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代에 역사를 바꾼 다섯 反共 지도자
처칠, 이승만, 아데나워, 드골, 레이건: 70代의 노구를 이끌고 역사를 바꾼 건강의 힘은 육체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사명감에서 우러난 정신력 덕분이 아닐까?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가 이런 건강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1. 윈스턴 처칠: 1874년 출생,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66세에 戰時 총리가 되어 영국을 승리로 이끈 뒤 71세에 물러났다가 77세에 복귀, 81세까지 재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자유민주주의자로서 소련을 견제하였고, '철의 장막'이란 말을 만들었다. 1965년에 91세로 사망하였다. 2차 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 李承晩: 1875년에 출생,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70세에 귀국,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건국을 주도하였다. 73세에 대통령이 된 후 12년간 재임하였다. 이 기간 반공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韓國戰을 지도, 자유진영과 조국을 지켜냈다. 建國과 護國의 지도자서 두 번 나라를 살린 사람이다. 1965년 90세에 하와이에서 사망.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 등 여러 권의 책이 있다.
3. 콘라드 아데나워: 1876년 출생으로 쾰른 시장을 지낸 뒤 나치 독일의 탄압을 받았다가 독일의 패전 후 政界에 복귀, 기독교 민주당을 만들고, 73세이던 1949년부터 ?세이던 196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1967년에 90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독일이 과거를 청산하고 재무장, Nato에 가입, 서유럽의 일원으로서 소련과 대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서구를 이간질시키려던 스탈린의 중립통일안을 거부하였다. 천주교 신앙에 뿌리를 둔 그의 반공적 자유민주 노선은 콜 총리 시절에 통일로 결실되었으며 지금도 독일 정치의 主流이다.
4. 샤를 드골: 1890년에 출생, 국방차관일 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 자유 프랑스 군을 창설,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 패전국을 戰勝國으로 전환시키는 逆轉의 주인공이 되었다. 잠시 은퇴하였다가 1958년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나라가 內戰 직전으로 몰리자 국민과 국회에 의하여 다시 불려나와 총리를 거쳐 개헌을 한 뒤 대통령이 되었다. 69세에서 79세까지 대통령으로 재직, 프랑스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핵무장을 하였으며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 또한 철저한 反共공화주의자로서 두 번 나라를 구하였다.
5. 로널드 레이건: 1911년에 태어난 레이건은 70세에 대통령이 되어 78세에 물러날 때까지 對蘇 강경정책으로 공산진영의 붕괴를 유도하였다. 그 또한 기독교적 반공자유 투사로서 '죄를 미워하라.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93세이던 2004년에 사망하였다.
처칠, 이승만, 아데나워는 한 살씩 차이가 난다. 세 사람은 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이 팽창정책을 쓸 때 이를 저지, 자유진영을 지켜낸 3大 인물이다. 70代에 정권을 맡아 그런 위업을 이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골과 레이건도 70대에 대통령을 지냈다.
70대에 정치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면서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이 다섯 명의 공통점이 있다.
1. 기독교에 바탕을 둔 신념의 반공자유 투사였다.
2. 건강이 출중하였다.
3. 드골을 뺀 네 명은 90 이상 장수하였다.
4. 이들 가운데 이승만과 드골은 두 번 나라를 구했다(터키의 國父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도 두 번 나라를 구하였다).
5. 패배를 딛고 頂上에 도달하였다.
6. 처칠, 드골, 이승만은 大문장가였다.
70代의 노구를 이끌고 역사를 바꾼 건강의 힘은 육체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사명감에서 우러난 정신력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가 이런 건강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신념, 건강, 知性, 경륜이 합쳐지니 나이는 장애물이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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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냐 중립통일이냐에서 분단을 선택한 아데나워
스탈린의 중립화 통일론
스탈린의 중립화 통일론을 거부한 아데나워 전 독일 총리.
1945년 5월 연합군에 항복, 미·영·불·소(美英佛蘇)의 4대국 지배하에 들어간 독일은, 소련 점령하의 동독(東獨)과 미·영·불(美英佛) 점령하의 서독(善)으로 나눠졌다. 냉전(冷戰)이 격화되면서 한반도처럼 동서독은 통합이 어렵게 되었다. 미·영·불 점령하의 서독 지역에서 지도자로 등장한 아데나워 수상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처럼 서독을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독립시키려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데나워는 주권(主權)회복 과정에서 서독을 재무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시키고, 프랑스 등 서구와 유럽공동체를 구성하는 노선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를 구경만 하지 않았다. 서독의 주권회복에 즈음하여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3월 10일 스탈린은 서독을 관할하던 미·영·불에 ‘스탈린 노트’로 유명해진 각서(覺書)를 보냈다. 동서독을 통합한 통일정부를 구성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의 핵심은 통일된 독일이 중립국으로 남아야 하며 그렇게 하면 국방에 필요한 정도의 재무장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중립화를 약속하면 동서독 통일을 지지할 뿐 아니라 재무장도 허용하겠다는 소련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아데나워는 스탈린의 음모를 간파하였다.
그는 미·영·불 정부에 “서독은 스탈린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 미·영·불·소 4대국이 서독을 무시하고 무엇을 결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서독 안에선 스탈린의 제의에 찬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집권 기독교민주당 안에서도 검토할 가치가 있는 제안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스탈린의 제안은 통일을 중시하는 민족주의파(派)와 중립 지향의 평화주의파를 다 같이 노린 승부수였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독일의 중립화는 미군을 유럽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유럽은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에 종속되어 기독교 문명이 무신론(無神論)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유럽과 독일은 일체가 되어야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이를 위하여는 통일의 꿈도 잠시 유보하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유냐, 통일이냐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좌우합작론을 거부한 논리와 비슷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스탈린의 조종을 받는 남북한 공산주의자들과 합작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은 한반도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상종할 수 없는 반문명 세력으로 보았고 아데나워도 소련 공산주의를 반유럽, 반기독교적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스탈린 노트는 다른 모습으로 한반도에서 등장할 수 있다. 중국이 친중화한 한국을 상대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한국 주도의 통일을 지지한다. 단, 통일된 한반도는 한미동맹에서 탈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통일된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장 국가 및 준핵무장 국가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된다. 뼈에 사무친 친중 사대주의의 역사적 유전자가 발현(發顯)되어, 더욱 중국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중국이 공산독재국가로 남아 있다면 이는 친공산 독재화를 뜻한다. 한국의 자유와 번영을 보장하였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위협 받는다. 한반도 중립화 제안은 자유냐 통일이냐의 선택을 한국인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유를 통일보다 더 높은 가치로 수용하였지만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서독이 경제적·군사적·외교적 국력을 충실히 해 가는 과정에서 동독을 자연스럽게 견인(牽引), 흡수하는 장기적 전략을 썼다. 아데나워는 서독을 서방세계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음모에 말려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