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음지기

42. 가르멜의 산길

작성자마음지기|작성시간15.09.29|조회수1,625 목록 댓글 2


 

십자가의 성 요한 지음 / 최민순 신부 옮김 / 바오로딸


1. 작가소개


- 지은이 : 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와 카탈리나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옮긴이 : 최민순 신부

전라북도 진안 출생. 1935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임실·남원 등지에서 본당신부로 근무하다가 1939년부터 전주해성학교 교장, 1944년부터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학장취임 2개월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 聖神大學의 전신.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전임되었다.


1951년 대구교구 출판부장 겸 천주교회보와 대구매일신문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한때 교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1952년 다시 성신대학의 교수로 복직하였다. 그 뒤 1960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신학과 고전문학을 연구한 뒤, 1963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65년부터 가톨릭공용어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부터 다시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 8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수필집 ≪생명의 곡≫, 시집 ≪님≫·≪밤≫ 등이 있으며, 유고집 ≪영원에의 길≫이 있다. 또한 다수의 번역서도 남겼다.

특히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등은 정확한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과 역서는 주로 영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와 관련된 번역서로는 ≪예수의 데레사, 완덕의 길≫(1967), 구약성서의 <시편>(1968), ≪영혼의 성≫(1970)·≪십자가의 요한≫(1971)·≪깔멜의 산길≫ (1971)·≪어둔 밤≫(1973) 등이 있다.

이 밖에 ≪대구매일신문≫에 호교론에 관한 소논문들을 게재하였고, 가톨릭공용어위원 시절에 <주의 기도>·<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작성하였으며 몇 편의 성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제2회 한국펜클럽번역상을 수상하였고, 1967년부터 지도신부로 재직하여 오던 성모영보 가르멜수녀회의 본원인 로마 가르멜회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을 받았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내가 붓을 들게 된 동기는, 이렇듯 어려운 문제를 다룰 만한 능력이 내게 있어서가 아니다. 워낙 이것이 많은 영혼들에게 필요한만큼, 적이나 서술해보겠다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반드시 도움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p28)

☞ 이 책의 서술 동기는 많은 영혼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처음부터 나의 뜻은 모든 사람을 하지 않고 가르멜 수도회의 초기 계율을 지키는 남녀 수도자들을 상대로 하였으니, 이들이 내게 이것을 청하였고, 이들이야말로 이 산의 오솔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요, 이미 이승의 덧없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이들이니. 영의 벗음의 묘리를 더 깊이 깨칠 것이다. (p32)

☞ 성인은 이 책을 가르멜 수도자의 청에 의해 서술했음을 밝힌다. 대상이 수도자인만큼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실천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제1권: 감각의 능동적 어둔 밤

제1장: 영성인(靈性人)이 지내는 두 가지의 밤을 들어 말함

제2장: 하느님과 합치기까지 거쳤다는 ‘어둔밤’이 무엇인가를 밝힘

제3장: 온갖 물욕을 끊음에 대하여 말함

 

온갖 물욕에 맛이 없음을 여기서 밤이라 부른다. 마치 빛없는 것이 밤, 따라서 빛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니 보이므로 시각이 어두워져 비어있는 것이 밤인 것처럼, 영혼에 있어 욕을 끊어버리는 것도 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일, 영혼이 온갖 물욕에서 맛을 끊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셈, 비어있는 거이다. (p53)

☞ 물욕(物慾): 물질에 대한 욕...그 욕을 끊어버리는 것.


마치 시력이 빛을 매개체로 해서 볼 수 있는 대상물을 미끼로 삼으나 빛이 꺼지면 보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도 그 능력으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욕구로 통하여 미끼로 삼는다. 따라서 이 욕구가 꺼지면, 아니 보다 적절하게 말해서 극복이 되면, 영혼은 그런 모든 것에서 미끼를 맛보지 못하니, 그러기에 영혼은 이 욕구에 대해서 어둡고 빈 것이 된다. (p41)

☞ 성인은 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영혼은 욕구가 극복되면 욕구에 대해서는 없는 것, 곧 어둡고 빈 것이 된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내를 맡고 느껴지는 것을 억지로 막지는 못하나, 영혼이 이를 부정하고 끊어버리면, 마치 안 보이고 안 들리고 … 하는 것처럼 영혼에게는 상관도 방해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눈을 딱 감고 있는 사람과 같이, 이 사람은 필경 시력을 잃은 소경처럼 어둠 속에 있다. (p42-43)


제4장: 영혼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욕 끊기를 정말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 끊기와 맛 없애기의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집이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어둠을 둘러쓴 영혼이 먼저 어둠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티없이 맑으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빛날 수도 없다. 성 요한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고 말한 대로 빛과 어둠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p44)

☞ 욕(慾): 즉 욕. 세상 것에 대한 욕과 하느님은 특히 수도자에게 함께 있을 수가 없다.


마음이 피조물에 애념과 애집을 가질 때, 마음은 그 피조물과 같아지고, 애집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혼이 피조물과 같거나 비슷해지는 법이니.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서로 닮게 하는 것이다. (p45)

☞ 나는 진정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피조물인가, 하느님인가? 피조물을 사랑하면 그 피조물을 닮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닮는다.


피조물을 좋아하는 자는 그 좋아하는 피조물처럼 낮고 낮은 존재가 되고,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 수도 있으니,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대상과 비등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상대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p45)


영혼이 다른 무엇을 사랑할 때 하느님과의 순수한 합일과 결합이 불가능하게 되니, 피조물의 낮음과 창조주의 높으심 사이는 빛과 어둠의 거리만큼이나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p45)


피조물이 도시 무(無)요, 그에 대한 집착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헤살놓거나 앗아가므로, 무보다 더 못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 다만 무에 그치지 않고, 빛을 앗는 것이기에 무보다 더 못한 것과 같다. (p45)

☞ 하느님과의 합일을 방해하는 피조물은 아니 있는 것만 못하다


어둠을 지니는 자가 빛을 파악하지 못하듯이, 피조물에 집착하는 영혼도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 (p45)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느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기면, 무(無)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무에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 앞에 무요, 오히려 무보다 더 못하다. (p46)

☞ 이 지상의 수십억의 돈이 있다한들 하느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일뿐이다.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유와 절대로 결합하지 못하니, 없는 것이 있는 것과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p46)


피조물의 우아함과 수려함에 집착한 영혼은 하느님 눈앞에 더없이 볼품없고 볼썽사나운 것이니, 이러한 영혼이 하느님의 그 무한하신 매력과 절대미에 용납될 수 없기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과 미운 것이 너무 거리가 먼 까닭이다. (p46)

☞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작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예지와 합하려면, 앎보다 차라리 알지 못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p47)


이 세상의 모든 주권과 자유를 하느님 영의 주권과 자유에 비기면, 그것은 가장 심한 종살이, 고생살이, 볼모살이이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 높은 소임, 욕구의 해방에 연연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아들이 아닌 가장 천한 종이나 포로와 같이 간주되고 또 그런 대접만을 받는다. 스스로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신 거룩한 진리를 아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p47)


자유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 있지 않으니 이런 마음은 노예의 마음인 까닭이요, 오직 자유로운 마음에 있으니 이 마음이 바로 아들의 마음인 까닭이다. (p48)


5장: 욕 끊기의 어둔 밤을 거쳐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영혼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영혼에게 방해가 되는 자연, 초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욕을 먼저 비우지 않고, 하느님과 합일되는 높은 단계에 오르려는 생각은 무지의 절정이다. (p50)

☞ 자신을 욕으로부터 비워야 하느님으로 채울 수가 있다


다른 무엇을 하느님과 한껍에 사랑하고 싶어하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을 가벼이 보는 자다. 하느님에게서 지극히 먼 것을 하느님과 함께 한 저울에 달기 때문이다. (p52)


하느님과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당신과 함께 사랑하거나 그에 집착하는 사랑은, 하느님을 여간 욕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 이상으로 사랑한대서야 어찌 될 것인가? (p52)

☞ 신앙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제아무리 덕을 많이 닦는다 할지라도, 욕이 살아있는 한 도달이란 있을 수 없다. 완덕을 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니, 완덕이란 영혼이 모든 욕을 끊고 벗고 비우는 데 있는 것이다. (p53)

☞ 욕이 있는 한 완덕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6장: 욕망으로 영혼에 미치는 두 가지 주된 해를 말함

 

연애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바랐던 날에 모처럼의 기회가 수포로 돌아갈 때 허탈증에 빠지는 것처럼, 마음은 욕을 가지면 가질수록, 채우면 채울수록 허탈증에 걸린다. 흔히들 말하듯이 욕정은 불과 같은 것, 섶을 지피면 활활 타다가도 나무가 다하면 안 꺼지려야 안 꺼질 수 없다. (p60)


제7장: 욕이 어떠한 고통을 영혼에게 주는가를 다룸

제8장: 제욕이 어떻게 영혼을 어둡게 하고 눈멀게 하는 가를 다룸

 

마치 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하여서 밝은 태양이 비치지 못하듯, 흐린 거울에 얼굴이 맑게 비칠 수 없듯, 흙탕물에 비치는 사람의 모습이 똑똑치 않듯이, 제욕에 사로잡힌 영혼은 이성이 어두워져서, 인간 이성의 태양도 하느님의 초자연적 지혜의 태양도 밝게 비출 자리가 없는 것이다. (p64)

☞ 욕을 버리지 못한 영혼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마음이 욕에 이끌리면 장님이 되는 것이니, 보는 자가 못 보는 자에게 이끌리면 두 사람이 다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성마태오를 통하여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하고 말씀하셨다. (p65)

☞ 욕에 빠지면 하느님을 볼 수 없으니 어이 장님이 아닌가!


아름다운 빛에 대한 욕이 부나비를 홀려서 화롯불로 인도한다면 그 부나비의 눈은 고마운 것이 못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욕으로 기르는 자도 홀린 물고기와 같으니, 고기잡이가 쳐놓은 함정을 못 볼 바에야, 햇불의 빛은 고기에게 차라리 어둔 구실을 하는 것이다. (p65)

☞ 세상에 대한 욕이 영원한 생명에 방해가 된다면 고마운 것이 아니라, 적인 것이다


열매를 얻기 위하여 땅을 가꾸는 수고가 필요하고, 이 수고가 없이는 다만 잡초가 남는 것처럼, 영혼의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제욕을 끊음이 필요한 것이다. (p66)


솔로몬같이 지혜와 하느님의 은혜를 갖춘 사람이 늘그막에 이르러, 그렇듯 많은 우상과 제단을 모으고 제 자신이 예배를 드리도록 그토록 눈이 멀고 의지가 무디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렇게 되기에는 여성에 대한 애착, 그리고 마음의 욕과 낙을 끊기에 힘쓰지 않은 그것만으로 넉넉하였다. (p67)

☞ 솔로몬같은 지혜로운 인간의 타락이 궁금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욕을 끊지 못했기 때문


스스로의 욕정에 맡기어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그 영혼은 얼마나 추할 것인가?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동떨어져 있으며, 얼마나 당신의 깨끗하심에서 멀 것인가? (p71)


제10장: 제욕이 영혼을 얼마나 미지근하게 그리고 약하게 만드는가

 

자잘한 것들에 마음을 쓰는 영혼은 마치 밑으로 새는 물의 부피가 불어날 수 없는 것처럼 덕에 나아갈 수 없게 된다. (p74)


욕은 영혼에게 어느 선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지고 있는 것마저 앗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끊어 없애지 않는 한, 독사 새끼가 제 어미에게 한다는 짓을 끝까지 하고야 말 것이다. 독사 새끼는 어미의 뱃속에서 자라면서 제 어미를 죽이고는 어미를 희생시키는 대신 저만 산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끊어지지 않은 욕도 하느님 안에 있는 영혼을 죽이기에 이르는 것이니, 영혼이 먼저 그 욕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p75)

☞ 욕을 끊는 수련을 끊임없이 해야한다


병자의 불쾌로운 기분은 걸음 걷는 데에 불편과 어려움을 느끼게 하고, 먹는 데에 염증을 느끼게 하지만, 세상 것에 대한 욕만큼 영혼이 덕에 나아가는 데에 굼뜨고 슬프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덕을 얻으려는 마음과 힘을 쓰지 않는 까닭은,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욕과 정을 가지지 않는 데에 있다. (p76)

☞ 하느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11장: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아무리 작은 욕이라도 모두 다 없애야 함

 

영혼이 만약에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어느 불완전을 원한다면 벌써 하느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니, 하느님의 뜻에 없는 것을 영혼이 지닌 탓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사랑과 의지로써 완전히 하느님과 합일하려면, 우선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의지욕을 모두 버려야 함은 분명한 일이다. (p78)

☞ 나의 의지를 하느님께 맡길 것.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알고 짓는 소죄의 경우, 아무리 작은 죄라도 이를 끊지 않으면, 단 하나라도 합일에 지장이 된다. (p79)

☞ 아무리 작은 죄라도 알고 짓는 죄는 하느님께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의지적인 불완전에 기인하는 어떤 습성이 극복되지 않는 한, 이것은 하느님과의 합일은 고사하고 완덕에 나아가는 것마저 막는 것이다. (p79)

☞ 나쁜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어느 것에 집착을 끊지 않는 영혼은, 비록 덕이 많다 할지라도 하느님과의 합일의 자유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p80)


어떤 사람들은 숱한 선행과 영적 수련과 덕,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은혜의 보물선처럼 가멸지면서도, 그 어느 애념이나 애집이나 시덥지 않은 애호를―이것들은 결국 같은 것들―끊어버릴 용기가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완덕의 포구에 닿지를 못하니,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일이다. (p80)

☞ 신앙인으로서 지나친 취미도 생각해볼 문제다. 하느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한다면.


이 길은 항상 욕을 버리면서 가는 길이지, 욕을 기르면서 가는 길이 아니다. 일체를 버리지 아니하면 다다르지 못하는 길이다. (p81)

☞ 완덕의 길, 버리는 길.


불의 도수가 한 치만 모자라도 나무 한 조각을 불덩어리로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도 단 하나의 결점 때문에 하느님 안으로 변성되지는 못할 것이다. (p81)


제12장: 해를 영혼에 끼칠 만한 욕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힘

제13장: 감성의 밤에 들기 위하여 마땅히 써야 할 방법

 

매사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당신의 생활에 맞추어나가려는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한다. 본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생활을 깊이 관찰하고, 모든 일에 임하시던 당신의 태도를 거울삼아 사는 것이다. (p89)

☞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


이 일이 잘 되기 위해서는 감성에 오는 어떠한 맛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를 끊고 빈 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 아버지의 뜻을 좇는 일 외에는 어느 낙도 아니 가지셨고 가지실 마음도 없으셨으니, 성부의 뜻에 따르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요 양식이라 하셨다. (p89)

☞ 우리도 성부의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들을 맛이 있음직한 것이 있다 하자, 하나 하느님의 영광이나 당신을 섬기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보아서 즐거울 무엇이 있다 하자,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면 그런 것을 좋아하지도 보지도 말아야 한다.(p89)

☞ 음악이나 영화를 즐김에 있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지않는다면 버려야 한다


영성적인 사람은 이 벗음 속에서 고요와 쉼을 얻나니 어느 것에도 욕이 없고, 겸손의 중심에 있으므로 위로 괴롭힐 아무 것도 없고 아래로 누를 아무것도 없다. 무엇에 욕을 부리는 그 자체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92)


제2권: 영성의 능동적 밤

제1장

제2장

제3장: 믿음이 어찌하여 영혼에 있어 밤인가?

 

믿음의 절대적 빛이 영혼에게 내릴 때 영혼에겐 도리어 캄캄한 어둠이 되는 것이니,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기고 없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빛이 다른 빛들을 없애버림과 같으니, 태양이 한번 비치고 우리의 시력을 부시게 하면 다른 빛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태양 광선이 너무 세어서 우리 시력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는 것처럼 믿음의 빛도 너무나 세기 때문에 이성의 빛을 눌러서 이기는 것이다. (p104)

☞ 영혼이 작아지고 어둠이 될 때 믿음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것.


믿음은 그 자체는 물론 그와 비슷한 것도 우리가 보거나 알거나 하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어느 감각에도 비례하지 않으므로, 자연적 지식의 빛으로는 믿음에 대한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들음으로써 그것을 알고, 그 가르침을 믿으며, 자연적 인식의 빛을 없애고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p105)


다른 지식은 모두 이성의 빛으로 얻어지지만 믿음의 지식은 이성의 빛을 부정하면서 얻어지므로, 자기 자신의 빛이 어두워지지 않으면 믿음의 지식은 쓰러지고 만다. (p106)

☞ 현대인들은 믿음도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성으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미신으로 몰아 세운다.


제4장: 믿음으로 최고의 관상까지 잘 인도되려면 영혼도 스스로 어둠 속에 있어야 함

 

자기를 버리고 없애고 벗어버린 영혼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못하도록,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p109)


다만 의지할 곳은 어두운 믿음뿐, 이를 빛으로 길잡이로 삼으면서 자기 자신이 알고 맛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그런 것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영혼을 그르치는 암흑인 까닭이니, 믿음은 알고 맛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다. (p109)

 

하느님과 결합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는, 영혼이 어느 지식, 감정, 상상, 의견, 의사, 제 버릇, 제 것, 남의 것에 얽매여 그 일체를 떨치고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있다. (p111)


이 길에 있어서는 길을 버림이 곧 길로 듦이다. 다시 말해서 목적에 도달함이다. 제 격식을 떠남이 곧 격식이 없으신 하느님께 들어감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영혼은 이미 격식이나 방식이 없고, 그런 것에 매이지 않으며, 매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p111)

☞ 나를 버림이 하느님께 도달함이다. 즉 죽어야 삶인 것이다.


영혼은 자연적 또는 영적으로 알거나 깨달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밀쳐두고, 이승에서는 알 수도 없고 생심도 할 수 없는 것에로 가기를 열렬하게 바라야 한다. (p111)

☞ 결국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함이다


영혼은 캄캄한 속에서 믿음을 힘입어 하느님과의 합일에 더욱 가까워지는데, 믿음은 어두우면서도 영혼에게 묘한 빛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영혼이 하느님을 보려 한다면, 눈부신 해를 보려고 눈을 치뜨는 사람과 같이, 당장에 캄캄해지고 말 것은 확실하다. (p112)


제5장: 영혼의 하느님과의 합일이란 무엇인가를 밝힘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영혼 안에든, 세상에서 제일 나쁜 대죄인의 영혼 안에라도 실체적으로 계시고, 그 힘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p115)

☞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내 안에 계신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의 하느님과의 합일이란 … 영혼이 하느님과 합쳐져서 하느님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항상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비슷(相似)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상사의 합일이라 한다. (p115)


이 초자연적 합일은 두 의지, 말하자면 인간과 하느님의 의지가 하나로 합쳐 상반됨이 없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하느님 의지와 상반되고 맞지 않는 것을 온전히 끊어버리면,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 (p115)

☞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느님과 합일이 된다. 합일은 내가 하느님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지 않고 당신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내던진 다음에야, 하느님의 뜻 아닌 것이 그 안에 있지 않아서 비로소 하느님을 닮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p116)


영혼이 피조물과 그 기량의 입성을 많이 걸치면 걸칠수록 그 정붙임과 버릇 때문에 그만치 합입에 도달하기가 어려우니, 하느님께 자리를 있는 대로 드리지 않아서 초자연으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16)


우리 영혼도 유리와 같아서 하느님 본성의 빛이 항상 그 안에 퍼부어지고 있다. (p118)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말끔히 벗어버리는 일이므로, 피조물의 가리개와 때를 떨어버려 하느님과 온전히 뜻을 같이 하면, 그 순간 영혼이 밝아지고 하느님 안에서 변화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초자연적 존재를 주시므로, 영혼이 바로 하느님인 듯, 하느님께 있는 것이 제게도 있는 듯이 보여지는 것이다. (p118)


이 합일의 준비는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인식, 맛, 감정, 상상, 그 밖의 어느 것을 가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결과 사랑뿐, 즉 주님 하나를 위하여 일체를 온전히 버리고 벗는 데에 있는 것이다. (p118-119)

☞ 버림이 얻는 것이 이 아이러니.


완전한 맑음 없이는 완전한 변화가 없고, 맑음의 비율대로 영혼의 깸과 빛남 및 하느님과의 합일이 더하고 덜하게 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일체를 오롯이 떠나 티없이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영혼은 하느님과 오롯이 결합하지 못한다. (p119)


제6장: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을 완성하는 것이 어찌하여 향주덕 세 가지인가?

 

신덕은 이성에 있어 아는 것을 비우고 어둡게 하고, 망덕은 기억에 있어 그 가진 모든 것을 비우게 하고, 애덕은 의지에 있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정과 낙을 비우고 벗어던지게 한다. (p124)

☞ 비우고, 비우고, 비우는 것


신덕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비록 확고부동하게 그런 것들을 믿는다 해도 그것은 이성이 발견한 것이 아니니, 이성으로 발견한다면 벌써 신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p122)


애덕 역시 의지에 있어 모든 것을 비우게 한다. 애덕은 우리에게 일체를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는데, 하느님께 우리의 정을 고스란히 쏟으려면 모든 것에서 정을 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루카를 통하여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라고 말씀하셨다. 그 뜻인즉 의지로써 가지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p123)

☞ 순교자들은 자기의 목숨마저 비웠다.


제7장: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얼마나 좁은가

 

자기 부정이야말로 정녕 하나의 죽음, 만사에 있어 현세적, 자연적 및 영적인 하나의 멸각(滅却)! 마음으로 일체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p128)


완덕의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알기와 즐기기와 느끼기의 일체를 벗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그 죽음이다. (p129)

☞ 완덕의 길은 자기를 죽이고 죽이는 과정이며 길.


하느님의 길은 곁으로나 속으로나 정말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것, 그리스도를 위하여 괴로움을 떠안고 무엇에나 자기를 없앰에 있는 것이다. (p129-130)


사람들이 당신의 죽어 가심을 보고 존경하기보다 조롱을 했으니 영예를 멸각하셨고, 자연성으로 볼 때 죽음으로 그 자연성은 없어진 것이요, 아버지의 도우심이나 영적 위로 역시 멸각되었으니,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드님이 빚을 다 갚아드리고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도록,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없애시고 무로 돌아가게 하셨다. (p131)

☞ 주님은 죽음의 비우심으로 우리에게 비움을 보여주셨다


영적 합일은 휴식이나 맛이나 영성적 감동에 있지 아니하고, 감성과 영성 즉 안팎으로 당하는 십자가의 뛰어난 죽음에 있는 것이다. (p131)

☞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제8장: 어떠한 피조물이든,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지식이든,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직접 수단일 수 없음

 

하느님께 닿으려면 알고 싶어 하기보다 차라리 알지 못하면서 가야하고, 하느님의 빛에 바싹 다가서려면 눈을 뜨기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p137)

☞ 이성의 어둔밤, 이성의 죽음으로 가야 한다


제9장: 영혼이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을 하는 데 있어, 믿음이 이성에게 적절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의 구실을 어떻게 하는가?

 

이성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알맞게 되려면 감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워야 하고, 고요 잔잔한 이성 안에 또렷이 비치는 것까지를 모두 벗어던져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적절하고도 직접적인 오직 하나의 방법, 즉 믿음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139)


영혼이 믿음을 많이 가질수록 더욱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39)

☞ 믿음이란 말 자체가 이성의 죽음인 것이다


영혼이 이승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당신과 직접 통교를 가지려면, 솔로몬의 말대로 어둠 속에 계시리라 하신 하느님과 어둠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141)


제10장: 이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지각을 구별함

제11장: 육체의 외관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성이 자각할 때

 

이런 따위는 영혼 안에서 오류와 교만과 허영이 잘 자라는 바탕을 마련해준다. 만지면 잡힐 듯이 형체적인 것인 만큼 감각을 움직이는 품이 센 까닭인데, 이 경우 영혼의 판단으로는 감각적인 것일수록 대단한 줄로 여겨져서, 저 빛이야말로 내가 뜻하는 하느님과의 결합을 위한 길잡이다, 방법이다 하고는 믿음은 아랑곳없이 그것을 따른다. 그리하여 이런 따위를 대단하게 알수록 길이며 방법인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다. (p146)

☞ 초자연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에 대한 성인의 경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제게 일어나는 것을 보는 영혼은, 하느님 앞에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듯한 생각이 곧잘 드는데 이는 겸손과 반대되는 것이다. 악마 역시 그 영혼에게 자기 만족을 은근히 불어넣어 주고 때로는 아주 드러나게 그러하기도 한다. (p146)


어떤 현상이 누구한테서 오든 그저 눈을 딱 감은 채 언제나 지워 없애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악마의 짓거리에 자리를 펴주고 저 악마를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어서, 악을 선으로 둔갑시킬 뿐 아니라 악마의 짓거리는 마냥 심해지고 그 대신 하느님의 일은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악마의 것만 남고 하느님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p149)


악마는 어느 영혼이 시현을 받고 싶어 한다든지 그에 솔깃해 하는 꼴을 보면, 그때야말로 오류를 틀어넣고 믿음을 해칠 수 있는 썩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p152)


제12장: 상상의 자연적 지각을 들어서 말함

 

하느님에 관한 것이거나 인간에 관한 것이거나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상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려면 영혼은 이런 감각에 깜깜한 채 일체의 영상을 비워야 한다. 이 따위 영상들은 오관의 대상인 형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는 얼토당토않은 것들이다. (p155)


제13장: 어느 때가 묵상과 추리를 버리고 관상의 상태로 옮아가기에 적당한가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우러러보면서 혼자 있기가 좋아진다.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윽한 평화와 고요와 안식 속에서, 기억 이성 의지의 작용이나 이리저리 오가는 추리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하나 우리가 사랑겹다 일컫는 공번된 지견이 있을 따름, 그 밖의 여남은 것들이야 무엇이건 알려 하지 않는 법이다. (p160)


제14장: 영성에 나아가는 데에 필요하다고 말한 그 이유

제15장: 자연적 추리와 자연 기능을 작용시킴이 얼마나 중요한가

 

묵상을 할 수 없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로 보일지라도 영성인은 고요 잔잔한 이성을 가지고 하느님께 향한 마음 가지기를 마땅히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휩싸인 하느님의 고요와 평화가 하느님의 오묘하고 숭고한 지견과 함께 차츰차츰 그러나 신속하게 영혼 안에 내려질 것이다. (p175)

☞ 우리는 얼마나 침묵을 힘들어 하는가? 하느님의 고요 속에 머물 줄 알아야 한다


제16장: 상상력 안에 초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영상을 들어 말함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 본질적인 합일에 이르려면 영혼은 조심하여 상상의 시현이나 형과 상 그리고 부분지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합일을 위한 지근 적절한 방법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헤살을 놓을 따름이므로 마땅히 물리쳐야 하고 갖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p181)


햇살이 유리창에 내리쬘 때 창은 맑게 닦여진 채 그 빛살을 막기는커녕 수동으로 받을 뿐 애써 하는 일 없이 환하기만 하듯이, 영혼도 비록 마음은 없고 아무리 물리치려 하더라도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저 형상의 영향과 전달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겸손과 사랑으로 일체를 끊어버린 의지라면 초자연의 빛살을 거스르지 못하고 마음의 더러움과 이그러짐만이 마치 유리의 때꼽이 빛을 막음과 같이 거스르는 것이다. (p182)

☞ 하느님의 은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감각에만 메아리치는 것과 믿음에 굳혀져 바탕을 이루지 않는 일체에서 영혼의 눈을 항상 떼어서 안 보이고 감각에 딸리지 않은 영에다만 눈길을 모아야 한다. 감각의 형상 안에 들지 않은 이 영이야말로 믿음 안에서 합일로 이끌어주는 것, 믿음은 합일의 고유한 방법이다. (p183)

☞ 감각을 추구할 때 위험에 빠지기 쉽다.


제17장: 하느님께서 감각을 통하여 영의 은혜를 내리실 제 가지시는 목적과 법식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됨됨이를 따라서, 가장 낮고 겉에 있는 것을 통하여 가장 높고 속에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완성시키신다. 그 때문에 우선 좋고 오롯하고 겉에 드러나는 자연의 대상을 잘 쓰도록 인간을 움직이시면서 그의 육체 감각부터 바로 잡아주시는 것이니, 이를테면 설교를 듣는다., 미사를 드린다, 성물(聖物)을 본다, 음식의 맛을 줄인다, 촉감을 보속과 극기로 다스린다는 것 등이다. (p188)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어림과 모자라는 힘을 살피시어 우선 겉에 드러나고 만질 수 있고 감각에 적응한 사물들을 발단으로 삼아 드디어 영스러운 것을 내리시는 것이다. (p189)


하느님과의 사귐에 있어 영에 더욱 가까울수록 상상에 의한 추리와 묵상 같은 감각의 길을 그만치 벗고 비우는 것이니, 하느님과의 사귐을 영으로 완전히 하려면 하느님께 대한 감각적인 일체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한 끝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다른 끝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동떨어지듯이 한 끝에 완전히 도달한다 함은 다른 끝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을 말한다. (p189)


제18장: 시현이 하느님께로부터 올지라도 이에 속을 수 있음을 말함

 

환(幻)이란 감각에 딸린 것이요 감각이란 절로 이에 기울어지는 것, 더구나 똑똑하고 느낌직한 환이 차려져 입맛을 당기게 하고보면, 고해 신부나 다른 사람이 그런 꼭두를 높이 알아줄 때 이 사실만으로도 제자는 안심코 그들처럼 할 쁜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빠져들어서 환에 맛을 들이고 기울어지고 사로잡히고 만다. (p195)


허다한 결점이 적어도 여기서 생기는 것이니, 영혼은 이미 겸손을 잃은 뒤라 환이 제법 무엇이나 되듯 자기는 무슨 좋은 것을 지닌 듯 그리고 하느님도 자기를 알아주시거니 생각해서 스스로 자만자족하느라 겸손에 역행하는 것이다. (p195)


하느님의 계시요 응답이요 말씀임을 안다 해서 덮어넣고 믿거나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보아 확실하고 진정한 것이라도 그 원인과 우리의 해석에 따라서는 반드시 그렇다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p198)


제19장: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시현과 말씀이 참될지라도, 우리가 그릇 알 수 있음을 밝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말씀과 계시를 두고 속는 수가 있음은 문자 그대로 또 거죽만 알아듣는 까닭이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주로 거기에 담겨진 영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나 실상 이것은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니, 그러기에 문자보다 훨씬 더 깊고 너무나 이상하고 문자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문자와 말씀및 시현으로써 볼 수 있는 형과 상에 얽매인 사람은 대단한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고, 비워진 감각에다 영의 자리를 마련함이 없이 다만 감각에 끌리는 탓으로 나중에는 어리석고 흐리멍덩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3,6)고 말했듯이, 이런 경우 감각으로 보는 문자를 떠나서 믿음의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하니 이것이 바로 영이요, 감각은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p202)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및 그를 좇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중점이 무궁한 왕국과 영원한 자유였는데도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하느님께서 아랑곳하시지 않는 긴치 아니한 것, 즉 찰나의 왕권과 덧없는 자유로 알아들었으니, 이런 따위는 하느님 앞에 왕국도 자유도 아닌 것이다. (p205)

☞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영원한 왕국인데도 사람들은 지상의 왕국을 목표로 쫓고 있다


비록 하느님의 말씀이요 계시라 할지라도 안심할 수 없다 함이니, 자칫하다가는 우리의 사유가 크게 그르칠 수 있고, 게다가 이 모든 현상은 영의 현묘한 심연인데, 이를 우리의 사유나 감각 범위에 국한시키려 함은 공기를 만지기, 혹은 공기 안의 티를 움키려 하기와 같은 일이나, 공기는 빠져나가고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p206)


결국 정확하고 가장 안전한 길은, 영혼들로 하여금 이런 초자연적인 일들을 슬기롭게 피해서 합일의 방법인 어두운 믿음 속에서 영의 순수함에 길이 들도록 함이다. (p209)

☞ 초자연인 것에 마음을 두기 보다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제20장: 하느님의 말씀과 말씀하시는 일들이 항상 진실되면서도 그 원인에 있어서는 확실성이 항상 있지는 않음을, 성경의 권위로 증명함

 

하느님께서 어느 누구에게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그 영혼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관한 무엇을 분명히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보여주셨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그 ‘무엇’의 꼬투리가 달라짐에 따라서, 혹은 더 혹은 덜 변할 수가 있고 심하면 아주 싹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p211)

☞ 그 점을 생각하며 성경을 읽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나 시현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덧없고 변하기 쉬운 인간사에 바탕을 두었으면 더욱 그러하다. (p213)


제21장: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원하는 바를 더러 들어 주시어도 그런 일을 즐기시지 않음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연의 한계를 넘어섬이 옳지 않다. 인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합리적인 자연의 한계를 정해 놓으신 만큼 이를 벗어나려 함은 곧 옳지 못함이요 무엇을 초자연의 길로 살펴보고 얻으려 함은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려 함이다. 이것이 곧 옳지 못함이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기꺼하시지 않는 바이니 무엇이든 옳지 못한 것이면 당신께 욕이 되는 까닭이다. (p216)

☞ 자연 자체도 하느님의 섭리인 것, 하느님은 자연 안에서 다가 오신다.


영스러운 맛을 감각으로 누리려 하기보다 초자연스런 길로 무엇을 알고 싶어하기가 훨씬 더 나쁘다고 나는 생각한다. (p218)

우리에게는 스스로 다스리기에 충분한 자연 이성과 복음의 법칙 및 진리가 있으므로 그런 따위가 필요치 않고, 한편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이롭게 하는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고 구제하지 못할 만큼 그러한 아쉬움과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p219)

☞ 이미 우리에게는 구원을 위한 이성과 복음이 주어졌다. 구태여 초자연적인 것을 쫓음은 이익보다 잃음이 더 많은 것이다. 그것은 쫓지 않더라도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과 복음의 진리를 잘 이용해야 되니 우리가 바라든 안 바라든 어떤 일이 초자연스럽게 알려질 때 그것이 자연 이성과 복음의 진리에 들어맞는지를 보아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일 그때에도 그것이 계시인 까닭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까닭에 받아들일 것이요, 계시로서의 의의는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p219)

☞ 계시는 이미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이 되었다


우리의 아쉬움, 고생, 어려움에 있어 으뜸가고 가장 안전한 방법은 기도와 바람뿐이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보살펴주시리라. (p219)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나 시현에 있어 그르치지 않기가 썩 어렵기도 하려니와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악마의 짓거리다. 악마는 하느님께서 영혼과 함께 가시는 그런 행색으로 영혼에 붙어 다니고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일러주시는 사정을 그대로 흉내내어 마치 양의 가죽을 쓰고 양떼 속으로 끼어드는 늑대처럼 영혼 안으로 감쪽같이 스며든다. 그리하여 이치에 맞는 그럴듯한 말을 하고 또 그 말대로 되는 것을 보고 영혼은 쉽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니, 미래의 일이 영락없이 들어맞는 것을 보고는 이야말로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로 믿기 때문이다. 자연의 밝은 빛을 가지는 악마에게는 과거와 미래의 여러 가지 일들을 그 원인부터 잘 알기가 쉽다는 것을 사람들이 미처 모르고 있으니, 악마는 그 이지가 총명하므로 원인에서 결과를 아주 쉽게 추리해 낸다. (p221)

☞ 초자연스러운 것은 언제나 악마의 위험이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22장: 초자연의 길로 하느님께 문의함이 왜 옳지 않은가

 

네가 만일 하느님 아니면 형체의 시현이나 계시를 바라거든 역시 인간이 되신 내 아드님을 익히 보아라. 이로써 너는 생각보다 더한 것을 바야흐로 얻으리니 사도는 또 말하였느니라.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 (P230)

☞ 우리에게는 계시의 완성인 예수님이 이미 주어졌다. 복음서에 있지 않은가!


초자연의 길로 무엇을 믿으려 하지 말고 오직 인간 그리스도와 당신의 성직자들인 인간들의 가르침을 믿으야 한다. 성바오로는 이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8) (P231)


제23장

제24장: 초자연의 길로 말미암은 영적 시현

 

비움과 어둠과 이 모든 것을 벗음 또는 마음의 가난을(이것들은 통틀어 하나임) 매개로 하여 믿음이 영혼 안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퍼져가면 갈수록 하느님 사랑도 영혼 안에다 뿌리를 내리고 깊숙이 퍼지기 마련이다. (p248)


영혼이 그 받을 수 있는 안과 밖의 모든 것 앞에서 스스로를 캄캄 어둡게 하고 없애려 들면 들수록 믿음이 또한 이에 따라 바람과 사랑이 영혼 안에 퍼지게 되는 것이니, 결국 이 향주삼덕(向主三德)은 하나로 같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p248)


제25장

제26장: 이성이 실상을 깨치는 지견을 다룸

 

하느님께 대한 지견이 일으키는 그 즐거움은 어디다 비길려야 비길 수 없고 어떻다고 말하고 시늉할 표현이 없다. 하느님 당신께 대한 지견이요 바로 당신께 대한 즐거움이기에 다윗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당신께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p253)

☞ 지견, 깨우침 곧 관상을 말한다


지견이란 곧, 영혼과 하느님과의 어떤 맞댐이므로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느껴지고 맛보아진 하느님 당신이신 것이다. (p254)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이루시는 지견(깨침)과 접촉(맞댐)은 어찌나 영혼을 가멸지게 하던지, 그 하나만으로도 영혼이 평생 떼치지 못하던 모든 결점을 단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복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p255)


이 지견은 갑자기 또 인간의 자유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고 싶으신 때에 하고 싶으신 대로 내맡겨 오직 겸손되이 있을 뿐, 싫다 좋다가 있을 까닭이 없다. (p256)

☞ 지견은 하느님의 마음대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은혜를 하느님께 받도록 하는 길은 겸손, 그리고 일체 갚음을 바람이 없이 하느님 사랑을 참는 그것이다. (p256)


제27장: 숨은 비밀의 밝힘

 

계시가 신앙에 관할 것일 때, 만일 색다르고 엉뚱한 무엇이 계시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의 천사가 말했다는 보장이 있다 해도 그러하니, 이 때문에 성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8) (p264-265)

☞ 성인은 되풀이하여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위험을 강조한다.


우리 신앙의 근본 바탕에 관한 것은 이미 교회에 계시되어서 그 이상 더 계시될 것이 없는만큼 새삼스러운 계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 포함된 잡동사니도 받아들이지 않을 각오가 필요하다. (p265)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럴싸하고 참되게 보이더러도 새로 계시되었다는 그 신앙진리를 믿거나 궁리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악마가 사람을 속이고 거짓을 꾸며내려 할 때면 진리와 그럴듯한 것을 미끼로 삼아서 우선 영혼을 잡아놓고 그 다음에 속여 넘기기 때문이다. (p265)


설령 그것이 진리이고 방금 말한 속임수의 위험이 없다 할지라도 신앙에 있어서는 무엇을 똑똑히 알고 싶어하지 않음이 영혼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믿음의 가치가 순전(純全)하고 이성의 밤길을 걸어 하느님과의 합일의 신묘한 빛에 도달하게 된다. 새롭다 싶은 어떠한 계시에 있어서 눈을 감고 과거의 예언을 살핌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p265)

☞ 믿음의 길은 교만한 앎보다 순명하는 모름이 더 소중하다.


악마가 손을 쓰는 계시는 어찌나 그럴듯하고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지 애써 이를 물리치지 않으면 반드시 속아넘어간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를 믿게 하려고 참스런 모양을 그럴싸하게 꾸며내고 다시 이것을 사람의 감각과 상상에 깊이 심어놓으면 그 당자는 틀림없이 이것이다 하고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p266)


완전한 인간이 되기에는 초자연의 길로 초자연스런 일을 원하는 것이 절대 필요치 않으니 이는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67)


제28장

제29장: 찹찹한 영혼이 때로 제 안에서 지어내는 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둥 예삿일이 아니었다는 둥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 겸손과 극기가 아닌 허튼소리와 영의 불순(不純)만이 나온다. 겸손과 사랑, 극기와 침묵과 거룩한 단순함이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한 것이 아닌가? (p272)

☞ 순종하지 않는 기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믿음 안에서 어두워야 하지 않은가? 어두운 채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가야 하는 것, 많은 추리로 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p272)


겸손한 사랑으로 마음의 터를 닦고 진실을 일삼으며 그 생애와 고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따서 참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혼의 모든 본으로 가는 길일 따름, 정신으로 숱한 추리를 해야 소용없는 것이다. (p275)

☞ 하느님 앞에서는 똑똑하다는 자의 불신보다는 배우지 못한 자의 믿음이 더 가치로운 것이다.


마음을 굳세게 하느님께 향하면서 성인들의 예지인 당신의 법과 그 거룩한 권유를 완전히 지키는 한편, 성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현의와 진리를 단순 솔직하게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마음의 불꽃이 성하게 타오르게 함에는 이것이면 족하므로, 다른 심오하고 기이한 것에 몸을 적셨다가는 위험하지 않음이 되려 이상할 것이다. (p277)


제30장: 초자연스런 길을 통하여 영혼에게 형상적으로 전달되는 영어(靈語)를 들어 말함

 

하느님께서는 큰 것에 마음이 끌리는 영혼들을 몹시 싫어하시는 것이 확실하니, 혹시 당신이 이를 명하시거나 누구를 큰 자리에 두신다 하더라도, 그 당자가 그런 명령을 좋아해서 재빠르게 덤비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p280)

☞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제31장

제32장: 하느님과의 합일의 길에 장애가 없도록 하는 마음가짐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대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많이 힘쓴 사람에게 이런 ‘맞댐’을 안 주시는가 하면 그다지 힘쓰지 않은 사람에게도 유현(幽玄)한 맞댐을 넘치도록 주신다. (p285-286)

☞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인 것을.


지견이란 유현한 맛이 깃든 초자연의 깨달음이니 자연 본성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하기보다 아니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p287)

☞ 수동의 영성인 것이다


애써 지견을 얻고자 하는 욕을 끊어야만 이성이 제 나름대로의 지견을 형성하지 못하고 악마도 별의별 거짓스런 지견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니, 놈은 위에서 말한 감동을 통하거나 아니면 지견에 몸을 맡기는 영혼 안에 끼칠 수 있는 제 힘을 통하여 곧잘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p287)


제3권: 영의 능동엣 밤(기억과 의지)

제1장

제2장: 기억의 자연엣 지각

 

하느님과 합일을 하려면 일체의 형상을 기억에서 없애버리지 않고는 절대 될 수 없는 것, 하느님 아닌 일체의 상을 깨끗이 벗어버림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p294)


하느님의 영과 합한 영혼의 작업은 하느님의 것, 따라서 그런 영혼이 하는 일들은 틀림이 없고 사리에 알맞을 뿐이니, 바로 하느님의 성령이 그로 하여금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몰라야 할 것은 모르게 하시며, 형상이야 있건 없건 기억해야 될 것이면 기억하게 만드시고, 잊을 것은 잊게 사랑할 것은 사랑하게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p297)


제3장: 기억으로 말미암은 지식과 추리에 스스로 밤이 되지 않은 영혼의 첫째 손해

 

나는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이라고 대답한다. 이 순결이란 피조물과 덧없는 것에 아무런 애착이 없고 그에 정신이 쏠리지 않음에 있다. (p304)

기도하는 정성을 잃지 말라. 일체를 벗고 비운 가운데 바람을 가져라. 하느님의 은혜는 더디 오지 않으리라. (p305)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상상적 및 초자연적 지식

억에 들어오는 형상과 지식이 초자연스러워도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 하느님께 가려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서 영혼을 비워야 하는 것이다. (P313)


가장 많이 바라는 때가 가장 많이 자기를 비우는 때,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나면 영묘한 합일 속에서 하느님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숱한 사람들이 기억에서 오는 그 아는 맛, 달콤한 맛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이 때문에 으뜸가는 소유와 온전한 감미에 이르지 못하니, 가진 바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루카 14,33) (P314)


제8장: 영혼이 초자연적 현상을 지각한 다음 올 수 있는 폐해들

 

초자연적의 현상이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일체를 끊고 비우는 싱싱한 믿음과 바람의 사소한 행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P316-317)


제9장: 자만심과 허영심에 빠질 위험을 들어 말함

 

덕은 자기 안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겸손, 그리고 자기 및 자기의 것을 업신여기는 데에 민감하고 틀이 잡힌 마음에 있는 것, 아울러 남이 자기를 아무짝에도 못 쓸 것으로 알아서 업신여김에 맛을 느끼는 데에 있는 것이다. (P319)


겸손은 사랑의 결과이니 사랑이란 제 것을 크게 여기지 아니하고 제 것을 얻으려 아니하고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기 하나뿐, 자기의 선이 아닌 오직 남의 선만을 생각한다. 따라서 초자연의 지각으로 눈을 잔뜩 높이지 말고 그것을 잊음으로써 자유롭기를 힘써야 한다. (P319-320)

☞ 겸손은 사랑의 결과이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제10장: 기억의 상상적 지각으로 악마가 영혼에게 끼칠 수 있는 셋째 폐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바람과 사랑 안에 있는 벗음과 비움보다 지각을 더 소중히 알기 때문에 악마는 갈수록 영혼을 속이고 나아가서는 힘 하나 안 들인 채 제 속임수를 믿게끔 만든다. 영혼이 이미 눈먼 장님이 되었으니 거짓도 거짓으로 보이지 않고 악도 악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 . (P321-322)


악마로부터 오는 이 큰 폐해를 막으려면 애당초 영혼이 초자연스런 현실에 맛을 들이지 말아야 하니, 자칫하다가는 맛에 눈이 어두워져서 타락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달콤한 맛과 낙은 구태여 악마가 거들 것 없이 그 자체가 영혼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니, 다윗이 “어둠이 나를 뒤덮고 내 주위의 빛이 밤이 되었으면!”(시편 139,11)한 것은 이를 말함일 것이다. (P322)

☞ 초자연스런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


제11장: 기억의 초자연적 부분지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합일을 막게되는 넷째 폐해

 

영혼이 바람(망덕)으로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서 기억이 있는 일체를 버려야 한다고 했으니, 바람이 오직 하느님께 대한 것이 되려면 하느님 아닌 것은 무엇이든 있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p323)


제12장: 하느님을 낮게 보고 엉뚱하게 판단하게 되는 다섯째 폐해

 

피조물이란 지상의 것이든 천상의 것이든 영혼의 기능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일체의 자연 및 초자연의 부분지든 영상이든 그것이 이승에선 제아무리 높다해도 하느님의 본질과는 비교도 비례도 될 수 없는 것. (p324-325)


임금의 종들에다 눈을 두고 떼지 않는 사람이 임금께 대한 마음이나 정성이 모자랄 것은 뻔한 일이다. 높이 보거나 낮추 보는 생각이 꼭 모나게 있어서가 아니라 종들에게 마음이 더 갈수록 임금에겐 그만치 덜 가므로 그 행실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p325)

☞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 돈보다도 더.


제13장: 상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떨어버림에서 영혼에 생기는 이익

 

만약에 영혼이 하느님께로부터 수동적으로 받는 영의 초자연적 지각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제 기능을 부리려 한다면, 분명 그것은 이미 된 일을 다시 하려는 짓이요 이미 된 일을 기꺼워하지도 않은 짓일 것이니, 제 힘으로 한다는 일이 이미 된 일에 헤살이나 놓을 뿐 아무 쓸데가 없을 것이다. (p330)


제14장

제15장: 이 감각(기억)에 대하여 영성인이 대처해야 할 일반적 방법

 

영혼이 하느님 아닌 다른 형상들을 기억에서 앗아버리면 그럴수록 기억을 하느님 안에 머물러 둘 수 있고, 기억의 전부를 하느님의 바람으로 채우고자 하면 그만치 기억을 싹 비워야 할 것이다. (p336)

☞ 하느님 아닌 것을 버림


목적을 위한 수단이 좋고 필요한 것처럼 성화(聖畵)같은 것이 하느님과 성인들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은 좋지만, 수단뿐인 것을 수단 이상으로 평가하고 거기에 얽매일 때 다른 경우나 마찬가지로 그만치 방애와 지장이 되는 것이다. (p337)


제16장: 의지의 어둔 밤

 

영혼이 하느님의 영광 존영만을 기뻐하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하느님 아닌 것에 슬퍼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면, 영혼의 힘과 그 힘부림을 하느님을 위하여 간직하고 하느님께 향하게 함이 확실하다. (p340)


영혼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기뻐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이 줄어들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하느님께 대한 바람은 줄어들며 다른 감정에 있어서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p340)


감정은, 의지가 피조물에 얽매여 하느님 안에서 힘을 잃을수록 더욱더 영혼을 들이치고 점령한다. 그렇게 되면 기뻐할 것도 없는 것들에 스스로 기뻐하기가 아주 일쑤이고, 이롭지 못한 것을 바라고, 기뻐할 일을 슬퍼하며, 무서워할 데가 아닌 데에 무서워하게 된다. (p341)


제17장: 기쁨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영광과 존영에 대한 것만을 의지가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 곧 복음적 완덕을 따라 당신을 섬김이라는 것, 이 외의 다른 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와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p344)


제18장: 현세의 보배에 대한 기쁨을 다룸

 

부귀를 잔뜩 누리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그만치 잘 섬길 수 있다면야 부귀 중에 기뻐함이 당연하겠지만, 저 현자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코헬 11,9)고 가르친 대로 도리어 하느님께 죄짓는 원인이 되기에 말이다. (p345)

☞ 재물이 하느님 앞에서 죄짓는 원인이 된다면, 복이 아니라 화가 되는 것.


물론 현세의 보배 그 자체가 반드시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니나,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애착에서 약해지기 때문에 일단 이에 정을 붙이면 하느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하느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체가 곧 죄이다.), 그러기에 현자가 죄를 면치 못하리라고 말한 것이다. (p345)

☞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떠났다.


누구든 자기나 형제가 부귀를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한, 부귀를 지녔대서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 부귀를 가지고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하느님을 섬김에 쓰는 경우뿐이다. 그렇지 못한 때에는 부귀에서 아무런 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p346-347)


자녀가 많고 그들이 잘살고 잘 생기고 재간이 있고 행운의 총아라 하더라도,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기뻐할 것이 못 된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미모와 부귀와 왕자의 혈통을 가졌대서 그게 무슨 쓸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은 까닭이다(2사무 14,25). 따라서 그가 이런 것을 가지고 기뻐한 것은 헛일이었다. (p347)

☞ 자식이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자식을 신앙인으로 키우지 못했다면 자식 농사는 헛 지은 것이다.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된다 해도 기뻐하기에 앞서 두려워해야 됨은 이 때문이니, 순경일수록 하느님을 잊을 기회와 위험이 더 큰 법이다. (p348)

☞ 잘된 것이 지가 잘난 탓인줄 알고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제19장: 현세의 보배를 즐기는 데서 영혼에게 따라올 수 있는 해

 

피조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는 데서 모든 폐해가 생기고, 피조물에 대한 기쁨과 집착에 따라 그만큼 영혼이 해를 입는 것 즉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p350)

☞ 득이 실이 되는 것이다.


덧없는 것을 탐내고 즐김에 자리를 비켜주면, 제아무리 성덕과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 폐해를 입지 않을 재주는 없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를 경계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탈출 23,8) (p351)


오늘날 그들의 이성은 탐심으로 영성면에 어두워져서,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돈을 섬기고 하느님보다도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니 앞세우는 것은 돈의 가치요 하느님의 가치나 그 상급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과 으뜸가는 신인 돈을 위해서라면 별짓을 다하지만,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이라면 뒷전으로 돌리고 만다. (p355)

☞ 450년 전의 상황이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과 똑 같은가!


그들은 세상의 재보에 연연하여 이를 신으로 삼기에, 그들의 신인 재보에 궁핍이 따르면 서슴없이 제 생명을 희생하고 절망하여 가엾은 목적 때문에 제 목숨을 끊기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한 신으로부터 받게 마련인 슬픈 상급을 스스로가 보여주는 것이다. (p355)

☞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항상 돈에 마음을 붙이게 되고 돈 때문에 걱정을 하고 그 값으로 당하는 멸망의 마지막 재앙이 오기까지 줄곧 돈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이는 저 현자가 이른 “부자가 간직하던 재산이 그의 불행이 되는 것이다.”(코헬 5,12)는 말 그대로인 것이다. (p356)

☞ 돈이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제20장: 시간적인 것에 대한 기쁨을 멀리함에서 영혼이 얻는 이익

 

조그마한 집착이라 하여 뒤로 미루어 제 힘을 믿어 즉시 끊어버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집착이 아직 조그맣고 시작할 때에 끊어버릴 마음이 없다면 뿌리가 깊고 다 큰 다음에 무슨 수로 뽑겠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p357)


작은 것 안에 큰 화가 숨어 있으니 마음의 울타리와 벽을 통해서 큰 화가 들어오는 까닭이다. (p357)


세상 것을 마음으로 떠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즐기고 그것으로 휴양을 얻을 수 있으니, 이는 소유욕의 집착을 가지고 세상 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p358)


집착은 하나의 번뇌라, 번뇌란 올가미와 같아 마음을 땅에다 얽어매므로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이승의 것을 떠나면 떠날수록 자연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 그에 대한 진리를 옳게 깨치는 밝은 지견을 얻게 된다. (p358)


갖고 싶은 마음이 없이 즐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듯이 즐기지만, 갖고 싶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두루 즐길 수 없다. 전자는 마음에 가지는 것이 없기에 성바오로의 말대로 모든 것을 마음껏 다 가지고 있고(2코린 6,10), 후자는 그 어느 것에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그 마음이 사로잡힌 탓으로 노예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다. (p359)


인생의 즐거움이란 하느님을 섬기고 매사에 당신의 영광과 존영을 위하여 힘쓰는 것뿐이고, 오직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이 있게 하며, 피조물에서 그 맛과 위로를 찾지 말고 그 덧없는 것들을 떠나라는 것이다. (p359)


피조물의 낙을 끊음에서 얻어지는 또 하나 크고 중요로운 이득은 하느님을 위한 마음의 자류로움이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은혜를 받는 데에 첫째가는 마음갖춤으로서 이 갖춤 없이는 당신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는다. (p359-360)


그 은혜들이란, 엄위하신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약속하셨듯이, 찰나의 기쁨 하나일만정 하느님 사랑과 복음의 완덕을 위해서 버린다면 이승에서 백배의 기쁨을 주시리라는 그것이다. (p360)

☞ 하느님을 위하여 버림.


제21장: 자연엣 보배에 마음을 두고 기뻐함이 얼마나 헛된가

 

자연엣 보배라는 것은, 고움과 아리따움과 풍정과 맵시에 육체가 지닌 모든 자질을 가리키고, 아울러 영혼에 있어서는 총명과 분별과 이성에 딸린 모든 특질을 말한다. (p361)

☞ 외적 내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재능및 외모


이러한 재모(才貌)를 가졌을 때 사람은 오히려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흐리기가 쉽고 이것에 홀려 허영에 빠지며 속는 까닭이다. 육체의 아리따움이 사람을 속인다 함은 이 까닭이니, 미모를 지닌 것이 자기 자신이건 남이건 그에 반하고 부질없이 좋아하다가 사람은 스스로 속고 옳지 못하는 길로 빠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헛되다 함은 자기나 남의 아름다움을 기리고 즐기는 탓으로 백천 가지로 사람이 타락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천부의 재모(才貌)가 원인이 되어서 이에 눈이 팔린 나머지, 헛된 자부심과 지나친 애착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p361-362)

☞ 하느님이 주신 것을 귀하게 쓰지 못하고 헛되게 살아버린다면 뛰어난 재능과 외모가 무슨 소용인가?


고움과 아리따움도 땅에서 이는 김과 같은 것, 이 모든 것은 다윗의 말과 같이 옷처럼 닳아 없어지는 것, 당신만이 변함없이 영원히 남으시는 것이다.(시편 102,27). 따라서 이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그 기쁨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으면 항상 거짓과 속음이 있을 것이다. (p362)


제22장: 자연엣 보배에 마음을 두고 기뻐함에서 영혼에 따라오는 해악들

 

자연엣 재보에 대한 이 헛된 기쁨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낌새가 보이거든 그 당장, 하느님을 섬김이 아닌 다른 일에 기뻐함은 얼마나 헛된 일이며 얼마나 위태롭고 해로울까 생각할 일이다. 천사들마저 제 아름다움과 천품을 즐기고 만족해 하다가 추악한 심연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큰가. (p368)


제23장

제24장: 마음이 기쁜 정을 둘수 있는 감각적 보배를 다룸

 

감각적 보배란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및 상상력의 내적 기능 등 일체 안팎의 감각에 딸린 것들을 통틀어 말한다. (p372)

감성적으로 파악된 어느 것에서 생기는 맛을 즐기느라 마음을 거기에 매어둔다면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 없으니, 하느님 안에서만 기뻐야 하고 하느님께만 써야 할 마음의 힘을 줄이게 될 것이다. (P373)


음악이나 다른 소리를 듣거나 유쾌한 것을 보거나 좋은 향내를 맡거나 풍미 있는 것을 맛보거나 즐거운 촉감을 느낄 때, 그때마다 그 첫 움직임부터 생각과 마음의 정이 하느님께 향하고, 감각적인 자극보다도 저 생각에 맛을 붙이고 오직 이 생각 때문에 맛스러워진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이미 말한 감각에서 이득을 얻는 것, 그리고 이런 감성의 것이 영에게 도움을 주는 표인 것이다. (P374)


감각적인 맛에서 영의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그 마음이 기쁨에 머물러서 헤어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해를 받으므로 그런 따위를 멀리해야 한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런 따위의 도움을 입는 것은 잘못은 아니라도 욕구가 감각적인 면을 즐기고 보면, 그 즐김의 결과는 항상 도움보다 장애요 이익보다 해가 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러한 놀이의 요구가 자기를 지배한다고 느낄 때 이를 마땅히 끊어야 하니, 이런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은 더욱 약하고 불완전하게 되는 까닭이다. (P375)


제25장

제26장: 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낙을 끊음에서 영혼에게 오는 영적 및 시간적 이익들

 

단 하나의 낙을 끊어보라. 그러면 주님께서는 영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승에서 그대에게 백을 주실 것이다. (p380)


욕망의 기쁨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물과 그 일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고요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 이와는 달리 이미 감각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감각 기능의 작용이 하느님의 관상을 향하게 된다. (p381)

☞ 신앙인이란 이미 감각에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닐까!


감각적인 것에 아직도 재미를 붙이고 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영에 도움이 되는 줄 알고 감각의 힘과 작용을 이용하려는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된다. 영혼의 힘이란 이따위 감각의 힘이 없어야 더욱 세어지는 것, 다시 말해서 감성면의 낙을 누리기보다 도리어 그 낙과 욕구를 꺼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p382)

☞ 이제는 세속의 낙은 끊고 하느님으로 낙을 삼아야 한다.


제27장: 윤리적 재보는 어떠한 것인가

 

윤리적 보배란 윤리상으로 본 덕과 덕의 습성, 어떠한 덕의 실천과 자비의 행위, 그리고 하느님 법의 준수와 예의 및 착한 성질과 경향으로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법없이도 사는 사람, 착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과 닦는 덕으로 하느님을 섬겨드리는 데에만 오직 이것에만 그 눈과 기쁨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덕이라도 하느님 앞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P385)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기뻐할 바는 좋은 일을 하고 좋은 풍습을 따름에 있지 않고 다른 것은 돌아봄이 없이 다만 하느님 사랑으로 함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 오직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 하나로 한 일에는 영광의 상급이 큰 것처럼 딴 마음이 동하여 이루어진 일들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뿐이겠으니 그렇다. (P386)

☞ 그리스도인의 덕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윤리적 선에서 하느님께 그 기쁨을 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것은 좋은 일, 단식, 자선, 고행 등의 가치가 그 양이나 질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P386)

☞ 윤리적인 선은 하느님이 빠진 선이다. 선 자체이신 하느님이 빠진 선이 과연 선일까?


한결 맑고 옹골진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할수록 그리고 기쁨이나 낙이나 위로나 칭찬따위에 도무지 무관심할수록 그만치 일은 가치로운 법이다. 따라서 착한 행실, 좋은 일에 있기 쉬운 기쁨이나 위로나 맛이나 재미에 마음을 두지 말고, 그런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스스로를 맑게 닦아 기쁨에는 어둠이 되고, 하느님께 그 기쁨을 집중시켜야 한다. (P386)


제28장: 윤리적 보배에 마음의 기쁨을 둠에서 생길 수 있는 일곱 가지 해악들

 

사람이 제 스스로 한 좋은 일과 착한 행실을 실없이 기뻐하다가 빠질 수 있는 해악이 허영과 교만과 자부이니, 제가 한 일을 기뻐함은 이를 크게 알아줌이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서 제 자랑과 다른 것들이 생기는 것으로, 복음서의 바리사이가 이런 따위였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기가 재를 지키고 선행을 한답시고 제 자랑을 펴놓았다(루카 18,12) (p387)

☞ 남이 알아주기 위하여 하는 선은 위선이다.


남을 자기와 비교하여 나쁘다 언짢다 판단하고, 남은 자기만큼 좋은 일을 하지 못 한다 여겨 마음속으로 남을 얕보며, 때로는 말로까지 드러내는 그것이다. (p387)


자기가 위로를 받고 자기 자신이 얻기 쉬운 일들보다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끊는 일이 하느님 앞에 더욱 가치롭고 가납되는 일들이다. (p390)


제29장: 윤리적 보배에 대한 기쁨을 이탈함에서 영혼에 생기는 이익들

 

맛 때문에 일을 하니 맛은 변하기 쉬운 것, 본성의 맛은 더구나 다른 맛보다 훨씬 변하기가 쉽고 보면, 아무리 큰일이라도 맛이 없어질 때 일도 마음도 없어지고 만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맛이 일의 혼이요 힘인 까닭에 맛이 가시면 일도 죽고 없어지는 것, 따라서 끝가지 버티지를 못하는 것이다. (p393)

☞ 하느님 없는 선은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


제30장: 초자연엣 보배를 다루기 시작함

 

초자연엣 보배란 인간 본성의 능력을 초월하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선물과 은혜로서 공으로 받은 것인데, 이를테면 솔로몬에게 주셨던 슬기와 지식의 선물, 성바오로가 말한 은혜들이다(1코린 12,9-10). (p395)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인간은 모름지기 생명의 길을 가고 있음을 기뻐해야 된다는 말씀이니, 생명의 길은 곧 사랑 안에서 일을 한다는 것, 과연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하느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사랑이란 이 모든 것에서 기쁨을 씻어버리고 오직 하나,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데에 기쁨을 둘 만큼 총명하고 굳세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p397)


제31장: 이러한 보배를 마음이 기뻐하는 데서 영혼에 생길 수 있는 해악들

 

기적과 증명이 많을수록 믿음의 공은 적은 법이다. 성그레고리우스가 “인간 이성이 실험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공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p403)


하느님께서는 믿음에 필요치 아니한 기적을 하시는 적이 없으니, 그리스도께서도 행여 그 제자들이 당신 부활의 경험에서 믿음의 공이 없을세라,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시기 전에 많은 일을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보지 않고 믿게끔 하셨다. (p403)


기적이 아니면 믿지 않던 바리사이들을 주님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따라서 유달리 초자연스런 일을 좋아하는 자들은 믿음의 손실이 큰 것이다. (p404)

☞ 표징과 이적만 따라 다니는 사람은 이 복음 말씀을 새겨들을 일이다.


이런 따위의 이상한 일들을 좋아함은 … 오직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 안에서 행하지 않으면 허영이다. 악마를 정복했대서 기뻐하던 제자들을 주님께서 나무라신 사실에서 이를 엿볼 수 있으니, 그 기쁨이 허영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나무라지 않으셨을 것이다. (p404)

☞ 우리 믿음의 목적은 하느님임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제32장: 초자연적 은혜에 대한 기쁨을 부정함에서 따라 오는 두 가지 이익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높이 받들어짐에는 그 길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느님 아닌 일체에서 마음과 의지의 기쁨을 떼쳐 오로지 당신 안에 두는 것이다. (p405)


무릇 일체에서 기쁨을 떨어버림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됨이 사실이라면 기쁨을 다만 하느님께 두고자 초자연스런 것마저 떨어버림은 한결 더 당신의 찬미가 될 것이니, 초자연스런 것은 그 실체가 한결 높은 까닭이다. (p406)


기쁨을 오직 하느님께 두고자 이런 것을 버리면, 예사로운 것으로 하기보다 훨씬 더 영광과 존숭을 하느님께 드리는 셈이 된다. 사람이 남을 위해서 값진 것을 값없이 보고 또 그러면 그럴수록 그만치 남을 위함이 끔찍한 까닭이다. (p406)


제33장: 마음이 기쁠 수 있는 보배

 

영적 보배는, 말하자면 일체 하느님의 일, 영혼과 하느님과의 교섭, 사귐, 그리고 하느님과 영혼과의 상통을 위하여 동기가 되고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p407)


제34장

제35장: 의지 안에 똑똑히 떨어질 수 있는 흐뭇한 영적 보배들

 

교회가 성화(聖畵)의 사용을 규정함에 주로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하여 성인들을 공경하자 함이고, 이를 통하여 마음이 움직여져 그들에 대한 정성을 일깨우자 함이다. (p410)


어떤 사람들은 표현의 내용보다 성화의 진기함 및 가치만을 본다. 그들은 성화가 신심의 동기로 쓰임을 잊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성인께 영적으로 지향해야할 마음의 정성을 밖에 드러나는 묘한 구성에다 기울여서 감각을 기쁘고 즐겁게 할 뿐, 그 대신에 마음속의 사랑과 기쁨은 그 속에서 멎게 한다. 이런 짓은 참다운 영을 전혀 방해하는 것이니, 참다운 영이란 부분적인 일체에 대하여 애착을 끊어야만 하는 것이다. (p411)

☞ 성화의 목적을 잊어버릴 때, 성화는 우상이 될 수가 있다.


성화나 그러한 유인(誘因)에 소유욕을 가지고 애착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신심과 기도는 하느님께 덜 향함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412)


제36장: 성화상을 들어 거듭 말함

 

순례를 하는 사람이면 때 아닌 때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때를 골라서 하는 것이 좋다. 많은 사람이 붐빌 때라면 나는 절대 권할 마음이 없으니, 그전보다 정신이 산란해져서 돌아오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p416)


많은 사람은 순례를 한답시고 정성보다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p417)

☞ 많은 경우 이 같은 순례를 하고 있다


제37장; 성화상의 대상을 통하여 어떻게 의지의 기쁨을 하느님께 향해야하는가?

 

악마는 교활한 놈이라 우리 구원이 되고 도움이 되게 쓰는 그 방법을 가지고 감쪽같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위장을 한다. 그런 까닭에 좋은 사람은 좋은 일에 더욱 조심해야 되는 것이니, 나쁜 것은 나쁘다는 증거를 그 자체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P419)


제38장: 성당과 기도를 위한 장소들에 대한 것을 말함

 

벌잇속으로 축제를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옳은가?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여기에 눈과 욕을 두는 사람이면, 그들 자신이 알 일이요 하느님께서 아시는 바다. (P425)

☞ 하느님을 제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축제를 지낸답시고 숱한 사람들이 흥청거릴 때, 당신은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시듯 진노를 터뜨리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축제를 지낸답시고 우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 중 수천 명을 죽게 하셨던 것이다. (탈출 33,7-28) (P424)


인간들이 지내는 그 많은 축제가 당신보다도 악마를 위하는 것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악마는 그러한 축제를 즐깁니다. 장사꾼처럼 제 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몇 번이나 축제에서 말씀하셨나이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9) (P424)


그렇다.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신 그 까닭이 있을 뿐, 다른 목적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P424)


제39장: 하느님께 마음을 향하면서 성당과 성전을 잘 쓰는 방법

 

우리 구세주께서도 (우리에게 모범을 주시려고) 외딴 자리를 골라 기도하셨으니 그런 자리는 감각을 지배함이 없이 영혼을 하느님께 올려주는 곳, 말하자면 땅에서 우뚝 솟아 감각을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벗은 산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P427)


제40장: 영이 이끌어야 할 마음거둠

 

참다운 영의 유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원인은, 보이는 바깥 것에서 즐기려는 욕구를 떼지 않는 데에 있다. … 비록 눈에 보이는 성당과 성전이 정하고 또 기도를 위한 장소이고 성화 역시 하나의 유인이 된다 할지라도, 영혼의 진기와 풍미를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유인에다 써버려서 살아있는 성전, 즉 마음거둠 안에서 비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429)


되도록이면 더 멀고 외딴 자리를 골라 마음의 기쁨을 모조리 돌려서 하느님께 빌고 당신을 기려야 한다. 바깥 것의 하찮은 맛일랑 아는 체할 것 없이 차라리 힘써 지워버려야 한다. 영혼이 감각적 신심에 맛을 들이면, 마음거둠을 통한 영의 벗음 속에서 발견되는 영의 옹골찬 유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p430)


제41장

제42장

제43장: 많은 사람들이 가지가지 예절을 따라 기도하는 다른 동기들

 

요즘 부질없는 신심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그, 믿음과 영험이 어느 수단 방법에 있는 양, 이것이면 정성도 기도도 다 되는 줄 안다. 그리하여 점 하나만 틀리고 제 자리에 어긋나도 영험이 없다는 둥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 없다는 둥 하니, 이는 진짜 기도보다 저 수단 방법을 더 신뢰하는 것, 하느님께 대한 심한 모독이요 모욕이 아닐 수 없다. (p436-437)


제44장: 마음의 힘과 기쁨을 하느님께 향하는 방법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성취하려면 하느님께서 가장 기꺼하시는 어느 것에 우리 기도를 집중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비는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구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알맞고 좋다고 보시는 것 마저 주실 것이니 말이다. (p439)


당신이 거듭 강조하신 것은 기도에 꾸준하라 하심이었는데, 이는 주님의 기도를 끈기있게 바치라 하심이고, 또 다른 데서는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 하셨다.(루카 18,1). 그러나 다양스런 기도를 가르치시지 않고 다만 주님의 기도를 열성으로 자주 바치라고 하셨으니, 이미 말한 대로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필요 일체가 이에 포함된 까닭이다. (p440)

☞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만 정성스레 바쳐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제45장: 의지가 헛되게 기뻐할 수 있는 도릿한 보배

 

설교자가 청중을 향상시키고 자산이 헛된 기쁨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임무가 말보다 영에 있다함을 깨달아야 한다. 밖으로 소리를 내서 하는 일일지라도, 안으로 영이 없으면 힘과 효과가 따르지 않는 까닭이다. (p443)


하나의 음악이 다른 음악보다 낫다 해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음악은 내게 있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p445)

☞ 남이 아닌 나를 움직여야 그것이 진짜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했다 해도 이내 잊어버리면 마음에 붙지 못한 붙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함을 제외하고라도, 그러한 설교에 맛을 들이는 감정은 영에로 옮아가는 길을 막는 길이니, 말솜씨며 부수적인 것에만 정신을 팔린 사람들은 이런 일 저런 일로 설교사를 치키며 따를 뿐, 설교에서 배우는 자기 개선은 돌아보지 않는다. (p445)


3. 이책에 대한 간략한 나의 느낌 또는 소개

 

‘가르멜의 산길’은 가르멜 수도자를 위하여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책이다. 하지만 평신도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신비가인 성인의 책은 흔히 어려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어렵지기 않았다. 성인의 ‘어둔밤’은 이해하기가 많이 힘들었는데, 이 책은 초보 수도자를 위한 것인 만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어둔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명금당 | 작성시간 15.09.29 옛날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는데요. 마음지기님이 수고 하셔서 더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음지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29 명금당님이 이 첵을 읽으셨네요...도움이 되었다니 고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