나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설 잘 지내시고 2월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작성자박선미 | 작성시간 14.01.30 마음지기님^^
    좋은책 또 권해 주시고 글귀 올려 주심 감사합니다.
    설 쉬고 단디 읽어 보겠습니다.
    새해 주님의 복 많이 받으시고 온가족 건강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마음지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1.31 선미님도 설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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