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 漢詩-바2部
번암집 제1권 / 시(詩)○어정(御定) 갱화록(賡和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갱화록〉을 만들었다.
16일 밤에 기악을 대동하고 영화정 앞에서 배를 띄워 놀다가 첫닭이 운 뒤에야 돌아오다〔十六夜 携妓樂泛舟迎華亭前 鷄鳴始歸〕
목란주 흔들흔들 둥근달 떠오르고 / 蘭舟搖漾月昇輪
열 무리 여악(女樂)에다 백 동이 술이로세 / 十隊紅粧百斛樽
옛날 그때 소선은 시시할 따름이니 / 當日蘇仙猶瑣瑣
부질없이 안주 술로 정신만 허비했지 / 等閒肴酒費精神
하교를 받들어 삼가 임금의 시를 첨부하다〔奉敎敬附宸章〕
채 좌상의 화성 병진년(1796, 정조20) 시축에 화운하다〔和蔡左相華城丙辰軸韻〕
지지대 앞길에서 고삐 멈추고 / 駐轡臺前路
저 멀리 화성 북쪽 바라다보니 / 迢迢望華陰
볏논은 일천 이랑 열려 있는데 / 稻秔千畒闢
뽕나무밭 일만 집 촘촘하구나 / 桑柘萬家深
철벽같은 성곽을 이미 보았고 / 已見城爲鐵
금전 사양 풍속을 듣게 되리니 / 思聞俗讓金
부유 교육 선왕의 마음이 담긴 / 先王富敎意
오현금 훈풍곡을 생각하노라 / 一曲想薰琴
위는 〈지지대(遲遲臺)에서 화성을 바라보며〉 시에 화운한 것이다.
만 장 성벽 구름 위 높이 솟았고 / 萬雉矯雲直
쌍무지개 물 걸쳐 이뤄졌나니 / 雙虹駕水成
여러 신하 일 맡아 노력하였고 / 勤勞衆御事
백성은 자식처럼 정성 바쳤지 / 經始子來誠
천지 규모 한없이 크기도 한데 / 天地規模遠
산하 형세 이곳에 모여들었네 / 山河體勢呈
가고 갈 제 시야에 들어오는 건 / 行行來眼界
거둥길 큰 제방이 평탄하구나 / 輦路大堤平
위는 〈낙남헌(洛南軒)〉 시에 화운한 것이다.
강남의 도회지라 인마가 모여들고 / 江南都會遝蹄輪
신풍에 봄이 들자 온 세상이 취한 듯 / 春入新豐四海樽
미로한정 놀이가 어쩜 이리 좋은지 / 未老閒亭如許好
두 밤을 촛불 아래 정신을 쏟았노라 / 雙宵高燭更凝神
위는 〈밤 뱃놀이〉 시에 화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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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1권 / 시(詩)○어정(御定) 갱화록(賡和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갱화록〉을 만들었다.
문루를 내려오며〔下樓〕
석양에 취한 몸이 붉은 계단 내려오며 / 斜陽扶醉下丹梯
발아래 깔린 구름 웃으면서 보노라 / 笑看飛雲脚下低
길가의 오래뜰이 그림과도 같은데 / 挾路門庭如畫裏
집집마다 심은 버들 모양새 일정하다 / 家家種得絲楊齊
하교를 받들어 삼가 임금의 시를 첨부하다〔奉敎敬附宸章〕
좌상의 〈화성시〉에 화운하다〔和左揆華城詩韻〕
삼도 중에 화성이 으뜸이거니 / 三都推第一
팔달문에 인재를 불러들여서 / 八達務懷來
내치 잘할 문사를 시험하였고 / 蹔試經綸手
국방 잘할 무재도 구하였노라 / 旋求鎖鑰才
높은 누각 하늘에 의지하였고 / 樓依天宇迥
도는 성곽 들 어귀 껴안았는데 / 城抱野門廻
정무란 본디부터 천심 있는 법 / 料理自深淺
궁중 술 익는 소리 들어나 보소 / 宮罇聽醱醅
맑은 날 군악 속에 높은 계단 오르니 / 乘晴笳鼓上雲梯
남북의 뭇 산들이 난간 밑에 들어온다 / 南北群山入檻低
높은 데서 비로소 천 리 먼 곳 바라보니 / 高處始窮千里眼
가을 연기 아홉 점 중국은 어디 있나 / 秋煙九點問靑齊
위는 〈팔달문루에 올라〉 시에 화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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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1권 / 시(詩)○어정(御定) 갱화록(賡和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갱화록〉을 만들었다.
상께서 현륭원에 나아가 제사를 행한 뒤에 비각 뒤 막차에 앉아 아침 수라를 들면서 신들에게 곁에 시좌할 것을 명하고 음식을 주셨으니, 특별한 은전이다〔上詣園所行祀訖 坐碑閣後幕次 進朝水剌 命臣等侍坐 賜以食 異恩也〕
한낮에 깊디깊은 행궁의 안방에서 / 行宮寢褥晝深深
근신의 충정으로 문안을 드렸는데 / 承候班頭寸寸忱
오늘 선영 앞에서 수라를 드신 것은 / 今日珠邱親玉食
하늘 위의 아버님 그 마음 달래고저 / 聖心要慰在天心
하교를 받들어 삼가 임금의 시를 첨부하다〔奉敎敬附宸章〕
좌상의 화성시축 가운데 세 편의 시에 화운하다〔步左揆華城軸三韻〕
매년 화성의 행차 때마다 좌상이 항상 시를 지었고 나는 매번 그 시에 화운했다. 올봄 행차 때는 내가 병이 나서 사흘 밤을 조리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비로소 원소(園所)를 참배하였다. 그사이 날짜는 비록 많지 않았지만, 아버님의 원침을 우러러본 게 다행스럽고 어머님의 곁을 떠나 있는 것이 서러워 시로써 그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병 때문에 그렇게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좌상이 대신하여 내 뜻을 드러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궁으로 돌아올 때 그가 시를 보여 주므로 마침내 화운하여 돌려보냈다.
밤마다 병 조리로 밤을 꼬박 지새우고 / 調痾夜夜漏壺傾
새벽이면 허둥지둥 마음 못 가누다가 / 明發瞿瞿不盡情
겨우 작은 정성으로 원묘에 다가가고 / 始寓微誠園廟近
다시 또 기쁜 소식 자궁께 올렸노라 / 旋將喜報殿宮呈
남은 한기 새벽의 깃발 속에 스며들고 / 餘寒曉入旌旂影
화한 기운 아침의 검패 소리 어울리네 / 協氣朝隨劍佩聲
자궁의 무한한 덕 온 수원부에 미치어 / 慈德無量覃一府
좋은 쌀 만년토록 끊임없이 수확하리 / 生生嘉粒萬年更
유근교 주변 길을 지나갈 적에 / 逌覲橋邊路
새벽녘 화신풍이 안장 스치니 / 花風曉拂鞍
농사는 장차 크게 풍작 이루고 / 農功將大有
봄빛은 절로 길이 평온하리라 / 春色自長安
행궁 아직 안온함 느끼었는데 / 行殿猶知穩
군복 또한 차갑지 아니하다네 / 戎袍却不寒
성과 해자 이처럼 좋아졌으니 / 城池如此好
이제 민심 얻는 게 급선무로세 / 先務得民歡
원문의 ‘대유(大有)’는 북쪽 둔전의 들 이름이고 ‘장안(長安)’은 북쪽 성의 문 이름이다. 이 들 이름에는 연거푸 풍작을 거둔다는 뜻을 부쳤고, 이 문은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셋째와 넷째 구에서 그것을 말하였다.
창오(蒼梧) 구름 바라보니 만 겹이나 짙게 깔려 / 一望梧雲萬疊深
아버님 그리는 정성 표할 곳이 없는데 / 羹墻無處效誠忱
비 뒤에서 수반 먹고 마지못해 떠나니 / 碑陰水飯遲遲發
해마다 봉심하는 소자 마음 살피소서 / 降格年年小子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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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금정역〔金井驛〕
금정역에 들어가 밤을 보내며 / 夜宿金井驛
멀리서 어동의 연기 보았네 / 遙望漁洞煙
백부께서 새벽같이 찾아오시어 / 伯父曉臨止
나를 불러 긴 들길로 향하시도다 / 唱我出脩阡
금니가 넓은 물결 건너질러서 / 金泥軼廣濤
백부의 고질병을 낫게 했는지 / 使公沈痾痊
온화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 熙熙撫我手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시도다 / 失喜便茫然
말을 타고 드디어 집에 닿으니 / 騎馬到門去
아침 해가 들판에 싱그러운데 / 朝日野中鮮
따뜻한 해와 바람 얼음을 녹여 / 暄飈革殘氷
금계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네 / 錦溪鳴涓涓
피리 소리 북소리 떠들썩한 곳 / 笳鼓發新響
여기가 내가 나고 자란 땅인데 / 宛彼桑梓田
저자에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 / 虛人幾萬叢
질서 있게 양쪽으로 줄을 지었네 / 秩秩開兩邊
가친께서 영남 고을 수령이 되고 / 家親綰嶺符
계수 가지 꽂은 아들 앞에 섰으니 / 簪桂兒在前
구경꾼은 발꿈치를 들고 보는데 / 觀者冒迥術
손님들은 하루 종일 잔치 즐기네 / 衆賓竟長筵
사당에선 슬픔과 기쁨 교차해 / 悲喜謁祠廟
경건하게 우리 조상 생각하누나 / 怵惕念吾先
조상님들 실로 인을 쌓으셨으니 / 吾先誠厚仁
급제한 게 어찌 나의 능력일쏜가 / 倖闡豈吾能
친지들이 너도나도 술을 권하고 / 親知皆送酌
왁자지껄 축하하는 말을 건네며 / 賀語紛相仍
내가 이름 떨친 것을 가상해하고 / 嘉我聲名大
내가 성은 입은 것을 부러워하네 / 豔我天恩承
성은이야 부럽지 않으랴마는 / 天恩豈不豔
내 마음은 진실로 다른 데 있네 / 我心亶在他
동쪽으로 보이는 동산 가운데 / 睠彼東園裏
교목이 울창하게 뻗어 있도다 / 喬木鬱交柯
경건히 가업을 잘 이어받아서 / 翼然好堂構
백여 년간 기틀을 다져 왔거니 / 鞏基餘百年
집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 堂中何所有
천여 권에 달하는 경전이로세 / 聖經千百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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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착호행〔捉虎行〕
점한이 들판에다 구덩이를 파 놓으니 / 店漢掘土野中歇
맹호가 사람들을 살피느라 들락날락 / 猛虎伺人出復沒
숲에서 쏴아 하고 찬 바람이 불어오니 / 林樾颼颼嘯有風
차가운 아침 공기 아직 뼈를 파고드네 / 初日未高冷砭骨
꽹과리와 함성으로 압박하자 범이 나와 / 扣鐵群呼虎乃行
천천히 바위 밑에 누워 기회 노리는 듯 / 徐卧巖底意欲出
범이 누운 뒤쪽으로 엎드린 채 살금살금 / 潛從虎背伏且進
숨죽이고 다가가니 머리털이 쭈뼛쭈뼛 / 細息累足寒毛髮
점차 거리 가까워져 고개 살짝 들고 보니 / 地勢漸近稍伸脰
바위 뒤로 얼룩무늬 슬쩍 드러나는구나 / 隔巖微見文章發
질풍같이 큰 바위를 밀어 떨어뜨리자 / 急下大石如疾風
범이 미처 몸을 돌려 피하지 못하여서 / 虎欲回身回未得
요골이 돌에 맞아 순무처럼 박살났네 / 石碎腰骨秋菁若
바위에 부딪혀서 높이 튕겨 나갔다가 / 衝巖跳立十丈强
지축(地軸)이 흔들리게 큰 소리로 울부짖고 / 牛吼雷鳴坤軸裂
성이 나서 돌덩이를 흙처럼 씹어 대며 / 嚼石如土力容易
노기를 주체 못 해 사람 향해 달려드네 / 餘怒直向人中突
사람들이 힘을 내어 일제히 돌 던지니 / 人力齊奮石勢集
이마와 가슴엔들 어찌 돌을 피하리오 / 陷額撞胷誰敢遏
이리저리 날뛰다가 기세 점점 약해져서 / 高騰低騰勢漸脆
잠시 뒤에 비틀대며 비탈 아래 주저앉네 / 須臾蹭蹬坐崖谷
울음소리 끊어지니 어찌 그리 고요한가 / 噭哮聲絶何寂寂
살았을 땐 만 사내가 모두 꼼짝 못 했지만 / 生時萬夫伏
죽은 뒤엔 양쪽 발을 아이들이 만져 보네 / 死後枝撑兩脚兒童辱
네가 전에 사람 먹어 귀가 세 곳 찢겼는데 / 爾昔食人耳三拆
어찌 홀로 사람에게 먹히는 걸 면할쏜가 / 那能獨免人爾食
점한이 올라타고 백 사내가 둘러메고 / 店漢騎之百夫擔
웃으면서 관가로 가 수급(首級)처럼 바치도다 / 笑獻官家如獻馘
호리처럼 날뛰는 인간들은 조심하라 / 嗟哉狐狸陸梁何不戒
너는 보지 못했느냐 / 爾不見
포학한 맹호도 주륙되고 만다는 걸 / 猛虎騁惡尙可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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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최생에게 주다〔贈崔生〕
최생은 얽매이길 싫어하는 자 / 崔生脫羈者
촌구석에 살려고 들지를 않아 / 不肯棲蓬蒿
순천을 휘저으며 쏘다니다가 / 特作順天橫
진주의 호걸 찾아 읍을 하였네 / 長揖晉州豪
하룻밤에 천금을 아까워 않고 / 千金散一夕
기분 좋게 술값으로 쓰는가 하면 / 快意淸濁醪
활보하며 협객들과 교제를 맺고 / 高步結客場
옆구리엔 긴 칼을 차고 있는데 / 脅上橫佩刀
석 잔이면 곧바로 거나해져서 / 三杯輒半醉
붉은 얼굴 기름이 흐르듯 하네 / 赤顔如流膏
흥분해서 손바닥을 치며 말할 땐 / 張髥一抵掌
큰 목소리 물가를 뒤흔드는데 / 大聲掀亭皋
호방한 말 속된 말 개의치 않고 / 豪談與俚語
생각대로 거침없이 쏟아 내도다 / 意到寧少擇
호남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이곳 / 湖嶺二百里
단성에 있는 나를 찾아왔는데 / 訪我丹丘側
틈을 타서 관아의 종들 다그쳐 / 餘閒策官隷
나무와 돌 끌어다 여울을 막고 / 束瀨屯木石
급류에다 통발을 포개 놓으니 / 層笱抗急溜
거센 물살 벽력같은 소리를 내네 / 力鬪生霹靂
물고기들 갇힌 채로 허둥거리며 / 群鱗勢顚倒
센 물살에 휩쓸려서 퍼덕이는데 / 前擲不敢逆
귀신같은 솜씨로 작살 날리니 / 騰叉若有神
천막 안에 구경꾼들 빽빽하여라 / 星坐沙邊幕
새벽에 으스대며 돌아오는데 / 晨歸自矜顧
큰 고기가 광주리에 버글거리니 / 大魚筐裏積
펄펄 뛰며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 超騰競張口
지느러미에서는 붉은 물 뚝뚝 / 鬐鬣紅欲滴
마침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 遂令四座客
보여 주며 극도로 즐거워하네 / 相視劇相快
솥에 넣고 맛있게 탕을 끓이고 / 香薰大鼎烹
주방에서 눈과 같은 회를 뜬 뒤에 / 雪飛中廚鱠
아이를 불러 술을 사 오게 하고 / 呼兒命杜康
그대에게 한 잔 또 한 잔 권하네 / 勸君一杯又
그대 급히 돌아가려 하지 말지니 / 君歸愼無遽
이 즐거움 내가 내심 취하려 하네 / 此樂吾竊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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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환아정에서 지곡사로 가다〔自換鵝亭赴智谷寺〕
마을을 다 지나서 산 입구로 들어서자 / 穿盡邑村山口入
병처럼 좁던 골에 홀연 들이 열리누나 / 初似壺中忽野闢
겁이 나서 말을 내려 가마로 다리 건너 / 下驢凌兢輿渡橋
남쪽 숲에 도달하니 사찰 문이 우뚝 섰네 / 南抵林煙寺門卓
삼면에는 봉우리들 빽빽하게 둘렀는데 / 三面峯高密似圍
골짜기 문 앞쪽으로 작은 길이 나 있구나 / 洞門前呀行徑拆
비늘 같은 절집 기와 평지에 반사되고 / 魚鱗梵瓦照平地
작은 암자 산허리에 자리를 잡았어라 / 小菴或占山腰築
돌 누대에 자리 펴니 저녁 해가 비쳐 들고 / 鋪筵石樓樓日斜
중이 와서 북 치는데 크기가 집채 같네 / 僧來擊鼓鼓如屋
중의 말이 이 절 중은 누구보다 고달프니 / 僧言此寺僧最苦
관아가 절 가까이 있는 것이 이유지요 / 寺去官門纔咫尺
종이며 신발이며 새끼줄을 막론하고 / 無論紙鞋與繩索
관아에서 온갖 것들 쉴 새 없이 요구하여 / 官門百須紛相責
아침에 마음 다해 관의 명을 봉행하면 / 朝奉官旨竭心行
저녁때도 되지 않아 명이 다시 이르지요 / 未暮已又官旨續
아전들이 날뛰는 게 포악한 범과 같아 / 官吏隳突惡若虎
승도들을 개 묶듯이 묶어 가곤 하는데 / 縛束僧徒如犬縛
수령은 부모이니 감히 불평 못 하지만 / 官是父母何敢說
아전들이 제 주머니 물건처럼 여기지요 / 鄕廳吏廳爲囊槖
공역은 무한하고 받들 힘은 부족하니 / 公役無限力有限
당장 먹을 양식조차 거덜이 나 버렸지요 / 以玆僧不謀朝夕
탄식하는 중의 말에 가을밤이 깊어 가고 / 僧語喞喞秋夜深
어둑한 푸른 창에 등불 심지 떨어지네 / 碧窓翳翳蓮燈落
이보게나 마음 아픈 얘기는 그만하게 / 僧兮僧兮勿復言
샘물 소리 고운 달빛 못 즐길까 두려우니 / 恐損我泉聲月色今宵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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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공경히 아버님의 시 〈차운하여 여우 상인에게 주다〉에 차운하여 써서 여우에게 부치다〔敬步家大人次贈汝愚上人之韻 書寄汝愚〕
한가로이 산속에서 연잎 옷 입고 / 境閒荷製服
출타 않아 나막신에 이끼 덮였네 / 門掩屐生衣
떠도는 몸 여전히 낯선 자린데 / 蓬梗仍他席
이때에 또 산초나무 꽃이 피었네 / 椒花又此時
지난날 찾아 주지 않았더라면 / 向非飛遠錫
내 어찌 맑은 인품 접했으리오 / 那得接淸機
눈 맞으며 가사를 새로 만들고 / 鬪雪新磨衲
구름 속에 몰래 시를 감춰 두었네 / 攜雲暗護詩
묘한 향기 관사에 퍼져 나가니 / 妙香官舍覺
참된 기운 아전들이 알아보도다 / 眞氣吏人知
무리를 떠나와서 불경 외우고 / 貝葉離喧誦
출정하여 긴 지팡이 짚고 왔도다 / 胡藤出定持
빈 골짝의 발소리로 교석에 답례하고 / 空跫答喬舃
행각으로 준마 탔던 지둔(支遁)을 비웃도다 / 行脚笑支騏
방장산 옆에 와서 나그네 되니 / 爲客隣方丈
돌아가고 싶어서 배에 누웠네 / 思歸卧楫師
저물도록 즐거운 대화 나누고 / 軒陰改軟語
노을이 붉게 탈 때 먼 산을 보니 / 霞焰對脩眉
다리 옆 나무에는 장기(瘴氣) 걷히고 / 瘴歇橋邊樹
성곽 밖의 비 앞길은 말라 있도다 / 泥晴郭外碑
세속 인연 끊은 몸이 어찌 머물랴 / 緣空那可住
생각 들자 돌아간다 인사를 하네 / 意到遂言歸
한스럽게 용과 함께 호위 못 하니 / 恨負參龍護
어찌 학과 짝이 되어 추종하리오 / 爭能伴鶴追
언 강의 찬 기운이 꿈을 깨우고 / 氷江寒攪夢
관사의 등불 아래 그리움 깊네 / 官燭黯增思
쌍명암의 봄 폭포를 보러 갈 테니 / 春瀑雙明約
솔 오솔길 나를 위해 닦아 놔 주오 / 松蹊爲我治
공경히 아버님의 시를 첨부하다〔敬附家大人韻〕
까마득히 먼 산속 율곡사에는 / 迢迢栗谷寺
초연하게 가사 입은 승려가 있어 / 矯矯稻畦衣
가부좌 틀고 앉아 천고에 놀고 / 斂屨遊千古
명상하며 사계절을 보내곤 하네 / 冥心了四時
얼음이 비추어서 살결이 되고 / 氷惟暎爲肉
구름은 절로 덕기(德機) 감추었어라 / 雲自杜成機
생계는 탁발하여 꾸려 나가고 / 契活生蓮鉢
문장은 국화 시를 물어볼 수준 / 文章問菊詩
장명등(長明燈)은 속세에서 보기 어렵고 / 龕燈世難見
식사 때의 경쇠 소리 새들이 아네 / 飯磬鳥方知
공무에 매인 몸이 틈을 내어서 / 簿牒曾餘暇
마침내 불경 들고 사찰 찾으니 / 楞伽遂一持
보리심은 달아나던 마음 돌리고 / 道心回逸鹿
북쪽 향한 그리움도 진정되었네 / 朔思去罷騏
지경이 툭 트여서 산귀신 없고 / 境闕無山鬼
청명한 가을날에 비도 걷히니 / 秋淸捲雨師
관아에서 나계를 저버렸지만 / 公門背螺髻
등불 아래 고아한 모습 꿈꿨네 / 官燭夢芝眉
어젯밤 나루에는 얼음이 얼고 / 昨夜氷平渡
앞길의 비에 눈이 흩뿌렸는데 / 前街雪糝碑
표연히 바람 맞고 찾아왔다가 / 飄然涉風至
껄껄 웃고 물 거슬러 돌아갔어라 / 笑罷遡溪歸
애초부터 마음이 잘 맞았으므로 / 微尙忻初愜
따라갈 수 없는 게 한스럽지만 / 冲規恨莫追
불가에는 본래부터 애착 없으니 / 渠家本無愛
빈집에서 단지 서로 그리워할 뿐 / 虛閣但相思
산속에서 만난 흥취 못다 했기에 / 不盡丹梯興
어쩌면 짚신 신고 다시 찾으리 / 靑鞋或更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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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을축년(1745, 영조21) 원일에 이 동년 몽서 이름은 성경인데 뒤에 헌경으로 개명하였다. 를 생각하다 20운〔乙丑元日懷李同年夢瑞 星慶後改獻慶 二十韻〕
원일은 예로부터 있었지마는 / 元日雖從古
객지살이 시름은 지금 겪는 것 / 羈愁實在今
한양은 북두성과 인접해 있고 / 京城隣北斗
고향 소식 남금과 맞먹는다오 / 鄕信敵南金
세월은 뜬 인생이 한스럽지만 / 歲月浮生恨
시서는 어진 선비 마음이로다 / 詩書良士心
객지에서 분주하게 오고 가느라 / 客遊紛去住
우리들의 만남이 뜸하였어라 / 吾輩曠招尋
그대는 조정의 훌륭한 선비 / 之子當朝彦
시에는 옛 음조가 깃들어 있네 / 爲詩有古音
질주하는 천리마와 같은 자질에 / 驥凌千里迅
반딧불은 오거서(五車書)를 비추었어라 / 螢照五車深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 心事於吾瀉
술 취하면 눈썹을 치켜세웠네 / 眉稜得酒森
밝은 때에 이 같은 사람을 보니 / 明時見此物
홀연히 일어남을 누가 금하랴 / 倏起復誰禁
쏘는 족족 표적을 명중시키고 / 碎的無虛箭
문단에선 덮었던 이불 뺏었네 / 騰毫捷覆衾
금첩의 보답을 동시에 입고 / 俱膺金帖報
친림(親臨)하신 성상께 함께 절했지 / 同拜袞衣臨
대궐 문이 열리면서 해와 달 뜨고 / 日月開閶闔
늘어선 반열 위로 소소 울렸네 / 簫韶列佩簪
당시에 우리 함께 활보했는데 / 當時兩高步
이별하고 떠나오니 첩첩 산들뿐 / 一別疊群岑
자라와 악어 굴에 종적 감추고 / 斂跡黿鼉窟
비겹 우는 숲에서 책을 보노라 / 看書鵯鵊林
말은 갈 곳 없어서 시름을 하고 / 馬愁天欲盡
부평초는 가없는 바다 겁내네 / 萍怯海無潯
우리 도는 은자(隱者)의 삶 감내하거니 / 吾道堪烏帽
〈고산곡〉을 소금으로 연주하도다 / 高山卽素琴
가을에 찾아와서 많은 시 지어 / 秋裝蒙數什
낯선 데서 읊조리는 날 위로했지 / 他席慰孤吟
한양 땅의 소식은 눈에 끊기고 / 雪斷終南鴈
서리 내린 영남에는 다듬질 소리 / 霜鳴嶺外砧
긴 비늘을 잡아 둘 수 있으랴마는 / 脩鱗那得挽
남미주를 우리 함께 들지 못하네 / 婪尾不同斟
밝은 시대 훌륭한 인물이 많고 / 聖代才賢足
객거(客居)에는 장기(瘴氣)가 침범하도다 / 浮居瘴癘侵
그리워하는 때에 봄까지 오니 / 相思又春色
매화 피면 밝은 해가 그늘 걷으리 / 梅日沃群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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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방장산가를 지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이익경 태운 을 전송하다〔方丈山歌 送李翼卿 台運 還京〕 과거 날짜가 연기되어 익경이 출발하지 않았다.
그대는 모르는가 / 君不見
삼한의 밖에 있는 삼신산 가운데서 / 三神山在三韓外
신비함과 수려함은 방장산이 으뜸임을 / 神秀輒數方丈最
깎을 때에 하부를 빌렸을 리 없건마는 / 刻鏤寧借夏斧飛
날카로운 봉우리가 남두성을 찌를 듯 / 崚嶒恐觸南斗壞
남쪽 땅은 사월에도 날씨가 무덥지만 / 炎州四月天似爇
천왕봉 정상에는 아직 눈이 펄펄 날고 / 天王絶頂猶飛雪
원기가 아득하여 가없는 바다 끝에 / 元氣茫茫海無壁
터럭 같은 유구국과 일본이 보이도다 / 琉球日本細如髮
천계의 울음소리 지척에서 들리는 듯 / 天鷄彷彿咫尺聞
생황 소리 아련하게 하루 세 번 퍼지는데 / 鸞笙縹緲三時發
중국에서 말만 듣고 진면목을 보지 못해 / 中原聞名不見眞
진 시황과 한 무제의 백발 날로 늘어 갔네 / 秦皇漢武白髮新
거령이 몇 번이나 무함의 뼈 조문했나 / 巨靈幾弔巫咸骨
폭풍이 동남 실은 배를 용서 않았어라 / 逸颶不饒童男船
조령을 넘어서면 수십 개의 고을들이 / 鳥嶺以外數十郡
다닥다닥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고 / 裂趾枕腹紛星陳
그 가운데 단성은 단구라고 불리는데 / 中有丹城號丹丘
거사가 이곳에서 포의(布衣)로 지낸다네 / 居士居之不冠巾
지난날 절을 하고 〈장양부〉를 올렸을 때 / 往者拜獻長楊賦
군왕께서 명정문에 나와 소견하셨지만 / 君王召見明政門
관모(冠帽)가 어찌 내게 돌아올 리 있겠는가 / 烏帽豈爲吾輩設
거사가 껄껄 웃고 서진으로 나왔어라 / 居士大笑出西秦
진주성 아래에는 구름이 자욱하고 / 矗石城下萬磧雲
우화루 앞 들판은 방초 돋은 봄날인데 / 羽化樓前芳草春
방초 돋은 봄날 가고 가을 낙엽 휘날리면 / 芳草春歸秋葉飛
나는 누굴 생각하나 내 친구를 생각노라 / 我思伊何思故人
지난해 강추위가 몰아치던 십이월에 / 去歲玄冬十二月
그대 여윈 말을 타고 서울을 떠나오니 / 君騎瘦馬辭長安
방장산 앞 강물에 저녁 연무 피어날 때 / 方丈山前江氣夕
배회하던 내가 문득 서울 손님 만났어라 / 徘徊忽逢長安客
바둑 두던 난간에는 맑은 바람 대에 불고 / 晴軒對棋竹籟鳴
시 겨루던 서재에는 등잔 심지 떨어졌지 / 夜堂鬪詩燈花落
나와 그대 수창하여 먹물이 흥건하니 / 我唱君酬墨汁豪
세모의 즐거움이 높은 벼슬 맞먹었네 / 歲暮此樂公侯敵
그대여 이와 같은 즐거움이 어떠한가 / 子兮如此樂事何
정월달 경신일에 촛불 켜고 지새웠지 / 上元之月庚申燭
취한 뒤엔 강직한 태도 금치 못하였고 / 醉後誰禁骯髒態
호기로워 방황하는 표정 짓지 않았어라 / 狂來不作棲遑色
얼마 안 돼 그대가 과거 보러 간다 하니 / 無何汝稱赴禮闈
인생살이 만남과 이별이란 알 수 없네 / 人生聚散不可期
강 얼음이 풀리고 언 땅도 녹았으니 / 江漢氷開后土釋
남쪽에서 돌아가는 배를 용이 호위하리 / 南國歸舟龍護之
그댈 지금 보내면 언제 다시 오려는지 / 送君去來何日
하늘 끝에 구름이 아득하게 덮였어라 / 碧雲渺渺迷天末
나도 이젠 먼지 덮인 속세를 벗어나서 / 我亦從此脫塵寰
짚신 신고 길을 나서 방장산을 향해 가리 / 靑鞋去去方丈山
신선이 왜 이렇게 늦게 왔냐 말을 하고 / 仙之人兮謂余來何遲
황정 복령 대부분 천년이나 묵었을 터 / 黃精茯苓動千年
힘들게 백전하는 그댈 굽어보노라면 / 下窺夫子白戰苦
마당의 싸움닭들 모두가 가여우리 / 登場萬鷄俱可憐
훗날 그대 내려와서 곡강연에 참석하여 / 恐君他日來從曲江宴
피리 불어 잠든 나의 난학을 깨우리라 / 笛聲攪我鸞鶴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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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제금당 팔영〔製錦堂八詠〕
느지막이 일어나 산색을 보니 / 晩起看山色
안개는 사라지고 영롱한 햇빛 / 煙開彩旭籠
봄 강에는 붉은 꽃잎 일렁이는데 / 春江赤相蕩
꽃 밑에선 물고기들 헤엄치누나 / 花底浴魚龍
엄혜산의 봄꽃〔嚴惠春花〕
눈처럼 깨끗하고 맑은 하늘에 / 寥天澄似雪
한없이 밝은 달이 떠오르도다 / 無限出蟾輪
높은 누대 위에 올라 술을 마시니 / 對酒高樓上
비단옷의 기녀가 한기 느끼네 / 羅衣秋妓寒
우화루의 가을 달〔羽化秋月〕
강가에는 옛 고을 터가 있는데 / 江上古邑基
울창하게 나무들이 늘어섰도다 / 蒼蒼多樹木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들리고 / 砧鳴不見村
석양 무렵 차가운 연무 퍼지네 / 落日寒煙色
강루의 저녁 안개〔江樓暮煙〕
조금씩 새벽빛과 어우러지고 / 稍與晨光合
물기운과 합해져 자욱이 피네 / 兼將水氣濛
아침마다 마셔도 다함이 없어 / 朝朝餐不盡
적성에서 지내며 양생(養生)을 하네 / 生理赤城中
적벽의 아침노을〔赤壁早霞〕
나무꾼이 별빛 보며 조반을 먹고 / 樵童星乃飯
긴긴 날에 푸지게 나무를 했네 / 日長樵更多
돌아갈 땐 저녁별이 반짝이는데 / 樵歸又昏星
먼 산에 노랫소리 퍼져 나가네 / 遠遠山外歌
백엄의 초가〔柏崦樵歌〕
해가 지자 강 기운이 왕성해져서 / 日沈江氣王
온 천지에 안개가 퍼져 나가네 / 煙靄一以舒
고기 잡는 사람은 볼 수 없지만 / 不省有漁者
환한 저곳 고기잡이 불빛이리라 / 火照應是漁
모래톱의 고기잡이 불빛〔沙洲漁火〕
걸어서 신안강의 배로 올라가 / 步上新安舟
강 물결을 손으로 희롱하도다 / 手弄新安波
갈매기는 나처럼 말이 없는데 / 白鷗兩忘言
서풍이 여뀌꽃에 불어오누나 / 西風吹蓼花
신안강의 뱃놀이〔新江泛舟〕
깎이고 쪼개어진 많은 바위들 / 斲出雲根疊
산을 둘러 백마성을 이루었어라 / 束成山帶圍
땅이 녹은 봄날에 밤비가 내려 / 春泥夜來雨
새 고사리 삶는 물을 제공해 주네 / 供我煮新薇
백마성에서 고사리를 삶다〔白城煮薇〕
공경히 아버님의 〈단구 팔영〉을 첨부하다〔敬附家大人丹丘八詠〕
사산(蛇山) 문익점(文益漸)의 효자려(孝子閭)가 여기에 있다.
한 기슭은 꾸불꾸불 뱀처럼 달려가고 / 蜿蜒一麓走如蛇
효자비 앞쪽으로 해가 절로 기우누나 / 孝子碑前日自斜
남쪽에 온 나그네 옷을 재차 받았는데 / 南客未廻衣再授
목화꽃에 가을바람 다시 또 불어오네 / 秋風又發木綿花
단계(丹溪) 우리 조정의 이름난 공경(公卿)이 이곳에서 많이 나왔다.
예로부터 단계 기슭 마른 적이 없었지만 / 從古丹溪岸不枯
본조에 이르러선 보배를 다 쏟아 냈네 / 淸朝倒瀉盡明珠
자손들이 더러는 옥과 같이 빼어난데 / 子孫往往能如玉
평생토록 오두막에 앉아 값을 기다리네 / 歲晏窮廬坐待沽
강루(江樓) 옛 호접루(蝴蝶樓) 터가 이곳에 있다.
사람 없는 백마성은 산안개에 싸였는데 / 白馬城空石氣浮
인연(人煙)으로 변해 버린 이곳이 강루로다 / 人煙變化卽江樓
한 언덕에 풀 시들고 호접도 사라진 뒤 / 一丘衰草無蝴蝶
저물녘에 비가 내려 가을로 접어드네 / 雨倂殘陽入素秋
우화루(羽化樓) 이때 현암 공(玄巖公)이 병으로 호서(湖西)의 시골집에 머물고 있었다.
먼 고향 쪽 구름 보며 시름하는 외기러기 / 千里湖雲一鴈愁
찬비 오는 무릉의 가을 꿈을 꾸곤 하네 / 夢中涼雨茂陵秋
동어로 남쪽 바다 날려고 하였지만 / 銅魚誤學圖南翼
저물녘에 도리어 우화루에 기댔노라 / 落日還憑羽化樓
적벽(赤壁)
구름이 다 사라지고 달빛이 퍼져 가니 / 纖雲卷盡月舒波
맑은 광채 고금이 다를 바가 없으리라 / 今古淸光無少多
끊임없이 왕래하며 적벽을 바라보니 / 袞袞去來看赤壁
조각배 몇 번이나 소동파가 되었던가 / 扁舟幾度作東坡
은선암(隱仙菴)
늦은 가을 단성에서 목화 수확 살펴보니 / 秋晩丹丘檢木禾
홀연히 옥호 속의 선경(仙境)으로 들어간 듯 / 瑤空忽入玉壺多
은선암 근처에서 중을 만나 얘기할 제 / 隱仙菴畔逢僧話
서풍에 참외만 한 대추가 익어 가네 / 幾樹西風棗似瓜
용흥사(龍興寺)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여기에 있다. 이때 산음 현감을 겸임하고 있었다.
술잔이 물결 따라 빙빙 돌며 지나가니 / 杯逐游湍旋旋過
하늘이 푸른 돌을 움푹하게 파 놓았네 / 天開蒼石自成窠
공무(公務)로 산음 땅에 수시로 이르지만 / 無端簿牒山陰至
풍류가 영화 같다 말하기는 부끄럽네 / 羞說風流是永和
느티나무 정자〔槐亭〕
만 솔은 슬피 울고 사람 하나 없는데 / 萬松哀處寂無人
골짜기에 가을이 와 말을 자주 멈추노라 / 峽裏行秋駐馬頻
병든 느티나무에 석양빛이 비치니 / 一樹病槐西日照
시내 건너 누런 잎이 온통 가을 정취로세 / 隔溪黃葉更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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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신혼의 이별〔新婚別〕
돌 옆에는 대나무가 푸른빛 띠고 / 靑靑石上竹
정원에는 곧게 자란 측백나무들 / 挺挺園中柏
저는 본래 명문가의 자식인 데다 / 妾本名家子
용모도 무척이나 깨끗했지요 / 容華何潔白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 偏得父母憐
어려서 부녀자의 법도 배우니 / 生少斅女則
그윽한 난초 향기 몸에 배었고 / 幽蘭緝成氣
목란을 장신구로 차곤 하였죠 / 木難佩爲飾
부끄러워 이웃집을 엿보지 않고 / 羞澁不窺隣
비단을 짜는 데만 공을 들이니 / 但事雲錦織
부모님이 다 컸다고 대견해하며 / 父母喜妾長
당신 집에 시집을 보내셨지요 / 敎妾君家入
신발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걷고 / 從容紫絲履
앉고 서는 것도 모두 반듯했는데 / 規坐而矩立
시집와서 이삼 년이 흘러갔지만 / 托身二三載
은하수가 둘 사이를 막고 있으니 / 河漢一以隔
당신의 음성조차 모르는 판에 / 未曾識君聲
얼굴이야 말해서 무엇하리오 / 何論見顔色
때때로 당신 꿈을 꾸곤 하는데 / 時時入夢姿
뭔가 고민 있는 듯한 표정이었죠 / 彷彿苦難的
마음이야 어찌 내게 소원하랴만 / 君意豈誠疎
옥 같은 여인들이 너무도 많아 / 衆女紛如玉
북쪽 집엔 원앙 그린 병풍을 치고 / 北里䲶鴦屛
서쪽 집엔 비취색 휘장 쳤지요 / 西舍翡翠幕
아침마다 잉어회를 상에 올리고 / 朝朝鱠赤鯉
거문고를 마음대로 연주하면서 / 錦瑟如意作
어떻게든 낭군의 사랑 받으려 / 要得求顧眄
요염하고 아리따운 웃음 지으니 / 姣笑與郞劇
좋은 때에 뭇 여인과 어울리면서 / 佳期嘯群匹
첫날밤을 치르려는 생각 않네요 / 不念新婚夕
당신이 처음 나와 약혼하던 날 / 君初納采時
덕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 自謂頗好德
아쉽게도 얘기를 해 보지 않아 / 所嗟未交言
깨끗한 내 마음을 알지 못하니 / 氷心君莫識
선물 주려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 引領欲有贈
두 손 가득 작약을 쥐고 있어요 / 留荑藹盈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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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단구록 상(丹丘錄上)
표려행〔豹驢行〕 서문을 덧붙이다.
거사가 당나귀를 한 마리 키우는데 굳건한 외모에 뛰어난 기상을 지녔다. 다리에 표범처럼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으므로 ‘표(豹)’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 무늬가 아니었다면 너는 ‘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늬는 너를 꾸며 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장추(長楸)와 금랄(金埒)에서 너의 무늬를 뽐내지 않고 주인과 더불어 자신의 뛰어난 점을 숨긴 채 세상에서 두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니, 너의 무늬를 귀하게 여겨 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조물주가 너에게 무늬를 주는 데는 빼어났지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너의 무늬를 사랑하게 하는 데는 빼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참으로 무늬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면 무엇하러 무늬를 주었단 말인가. 비록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거사의 당나귀는 너무도 뛰어나서 / 居士有驢絶耿介
처음에는 그림 속의 말을 보는 듯하였네 / 牽來忽若瞻圖畫
미백색의 털빛은 정결함이 으뜸이고 / 毛爲微白淨堪數
길고 붉은 갈기는 띠를 맨 듯 드리웠지 / 項垂長髹繫似帶
우뚝 서면 굳센 발목 힘줄보다 뻣뻣하고 / 勁骹卓地瘦於筯
마디 주변 무늬는 검은 구름 날아가듯 / 繡文繞節玄雲翥
뾰족한 귀는 절로 쫑긋 섰다 다시 눕고 / 尖尖耳自張復弛
정수리의 짧은 갈기 빳빳하게 곧추섰네 / 短短騣能竪不倚
맑은 정신 높은 기상 방자함도 남다르니 / 神淸氣矯恣挺出
사슴인 듯 표범인 듯 먼지 세상 초탈했네 / 鹿耶豹耶蛻塵累
잘 놀라고 의심 많아 날뛸 듯이 하다가도 / 其性驚疑稍欲橫
지혜로운 놈이라서 저 스스로 그치도다 / 爲物靈慧還自止
들에서 물 건널 땐 등을 높이 솟구치고 / 沿涉野水輒背竦
잔도(棧道)를 달려갈 땐 용맹하기 그지없네 / 超騰嶺棧最身勇
지난해엔 나와 함께 한양으로 길을 떠나 / 前年出向長安陌
한양의 넓은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지 / 長安大道淸無壅
붉은 재갈 뻐긴다면 과연 속된 무리이고 / 紫鞚驕嘶果下胤
꼴만 먹다 죽는다면 형편없는 종자일 뿐 / 靑芻飽死駑駘種
거사가 표려에게 일러 주노니 / 居士謂豹驢
진청이 없는 판에 누가 너를 생각하랴 / 世無秦靑誰念渠
바닷가에 산이 있고 산엔 지초(芝草) 있다 하니 / 海上有山山有芝
내가 곧장 너를 타고 신선 찾아 가려는데 / 吾行卽騎訪仙廬
당나귀야 당나귀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 驢乎驢乎云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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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적벽가〔赤壁歌〕
단성현은 고을 작아 마음 가는 데 없지만 / 丹城縣小無可意
오직 적벽 하나만은 경치 무척 뛰어나니 / 惟有赤壁頗詭異
산맥이 이어지다 백마성과 갈라져서 / 山脉迤分白馬城
절벽이 가파르게 땅에 우뚝 꽂혔어라 / 壁勢蒼然揷厚地
이어진 바위들은 그 모양이 각각이라 / 雲根絡綴狀非一
곰과 말과 소의 형상 공중에 떠 있는데 / 熊羆馬牛空中寄
행인들이 벌벌 떨며 그 밑으로 지나가면 / 行人凜栗其下過
천 장의 벼랑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 / 千仞谽谺危欲墜
푸른 솔엔 연녹색의 여라가 감겼는데 / 蒼松綠蘿相間之
아침마다 노을 일면 새 모습을 드러내네 / 朝朝霞起弄新姿
관아의 화각 소리 적벽 향해 울리면 / 官門畫角吹向壁
적벽에서 우레 같은 메아리를 보내오고 / 壁面相應轟雷馳
그 아래에 녹색의 신안강이 있어서 / 下有新安綠江水
밤낮없이 적벽의 그림자가 일렁이네 / 晝夜影動虛無裏
내가 여기 온 지도 두세 해가 되었는데 / 我來此地二三載
아침저녁으로 봐도 싫증나는 줄 모르니 / 朝看暮看情未已
달 뜬 밤에 적벽을 어찌 저버리겠는가 / 有月何孤赤壁夜
각건 쓰고 외로운 배에 몸을 기대노라 / 角巾每向孤舟倚
밝고 밝은 달빛은 사계절이 똑같으니 / 明明月色同四時
칠월이나 시월이나 특별날 게 무엇이랴 / 七月十月何必奇
당시에 퉁소 부는 사람 위에 떴던 달이 / 當時洞簫聲邊月
단구거사 술잔을 길이 비춰 주는구나 / 長照丹丘居士巵
오호라 적벽에는 크고 작음 없으니 / 嗚呼赤壁無小大
소동파(蘇東坡)는 부 지었고 나는 시를 짓도다 / 蘇子有賦儂有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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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장마를 탄식하다〔長霖歎〕
만산에 짙은 안개 한량없더니 / 不盡萬峯霧
우렛소리 골짜기를 흔드는구나 / 訇然衆壑雷
영남 땅에 사월부터 내리던 비가 / 嶺南四月雨
유월 지나 칠월에도 그치질 않네 / 六月七月猶不開
북극의 하늘 기둥 갑자기 기울어서 / 秪疑北辰天柱乍傾側
만 가마니 은하가 하늘에서 쏟아지나 / 倒瀉銀河萬斛天上來
아니라면 조왕이 용과 백번 겨루느라 / 不然鳥王與龍鬪百場
우림군이 천 개의 창 공중에서 휘두르나 / 快驅羽林千槍空中回
산골짝에 파도 넘쳐 백 갈래 물 모여드니 / 山谷揚濤百派集
신안강이 불어나서 물살이 화살 같아 / 新江橫溢如箭急
만 그루의 나무를 쉽게 꺼꾸러뜨리고 / 顚倒何有萬章木
천 장 높이 산을 덮쳐 씻기려고 하는구나 / 乘凌欲漱千尋嶽
천 장 산을 씻기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 / 千尋嶽漱猶可
논밭의 곡식들을 모두 엎어 버렸어라 / 禾溝麥壠皆飜覆
지친 제비 나지막이 날며 춤추지 않고 / 石燕身疲低不舞
날개 젖은 까마귀는 어디론가 숨었어라 / 金鴉翅濕潛成伏
장로들은 탄식하고 과부들은 한숨 쉬니 / 長老長吁寡婦歗
가을 들에 통곡 소리 끊이지 않는구나 / 嗷嗷不絶秋原哭
엄혜산 허리에는 구름이 자욱한데 / 嚴惠之山石氣浮
구봉거사 단성의 적벽 앞에 살고 있네 / 九峯居士居赤壁
흙비가 옷 적시고 궤와 자리 퀴퀴하니 / 霾氛膩衣几簟腥
우러러 하늘 보며 길게 한 번 탄식하네 / 仰視乾宇一歎息
백 년 동안 붕당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 百年朋黨盛戈戟
음기가 하늘 찔러 하늘이 검어졌나 / 陰氣矗天天爲黑
아니라면 어찌 이리 장마가 극심할까 / 不爾霖曀何太劇
내가 우리 임금 위해 빗자루를 손에 들고 / 我欲爲君親擁篲
하늘로 날아올라 짙은 구름 쓸어 내어 / 飛上靑天掃陰翳
영원토록 풍륭 병예 간여하지 못하게 해 / 永使豐隆屛翳不敢干
태양이 내리쬐고 황도 개게 하고 싶네 / 大明揚輝黃道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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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약산 선생 만사 102운〔藥山先生挽 一百二韻〕
삼한 땅의 기운이 쓸쓸해지고 / 蕭瑟三韓氣
오수의 별자리가 아득해지니 / 蒼茫五宿躔
예로부터 세상이 어지러울 땐 / 古來於缺界
하늘이 큰 인물을 돕지 않았네 / 天不佑高賢
초가을에 부고받고 의아했으니 / 赴紙新秋怪
지난달에 시를 내게 보내 주셨네 / 詩筒去月傳
들보가 꺾여 버려 큰 집이 비고 / 樑摧空巨室
미꾸라지 설쳐 대어 못이 휑하네 / 鰌橫廓深淵
말세에 큰 인재를 얻기 어렵고 / 季葉才難得
문단의 일마저도 망연해지니 / 詞林事惘然
병들어 영남 땅에 머무는 몸이 / 病留炎海外
장기(瘴氣)에 시달리며 눈물 뿌리네 / 淚灑瘴雲邊
나라에 어진 인재 급하던 때에 / 國以賢良急
공께서 온전하게 지우(知遇) 입으니 / 公曾際會專
총명은 세상에서 보기 어렵고 / 聰明世眞間
기개는 유례없이 뛰어났어라 / 超越氣無前
마음은 가을날의 물처럼 맑고 / 秋水開襟照
피부는 봄날에 핀 꽃과 같으며 / 春花暎肉姸
문장은 펼쳐 놓은 비단과 같고 / 文章腸錦掞
담설은 긴 강물이 흐르듯 했네 / 談說舌河懸
《주역》은 단호하게 음을 내치고 / 太易排陰果
유기의 활 버들잎을 깨부쉈어라 / 由基碎柳弦
하왕만큼 기상이 늠름했으니 / 何王凜將及
여지의 죽음 누가 불쌍해하랴 / 蜍志死誰憐
신속하게 예리한 판단 내리고 / 捷出精神銳
강단 있게 기세 몰아 행동 취하니 / 橫驅氣勢堅
세속적인 명리(名利)를 탈피했는데 / 自能伸汨沒
위기 극복 어려울 게 무에 있으랴 / 何有撥迍邅
천리마의 발에 붉은 전광 스치고 / 赤電捎騏足
송골매의 발톱 쇠로 다듬었어라 / 金精厲鶻拳
홍범이 숨어 버린 세상을 만나 / 世丁箕範隱
초인의 지껄임에 동요 않다가 / 身不楚咻牽
중년에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 中歲收簪履
금상(今上)께서 인물됨을 인정하셨네 / 當朝別珷璇
썩은 뼈를 논한 상소 서릿발 같아 / 皁囊霜朽骨
연촉이 화전 위에 아롱댔으니 / 蓮燭纈花磚
시대를 근심하여 규간(規諫)하였고 / 剴切憂時語
연석에서 차분하게 도를 논했네 / 從容講道筵
난리의 큰 단서를 꺾어 버리니 / 籌摧亂階大
화란의 기미 먼저 환히 알았네 / 識炳禍機先
힘껏 도와 나라를 안정시킨 뒤 / 力贊金甌奠
철권에 이름 넣길 사양했으니 / 名辭鐵券鐫
봄날에 도성 안의 재앙 거두어 / 春收雙闕祲
만백성이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네 / 晝穩萬家煙
벼슬하며 올곧게 처신하므로 / 逸軌雲霄展
성상께서 발탁하여 은총 베푸니 / 珍芼雨露宣
성심이 항상 공을 사랑하시어 / 聖心常有眷
왕도가 치우침이 없게 되었네 / 王道佇無偏
광형과 급암처럼 종사를 위해 / 匡汲皆宗社
우리 임금 요순으로 만들려 하니 / 唐虞復廈氊
성상께서 발탁하는 교지를 내려 / 鳳綸惟簡在
시종신의 품계에 금세 올랐고 / 貂珥倏喬遷
사명을 받들고서 남쪽으로 가 / 使轄南星動
북두성과 닿은 대궐 그리워했네 / 仙樓北斗連
응대할 땐 언행이 온화했지만 / 言行藹酬酢
조정에선 못된 자들 용서 않았네 / 廷叱死蹻騫
군신 간의 의기투합 이러했지만 / 契合紛如此
물러나려는 뜻을 가지셨으니 / 遐情實有焉
허석했던 가의(賈誼)처럼 승진 빨라도 / 超同虛席賈
물러남은 급류 속의 전약수(錢若水)였네 / 退似急流錢
가을날 하의(荷衣) 입고 자유 누리고 / 蕭灑秋荷服
저물녘에 약초밭을 배회했으며 / 徘徊晩朮田
번화한 시장 옆에 살며 글 읽고 / 讀書金市側
약봉의 비탈에서 도를 닦으니 / 鍊魄藥峯巓
간간이 시기하여 헐뜯은 말들 / 間有猜讒發
대개가 왕의 총애 때문이었네 / 居多寵遇緣
한적한 섬돌에는 국화가 피고 / 砌閒黃菊護
열린 문엔 노송이 서려 있는데 / 門豁老松纏
부모님 봉양하며 잡념을 잊고 / 浮念刪晨省
비 오는 밤 형제가 한방에 잤네 / 餘歡囿雨眠
험난한 풍파 속의 지주이셨고 / 風波卽砥柱
티끌 같은 세상의 부처였으니 / 塵刹乃金仙
골목에는 참새 그물 펼칠 만해도 / 窮巷容羅雀
명리 좇는 자에게는 침을 뱉었네 / 名場唾慕羶
한 언덕에 서책이 넉넉하였고 / 一丘饒典籍
세 족당은 다투는 일 없었으니 / 三黨息戈鋋
성상께선 운하(運河)의 풀로 일컫고 / 睿賞官河草
상이 일찍이 “오모(吳某)는 지금 조정에서 부평초와 같은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강 건너는 배로 여겼네 / 輿情野渡船
은거할 땐 부지런히 독서하였고 / 沈冥恒兀兀
저술 또한 심오한 경지였으니 / 著述又玄玄
붉은 정곡 꿰뚫는 걸 법으로 삼고 / 法在紅心破
푸른 꼬리 선명함을 중히 여겼네 / 珍看翠尾鮮
소리 내면 사경과 조화 이루고 / 發聲諧泗磬
뜻은 묵은 학설에서 탈피하였네 / 立意蛻陳編
명쾌함은 장탕(張湯)이 쓴 판결문 같고 / 張鼠單辭確
갖은 맛이 조화된 건 오후정(五侯鯖)인 듯 / 侯鯖衆膩全
재주는 비교할 데 없이 높았고 / 才高不細級
마음은 참된 도리 터득한지라 / 心得有眞詮
좌고우면하는 태도 보이지 않고 / 光景無中境
매사를 분명하게 재단하였네 / 裁成別著天
밝은 감식력으로 신괴를 보고 / 方諸神怪見
뗏목 타고 고금을 오르내렸네 / 橫筏古今沿
밀려드는 물은 섬돌 개의치 않고 / 湊處元嫌砌
큰 물결은 세류(細流)를 다 받아들이니 / 洪來不擇涓
집집마다 닭이 울고 개가 짖어도 / 千門幻鷄犬
한 이치가 연비어약(鳶飛魚躍) 비추었어라 / 一理照魚鳶
문장에도 온전한 소가 없으니 / 壇坫無全目
나란히 겨룰 만한 자가 누구랴 / 櫜鞬孰竝肩
누군가가 영향을 준 게 아니라 / 非人作外援
내 힘으로 도달한 경지였어라 / 自我擬中權
성상께서 권점 찍어 드러내시니 / 御點推揚幟
공의 문형(文衡) 권점(圈點)에 상이 일찍이 어점(御點)을 가하였다.
붕사가 채찍 든 걸 싫어하였네 / 朋私忌著鞭
깊은 학식 급총서를 달가워 않고 / 幽何屑汲塚
회수에서 나는 옥과 빛을 겨뤘네 / 光欲鬪淮玭
상자 속에 담겨 있는 고매한 글들 / 有篋緘三昧
나라 안 사람들이 앙모하였네 / 翹心罄八埏
선비를 사랑하여 집에 있을 땐 / 在家常愛士
맞아들여 학문을 토론했으니 / 深庭別開椽
업후(鄴侯)의 서가 가득 아첨 꽂히고 / 鄴架牙籤滿
용문에는 선비들이 들어찼었지 / 龍門組帶塡
초하루의 인물평은 엄정하였고 / 月評森不已
시를 짓는 규정은 치밀했는데 / 詩令密難蠲
강석에서 함장과 쟁론 벌일 때 / 間席爭函丈
질문하면 정확하게 응대하셨네 / 撞鍾輒應篿
진퇴에는 두 가지 걱정 따르고 / 二憂隨進退
은거할 땐 세 즐거움 누리셨으니 / 三樂稱盤旋
밝은 때에 물러나서 자유 누려도 / 漫跡明時倦
칠실에서 충성으로 가슴 태웠지 / 忠腸漆室煎
갑자기 폐합하는 사태를 만나 / 蒼黃逢閉閤
정성 다해 경현역철(更絃易轍) 청하였으니 / 悃款責更絃
어탑(御榻)은 철문처럼 닫혀 있는데 / 禁地扃如鐵
고관들은 간담이 연도(鉛刀) 같거늘 / 榮班膽似鉛
상소하여 세 가지 일 권면하였고 / 血封三事聳
국맥을 한마디의 말로 이었네 / 邦脉一言綿
유도처럼 몸은 비록 은거했지만 / 有道身雖隱
원안의 눈물 절로 흘리셨으며 / 袁安涕自漣
문정공의 붓으로 마음 바루고 / 格心文正筆
계손이 매를 쫓듯 악 미워했네 / 嫉惡季孫鸇
일 처리엔 경륜이 빈틈이 없고 / 事外經綸密
가슴속에 모든 것을 꿰고 있었지 / 胷中細大穿
미나리도 맛있는데 뭐가 문제랴 / 何傷芹亦美
약이 병을 고치는 걸 보려 하였네 / 要見藥能痊
우국애군(憂國愛君) 정성은 부족함 없고 / 憂愛存無過
왕의 허물 줄이고자 노력하였네 / 淵涓銳省愆
아첨하는 자의 얼굴 염지초(染指草) 같고 / 佞顔騂指草
악의 괴수 추련에 승복하였네 / 魔領服秋蓮
처음 먹은 마음이 돌처럼 굳어 / 介石初心固
좌천되어 지방으로 부임했는데 / 仙鳧左降翩
청헌의 학조차도 지니지 않고 / 不煩淸獻鶴
은지의 샘물 거듭 노래하였지 / 再詠隱之泉
상이 자리 비워 두고 기다리시니 / 側席勤虛佇
돌아와서 어찌 감히 편히 지내랴 / 還都敢靜便
내직으로 옮긴 것은 경천과 같고 / 內遷資景倩
중비로 내린 은총 연년 같았지 / 中批寵延年
공이 외직에 있다가 간의(諫議)로 부름을 받았고, 곧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다.
구름문양 보자기에 싸 내린 표리(表裏) / 袞奬紅雲裹
맑은 강에 빤 것 같은 흰 명주였네 / 恩紬白漢湔
덕이 빛나 봉새가 내려앉았고 / 德輝忻鳳下
물속 괴물 서각(犀角)의 빛 두려워했지 / 水怪怯犀燃
은택이 멀리까지 미치게 된 건 / 欲識恩波遠
은거하던 때로부터 비롯됐으나 / 初從釣渚圓
문원에도 어려움 겪었거니와 / 文垣亦蹭蹬
낭묘 승진 억지로 지연시켰네 / 廊廟强遷延
친람(親覽) 거친 훈의를 감수하였고 / 訓義親經決
어제(御製) 정리 혼자서 주관하였네 / 宸章獨遣銓
어명 받고 개성(開城)의 유수(留守)가 되어 / 故都膺牘剡
풍속을 빠짐없이 두루 살피니 / 遺俗入帷褰
박연(朴淵)에는 무지개가 곧게 드리우고 / 淵瀑垂虹直
만월대(滿月臺)엔 사슴 풀이 무성하였네 / 臺芽覆鹿芊
촌락마다 따뜻한 정사 펼치고 / 陽春布井落
만일 위해 산천을 그렸지마는 / 陰雨繪山川
공이 개성 유수로 있을 때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관방(關防)의 요해(要害)를 그리게 하였는데, 장차 보고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했다.
단시간에 공의 풍도 그쳐 버리니 / 短局風期歇
우리 도가 나날이 전도되리라 / 斯文日觀顚
일찍부터 옥 같은 덕 흠모하다가 / 早欽如玉美
복규의 경계까지 듣게 됐는데 / 多忝復圭篇
도리로 온전하게 배양하시며 / 桃李培成植
부족해도 버리지 않으셨으니 / 柯桐蝕未捐
물속에 잠긴 검이 광채 발하며 / 沈鋩吐光怪
풀무질을 하여 힘껏 가르치셨네 / 開韛力陶甄
〈백설가〉를 영에서 읊조리시고 / 吟雪歌仍郢
황금 내건 연왕에게 보답하시니 / 懸金禮復燕
백토 깎는 재주를 감히 말하랴 / 敢言拚斲堊
통발 잊는 경지에 이르렀어라 / 別是到忘筌
진결이 기억에서 흩어져 가니 / 眞訣諳中散
공이 일찍이 양생(養生)의 비결을 배웠다.
영주를 악전에게 의지하였네 / 靈籌倚偓佺
여전히 영남에서 머무는 내게 / 客來猶嶺邑
편지와 함께 시를 보내셨는데 / 書到又詩箋
우리 도가 지금 어떤 지경이냐며 / 吾道今何似
더욱 힘써 나가자고 면려하였네 / 相期益勉旃
하늘은 왜 우리를 저버렸는지 / 天胡負家國
폭풍이 큰 나무를 쓰러뜨렸네 / 風忽倒楠楩
나라 안이 모두 놀라 방아 멈추고 / 輟杵驚朝野
널이 시전 지날 때는 통곡 소리뿐 / 過車哭市鄽
성상께서 지난날의 공훈 생각해 / 玉音提舊伐
높은 품계 공에게 추증하셨네 / 華贈送新阡
상이 연석(筵席)에서 공이 무신년(1728, 영조4)에 적도를 토벌한 공훈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공에게 정경(正卿)을 추증할 것을 명하셨다.
애통함은 남들보다 백배나 큰데 / 痛惜身堪百
천 리나 되는 길이 가로놓였네 / 微茫路恰千
반열에서 정숭(鄭崇)의 신발 못 끌고 / 班心未鄭履
주나라 사냥 수레 수행 못 하니 / 車後失周畋
향화(香火) 속에 한 해는 저물어 가고 / 香瓣乾坤暮
갈대 재는 절서의 변화 알리네 / 灰葭節序嬗
혼탁한 구주의 연기 벗어나 / 九煙超穢濁
훨훨 날아 삼신산(三神山)에 들어가시니 / 三島入翩躚
새벽닭이 울기 전에 입궐 못 하고 / 未先晨鷄往
‘선(先)’ 자는 거성(去聲)이다.
끝내는 상여 타고 돌아가셨네 / 終成素馬還
산양에는 저물녘의 젓대 소리요 / 山陽來晩篴
강 위에는 외로이 배가 떠가네 / 江漢出孤舷
수레바퀴 자국은 강가에 남고 / 殘轂留鴻跡
찬 꽃은 말 언치를 비춰 주는데 / 寒花暎馬韉
추사에 제비들은 머뭇거리고 / 依遲秋社燕
석양 무렵 매미 소리 처량하여라 / 凄咽夕陽蟬
풀이 자라 집 앞길은 보이지 않고 / 草沒前蹊惑
빈 뜰에는 학 한 쌍이 나란히 섰네 / 庭空舊鶴聯
공연히 국사 위해 눈물 흘릴 때 / 空餘國士淚
들보 위에 달빛 환히 비치는구나 / 樑月照潺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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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한양에서 단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광나루 배 안에서 이익경에게 회포를 적어 부치다〔自京還向丹丘 廣津舟中寄懷李翼卿〕
상경할 땐 그대와 여정 함께하였는데 / 來時與君同作行
갈 때는 그대 두고 나 혼자 가야 하네 / 去時君留我獨征
광릉의 강가에서 외로운 배를 타니 / 廣陵江上倚孤舟
갈댓잎에 쏴아 하고 가을바람 부는구나 / 蘆葉淅淅多秋聲
저도는 어디인가 멀리 연기 일어나고 / 楮島何在遠煙起
석양빛에 봉은사는 보일 듯 말 듯 하네 / 夕陽明滅奉恩寺
봉은사는 나에게 용천암과 같은 곳 / 奉恩是我龍泉菴
지난날 산사에서 힘겹게 글 읽었네 / 往歲攻苦禪窓裏
이른 새벽 세수하고 불전에 올라가서 / 早起盥洗登佛殿
그날 과제 끝마치면 정오가 안 되었고 / 了得新題未午晷
다시 방에 들어가서 못 미칠 듯 독서하다 / 回身讀書如不及
나무에 어두운 빛 깃들고야 그쳤었지 / 暝色生樹然後已
유월과 칠월이면 지독하게 날이 더워 / 六月七月天甚熱
몸에 물을 끼얹은 듯 줄줄 땀이 흘렀고 / 肌膚汗積流如潑
절밥에 허기지고 모기가 뜯어 대도 / 僧飯不飽寺蚊嚙
고생스레 책 붙들고 오랜 세월 보냈었네 / 艱哉硯北多歲月
돌아와서 한 번 만에 용문에 올랐으니 / 歸來一蹴龍門高
귀신이 그동안의 수고에 보답한 듯 / 如有鬼神酬其勞
지금 그대 지난날의 나처럼 책 싸 들고 / 今君負笈如故我
산사에서 밤마다 등불 켜고 앉았으니 / 佛榻夜夜焚膏坐
부지런히 공부하여 절굿공이 바늘 되면 / 若能孜孜杵成針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어떠하랴 / 何妨落落商與參
갈대에 맺힌 이슬 가을날은 저무는데 / 蒹葭白露秋陰暮
이른바 이 사람을 찾아갈 수가 없네 / 所謂伊人不可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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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조령〔鳥嶺〕
남쪽에 극히 험한 고개 있으니 / 炎維有絶險
조령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곳 / 鳥嶺天下獨
태곳적의 쇠가 닳아 절벽 이루고 / 壁磨太始鐵
두터운 지맥 끊겨 벼랑이 됐네 / 崖絶厚地脉
지난날 신라와 고려 시대에 / 新羅及高麗
하늘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 天以限南北
벌벌 떨며 공중에 잔도(棧道) 만들고 / 凌兢斲飛棧
기어올라 북극성을 뚫으려 해도 / 仰攀穿斗極
신령한 도끼날이 도리어 무뎌 / 神斧力反脆
단번에 돌 모서리 깎지 못하여 / 未遽剗石角
숲에서는 음산한 기운 풍기고 / 林木集送氛
자주 하늘 컴컴해져 비를 뿌렸네 / 往往天潑黑
지나간 임진년(1592, 선조25)에 조선에서는 / 昔者壬辰年
왜구가 온 나라에 들끓었는데 / 島夷大充斥
발호하여 조령 밑에 이르러서는 / 跳梁及嶺下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득 품었지 / 疑懼遂滿腹
돌 비탈을 오르려니 날개가 없어 / 緣磴腋無翼
서로 신호 보내면서 잠복했는데 / 嘯儷以狙伏
원수가 관군들을 거느리고도 / 元帥統王師
겁을 먹고 험한 지형 차지 못 하니 / 懦不先據阨
흉적들이 질풍처럼 돌격하여서 / 凶鋒猋乃發
귀신처럼 신속하게 빈 곳을 쳤네 / 擣虛如鬼速
조령의 뒤쪽으로 날듯 진격해 / 鼓行飛鳥背
가무 소리 만 골짝을 흔들었는데 / 歌舞動萬壑
치달리는 형세를 감당 못 하여 / 長驅勢莫當
죽은 이들 피가 땅을 물들였기에 / 殺人中原赤
오늘날도 달천(獺川) 가에 비바람 치면 / 至今獺水上
귀신이 한밤중에 통곡을 하네 / 風雨鬼夜哭
나라에서 지난 일을 교훈 삼아서 / 國家丕懲前
진장을 둬 관문을 굳게 지키니 / 鎭將鎖閫閾
세 성은 공중에 우뚝이 솟고 / 三城鑿空翠
흰 성벽은 백 자나 뻗어 있도다 / 粉甓亘百尺
고을에서 식량을 실어 보내어 / 州郡轉粟米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고 / 壯哉倉廩積
촌락에는 개들이 짖는 일 없어 / 民居狗不警
백성들이 밥과 죽을 배불리 먹네 / 鼓腹飧與粥
내가 마침 가을에 이곳에 오니 / 我來屬時晩
나뭇잎들 새로 붉게 물이 들어서 / 赤葉融新液
하늘로 올라가는 사십 리 길이 / 天梯四十里
비단을 펴 놓은 듯 곱게 빛나며 / 綺纈粲相射
골짝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 源流漏百谷
가을바람 숲에서 불어오누나 / 秋韻間松櫟
건장한 병졸들은 대낮에 졸고 / 健兒白日眠
딱따기는 한구석에 버려졌는데 / 戌柝卧成澁
말을 내려 형세를 살펴보고는 / 下馬覽體勢
옛일을 떠올리며 탄식하누나 / 懷古一於悒
어찌하여 관문을 잠그지 않아 / 奈何不扃鐍
왜구들이 들어올 수 있게 했던가 / 而使大盜入
많은 무기 갖추고 큰 성 쌓는 건 / 千倉與百雉
예로부터 급선무가 못 되었으니 / 古來非務急
장수가 적임자가 아닐 경우엔 / 推轂苟非人
천연적인 해자라도 소용이 없네 / 天塹爾何益
비가에 용추(龍湫)에선 용이 치솟고 / 悲歌拔湫龍
서생의 머리카락 갓을 뚫으니 / 髮指書生幘
훗날에 여기 오는 사람들에겐 / 無令後來者
지금 같은 울분 갖지 말게 할지니 / 視今猶視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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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마〔薯蕷〕
단성에는 마가 많이 생산되는데 / 丹丘多薯蕷
큰 것은 한 아름이 될 정도이네 / 大者餘一圍
어떤 이가 포대 가득 가져다주니 / 人有贈滿包
순박한 풍속 감히 내가 어기랴 / 淳風我敢違
장마는 직선으로 곧게 뻗었고 / 倔强首尾立
산마는 뱀이 서린 모습 같은데 / 盤鬱龍蛇肥
생육에 강한 성질 지니고 있어 / 滋蔓恰盡性
들판에 눈 내려도 피해가 없네 / 不泥原雪威
돌려 보는 사람마다 탄성 지르며 / 傳視輒驚叫
흔치 않은 크기라고 말들을 하네 / 見者曾見稀
삶아 오니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 蒸來口涎出
하얀 김이 물씬물씬 피어나는데 / 氣騰朝霞霏
자줏빛 옥과 같은 예쁜 껍질을 / 姸姸紫玉皮
벗겨 보니 얇아서 날 것만 같네 / 應爪脫如飛
응고된 연유보다 더 부드럽고 / 凝酥奪柔軟
두꺼운 지방보다 광택이 나며 / 疊肪損光輝
당당하게 쟁반에 누운 모습은 / 磊落偃髹盤
키가 큰 사람처럼 훤칠하여라 / 一似長人頎
연달아서 꿀 내오라 재촉해 대니 / 連聲促新蜜
특이한 향이 옷에 배는 듯하고 / 異香頗襲衣
안 씹어도 입에서 절로 녹는 게 / 消融不煩囓
아침 햇살 받은 눈이 녹는 듯하네 / 如雪見朝暉
순식간에 모조리 다 먹어 치우니 / 斯須喫已盡
게걸스럽다는 비난 개의할쏜가 / 寧顧鶴饞譏
가만히 생각하니 흉년이 들어 / 默念歲不登
많은 백성 봄 기근에 시달리느라 / 閭巷多春饑
아침에는 나무뿌리 캐다가 먹고 / 朝收石榞去
저녁에는 풀을 뜯어 연명하는데 / 暮掇烏昧歸
좋은 음식 먹는 나는 뭘 하는 건가 / 美味我何者
상 앞에서 길게 한번 탄식을 하네 / 臨案一永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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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쌍계동으로 소응천 처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다〔雙溪洞天 訪蘇凝天處士不遇〕
천 장 높이 방장산이 까마득한데 / 方丈千尋黛
뛰어난 처사 하나 숨어 지내네 / 深藏一士奇
차조밭은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 秫田臨水在
초가집은 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 茅屋暎林知
정신을 단련시킬 단약(丹藥)이 익고 / 鍊魄金丹熟
책 읽느라 세월이 더디게 가네 / 看書日月遲
내가 온 걸 알아채는 사람이 없어 / 無人覺來往
살구꽃 가지 옆을 서성이노라 / 三繞杏花枝
두 번째〔其二〕
늙은 개가 순하게 길이 들어서 / 老犬馴良甚
한참 동안 누운 채로 날 바라보네 / 移時卧見人
처자식은 속기를 찾을 수 없고 / 妻孥渾不俗
연기 피는 이웃집이 두어 채로세 / 煙火少爲隣
지초는 원래 한을 경시했지만 / 芝草元輕漢
도원으로 진을 피해 온 건 아니네 / 桃源非避秦
언제 다시 이곳에 찾아올거나 / 重來欲何日
말안장의 누런 먼지 부끄러워라 / 鞍馬愧黃塵
세 번째〔其三〕
이곳의 숲과 골짝 좋아하기에 / 於焉好林壑
이 사람이 벼슬 않고 은거하나니 / 之子不簪纓
속세를 떠나와서 글을 읽지만 / 事外藏書籍
세상에 그의 명성 자자하여라 / 人間有姓名
산속의 시내 소리 발에 날리고 / 簾飛山澗響
절 종소리 창으로 들려오도다 / 窓落寺鍾聲
화산의 반을 내게 나눠 준다면 / 半華如相及
봄날 함께 밭 갈기를 약속하리라 / 春期在耦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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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최생을 위해 구만가를 짓다〔九萬歌 爲崔生賦〕
나는 본래 현암의 시내에서 낚시하며 / 我本漁釣玄巖溪
푸른 삿갓 도롱이로 관원들을 비웃던 몸 / 綠蓑靑箬笑簪絓
권세가에 명함 들일 생각 하지 않았고 / 有刺不修五侯門
장안의 진흙길에 말을 몰지 않았었지 / 有馬不鞴長安泥
주머니에 돈 없어도 구전문사(求田問舍)할 만하여 / 囊中無錢可問舍
말을 타고 유람하며 근심 잠시 풀던 차에 / 駕言出遊憂暫瀉
구만촌에 이르러선 눈이 문득 밝아지니 / 九萬村墟眼忽明
백운산 앞쪽으로 큰 들판이 열렸어라 / 白雲山前大開野
마주한 오봉산은 홀을 꽂은 것 같은데 / 前對五峯如揷笏
모두가 빼어나고 자태가 각양각색 / 箇箇姸妙態非一
그 아래로 맑은 강물 한줄기가 흐르는데 / 澄江一帶其下過
강물 속에 큰 물고기 어찌나도 많은지 / 江中大魚何發發
깊이 따라 낚싯대나 작살로 잡아 올려 / 深則宜釣淺宜擉
작은 것은 내버리듯 개에게 던져 주네 / 小者飼犬如棄物
출렁이는 누런 곡식 십 리를 뒤덮었고 / 䆉稏橫覆十里雲
목화는 눈이 온 듯 천 이랑에 펼쳐졌네 / 木綿平開千畒雪
옆을 보면 한 고을이 손에 잡힐 것만 같고 / 傍視縣城如可攬
밥 짓는 연기 피어 숲으로 번져 가네 / 墟煙林照遞明滅
이 세상에 낙토가 있는 줄을 알겠으니 / 世上方知有樂土
도원이나 귤주를 무엇하러 말하리오 / 桃源橘洲何足說
오래전 신통력 있는 중이 풍수 보곤 / 伊昔神僧勘地理
공경대부 끊임없이 나올 거라 하였다네 / 公卿袞袞應輩出
귀신이 의도한 듯 아끼고 감춰 둔 곳 / 神慳鬼護如有情
은거지를 끝내 누가 경영하게 되려는지 / 菟裘竟屬何人營
석양에 말 멈추고 세 번 길게 탄식하니 / 落日停車三歎息
나와 함께할 사람은 늙은 최생이리라 / 誰其偕者老崔生
최생이 날 위해서 주선을 잘해 주니 / 崔生爲我好料理
훗날 그대 손을 잡고 그곳으로 함께 가리 / 他日同君攜手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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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약산 선생의 옛집에서 감회에 젖어 시를 짓다〔藥山舊第 感懷賦詩〕
너무나도 짧은 인생 생각은 길고 긴데 / 浮生苦短意何長
부질없이 따져 보니 한바탕 꿈만 같네 / 閒事商量一夢場
삼우당 앞 나무에는 달이 밝게 비추건만 / 三佑堂前松檜月
책상에 기댄 사람 이제 다시 볼 수 없네 / 更無人倚舊書牀
두 번째〔其二〕
뜰에는 이끼 끼고 작은 밭은 황량하니 / 庭院靑苔十畒荒
꽃이 피고 꽃이 져도 모든 것이 아득할 뿐 / 花開花落事茫茫
담장 밑엔 벌집이 아직도 남아 있어 / 墻陰留下蜂房在
하루 종일 분주하게 꿀을 물어 나르도다 / 辛苦含香盡日忙
세 번째〔其三〕
옛 아전이 오지 않아 대문은 고요하고 / 故吏不來門寂寂
날 저물면 도둑놈이 화랑을 엿보도다 / 偸兒日暮畫廊窺
약산 선생 집에 와서 슬픈 감회 드는 것은 / 藥山庭戶傷心事
선생이 전에 지은 시와 일치하기 때문이네 / 正是先生舊日詩
옛 아전〔故吏〕과 도둑놈〔偸兒〕은 약산(藥山)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네 번째〔其四〕
허물어진 담장 위로 저녁 비가 내리니 / 頹垣日暮雨霏霏
학 길렀던 빈 정원은 풀빛이 희미하네 / 養鶴園空草色微
슬프게도 지난날의 왕씨 사씨 집 제비가 / 惆悵去年王謝燕
봄이 오자 공연히 주렴 옆을 날려 하네 / 春來虛擬傍簾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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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역병에 걸려 거처를 옮겨 기거하였는데, 요양하는 틈틈이 떠오르는 대로 기록하였다. 훗날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병중에 헛소리를 했다고 여기지나 않을지 모르겠다〔患癘移家 調治之暇 有得隨記 異日示人 未知人不以爲病囈否也〕
관노(官奴)가 떠나려고 자꾸 편지 재촉하니 / 官奚臨發索書頻
병든 마음 아득해져 눈물이 쏟아질 듯 / 病思蒼茫淚欲捫
노친께서 병 심한 걸 눈치챌까 두려워서 / 恐被老親疑病甚
기대 앉아 글 몇 줄을 억지로 적었어라 / 數行欹就强成言
두 번째〔其二〕
적막한 나날 실로 태곳적과 비슷한데 / 寥寥眞似上皇年
빈집에서 자다 깨어 다시 잠이 들곤 하네 / 眠了虛堂也更眠
우습게도 늙은 닭이 병든 객이 안 볼 때에 / 剛笑老鷄欺病客
남은 밥을 먹으려고 침상 가로 다가오네 / 步隨殘粟到衾邊
세 번째〔其三〕
대추나무 잎 푸르고 뽕나무는 듬성한데 / 棗葉靑靑桑葉稀
병든 주인 일어나서 천시를 살펴보네 / 主人病起攬天時
절에 가서 함도회(含桃會)를 열기로 했기에 / 招提向上含桃約
끝이 없는 안개 물결 머릿속에 맴도누나 / 無限煙波有所思
한강 가에서 함도회를 열기로 약속했는데 병이 나서 지키지 못하였다.
네 번째〔其四〕
여라 밖에 어둑해진 조그마한 하늘 있고 / 蘿外冥冥小有天
개 짖는 몇몇 집에 저녁 짓는 연기 피네 / 數家鳴吠自人煙
도원의 풍속 후해 성낼 걱정 없기에 / 桃源厚俗無嫌怒
보리밭 근처에다 푸른 나귀 풀어놓네 / 放著靑驢近麥田
다섯 번째〔其五〕
산안개와 시내 연기 먼 산을 가렸는데 / 山靄溪煙抹遠靑
작은 방이 서늘하여 정신을 맑게 하네 / 小堂涼意動新醒
무단히 새벽녘에 성 남쪽에 비가 오니 / 無端五夜城南雨
솔가지에 별이 몇 개 걸린 것을 못 믿겠네 / 未信松梢有數星
여섯 번째〔其六〕
한 달가량 병을 앓아 사람들이 피하므로 / 吾病三旬被衆猜
사립문을 남들에게 열어 주지 못하는데 / 柴門不敢向人開
이웃집의 여자아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 隣家小女那能識
담장 위로 나비 날면 번번이 쫓아오네 / 一一墻頭趁蝶來
일곱 번째〔其七〕
푸른 교외 맑은 물을 마주 보는 작은 초가 / 靑郊白水暎茅茨
여름 내내 문을 닫고 적막하게 지냈어라 / 長夏門深太古時
쌀 사 오고 남새밭을 가꾸는 어린 종 둘 / 小婢買粮僮理圃
황새 둥지 가지에다 그네를 달아 뒀네 / 秋千搭在鸛巢枝
여덟 번째〔其八〕
댓잎에는 엷은 이슬 돌아가는 새 드문데 / 竹露微生返翼稀
성곽 남쪽 별 뜬 밤에 스님이 찾아왔네 / 郭南星月上人衣
오늘 밤 빈방에서 홀로 자지 않게 하니 / 今宵免使虛堂卧
날 만나고 가겠다고 산 구름과 약속한 듯 / 如約山雲訪我歸
아홉 번째〔其九〕
약 달이는 화로에 불이 가물거리는데 / 藥爐殘火有孤明
병난 뒤로 잠이 줄어 잡념만 가득하네 / 病後無眠百慮盈
새벽종 소리 나를 일깨워 줘 고마우니 / 多謝曉鍾偏起我
항상 친구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네 / 每回聞似故人聲
열 번째〔其十〕
온종일 사립문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 長日柴扉少客來
사내종의 부축 받아 시냇가로 내려가네 / 野僮扶下柳溪隈
뜬구름이 푸른 산에 문득 비를 뿌리려 해 / 浮雲便欲靑山雨
오늘 아침 보리 베지 않은 것을 후회하네 / 悔不今朝刈麥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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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이발〔理髮〕
병에 걸려 누운 지 한 달여 만에 / 卧病一月餘
간신히 일어나서 머리를 빗네 / 新起理吾髮
여러 날 흘린 땀과 잔뜩 낀 때가 / 宿汗與深垢
다림질을 한 것처럼 들러붙어서 / 熨帖湊爲一
송라처럼 얼기설기 뒤엉킨 데다 / 纏來劇松蘿
아교 칠을 한 것처럼 엉겨 붙었네 / 凝處似膠漆
나무 빗이 도리어 튕겨 나오니 / 木梳反齟齬
당겨서 빗어 내릴 방도가 없어 / 無罅可句掣
가닥가닥 신경 써서 분리한 다음 / 絲絲用意剔
하나하나 손으로 갈라야 하네 / 箇箇分手裂
뭉친 곳은 모근(毛根)이 상할까 싶어 / 深結最念根
조심스레 끝을 먼저 비벼 보는데 / 淺試先刷末
단단하게 들러붙은 부분을 뗄 땐 / 狠族有時脫
너무 아파 신음 소리 저절로 나네 / 牽痛輒聲發
엉켜 붙어 뿌리가 약해진 탓에 / 黏雲軟少蔕
뭉텅뭉텅 소리 없이 뽑혀 나와서 / 隊隊無聲拔
머리가 가볍다고 느낄 정도니 / 擧頭便覺輕
혀를 차며 탄식할 뿐 어찌할쏜가 / 感歎何喞喞
내가 처음 태어날 때 머리카락과 / 吾與髮爲約
백 년을 함께하길 기약했으니 / 曾以百年結
백 년이라 해 본들 얼마나 되랴 / 百年復幾何
필경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것 / 畢竟兩澌滅
내 몸이 우연히 내가 된 것이 / 吾身偶成吾
떠다니던 원기가 모여서인데 / 飄在元氣藪
네가 또 나의 몸에 기탁한 것이 / 爾又寄吾身
어떻게 영원할 수 있는 것이랴 / 那得永相守
내 몸조차 지키지 못할 판인데 / 吾身幾不救
어찌 너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나 / 於爾可無負
모이면 흩어지게 되어 있으니 / 旣聚理必散
시간이 짧고 긴 건 논할 게 없네 / 不須論暫久
이로써 그럭저럭 달관을 하니 / 以玆聊達觀
내 마음은 느긋하게 할 만하지만 / 亦足寬我意
두려운 건 노친에게 절을 하는 날 / 只恐拜老親
노친께서 측은하게 보실 일이네 / 老親憐我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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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잡흥〔雜興〕
산속에서 지내느라 게을러져서 / 山居養疎懶
느지막이 일어나 방문을 여니 / 晏起出茅墅
구름이 자욱하게 사방을 덮어 / 洩雲冒四垂
몇 시나 됐는지를 알 수가 없네 / 日上定幾許
아마도 정오까진 되지 않은 듯 / 午時似不足
곳곳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네 / 炊煙起處處
기지개를 켜 보니 기분이 좋고 / 欠伸氣頗適
앉고 눕는 데에도 걸림이 없네 / 坐卧無違拒
이불과 요를 들고 나가서 터니 / 衾裯出披拂
이들이 톡톡 튀어 도망을 가네 / 衆蚤跳以去
숲 바람이 저녁 무렵 비를 몰고 와 / 林風吹晩雨
발과 휘장 한 번씩 휘날리더니 / 簾帷時一擧
하늘에서 불같은 호령을 내려 / 上天有號令
천둥과 번개 치니 막을 수 없네 / 雷動不可禦
역질이 이로 인해 소탕되리니 / 癘疫爲掃蕩
무더위를 식혀 주고 말 리가 없네 / 豈伊淸煩暑
이 덕분에 얼굴에 화색이 돌아 / 卽此有歡顔
기분 좋게 술 사 오라 명을 내리니 / 陶然命酤醑
술을 사다 누구와 마시려 하나 / 酤醑欲誰共
〈벌목〉 시의 내용에 느낌이 있네 / 伐木感遺語
두 번째〔其二〕
촌 사내가 가난하여 돈이 없어서 / 野夫貧無錢
집을 세내 교외에서 살고 있는데 / 賃宅息郊墟
민가가 대여섯 집밖에 안 되니 / 人家纔五六
황량하여 마을이라 할 것도 없네 / 荒落豈里閭
소나무 울타리를 못 치게 하여 / 松籬命不揷
긴 시내를 마음껏 볼 수 있는데 / 恣意頫脩渠
땅이 넓어 사람들의 다툼이 적고 / 地曠少人爭
아름다운 나무 많이 자라고 있네 / 嘉木植不疎
내 밭까지 넝쿨을 뻗은 오이와 / 瓜蔓延我畬
내 집으로 가지를 드리운 살구며 / 杏子垂我廬
대추나무 밤나무는 줄을 이루고 / 棗栗頗成行
아직 어린 뽕나무도 무성해졌네 / 穉桑菀以舒
저녁나절 시원한 바람 일더니 / 靈籟起將夕
푸른 산에 보슬비를 뿌리고 갔네 / 靑山微雨餘
옆쪽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 傍有一席坳
접시꽃이 자라도록 버려뒀는데 / 葵藿懶弗鋤
여기에다 초가로 지붕 올리고 / 於焉擬茅編
내 책을 가져다가 채우려 하네 / 攜我滿架書
땅이 외져 순수한 성품 지키고 / 沖眞割區緣
내 뜻대로 담박하게 살 수가 있네 / 淸澹獲心初
문 앞으로 난 길을 바라보건대 / 睠彼門前路
정신없이 고관들의 수레 오가니 / 擾擾流軒車
닭이 울면 분주하게 오관을 나가 / 鷄鳴出午關
흙탕물에 옷자락을 더럽히도다 / 泥潦浩染裾
묻노니 뭣 때문에 그리하는가 / 借問何乃爾
이부는 강가에서 은거했거늘 / 吏部江上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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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집 안에 영남에서 온 사람이 있어 짓다〔門有嶺南人行〕
영남에서 올라온 사람 있으니 / 門有嶺南人
단성에서 며칠에 출발했을지 / 幾日發丹丘
단성에서 한양은 구백 리이고 / 丹丘九百里
긴 강이 또 아득히 흐르고 있네 / 江漢復悠悠
단성에 계신 나의 부모님께서 / 懷哉我父母
내가 아픈 것만을 걱정하는데 / 閔焉惟疾憂
무릎 꿇고 부모님의 편지 읽으니 / 長跪讀來書
눈물을 어찌 금할 수가 있으랴 / 弱涕不其流
사람 출입 경계하라 말씀하시고 / 上言畏人來
이어 음식 조심하라 당부하셨네 / 下言愼飮食
가지가지 진기한 바다 생선과 / 溟鱗種種異
눈처럼 하얀 꿀을 보내 주시고 / 崖蜜如雪白
그 밖에도 정성스레 싸 보낸 것들 / 殷勤爲包裹
하나같이 병든 나의 입맛에 맞네 / 箇箇病口適
좋아하던 음식은 아니지마는 / 匪汝之爲好
부모님이 멀리서 보내셨기에 / 父母遠于錫
일어나 앉아 한번 맛을 보기를 / 起坐加一餐
부모님이 옆에 계신 것처럼 하네 / 如在父母側
편지로 그 은혜에 감사드릴 뿐 / 修書報父母
걱정을 덜어 드릴 방도가 없네 / 何以慰顔色
어제는 오랜만에 이발을 하고 / 昨日理吾髮
오늘은 또 세수하고 몸을 씻었네 / 今日又盥濯
나귀 타고 백문을 지나가는데 / 騎驢過白門
움직이는 것이 제법 자유롭기에 / 四體頗自適
돌아와서 내 방을 청소한 다음 / 歸來掃我室
저녁 내내 앉아서 책을 읽노라 / 讀書以永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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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오성집 대성 을 애도하다〔哀吳聖集 大成〕
영문에서 그대를 보았을 때에 / 令門見吾子
그 집안의 자제답게 총명했으니 / 了了固應爾
약산을 아버지로 뒀는 데다가 / 藥山以爲父
현계가 바로 그의 형이었어라 / 有兄玄溪是
성 남쪽에 자리 잡은 단아한 집에 / 翼然城南宅
울창하게 나무들이 솟아 있으니 / 鬱鬱峙喬梓
늙은 봉새 기이한 풍채 지녔고 / 老鳳有奇彩
어린 새끼 아름다운 자태 배웠네 / 穉翎學旖旎
문단에서 기예를 겨룰 적에는 / 出遊白戰場
대단한 기량 널리 떨쳤으므로 / 獲雋奮距嘴
사람들은 현계가 요절했지만 / 人言玄溪沒
약산에게 다른 아들 있다 하였네 / 藥翁復有子
두 번째〔其二〕
누구의 죽음인들 안 슬프랴만 / 人死誰不哀
그대의 죽음만 한 슬픔 없으니 / 哀莫如君死
상 당하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 縗麻未及練
몸 거두어 저승으로 돌아갔어라 / 斂歸泉臺裏
약산의 묘에 풀이 무성해지니 / 荒哉藥山墓
귀신이 굶주리진 않으려는지 / 不其鬼餒矣
때때로 조문하는 이들 오지만 / 時時弔者來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네 / 無人辨誰某
각자가 자기 성과 이름을 적어 / 各自書姓字
부질없이 노복에게 넘겨주는데 / 空付蒼頭手
노복이 글을 들고 눈물 흘리며 / 蒼頭持書泣
그대의 오랜 벗인 날 바라보네 / 見君故時友
세 번째〔其三〕
그대에게 가죽 상자 두 개가 있어 / 君有兩皮篋
그 속에다 붓을 가득 모아 뒀으니 / 中貯管城子
붓을 모아 둔 것은 앞으로 있을 / 藏之欲有俟
선친의 문집 간행 위해서였네 / 所俟先稿梓
그대가 죽고서야 상자를 열어 / 君死始抽閱
그 붓으로 그대의 명정을 쓰고 / 寫君銘旌字
나머지는 어디도 쓸데가 없어 / 餘者用無處
내당의 안어른께 전해 드렸네 / 持向高堂裏
안어른이 제수 비용 걱정하시어 / 高堂憂奠需
시장에 가져다가 팔게 하시니 / 俾賣白門市
어찌 귀히 여기지 않아서이랴 / 豈不貴此物
놔두어도 차마 볼 수 없어서라네 / 留亦不忍視
네 번째〔其四〕
화전에 그대 집의 전장 있는데 / 君家花田庄
밤나무에 열린 밤이 다발 같았지 / 種栗栗似束
회상컨대 지난해 팔월 어느 날 / 往年八月中
밤이 익자 그대 가서 밤을 털더니 / 栗熟君來剝
올가을엔 그대가 세상을 버려 / 今秋送君去
밤나무 옆에다가 그대를 묻네 / 葬之栗樹側
또렷하게 보이는 그대 옛집엔 / 宛宛舊棲屋
그대 행적 하나하나 남아 있어라 / 一一見行跡
가을바람 밤낮으로 불고 있으니 / 西風日夜至
예전처럼 주먹만 한 밤이 열리면 / 舊栗如拳拆
가져다가 그대 무덤 앞에 올리고 / 持玆侑君塚
과부가 추석 제수 마련하리라 / 孀婦祭秋夕
다섯 번째〔其五〕
내 나이 스무 살이 조금 넘었고 / 吾年二十餘
그대 안 지 십 년이 채 안 되었는데 / 識君未一紀
조부부터 그대까지 모두 곡하니 / 哭君祖子孫
세대가 바뀌는 게 이와 같도다 / 人代迅如此
지난날에 어르신을 찾아뵙고서 / 曩時拜尊翁
오만 가지 일들을 상의했지만 / 商量百千事
그중에 한 가지도 못 이룬 채로 / 百千未得一
세월만 속절없이 보내었어라 / 西日東逝水
진즉에 다 허사임을 알았을진댄 / 早知竟亡羊
어찌 길이 맹세하지 않았겠는가 / 那不歌永矢
그대 가서 어르신께 말씀드리면 / 君歸報尊翁
어르신이 뭐라고 대답하실지 / 尊翁云何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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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소사교를 노래하다〔素沙橋歌〕
삼한의 사물 중에 무엇이 가장 크랴 / 三韓物象誰最大
어느 것도 소사교를 당해 내지 못하리라 / 素沙之橋不可當
내가 이곳 소사교를 몇 번이나 건넜지만 / 我行素沙凡幾度
올 때마다 벌벌 떨며 비 오듯이 땀 흘렸네 / 每到跼蹐汗流漿
멀리 보면 걸쳐진 듯 다가가면 누운 듯 / 遠望如掛近如卧
공중에서 완연하게 용이 나는 형상이요 / 空中宛爾遊龍翔
북쪽에서 건너편에 있는 사람 바라보면 / 北邊望見南邊人
개미처럼 꼬물거려 구분하기 어려워라 / 蠢動如蟻難可詳
열 장이나 되는 나무 천여 개 가까이가 / 十丈之木數近千
판자를 이고 서서 장엄하게 줄 이루고 / 頭頭戴立儼成行
양 입구는 완만하다 중간에선 경사 커져 / 兩畔稍偃腹乃果
점점 위로 굽어진 게 가옥의 들보 같네 / 漸漸穹隆如屋樑
그 아래로 백 이랑의 물결이 마구 흘러 / 其下橫流百頃波
넘실대며 솟구치니 어찌나도 아득한지 / 澎湃蕩潏何茫茫
말을 타고 건너가다 말이 혹 내달리면 / 癡人騎馬馬或逸
순식간에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되네 / 須臾性命絶可傷
신기하게 승려들이 일을 무척 쉽게 하여 / 異哉僧徒力容易
해마다 여기에서 다리를 보수하네 / 歲歲於此修津梁
내가 와서 건너는데 간이 콩알만 해져서 / 我來徒步心更寒
조심조심 발을 떼며 어쩔 줄을 모르고 / 擧武促促太劻勷
중간에선 감히 옆을 돌아보지 못한 채 / 當中不敢左右顧
눈앞이 아찔해져 구를 듯이 휘청대다 / 雜花隕目如顚僵
평지에 닿고서야 안도의 숨 내쉬지만 / 置身平地始舒嘯
여전히 벌레 소리 귓전에서 웽웽대네 / 窸窣聲猶在耳傍
위험함과 평탄함은 처신하기 나름이니 / 險能爲易易反險
사물의 이치 모두 헤아림에 달렸을 터 / 物理細細歸商量
매사를 삼가도록 하는 것이 이 같으니 / 使我畏愼皆類此
양장판도 서둘지를 않는다면 강장일 터 / 羊腸未遽非康莊
그대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높은 수레 달리다가 엎어지는 일 많지만 / 高車駟馬多傾覆
한양성엔 넓은 길이 하늘처럼 뻗은 것을 / 長安大道如天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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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4권 / 시(詩)○단구록 하(丹丘錄下)
연치현은 남원과 운봉의 경계에 있는데, 커다란 돌 두 개가 길옆에 서 있다.
그 표면에 명나라 장수 도독 유정이 직접 쓴 “만력 모월 모일에 도독 유정이 병사를 이끌고 이곳을 지나가다.” 등의 수십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2년 사이에 두 차례 이곳을 지나가면서 그때마다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만력황제는 우리 동방 사람들에게 하늘처럼 망극한 은혜가 있다. 그 당시 유 도독 같은 분이 실로 성지를 받들어 흉악하고 교활한 왜놈들을 소탕하기를 바람처럼 신속히 하고 중국 조정에 승전보를 올림으로써 명성을 외국에까지 드날렸으니, 그 지략과 용맹이 어찌 진실로 뛰어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군중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짓는 천한 졸개라고 할지라도 명나라 조정을 존경하고 예우할 것이다. 더구나 황제의 명을 받고 출정한 장수라면 어떠하겠으며, 더구나 황제의 명을 받고 출정해서 우뚝한 공을 세운 것이 유 도독과 같은 분이라면 어떠하겠는가. 명나라 조정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유공을 사랑하고, 유공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유공의 마음이 담긴 글씨를 사랑한다면, 진실로 남국이 감당을 애호하고 현수에 타루비가 전해진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안근유골의 나머지가 비바람에 깎이고 먼지와 이끼에 침식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오직 이 고개에 이 돌이 있다는 얘기를 미리 들은 자만이 희미한 글자를 손으로 더듬어 가며 자획을 추정해 보고서야 어느 글자가 무슨 자인 줄을 알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코앞을 지나가더라도 보지를 않으니, 이 또한 애석해할 일이 아닌가. 아! 세상에 옛것을 좋아하고 의로움을 좋아하는 자가 본디 이렇게 드문 것인가. 어찌 이 돌이 묻힌 채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개탄스러운 마음에 장구를 지어 연치현의 고사로 삼는 바이다〔燕峙峴 介南原雲峯之界 而有二大石 立峴之路傍 其石面 有天將劉都督綎親書萬曆某月日都督劉綎提兵過此等數十字 蓋二年凡再過而皆刻石以記之也 竊念萬曆 於我東有昊天罔極之恩 維時若劉都督者 實聖旨是承 翦掃凶狡 迅若風飆 奏凱天朝 揚名外國 其智勇 豈不誠卓犖矣乎 夫東人之於天朝 廝養之卒 猶當敬以禮之 況推轂而出者乎 況推轂而出而卓犖如劉都督者乎 以愛天朝之心 推以愛劉公 以愛劉公之心 推以愛劉公之心畫 誠宜若南國之護甘棠 峴首之傳墮淚者 而今乃使顔筋柳骨之餘 風勦雨淋 埃蘚交蝕 幾乎䵝昧矣 惟人之先有以聞是峴之有是石者 摩挲彷像 諦推字畫 乃能得其某字之爲某字 不然者 雖當面過之 蓋無覩也 斯不亦可惜哉 噫 世之好古而好義者 固若是罕耶 何是石之湮沒無章至於此也 慨然賦長句 以備燕峙峴故事〕
그대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남원과 운봉 땅의 경계가 맞닿은 곳 / 南原雲峯地相錯
연치현 길옆으로 돌이 두 개 서 있는 걸 / 燕峙之峴傍有石
돌 표면에 새겨진 손바닥만 한 글씨는 / 石面有字如掌樣
다름 아닌 유 도독이 새겨 놓은 것이라네 / 云是都督劉公之所刻
유 도독이 출정하여 동쪽으로 진군하매 / 劉公提兵東出征
황제 군대 가는 족족 왜놈들이 항복하니 / 天戈所指凶蠻伏
서릿발과 같은 칼 빛 대방에 머물렀고 / 劍氣霜屯帶方域
진격하는 북소리는 방장산을 흔들었네 / 鼓聲雲搖方丈嶽
산천을 뒤흔들며 남쪽으로 내려오자 / 南國山川蹴踏來
날뛰던 대마도의 왜구들이 꺾였는데 / 馬島瑟縮鯨鯢摧
벽력같은 기세로 연치현을 달려가다 / 雷躪電驅燕峙峴
말을 내려 창을 놓고 잠시 배회하였어라 / 下馬橫槊一徘徊
장난삼아 큰 붓 들어 자신의 성명 적어 / 戲拈大筆書姓名
두 돌에 새겼는데 어찌 그리 헌걸찬지 / 刻之雙石何崔嵬
산신령이 축하하고 장군이 크게 웃자 / 山靈獻賀將軍笑
산속의 초목 모두 광채를 되찾았네 / 山中草木皆昭回
기와 상과 정과 내가 없을 리 있으랴만 / 豈無旂常與鼎鼐
천년토록 장군 수택 남겨짐만 못하리라 / 不如將軍手澤留千載
부차령(富車嶺)의 전투에서 모든 게 끝장나서 / 嗚呼萬事富車戰
순식간에 형세 변해 황도가 멸망했네 / 金火倏忽黃圖廢
이백 년이 지나도록 돌이 그냥 남아 있어 / 二百年間石不轉
나무꾼도 감당처럼 애호할 줄을 알고 / 樵兒倘識甘棠愛
귀신이 물리쳐서 들불 근접 못 했건만 / 鬼呵不使野火侵
비를 맞아 반 가까이 이끼에 묻혔어라 / 雨淋强半苔紋晦
내가 와서 탄식하며 누차 쓰다듬노라니 / 我來歔欷屢摩挲
산새가 사람 보고 놀라 마구 떠드는데 / 山鳥怪人驚相譁
내 시가 너의 가치 높이기에 부족하니 / 吾詩不足增重汝
돌이여 돌이여 어찌하면 좋겠는가 / 石乎石乎可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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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김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이몽서를 전송하다〔送李夢瑞之任金泉郵〕
늦가을에 김천으로 떠나는 그대 / 秋晩金泉道
풍류 있고 용모는 옥과 같도다 / 風流玉面郞
땅이 산과 바다에 닿았을 테니 / 地應連海嶽
하늘이 준 문장을 시험할 기회 / 天與試文章
수레는 기러기를 따라서 가고 / 征蓋承飛鴈
말발굽은 찬 서리를 밟을 터인데 / 華蹄傲肅霜
연운이 걷힌 날의 경치 읊은 시 / 煙雲晴滿篋
하나같이 기이한 기운 넘치리 / 異氣一蒼蒼
두 번째〔其二〕
땅은 옛 신라국에 속해 있었고 / 壤割新羅國
하늘이 조령 옆에 성을 두었지 / 天黏鳥嶺城
짙은 연무 헤치고 역마가 가니 / 瘴煙開馹騎
치솟은 나무 위에 문성이 뜨네 / 雲木出文星
늙은 용이 사는 못은 물이 검은데 / 龍老湫紋黑
단풍이 물든 산 빛 찬란하리라 / 楓酣岳氣明
모쪼록 생각하라 소릉의 붓이 / 須知少陵筆
경치 따라 기이하게 변했던 것을 / 奇變各隨形
세 번째〔其三〕
동방에 뒤늦게야 태어난 내가 / 嗟晩生東國
퇴계 선생 계셨다는 말을 들었네 / 恭聞有退溪
풍진세상 하찮은 관직 지냈고 / 風塵一官小
기로에서 십 년을 헤매셨다지 / 歧路十年迷
맑은 냇물 선생의 성품과 같고 / 川性澄空合
물고기도 그 기상을 닮았으리라 / 魚情積氣棲
함께 가도 부끄러워 않을 거라면 / 同車或不愧
나도 따라 그곳으로 가고 싶다오 / 此地願相携
네 번째〔其四〕
허둥대며 장협가를 부르는 신세 / 長鋏棲棲者
세월 가니 마음을 가눌 길 없네 / 難爲歲晩心
서리 내린 대자리를 달이 엿보고 / 月窺霜簟冷
깊은 능을 하늘이 둘러쌌는데 / 天繞柏城深
밤새도록 어지러이 나뭇잎 날고 / 亂葉侵燈語
새벽까지 샘물 소리 들려오누나 / 遙泉到曉吟
내일 아침 그대를 또 전송한 뒤엔 / 明朝又送別
적막하게 푸른 산만 바라보리라 / 寥落對靑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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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정 생원을 노래하다〔鄭生員歌〕
정 생원은 상서의 증손이라 말하는데 / 鄭生員自稱尙書之曾孫
해진 옷이 짧고 얇아 정강이도 못 가렸네 / 敝衣單薄不掩骭
북풍에 눈이 날려 어두워진 산골짝을 / 北風飛雪山谷昏
호환(虎患)을 각오하고 멀리 찾아왔지마는 / 衝虎遠來來叩門
호소하는 것은 겨우 한 끼 밥에 불과하네 / 所訴維何一壺飧
그대들은 정 상서에 관한 얘기 들어 보라 / 汝門請從尙書說
대가(大駕)가 남한성에 파천하던 그 당시에 / 南漢之城龍駕遷
여진 병사 쳐들어와 크게 기세 떨치면서 / 女眞兵來大作勢
밤낮없이 새카맣게 포위한 채 진(陣)을 치고 / 黑鵝團結無朝曛
낙타에다 집채만 한 포를 실어 운송하여 / 槖駝載砲砲似屋
포학하게 곧장 땅을 뒤집으려 하였었지 / 炰烋直欲翻坤軸
태조께서 세운 사직 작은 성에 옮겨지매 / 太祖社稷七里郭
딱따기 소리 나는 밤에 왕이 흐느꼈네 / 君王淚灑中宵柝
왕에게는 삼한 땅의 삼백 고을 있었지만 / 王有三韓三百州
군대 이끈 절도사들 호의호식하면서도 / 擁兵節度徒飽肉
누구 하나 달려와서 구원하려 하지 않고 / 無有一人規左足
군막에서 자다 깨어 술잔치로 소일했지 / 帳裏睡起笙簫作
정 상서가 격분하여 눈물 닦고 일어나서 / 尙書雪涕投袂起
죽기로 작정하고 왕에게로 달려가니 / 吾勤吾王敢愛死
선두에 찬란하게 펄럭이는 대장기엔 / 軍前七曜上將旗
충청도 관찰사란 큰 글씨가 보였다네 / 大書忠淸觀察使
충청도의 병마는 모두 신의 소관이니 / 忠淸兵馬臣所制
칼날과 화살처럼 속히 달려가리이다 / 鼓行而進如鋒矢
신에게 술과 안주 있다고 아뢰고는 / 臣有酒臣有殽
포위 뚫고 한밤중에 성안으로 바쳤는데 / 衝獻圍城夜色裏
이를 듣고 왕께서 충성되다 내 신하여 / 王曰忠哉嗟我臣
대의가 온 천지에 빛나기에 충분하니 / 大義固足燿乾坤
성패는 논할 바가 아니라고 하셨어라 / 畢竟成敗非所論
지금 공이 죽은 지 백 년도 안 됐건만 / 祇今公死未百年
자손이 곤궁하여 굶주리는 자가 많고 / 子孫窮餓多顚連
가련한 정 생원은 / 可憐鄭生員
들어앉을 집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없어 / 家無一瓦農無田
구걸하며 다니지만 먹여 주는 사람 없고 / 十乞村閭不一食
게다가 올가을엔 흉년까지 들었어라 / 況是今秋又無年
그를 위해 청렴했던 정 상서를 노래하니 / 我爲鄭生歌廉吏
충성되고 개결했던 정 상서의 후손이 / 安可爲鄭尙書忠且廉
어찌하여 한 뙈기의 땅조차 없는 건가 / 其孫無立錐
그대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세도(世道)가 추락하매 탐욕스런 관리 많아 / 世路日卑貪吏多
살진 말에 비싼 갖옷 대대로 부 누림을 / 肥馬輕裘世世爲富家
우맹이 이미 죽어 뼈가 썩어 버렸으니 / 優孟死去骨已朽
가련한 정 생원을 어찌하면 좋을는지 / 鄭生員奈若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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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정월 대보름달 무진년(1748, 영조24)〔上元月 戊辰〕
둥근 달이 한양성 하늘에 뜨니 / 團出長安
도성에 흩날리던 하얀 눈이 그친 뒤에 / 長安新罷豆稭屑
이윽고 구름 가에 흰 옥쟁반 둥실 뜨네 / 雲際俄升白玉盤
받들고 온 자극의 활시위가 팽팽하고 / 擎來紫極弓初滿
하늘 위를 굴러가는 수레바퀴 동그란데 / 碾到靑冥輪正完
쌓인 빛이 단봉성을 감싸는가 싶더니만 / 積暈才涵丹鳳城
어느새 맑은 광휘 주작항을 쏘는구나 / 淸光已射朱雀桁
주작항 머리에는 통금(通禁) 북이 울리지만 / 朱雀桁頭禁鼓發
태평성대 풍속이라 사람들 다 나와 걷네 / 昇平古俗萬人行
밝은 달은 세월 가도 해마다 같거니와 / 月色年年又歲歲
몰려나온 사람들은 어찌 이리 많은 건지 / 足聲殷殷何訇訇
만 가구 천 대문이 눈빛처럼 맑아지고 / 萬戶千門澄似雪
복잡한 도성 길은 물속처럼 깨끗하네 / 三條五劇淨如泓
조씨 이씨 술병 들고 방자하게 지나가고 / 趙李携樽恣經過
김씨 장씨 자리 잡고 서로서로 맞이하니 / 金張選地互逢迎
김씨 장씨 조씨 이씨 호기로운 뜻이 많아 / 金張趙李多意氣
생가에다 천금을 안 아끼고 쓰는구나 / 笙歌不惜千金費
왕손 댁의 연못 정자 의춘궁(宜春宮)과 인접하고 / 王孫池館接宜春
도위 집의 누대는 대궐 문과 나란한데 / 都尉樓臺連象魏
굴슬 병풍 걷으니 달빛 환히 비쳐 들고 / 屈膝屛開桂影發
비취 주렴 붉어지니 향로 연기 피는구나 / 翡翠簾烘香篆爇
그 밖에도 진천의 젊은 사내 있으니 / 別有秦川少年子
금위군(禁衛軍)도 위축되어 나무라지 못하도다 / 金吾瑟縮那敢叱
곽해가 나는 듯이 오릉에 도착하자 / 郭解飛騰五陵至
계심이 잡아끌고 장대로 나가는데 / 季心結束章臺出
부용검의 칼날이 번쩍번쩍 광채 내고 / 芙蓉劍躍光凌亂
앵무배가 드높은 기상을 전하도다 / 鸚鵡杯傳氣崷崒
길가에서 서로 만나 길가에서 인사하고 / 路傍相逢揖路傍
술집에 말을 매니 그대 말은 누런색 / 繫馬娼樓君馬黃
술집에선 용뇌향(龍腦香)이 온갖 소리 압도하니 / 娼樓龍氣奪鞮狄
북쪽 지역 위태롭게 할 만한 미인 있네 / 絶代佳人傾北方
미인이 진주 비취 이 밤중에 자랑하며 / 佳人珠翠矜是夜
비단옷에 패옥 차고 향기로운 방에 앉아 / 羅襦寶帶坐蘭房
〈춘면곡〉을 노래하니 전두는 비단이고 / 春眠曲裏纏頭錦
〈어부사〉를 부르는데 큰머리로 장식했네 / 漁父辭中高䯻粧
밝은 달이 지기 전엔 취하여도 안 돌아가 / 明月不墜醉不歸
인생의 즐거움이 끝이 없이 이어지네 / 人生歡樂未渠央
유독 양친 생각으로 객지살이 싫증 난 몸 / 獨有思親倦遊客
좋은 밤에 달을 보며 밤늦도록 방황하니 / 佳辰望月夜彷徨
얼음처럼 맑은 달에 이 몸을 의탁하여 / 將身願托氷蟾裏
하늘가에 빛을 흘려 모친 방을 비추고파 / 流影天涯照北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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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유천 점사(店舍)에서〔柳川店〕 이때 단성(丹城)의 임소로 근친(覲親)하러 갔다.
비가 내려 점사에 앉았노라니 / 雨坐柳川店
두 할멈이 부엌에서 얘기하는데 / 廚下兩媼語
객지에서 온 할멈이 주모를 보고 / 客媼問主媼
곡소리가 어디에서 나느냐 묻자 / 哭聲起何所
주모 할멈 갑자기 흐느끼더니 / 主媼遽哽咽
한참 있다 곡절을 대략 말하네 / 良久略相敍
이웃집에 아무개의 어미가 있어 / 東隣有某母
일찍이 네 아들을 키워 왔는데 / 母嘗四男擧
아들 셋이 한정으로 조사되어서 / 三男入閑丁
어영군(御營軍)의 보인(保人)으로 편입됐다오 / 作保御營旅
솥단지와 수저까지 죄다 팔아서 / 賣鼎兼賣匙
겨우겨우 보포(保布)를 마련했건만 / 纔備價布去
어젯밤 관아에서 차인(差人)이 와서 / 府差昨夜至
막내를 또 보인으로 삼고 말았소 / 末男又被捉
어찌할까 막내는 아직 어려서 / 吁嗟末男小
나무하는 것조차도 못 배웠는데 / 學樵樵不克
관아에서 오히려 놔두지 않고 / 官家猶不恕
보정으로 편입시켜 버린 거라오 / 簽隷納布籍
어미가 이 말 듣곤 가슴을 치며 / 母聞大搥胷
네 아들의 군역(軍役) 누가 감당할쏜가 / 孰堪四男役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 吾生不若死
한밤중에 스스로 목숨 끊으니 / 夜中甘自殺
죽는 자야 죽고 나면 그만이지만 / 死者長已矣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는지 / 生者詎存活
두 할멈의 대화를 다 듣기도 전에 / 問答聽未卒
마음 실로 놀랍고 안쓰러웠네 / 我心實驚惻
죽기를 싫어함은 누구나 같고 / 惡死人所同
아들 많이 두기를 다 바랄 터인데 / 多男人所欲
아들의 군역으로 어미가 죽어 / 男役母霣生
원통함이 쌓여서 하늘을 찢네 / 冤積穹蒼裂
성상께선 구중궁궐 깊이 계시니 / 聖后居九重
슬픈 이 곡소리를 어찌 들을까 / 此哭何由徹
쓸모없는 서생이 옛글을 읽어 / 腐儒讀古書
하루 종일 탄식하고 또 탄식하네 / 歎息欲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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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김 동자 중진의 순효사를 노래하다〔金童子重鎭殉孝祠歌〕
마악은 어찌 그리 높이 솟았나 / 馬嶽何崷崒
청담에는 잔잔한 물결이 이네 / 淸潭亦淪漪
그 위쪽에 외로운 효자의 봉분 있고 / 上有孝子之孤墳
그 아래에 새로 지은 효자의 사당 있네 / 下有孝子之新祠
예천(醴泉) 지초(芝草) 나는 곳은 정해진 바 없으니 / 醴泉無源芝不根
효자는 누구인가 여염집의 아이로다 / 孝子伊誰閭左兒
아이가 열두 살 때 모친이 역질 앓자 / 兒年十二母中癘
탕약을 시중들며 모친 곁을 지키거늘 / 母湯兒嘗兒不離
부친이 너는 어려 조심해야 한다면서 / 父曰兒藐尙愼旃
임시로 다른 곳에 보내려고 하였지만 / 扶兒欲令兒避之
어머니가 아프신데 제가 어딜 가겠냐며 / 兒曰母病兒安往
부친을 바라보며 눈물 뚝뚝 떨궜어라 / 對父簌簌零淚垂
모친이 별세해도 차마 두고 가지 못해 / 母棄兒兒不忍棄母歸
청담리 자락에서 시묘살이하였는데 / 淸潭一曲廬於斯
봄이 가고 측백도 시들해진 가을까지 / 春暉已遒秋柏枯
조석으로 어머니를 부르면서 통곡했네 / 朝曛叫母山之陲
황천이 깊고 멀어 어머니가 못 듣기에 / 冥漠重扃母不聞
따라 죽어 영원토록 슬퍼하지 않으려고 / 不如下從地下維以不永悲
무덤에 난 풀이 아직 묵지도 않았는데 / 草荄猶未夜臺宿
난초 촉이 새벽 서리 맞고 지레 시들었네 / 蘭芽徑被晨霜萎
가련하다 흙벽돌에 둘러싸인 작은 몸이 / 可憐堲周三尺軀
한 줌의 흙이 되어 모친에게 돌아가니 / 一抔全歸母所遺
혼령이 아침저녁 어머니를 모시고서 / 魂朝母侍兮暮侍母
평소처럼 도란도란 화락하게 지내리라 / 融融洩洩如平時
효자가 효도하다 죽는 일 혹 있었지만 / 孝子殉孝古或有
아이 나이 열셋이니 기특하기 그지없네 / 兒齡十三兒最奇
청담에는 물결 길이 잔잔히 일고 / 淸潭永淪漪
마악은 영원토록 우뚝하리라 / 馬嶽長崷崒
사계절에 사당에는 무얼 올리나 / 四時何物薦孝子
푸른 죽순 흰 물고기 너무나도 정갈하니 / 靑笋白魚何蠲潔
효자가 감히 혼자 먹지 못하고 / 孝子不敢享
가져가서 모친더러 드시라 할 터 / 持玆繄遺母
인류는 불멸하고 이륜(彛倫)은 영원하니 / 嗚呼生人不殄倫不斁
순효사는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으리라 / 殉孝之祠其始自今兮無替千萬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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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삼릉 낭과 함께 앞 못에서 천렵을 하였는데, 이때가 9월 14일이었다〔同三陵郞獵魚前潭 時九月小望〕
능 어귀에 도랑 막아 못을 만들고 / 鑿池障陵口
고기 길러 물속에서 고기가 노니 / 養魚魚潛伏
해마다 모조리 다 잡아 버려도 / 魚見每年勦
금세 다시 전처럼 득실거리네 / 還復牣如昔
늦가을에 건장한 졸개 데리고 / 杪秋領健卒
둑 한쪽을 터놓아 물을 빼 내니 / 割隄漉一曲
고기가 막아 놓은 통발에 걸려 / 魚至被笱捍
낭패하여 도망가려 버둥거리네 / 狼狽輒前却
물이 점점 빠져서 바닥 보이자 / 水勢漸看縮
고기들이 더 급해져 부산스럽게 / 頭頭益騷繹
떼를 지어 앞으로 돌진하다가 / 群聚氣蓊匼
허둥지둥 뒤쪽으로 몰려가누나 / 倉卒但回復
그렇지만 금빛 비늘 감출 수 없어 / 金背脫莫掩
햇빛에 모습 환히 드러나는데 / 雲日照的㿨
잉어는 그중에서 제일 드세어 / 鯉魚最不覊
펄떡펄떡 두어 자나 뛰어오르고 / 奮躍動數尺
약한 놈은 간사하고 교활하여서 / 弱者稍奸黠
진흙 속에 머리 묻고 숨으려 하네 / 垂首竄泥隙
잠깐 사이 물이 거의 빠져나가자 / 斯須水膚寸
사방에서 달려들어 잡으려 하니 / 驍手紛四集
놀란 놈들 개구리밥 더미로 뛰고 / 驚藏驀萍塊
궁해져서 연잎 속에 숨기도 하네 / 窘投依荇葉
못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모습 / 平地一以散
흰 서리가 내린 듯 눈이 내린 듯 / 炯如霜雪白
지느러미 펴고서 달아나는 놈 / 鬐張逸逭叉
비늘이 떨어진 채 작살 맞은 놈 / 鱗敗癡中擉
지푸라기 줍듯이 쓸어 담으니 / 俯取如芥拾
광주리가 작아서 다 못 담겠구나 / 筐筥不勝窄
큰 놈을 잡았을 땐 환호성 치며 / 獲雋時大叫
크고 작은 놈들 잔뜩 쌓아 놓는데 / 差差遂成積
불쌍하게 풀밭에 내던져져서 / 蹭蹬委岸草
거품 물고 여전히 노기 품었네 / 噴沫怒猶蓄
비린내가 먼 하늘로 풍겨 나가자 / 腥發滿遠空
솔개가 낚아채려 몰려오는데 / 接翅鴟撇席
이때 솔개가 사방에서 내려왔다.
돌아보며 장관에 놀라워하며 / 相顧駭壯覿
용이 집을 옮기는 건 아랑곳 않네 / 遮莫龍改宅
익릉으로 내가 온 지 오래됐지만 / 我來喬山久
온종일 문을 닫고 지내 왔는데 / 閉戶度晨夕
이번에 여러 어른 만난 덕분에 / 賴遇諸丈人
단번에 적막감을 떨쳐 버렸네 / 一擧豁岑寂
돌아올 땐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 歸時似凱捷
뜻과 기개 높아져 으스대지만 / 意氣頗赫赫
새로 물을 넣어 주라 분부하는 건 / 分付筧新流
모조리 다 죽이는 게 불쌍해서라네 / 暴殄吾所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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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회포를 쓰다〔書懷〕
사방 숲에 정적만이 감도는 밤에 / 四林都寂寂
책상 앞에 앉아 두 분 그리워하네 / 書几二人深
다람쥐 깃든 잎에 눈이 쌓이고 / 雪滯鼯棲葉
달이 기운 산에는 두견새 우네 / 鵑愁月墜岑
지금까지 게으르게 지내 온 날들 / 至今成懶惰
가는 세월 붙잡아 둘 방도가 없네 / 無計挽光陰
시냇가 등불 심지 다 떨어지니 / 落盡溪燈焰
밤새 잠 못 드는 마음 누가 알거나 / 誰知永夜心
두 번째〔其二〕
오늘을 어제와 비교해 보면 / 今日比昨日
남은 해가 하루만큼 줄어든 거니 / 寸寸歲華深
조각달이 편백나무 위에 뜬 뒤엔 / 缺月纔昇檜
구름 따라 동쪽으로 갈 수 없다네 / 同雲不返岑
온갖 바람 소리는 빈 숲에 일고 / 林空訝衆響
짙은 구름 사이로는 다듬질 소리 / 砧迥度重陰
고요한 밤이 되면 뉘우치노니 / 靜夜方知悔
이 마음이 잡풀 자란 산길 같구나 / 蹊茅尙此心
세 번째〔其三〕
훈업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요 / 勳業非吾輩
학문에 힘쓰는 게 평소 뜻인데 / 藏修素計深
동지를 넘기도록 책 다 못 읽고 / 殘書經至日
등불 하나 깊은 산을 지키고 있네 / 孤燭守穹岑
물을 긷는 새벽까지 눈이 오더니 / 谷雪通晨汲
구름 새로 드문드문 별이 보이네 / 林星刷暝陰
천시만이 아니라 인사까지도 / 天時又人事
쓸쓸하여 즐거운 마음 없어라 / 蕭瑟少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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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기사년(1749, 영조25) 봄 춘당대시에 입시하다〔己巳春 侍從春塘臺〕
능침에서 이틀 묵고 대가(大駕)가 환궁한 후 / 園陵二宿六龍廻
꽃 만발한 춘당대에 성상께서 친림하니 / 花滿春塘御座開
수행한 오군영의 군사들을 위로하려 / 要慰五營隨駕士
화랑에서 상을 걸고 무사들을 시험하네 / 畫廊金帛試群才
두 번째〔其二〕
훤칠한 팔 척 장신 우두머리 선전관이 / 行首宣傳八尺脩
백삼 입고 화룡포를 안고 나와 진헌하네 / 白衫包出畫龍袍
어전에서 개장하는 북을 둥둥 울리자 / 御前擊得開場鼓
활을 쏠 무관들이 왕 가까이 도열했네 / 決拾材官近冕旒
세 번째〔其三〕
바람 없는 공중에는 용 깃발이 고요하고 / 天半龍旗靜不風
군신은 하루 종일 꽃 가운데 앉았도다 / 君臣永日萬花中
춘당대는 한 폭의 태평성대 그림이니 / 春臺一幅昇平畫
향로의 맑은 연기 만 나무에 번져 가네 / 淑氣香煙滿樹濃
네 번째〔其四〕
빈궁이 효성스레 팔진미를 차려 내자 / 嬪宮孝養八珍來
지척의 용안에는 희색이 넘치누나 / 咫尺堯眉喜色開
전교하여 시종에게 귀한 음식 하사하니 / 傳敎班心宣異味
옥쟁반을 높이 들고 영화대로 내오누나 / 玉盤擎出暎花臺
다섯 번째〔其五〕
꽃 속에 과녁 펴니 상서로운 해 빛나고 / 花裏張帿瑞旭明
무겸들이 활 쏠 사람 이름을 제창하네 / 武兼齊唱射班名
나이 어린 도위가 쏘는 족족 명중시켜 / 弱齡都尉無虛發
어탑에 보고하는 활 점수가 제일 높네 / 榻下偏高告箭聲
여섯 번째〔其六〕
어수당 가까이에 비단 과녁 설치하니 / 魚水堂邊錦帳橫
나인들의 패옥 소리 은은하게 울리도다 / 內人環珮暗琤琤
성상께서 시끌벅적 떠드는 걸 경계하여 / 宸心爲軫紛華戒
동궁의 강독 소리 들리는지 자주 묻네 / 數問春宮講讀聲
일곱 번째〔其七〕
액례가 전언(傳言)하고 태복이 재촉하니 / 掖隷傳聲太僕催
준마가 꽃을 밟고 저물녘에 이르렀네 / 龍駒驕踏晩花來
삼군영의 대장에게 은혜롭게 하사하니 / 三營大將蒙恩賜
대궐에서 사은(謝恩)한 뒤 고삐 끌고 돌아가네 / 牽轡瑤墀拜舞廻
여덟 번째〔其八〕
수많은 관원에게 큰 은총을 베푸시어 / 蹌蹌簪笏爛光榮
내려 주신 어제(御製)를 두 손으로 받들었네 / 雲漢宸章拜手擎
축원하는 정성이 과도한 칭찬받아 / 華祝微誠霑袞奬
도성 안에 한림의 시구 가득 퍼졌어라 / 翰林詩句滿神京
상이 칠언시 한 구를 지어 내리시며 여러 신하에게 차례로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셨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시구를 써 올리기를 “환궁길에 횃불 따로 밝힐 필요 없으리라, 노인성(老人星)이 대궐 위에 본래 밝게 떠 있으니.〔輦路未須排畫燭, 壽星元自耀重宸.〕”라고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한림(翰林)의 시에서 임금을 축원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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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대보단 제사에 배종한 사실을 기록하다〔陪祭大報壇記實〕
창덕궁의 열천문 안 신종대왕 제단은 / 洌泉門內神宗壇
천고토록 지사 인인 눈물 흘릴 곳이니 / 千古志士仁人淚
숙종께서 세우시고 금왕이 계승하여 / 寧王作之今王述
변함없이 폐백 갖춰 제향을 올렸어라 / 依然玉帛趨走地
《명사》를 반포하매 은혜 더욱 드러나 / 正史東來恩益彰
감격하여 흘린 눈물 용포를 다 적셨는데 / 感涕濕盡山龍服
함인정 아래에서 밤새도록 토론해도 / 涵仁亭下五更燭
조정 논의 일치 안 돼 왕께서 근심타가 / 群議不一王心慽
결단하여 의(義)에 맞게 의절(儀節)을 제정하여 / 義起儀文斷宸衷
명 태조와 의종 함께 제향하게 되었어라 / 太祖毅宗祭祀同
왕께서 재계한 뒤 친히 희생 살피시고 / 王乃齋祓親視牲
앉은 채로 경건하게 새벽까지 기다렸다 / 坐數更鼓心憧憧
시간 되자 홀을 잡고 단아하게 추창하니 / 時至執圭趨翼如
세 신위를 모신 제단 화창하게 개었어라 / 一壇三幄連晴空
피리와 생황 이어 경쇠 쇠북 연주되어 / 簫磬和鳴笙鏞遞
계단을 내려와서 울창주로 강신할 때 / 鬱鬯灌地降自陛
홀연히 한줄기의 거센 바람 불어닥쳐 / 忽有一風空外叫
나무들이 부딪치며 슬프게 울 듯하고 / 苑木磨軋如悲嘯
무단히 빗방울이 수십 방울 떨어져서 / 雨點無端落數十
뜰 앞의 화톳불이 기세가 꺾이더니 / 赤焰欲損庭前燎
초헌이 이뤄지자 홀연 다시 맑아져서 / 初獻纔成忽復霽
하늘 가득 무수히 많은 별들 반짝이네 / 滿空磊落星河照
순식간에 광경이 어지러이 뒤바뀌며 / 片時光景紛變態
운거와 풍마 이미 강림한 것 같으니 / 雲車風馬有無內
백관들이 서로 보며 모발이 송연하여 / 百僚相顧凜毛髮
슬퍼져서 어렴풋한 모습 기술 못 하누나 / 凄愴怳惚難具述
세 황제가 여길 두고 달리 어딜 가시리오 / 嗚呼三皇捨此更何之
주나라의 문물에다 한관 위의(漢官威儀) 갖췄으니 / 周家文物漢官儀
소신은 춘추관에 몸을 담은 사관으로 / 小臣秉筆直史閣
이 일을 기록하여 영원토록 남기노라 / 書庸識哉垂千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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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성현 찰방으로 부임하는 강석여 필리 를 전송하다〔送姜錫予 必履 之任省峴郵〕
지난날 정처 없이 떠돌던 몸이 / 疇昔萍蓬跡
국포 선생 댁에서 신세 졌는데 / 依因菊圃居
나이 어려 교제는 못하였지만 / 周旋吾齒未
그대 얼굴 이때 처음 알게 되었소 / 省識子顔初
마을 안의 강회에서 뵙기도 하고 / 巷俗詩書內
운종로를 걷기도 하였었는데 / 街鍾步履餘
십여 년 전 선생께서 작고하시어 / 山頹十年淚
마주 보며 눈물로 옷을 적셨소 / 相對重霑裾
두 번째〔其二〕
가난하여 성 서쪽의 가옥을 팔고 / 貧賣城西宅
해변에서 농사짓는 백성이 되니 / 耕爲海曲氓
채란(采蘭)의 봉양 읊을 방책이 없어 / 無方詠蘭養
밭을 갈며 여가에 글 읽었지요 / 餘力帶鋤經
고기 잡아 상선(商船)에 가져다 팔고 / 魚蟹交商舶
연무 서리 속에서 벼가 익더니 / 煙霜熟浦秔
궁색함은 그대에게 맞지 않기에 / 蓬蒿非爾輩
구만리 벼슬길에 나가게 됐소 / 鵬路遂崢嶸
세 번째〔其三〕
서리 오자 성글어진 버들잎 지고 / 新霜落疎柳
성 남쪽엔 가을바람 소리 들리네 / 南郭有秋聲
저물려는 한 해를 아쉬워할 때 / 坐惜歲將晩
어찌하여 그대가 또 떠나가는지 / 如何君又行
기러기 돌아가는 한강은 넓고 / 歸鴻漢水闊
말 달리는 영남에는 비낀 구름들 / 飛馹嶺雲橫
이별한 뒤 국화꽃이 핀 것을 보면 / 別後逢黃菊
그리움에 술을 가득 들이켜리라 / 相思酒滿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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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북풍행. 양양으로 가는 상보 형을 전송하다〔北風行 送尙輔兄之襄陽〕
시월 초 한양성에 장맛비가 쏟아지고 / 漢陽十月玄陰漲
한밤중에 북풍까지 사납게 불어오니 / 中夜北風風用壯
우뚝이 선 목멱산에 한강 물이 들이치고 / 木覓贔屭江漢揚
추운 성의 나무들은 어지럽게 쓰러졌네 / 寒城萬木俱顚狂
기러기 다 날아가고 국화도 시든 계절 / 南鴻翔盡黃菊萎
곳곳에 얼음 얼고 서리 잔뜩 내렸는데 / 川逵漠漠多氷霜
이형이 이런 때에 먼 길을 가게 되어 / 嗟哉李兄此時有行役
돈을 빌려 말을 사니 황갈색 말이라네 / 貸錢買馬馬玄黃
이형은 글을 읽어 경서에도 통달했고 / 李兄讀書貫聖經
이형은 시를 지어 이름 크게 날렸지만 / 李兄作詩擅詞場
대궐 문이 너무 깊어 재주 알릴 길이 없어 / 閶闔門深賦未獻
빈한한 진사로서 흰머리만 늘어 가니 / 進士名寒髮欲蒼
바닷가 귀퉁이의 쓸쓸한 초가에서 / 蕭蕭白屋留海曲
처자식이 일 년 내내 먹고살 일 걱정하네 / 妻子歲暮憂衣食
스스로 양양성에 일이 있다 말을 하자 / 自言有事襄陽城
마부가 이른 새벽 말을 대령시켰는데 / 僕夫曉告遠鷄鳴
문 나서며 호탕하게 〈행로난〉을 노래하니 / 出門浩歌行路難
한참 동안 고개 위에 먹구름이 자욱하네 / 彌時嶺黑雲崢嶸
그대 알지 못하는가 / 君不見
양양의 동쪽이요 한수의 위에 있는 / 襄陽之東漢水上
낙산의 수려함은 온 천하가 안다는 걸 / 洛山秀色天下名
푸른 솔길 몇 리 밖에 사찰 문이 열리고 / 蒼松數里寺門開
붉은 언덕 천 장 아래 큰 바다가 비꼈는데 / 赤岸千丈滄溟橫
첩첩의 봉우리엔 의상의 전설 있고 / 層巖合沓傳義相
빽빽한 삼목 숲엔 아명의 사당 있네 / 靈杉結糾祠阿明
굴속의 부처님은 편안하게 앉았건만 / 窟中坐佛太恬如
자리 밑은 밤낮으로 바람 소리 요란하며 / 尻下日夜風霆轟
이화정(梨花亭)엔 한밤이면 황홀한 일이 많고 / 梨亭五夜多怳惚
노을빛 찬란하게 아침 해가 떠오르네 / 紫赤縈送扶桑日
아름다운 어제(御製)가 동쪽 지역 진무하고 / 雲漢宸草鎭東陲
우리 성조(聖祖) 대필을 하사하여 찬양했지 / 吾祖大筆揄揚之
금년 오월 초순경에 내가 여길 가게 되어 / 今年五月月未團
석실에서 출발하여 맘껏 유람하였으니 / 我從石室窮遊嬉
절벽에서 시를 읊자 큰 물고기 뛰어놀고 / 峭壁吟詩大魚躍
누대에서 노닐 때는 은하수가 떨어졌네 / 畫棟倚瑟明河落
돌아와선 넓은 바다 꿈을 꾸곤 하였는데 / 歸來夢想馳寥廓
우리 이형 행선지가 그 사이에 있다 하니 / 嗟哉李兄行色在其間
뭣 때문에 떠나면서 얼굴 찌푸리겠는가 / 何須去作不平顔
천오에게 읍을 하고 바닷물을 떠내어서 / 左挹天吳右酌滄海
답답한 가슴속을 깨끗이 다 씻어 낸 뒤 / 澆盡輪囷磈磊之胷次
입을 열어 배 속에 든 시를 노래 부르리니 / 然後開口大唱腹中詩
이형의 이번 걸음 실의(失意)한 건 아니리라 / 嗟哉李兄此行未必非得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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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권 양산 만 의 만사 20운〔權梁山 萬 挽 二十韻〕
준재(俊才)의 곤경 누가 애석해했나 / 驥困曾誰惜
와각(蝸角)의 영토 다툼 참지 못했네 / 蝸爭苦未戡
재주 품고 고을 원에 머물렀으니 / 才猶泥下邑
하늘은 왜 인재에게 각박한 건지 / 天豈薄奇男
고아한 곡조 절로 터득하였고 / 古調應心得
새 시 짓길 본래부터 좋아했으니 / 新詩乃性耽
이는 본래 귀한 일로 여겨졌는데 / 從來此事貴
오직 우리 공이 이를 감당하였네 / 獨許我公堪
월조에서 강제를 들었거니와 / 月朝聞江霽
‘조(朝)’ 자는 거성(去聲)이다. 희암 공(希菴公)이 일찍이 공의 “강이 개니 홀연히 무지개 뜨네.〔江霽忽高虹〕”라는 시구를 감상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칭찬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총명과 넓은 도량 선망하였네 / 聰明艶海涵
법도대로 몰아 적식 쓰러뜨렸고 / 範驅僵籍湜
여력으로 창엄을 압도하였지 / 餘力壓滄弇
북해를 차고 날자 맞설 이 없고 / 不一搏溟北
공이 중시(重試)에서 급제하였다.
나라 안에 견줄 만한 사람 없었네 / 無雙步斗南
노년에야 고을 원이 되어 나가니 / 遨頭成晩暮
헝클어진 흰머리가 애석했지만 / 華髮惜鬅鬖
관아 뜰에 핀 매화가 술을 권하고 / 酒熟官梅勸
낙동강의 달빛 맑게 동헌 비췄네 / 衙淸洛月參
몇 년 전에 금부(禁府)에서 심문받을 때 / 去年偎墨絏
며칠 동안 연이어서 담론 듣고서 / 連日侍玄談
내가 공과 함께 의금부에 나가 심문을 받았다.
노쇠하신 공의 말에 손뼉을 치자 / 鼓掌從衰疾
취한 공은 기댄 채로 껄껄 웃었지 / 掀髯倚半酣
기개 높아 세상을 좁게 봤으니 / 氣高今世窄
치밀한 꾀 대신이 알아보았네 / 籌密大臣諳
공이 이때 남쪽 고을 수령으로서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변통하려는 뜻을 가졌다.
식형(識荊)의 소원 이룬 듯 / 恰遂知荊願
책심의 부끄러움 면하였기에 / 敎除責沈慙
이별한 뒤 꿈에 자주 찾아갔었고 / 嶺雲勞別夢
편지 대신 달을 보며 그리워했네 / 樑月替書函
버드나무 다섯 그루 문 앞에 심고 / 門柳新栽五
바위 정자 삼공(三公)과도 안 바꿨는데 / 巖亭不換三
쓸쓸히도 말세에 태어난 탓에 / 蕭條當季葉
애석하게 좋은 나무 쓰러졌어라 / 顚仆惜文枏
문단에는 환히 비출 무소뿔 없고 / 藝苑亡犀照
속세에는 시끄러운 제비 소리뿐 / 湫寰覇燕喃
영지가 산에 오래 버려졌지만 / 靈芝空歲晩
서대초는 춘풍을 또 머금었어라 / 書帶又春含
현안처럼 풍질 오래 앓으시다가 / 藥餌淹玄晏
하얀 상여 타시고 먼 길 떠나니 / 川原限素驂
상심하여 조령 쪽을 돌아보지만 / 傷心鳥嶺色
캄캄하여 이내조차 보이지 않네 / 蒼慘不成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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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권 / 시(詩)
조령〔鳥嶺〕
점심 무렵 조령 아래 당도해 보니 / 午到鳥嶺底
골짜기에 그늘 아직 걷히지 않고 / 長陰宿未洩
열 자도 넘을 듯이 눈이 쌓여서 / 雪積丈有餘
키가 큰 편백만이 보일 뿐이네 / 聳檜纔不沒
모진 바람 눈 쌓인 언덕 흔드니 / 戕風攪屯素
휘날려서 연무처럼 흩뿌리는데 / 飄似煙靄潑
거대한 바위에는 고드름 기둥 / 巨巖被氷溜
하얀 쇠가 튼튼하게 박힌 듯하네 / 贔屭立皛鐵
성곽은 말끔하게 모습 변하고 / 城郭澹改色
빈 숲에는 도깨비의 휘파람 소리 / 魑魅嘯空樾
잔도가 열흘가량 막혀 있어서 / 棧途阻一旬
장사꾼들 머리가 다 세려고 하네 / 商旅變鬒髮
나의 말이 지치고 병든 탓으로 / 我驢玄以黃
남여 타고 험한 고개 올라가는데 / 籃輿乘巀嵲
산은 추워 새와 짐승 자취 끊기고 / 山寒鳥獸絶
골짜기엔 거센 바람 그치지 않네 / 林壑迥蕭瑟
소나무는 바람 속에 윙윙거리고 / 松聲和空籟
차츰차츰 어둠이 내려앉으니 / 稍稍暝意發
어둑해진 마을을 굽어보고야 / 俯視村墟杳
종이 배가 고픈 줄을 깨닫는구나 / 徒御載飢渴
나그네는 본래부터 감회 많은데 / 客子固多感
경색마저 무척이나 시름겨우니 / 物色況愁絶
시내는 다 동쪽으로 내달리지만 / 奔川盡東逝
흘러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는가 / 東逝反何日
산 정상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아 / 絶頂高近天
도성까지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니 / 可以望京洛
도성 안에 그리운 내 집 있지만 / 京洛有吾家
사람 없어 적막감에 잠겼으리라 / 人亡簾戶闃
너무나도 가련한 배 속의 아이 / 絶憐腹中兒
태어나서 곧바로 숨을 거두니 / 落地俄不育
애통함이 마침내 빌미가 되어 / 哀傷遂作祟
죽을 때도 원통하여 눈물 흘렸네 / 冤淚死盈睫
지아비는 근친(覲親) 가서 안 돌아오고 / 夫子覲未還
시부모는 영남 땅에 머물러 있어 / 舅姑在南邑
덩그러니 빈소에 놓인 널 하나 / 一棺廓獨處
두어 명의 노복이 지킬 뿐이네 / 守者數婢僕
운명이 어찌 이리 기구한 건지 / 嗚呼奈何天
이웃들도 비통하고 가련해하네 / 里閭猶悲惻
내 노정은 헛되이 지체되건만 / 我行其虛徐
영령은 간절히 날 기다리리라 / 精靈望我切
비통하게 조령에서 시를 읊는데 / 悲吟鳥嶺歌
미점에는 새 달이 벌써 떴구나 / 薇店已新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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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백복령가〔百複嶺歌〕
옛날에 듣건대 백복령이 / 昔聞百複嶺
웅장하여 천하의 장관이라더니 / 盤礴天下壯
이제 와서 처음 보니 / 今來始見之
놀라워 참으로 형언하기 어렵구나 / 吁駭誠難狀
마침 우리 행차가 가을 황혼 때를 만나니 / 我行况値秋日曛
바람 불어와 나뭇잎은 어지러이 울어 대고 / 天風吹葉啼紛紛
위는 하늘을 오르는 듯하고 아래는 구덩이 같다는 것만 알 뿐 / 但覺上如攀天下如坎
어둠 속에서 단풍인지 소나무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네 / 暝裏楓松殊不分
옷깃 앞으로 쌓인 기운이 아득히 가로질렀는데 / 襟前積氣橫漠漠
응당 이것이 가없이 일렁이는 동쪽 바다렷다 / 應是東海漲無垠
마부가 채찍질하면서 감히 소리 못 지름은 / 僕夫鞭馬不敢叱
큰 소리를 호랑이가 들을까 봐 두려운 거라 / 高聲或恐猛虎聞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밤은 얼마나 깊었느뇨 / 登頓嶺坂夜何其
우리 일행 이번 행차에 천신만고 다 겪누나 / 一行備嘗千苦辛
언뜻 깜빡이는 마을 등불을 기뻐서 바라보곤 / 喜見村燈乍明滅
문 두드리고 주인 불러 애걸을 해 보건만 / 叩門喚主頗哀乞
주인은 굳게 문 닫고서 응대를 아니 하고 / 主人不譍門掩牢
짐짓 등불을 불어 끄니 인기척도 끊어졌네 / 吹燈故故人聲絶
간곡히 말했어라 우리 일행 도적이 아니요 / 苦道此行非盜賊
골방이라도 빌려 잠시 쉬어 가고 싶소 / 願借廢房暫休歇
천만번 간곡한 하소연에 문을 열어 주었는데 / 千訴萬懇始開門
짙은 이슬 맞은지라 두건 버선 흠뻑 다 젖었네 / 重露濕盡巾與韈
이때는 궁벽한 고을에 가을걷이 미처 못 해 / 是時窮村未新穫
쌀 한 톨을 사려 해도 살 수 있는 방도 없네 / 欲買粒米無其術
처량히 허기져 앉아 동트기를 기다리다 / 悄然飢坐達天曙
지친 노복을 보자 하니 행색이 참담하다 / 罷僕相看色慘怛
사람은 안 먹어도 그런대로 괜찮지만 / 人不食尙可
굶주리는 말에다 어찌 몸을 맡기리오 / 馬飢何以致吾身
저 장자후를 탓할 것도 없어라 / 不須怨彼章子厚
세상만사가 모두 천명이요 사람 힘이 아니로다 / 萬事皆天不是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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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응벽헌에서 옥호에게 부치다〔凝碧軒簡玉壺〕
해 뜨면 견여 타고 시간 맞춰 매양 오니 / 朝日肩輿每趁期
살짝 취한 사군 뒤로 기녀들이 따르누나 / 使君微醉綺羅隨
공무 한가하여 세 가지 일과 아니 폐하고 / 官閒不廢三籌課
시 짓고도 여유로워 바둑 한 판 두는구려 / 詩罷還饒一局棋
갈대 언덕 사람 소리에 가을 저자 파하는데 / 荻岸人聲秋市散
그림 난간 비친 강빛에 석양은 더디 지네 / 畫欄江色夕陽遲
능파대가 정녕 봉래산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 凌波定似蓬萊未
배 띄워 바다 노닐 제 응당 품평해 보리라 / 題品應須泛海時
공이 일찍이 “매일 몇 수의 시와 세 잔의 술과 잠깐 동안의 낮잠으로 일과를 삼는다.”라고 하였기에, 시편 안에 언급하였다. 능파대는 금강산과 명성이 비등하므로 낙구에 언급하였다.
두 번째 첩운〔二疊〕
비가 와도 약속하고 날 맑아도 약속하니 / 雨亦爲期晴亦期
진주관 저 멀리로 날마다 서로 어울리네 / 眞珠觀迥日相隨
안개 둘러친 버들 마을은 언덕을 굽어보고 / 煙團欅柳村臨岸
가을 맑은 누대의 대는 바둑판에 어리누나 / 秋淨樓臺竹暎棋
땅 구르는 쑥대 신세라 동해는 넓기만 하고 / 轉地萍蓬東海闊
하늘 닿은 운수 아래 북쪽 편지 더디 오네 / 黏天雲樹北書遲
나그네 시름겨워 홀연 말을 잊고 앉았으니 / 覊愁忽爾忘言坐
바로 외로운 성에 낙엽 소리 들리는 때라오 / 正是孤城葉響時
세 번째 첩운〔三疊〕
세상 밖에서 백아의 거문고가 종자기를 얻었네 / 世外牙絃得子期
예전 조정에 있을 적에 우리 잠시 종유했었지 / 向來西掖暫追隨
맑은 가을비 내려 여울 소리 홀연 빨라지고 / 灘聲忽急淸秋雨
시령이 새로 너그러워져 격일로 바둑 두네 / 詩令新寬間日棋
구름과 달이 또한 질탕한 정취를 자아내니 / 雲月也能供跌宕
벼슬아치가 묻혀 살아도 감히 원망치 않노라 / 衣冠不敢恨棲遲
신선이 노닐던 경승지가 지금도 나뉘어 남아 / 仙區物色分留在
단조가 아득히 영랑 술랑 시절부터 전해지누나 / 丹竈遙傳永述時
시 짓기와 바둑 두기를 격일로 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네 번째 첩운〔四疊〕
단제를 날듯 달려 사군과의 약속 찾아가니 / 丹梯飛赴使君期
여울 물길 비스듬히 흘러 들빛이 따라가네 / 灘勢迤迤野色隨
난간 기댄 물가 구름 아래 기생들 늘 나란하고 / 依檻渚雲常竝妓
누대 가까이 물새는 바둑 소리에 아니 놀란다 / 近樓沙鳥不驚棋
촛불 앞에 강물 일렁이니 잠자는데 썰렁하고 / 燭前江動眠堪冷
회나무 꼭대기 바위 높이 매양 늦게 앉았어라 / 檜頂巖高坐每遲
듣자니 세상에는 아이들 장난질이 많다지만 / 見說世間兒戲足
바다와 산을 기대고 누운 지 이미 오래라오 / 海山欹枕已多時
다섯 번째 첩운〔五疊〕
초명의 세계 밖에 좋은 마음 기약 있어 / 焦螟界外好心期
깊은 대숲 오솔길로 나막신 신고 따라가네 / 幽竹通蹊步屧隨
술자리의 기이한 향기는 새로 올린 버섯이요 / 酒所異香新薦菌
문인의 맑은 일과라 특별히 바둑 더하였네 / 詞家淸課別添棋
긴 모래톱에 내리는 비는 모래를 흠뻑 적시우고 / 長洲雨氣霑沙足
시든 풀 속 귀뚜리 소리에 늦도록 난간 기대노라 / 衰草蛩音倚檻遲
남국에서 편지 와서 마음 더욱 찢어지는데 / 南國書來心更折
노친께선 나를 그리시며 온종일 우시누나 / 老親思我泣三時
여섯 번째 첩운〔六疊〕
황혼 무렵 미인과의 약속이 홀연 어긋나니 / 黃昏忽誤美人期
선명히 나는 갈매기만이 바다 위로 따라오네 / 的的飛鷗海上隨
고향 돌아가고픈 맘에 공연히 꿈을 점쳐 보고 / 桑梓歸心虛占夢
강호의 긴요한 일이라곤 웃으며 바둑 두는 일 / 江湖機事笑爭棋
높은 난간은 대숲 가까워 일찌감치 쓸쓸한데 / 危欄竹近蕭森早
먼 들판에 펼쳐진 시내는 굽이굽이 더디 흐르네 / 迥野川鋪曲折遲
동쪽 누각 다시 가리키며 좋은 약속 남기나니 / 更指東樓留勝約
금빛 까마귀 하늘로 날아오르는 오경 때라오 / 金鴉騰翥五更時
일곱 번째 첩운〔七疊〕
운거 타고 굳이 안기생을 좇을 것도 없어라 / 雲車未必躡安期
주수의 하늘 향기가 가는 곳마다 따르누나 / 珠樹天香在處隨
한낮의 고요한 관가는 도리어 절간 같은데 / 晝靜官家還似寺
가을 깊어 공무 한가하니 바둑 둔들 어떠랴 / 秋深公事不妨棋
서풍이 나무 스치매 나뭇잎 소리 멀어져 가고 / 西風度樹葉聲遠
석양이 강물에 가득한데 갈매기 그림자 더디네 / 夕照滿江鷗影遲
난간 아래 물고기를 난간 위에서 세노라니 / 欄下遊魚欄上數
세상의 미움과 노여움을 모두 잊는 때라오 / 世間嫌怒兩忘時
여덟 번째 첩운〔八疊〕
삭삭 우는 오동나무 소리가 가을을 기약하는데 / 鳴梧淅淅作秋期
하늘 끝에서 자고 먹음에 노복 하나 따르누나 / 眠食天涯一僕隨
가랑비 내리는 푸른 물풀 위로 때로 그물 들어 보고 / 疎雨綠蘋時擧網
흰 구름 이는 빈 누각에서 억지로 바둑 두네 / 白雲虛閣强圍棋
성 아래 먼 포구에 서늘한 그늘이 아득하니 / 城臨極浦凉陰遠
장안에 부친 편지는 당도할 날이 더디리라 / 書寄長安到日遲
주인만이 부지런히 걸상 내려 손님을 맞이하고 / 惟有主人勤解榻
푸른 산에서 맑은 담소하며 매양 시간 보내누나 / 碧山淸話輒移時
이튿날 고을 사또 영공이 병이 나서 약속에 오지 못하고 앞 시에 첩운하여 보내왔기에 나 홀로 응벽헌에 앉아 아홉 번째로 첩운한 시를 받들어 답장하였다〔翌日主倅令公病未赴期 疊前韻見贈 獨坐凝碧軒 九疊奉復〕
오늘 아침 서운케도 만날 기약 어긋나니 / 今晨惆悵誤佳期
열두 난간 텅 빈 채 그림자만 홀로 따르네 / 十二欄空影獨隨
시름 속이라 자연히 게으른 잠이 많겠지만 / 愁裏自然多倦睡
병중이라고 바둑 겨룰 일이 아니 생각나리오 / 病中能不念勍棋
시 다 짓자 깊은 대나무숲은 온통 적막하고 / 詩罷幽篁渾寂寂
가을 한낮에 앉았노라니 시간도 더디 흐르네 / 坐來秋日亦遲遲
유군이며 모녀가 모두들 무료한지라 / 兪君嫫女皆無賴
높은 바위로 자리 옮겨 기대니 저물녘 되려 하오 / 徙倚層巖欲暮時
유군(兪君)과 모녀(嫫女)는 공의 시에 있는 말이므로 언급하였다.
열 번째 첩운〔十疊〕
귀신이 응벽헌의 약속을 교묘히 시기하여 / 魔兒巧妒碧軒期
안개와 노을만이 차례차례 나를 따라 노니네 / 獨有煙霞取次隨
시름겨운 매미 소리는 이별하던 나무에 남았고 / 黯黯蟬聲留別樹
쓸쓸한 대 그림자는 남은 바둑판 위로 떨어진다 / 蕭蕭竹影落殘棋
흥취 일으키던 작은 술통은 남은 향기에 젖었는데 / 關情小榼餘香濕
그림자 마주한 채 붉은 벼랑을 느릿느릿 걷노라 / 對影丹崖倦步遲
베개 베고 누웠던 사군께서 호기가 넘치시어 / 伏枕使君豪氣在
낮닭 울 무렵 남여를 준비하라 분부하셨네 / 籃輿分付午鷄時
열한 번째 첩운〔十一疊〕
명승지에서 끊임없이 그윽한 기약을 맺으니 / 名區續續結幽期
빈객과 주인의 풍류에 한가로움이 항시 따르네 / 賓主風流暇輒隨
가을 동원 술잔 깊어라 병에서 막 일어났으니 / 秋院酒深新起病
안개 물결 위 배 작아도 바둑판 둘 만하여라 / 煙波舫小且容棋
하늘 끝의 나그네 잠이 완전히 많이 줄었기에 / 天涯客睡全多減
바닷가 찬 겨울 소리에도 끝내 늦지 않았구려 / 海畔寒聲遂不遲
잠깐 떨어져서 밤 지새움도 이별이 아쉬우니 / 乍別經宵猶惜別
마주하면 저녁연기 피어날 때가 또한 두렵구려 / 對來還恐暮煙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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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죽서루에서 느낀 가을날의 생각. 노두의 〈추흥팔수〉에 차하다〔竹樓秋思 次老杜秋興八首〕
우수수 찬 바람 소리가 대숲을 울리고 / 淅瀝寒聲鳴竹林
두타산의 아득한 산빛은 싸늘하여라 / 頭陀遠色作凄森
묵은 구름은 회나무에 쌓여 서리로 다 맺히고 / 宿雲屯檜霜全護
푸른 바다에 구름 드리워 낮이 쉬 그늘지네 / 碧海生簾晝易陰
만사 아득해라 반악(潘岳) 대자리에 눈물 어리고 / 萬事蒼茫潘簟淚
구추라 지는 낙엽은 초나라 신하 마음이로다 / 九秋搖落楚臣心
서재 등불은 환히 밝고 높은 누각은 닫혔는데 / 書燈的的高樓掩
버들 시든 밤 규문 깊은 곳엔 외로운 다듬이소리 / 衰柳門深獨夜砧
두 번째〔其二〕
갈대 핀 너른 물가에 기러기 처음 비껴 날고 / 蒹葭洲闊鴈初斜
임금과 어버이 그리움에 머리가 세려 하네 / 一念君親鬢欲華
만 리 흐르는 신령한 근원은 한수에 다다르고 / 萬里靈源窮漢水
깊은 바다 기이한 기운은 선사와 접하였다 / 重溟異氣接仙槎
막 서리 내린 이별 언덕엔 쓸쓸히 낙엽지고 / 新霜別岸蕭蕭葉
달 떨어지는 외로운 성엔 아득히 피리 울리네 / 落月孤城窅窅笳
하늘 끝 좋은 시절에 암울하게 서성이는데 / 天末佳期暗延佇
뜰 가득 비바람 불어와 노란 국화를 꺾어 버리네 / 滿庭風雨折黃花
울진현(蔚珍縣)을 선사(仙槎)라고 부르는데, 척주(陟州)와 인접해 있어 네 번째 구절에서 언급하였다.
세 번째〔其三〕
갠 날 밝은 호수 일렁이고 죽서루는 찬란한데 / 明湖晴漾竹西暉
거울 속 먼 봉우리는 은은한 그림자 보내오네 / 鏡裏遙岑送影微
추각으로 금침 옮기니 바위에 뜬 달이 가까웁고 / 秋閣移衾巖月近
밤배 위에서 젓대를 부니 물새가 날아오른다 / 夜船吹篴渚禽飛
난초 시든 물가에는 아직 향기가 멀리 풍기고 / 蘭衰澤畔香猶遠
계수 늙는 회수 남쪽에선 계책이 어그러져 가네 / 桂老淮南計轉違
소슬한 교외 들판에는 서리가 듬뿍 내렸는데 / 蕭瑟郊原霜意重
작은 담장의 배처럼 하얀 뺨은 구분쯤 살졌구나 / 小墻梨頰九分肥
네 번째〔其四〕
죽서루 저녁 빛이 남은 바둑판을 비추더니 / 西樓暮色帶殘棋
바닷가에서 〈수조가〉 소리 구슬피 들려오네 / 海國歌聲水調悲
등불 다 꺼진 뒤엔 온갖 감정이 매번 교차하고 / 百感每交燈盡後
홑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다듬이소리 울려 퍼지네 / 單衣未改杵鳴時
여울에 바람 이는 옛 골짝 가을이라 안정키 어려운데 / 風灘古峽秋難定
낙엽에 비 듣는 빈 휘장 속에 외론 밤 더디 흐른다 / 雨葉虛帷夜獨遲
소중한 친구들이 서울 땅에 가득하거니 / 珍重故人京洛滿
그립다 말하는 편지를 또다시 받았어라 / 也蒙書札道相思
다섯 번째〔其五〕
난대는 청절한데 봉산과 접했어라 / 蘭臺淸切接蓬山
상서로운 구름이 지척 간에 있었을 때를 추억하노라 / 憶在祥雲咫尺間
진강을 마치면 달빛이 임금님 옷깃에 스며들었고 / 講罷月華侵繡衮
조회에서 돌아올 땐 버들빛이 궁궐을 옹위하였지 / 朝回柳色擁天關
기생이 웃으며 남쪽 노파의 일장춘몽을 말하니 / 風塵笑起南婆夢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도리어 초택 사람 같구나 / 霜鏡翻疑楚澤顔
나그네의 바람은 가련케도 궁궐에 걸려 있으나 / 旅望可憐懸鳳闕
내 마음은 조정의 반열에 서길 바라는 것 아니라오 / 此心非爲戀鵷班
여섯 번째〔其六〕
떠돌던 쑥대가 머나먼 해변까지 흘러왔어라 / 蓬梗迢迢極海頭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속에 가을이 깊어 가네 / 故園歸夢欲深秋
성긴 울타리 내리는 비는 중양의 빛을 보내는데 / 疎籬雨送重陽色
높은 언덕에 바람이 부니 밤마다 시름겨워라 / 絶岸風爲每夜愁
깊은 대숲을 지팡이 짚고 거닐다 자던 새 마주치고 / 幽竹倚筇逢宿鳥
어두운 뜸 걷어 열고 돌아오는 갈매기를 맞이한다 / 暝篷開幔受回鷗
당시 굴원과 가의 모두 무더운 변방으로 쫓겨났거니 / 當時屈賈皆炎徼
태평성대에 맑고 시원한 곳은 이 고을뿐이로구나 / 聖世淸凉獨此州
일곱 번째〔其七〕
짙푸른 암벽의 빛에 신령의 공력 깃들었고 / 蒼沈壁色費神功
닭 울고 개 짖는 마을은 물기에 젖어 있네 / 鷄犬村家水氣中
누각 아득한데 밤에 창해 너머로 태양이 솟고 / 樓迥夜騰滄海旭
누대 높으니 가을에 대붕의 바람을 막아 내네 / 臺高秋敵大鵬風
사군께서 맞아 웃으시매 물가 구름은 희디희고 / 使君迎笑渚雲白
쫓겨난 객 멀리서 오매 산 단풍은 붉디붉어라 / 遷客遠來山葉紅
말에서 내려 만리도의 비석을 먼저 찾아가 보니 / 下馬先尋萬里石
구불구불한 조적은 허 미옹의 글씨로다 / 離奇鳥跡許眉翁
동해비(東海碑)가 옛날에는 만리도(萬里島)에 있었다.
여덟 번째〔其八〕
건지촌 가는 길은 아득히 구불구불 보이고 / 搴芝村路迥逶迤
가을걷이 뒤 비낀 해는 옛 비탈에 가득하네 / 穫後斜陽滿古陂
여울 물길 굽이에는 연잎 배가 드나들고 / 灘勢曲通蓮葉舫
빗소리에 이는 시름 국화꽃 가지에 스며드네 / 雨聲愁入菊花枝
서리 치는 얽힌 나무들은 먼 바위에 솟아 있고 / 霜敲亂樹遙巖出
어선 등불은 겨울 물고기 쫓아 포구를 떠나가네 / 燈趁寒魚別浦移
누대 위 외로운 잠자리를 상심할 것 없어라 / 樓上未應傷獨宿
백운이 남긴 약속이 저물녘 처마에 드리웠나니 / 白雲留約暮簷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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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미수 허 선생 동해비가〔眉叟許先生東海碑歌〕
동으로 실직의 유허를 굽어보며 / 東臨悉直墟
큰 바다의 물을 바라보네 / 以觀瀛海水
바닷가에 한 조각 비석이 있어 / 瀛海之上一片石
정의로운 기운이 하늘로 우뚝 솟았네 / 正氣矗矗干霄起
나의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나의 관(冠)을 바로 쓰도다 / 肅我儀容整我巾
그러고서 공경히 마주하고 보노라 / 然後夔夔當面視
고결하도다 공자께서 산삭하신 뒤의 시요 / 雅潔孔子刪後詩
구불구불 창힐이 만들어 전래한 글자로다 / 離奇蒼頡造來字
긴 눈썹에는 백설이 덮이고 손은 살짝 떨리는데 / 長眉覆雪手微戰
기이한 필체는 마치 신령과 희롱하는 듯 / 異筆怳與神靈戲
아침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면 / 朝朝太陽從東來
문장의 기염이 태양을 감싸고 함께 배회하도다 / 文燄籠之共徘徊
찬찬히 읽으니 〈청묘(淸廟)〉의 비파 소리 어렴풋이 들리고 / 緩讀疑聆廟瑟希
우러러 더듬으니 은하수를 붙잡고 도는 것 같아라 / 仰攀如挹天河回
혹은 머리가 아홉 개인 듯 혹은 다리가 하나인 듯 / 或如九首或一股
행간마다 글자마다 모두 날아 춤추도다 / 行行字字皆翔舞
꿈틀꿈틀 신비하고 기괴한 형체를 숨길 수 없어 / 蜿蜒秘怪形莫遁
약한 놈은 바짝 엎드리고 강한 놈은 성을 낸다 / 弱者帖伏强者怒
아명이 하늘에 하소연하니 천제께서 탄식하시고 / 阿明上訴帝曰咨
너는 삼가 피하여 수부에 잠겨 있으라 명하시니 / 汝謹避之潛水府
백 년 동안 파도가 물어뜯지 못하였고 / 百年波濤囓不得
큰 고래와 검은 고래가 와서 몸을 굽신거렸네 / 穹鯨黑鰍來傴僂
하늘이 선생을 보내 미혹함을 깨치게 하셨나니 / 天遣先生牖迷津
세상 어디서인들 지주가 아니셨으랴 / 世間何處非砥柱
홍수가 땅에 가득 흘러넘쳐 너무나 혼탁했으니 / 橫流滿地太獨漉
서로 빠뜨려 죽인 것은 사나운 바다뿐만이 아니었도다 / 胥溺不啻滄溟惡
선생께서 담소하시며 손으로 구원해 주시어 / 先生談笑以手援
우리 도가 그 덕택에 명맥을 이어 갔네 / 斯文賴之綿一脈
오호라 선생께선 바다에 능하고 사람에는 능하지 못하셨는지 / 嗚呼先生能海不能人
인간 세상에는 지금껏 편벽되고 간사한 말이 일어나누나 / 人世至今詖淫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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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이형 상보 씨가 대령을 넘어 멀리 동해의 유배지로 나를 방문하였다. 하늘 끝에서 그를 만났으니 놀라움이 어떠했겠는가. 밤새 앉아 문득 이 시를 써서 화답을 구하였다〔李兄尙輔氏踰大嶺 迂訪余東海謫居 天涯逢迎 驚倒如何 夜坐輒錄此求和〕
그대는 어디에서 떨어졌는고 / 君自何方落
처음 보곤 꿈인가 의심했노라 / 初看夢也疑
밤에는 솜이불을 나눠 덮지만 / 絮衾分夜裏
반찬은 하늘 끝인지라 부족하구려 / 盤饌少天涯
곤궁과 현달은 하늘이 안배했나니 / 窮達玄穹錯
근심과 시름을 백발로써 아노라 / 憂愁白髮知
안부 인사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 寒暄未了敍
귀양살이 시 있는가 벌써 묻누나 / 已問謫中詩
두 번째 첩운〔再疊〕
예전부터 형제 같은 벗인지라 / 同袍自宿昔
둘의 우정은 의심할 것도 없지 / 情愛兩無疑
말 타고 오니 양기가 생기는 즈음이요 / 鞍馬陽生際
이 산하는 태양이 떠오르는 물가로다 / 山河日本涯
바다 구름은 용이 뿜는 기운 같아 두렵고 / 海雲龍氣怕
창밖 대나무 소리에 눈 내리는 줄 알겠네 / 窓竹雪聲知
초나라의 노랫가락이 참으로 처량커니 / 楚調多凄切
그대는 응당 내가 지은 시를 가련해하리 / 君應憐我詩
세 번째 첩운〔三疊〕
저녁 바람 불어 텅 빈 숲을 뒤흔드니 / 夕吹空林動
발자국 소리인가 바람 소리 의심하네 / 跫音颯欲疑
바다는 관문 밖으로 연이어 펼쳐지고 / 海連關以外
사람은 한수 물가에서 나를 찾아왔네 / 人自漢之涯
괴로운 대화 속에 등불은 꺼져 가는데 / 苦語篝燈盡
낡은 갈옷이라 된서리 찬 줄 아노라 / 嚴霜裋褐知
상봉해선 서로의 처지를 서글퍼하노니 / 相逢一相咤
불평하는 시 짓는다 어찌 괴이해하랴 / 那怪不平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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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6권 / 시(詩)○망미록 상(望美錄上)
당인의 운을 뽑아서 상보 형과 함께 짓다〔拈唐人韻 同尙輔兄賦〕
어두운 눈이 다리 가에 내려 까마귀 꼬리 잠기는데 / 暝雪橋頭烏尾沈
작은 사립문은 쓸쓸하게 대나무숲 속에 닫혀 있네 / 小扉牢落掩篁林
성에서 굽어보는 바닷빛은 하늘 아래 늘 음산하고 / 城臨海色天常曀
화각 소리 그친 누대 그늘은 밤 되어 막 깊어지네 / 角罷樓陰夜正深
동쪽 골짝에 피어난 매화가 세밑이라 어여뻐라 / 東峽梅花憐歲暮
대관을 넘어 말 타고 온 그대 마음을 알겠어라 / 大關鞍馬見君心
나의 시는 울적한 시름에 지어진 것이 아니요 / 吾詩不作牢騷恨
모두가 어버이와 임금님이 그리워 읊은 것이라오 / 盡是思親戀闕吟
두 번째 첩운〔再疊〕
향로 연기 어둑한데 달은 서쪽으로 잠기우고 / 爐熏黯黯月西沈
긴 밤에 바람 소리가 북쪽 숲에서 들려온다 / 遙夜風聲在北林
구름과 눈이 다 걷히고 온갖 경치 변했는데 / 雲雪傡收千境幻
아우와 형이 마주한 채 등잔불은 깊어 가네 / 弟兄相對一燈深
원통한 검광(劍光)은 쉼 없이 두우성에 뻗치거니 / 冤鋩不廢干牛氣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가 면벽하는 맘과 어떠한가 / 泥絮何如面壁心
봉래 바다를 떠도는 나는 스스로 위로하노니 / 蓬海流離吾自賀
멋진 유람에 시 백 편을 넉넉히 지어 읊으리라 / 壯遊贏得百篇吟
세 번째 첩운〔三疊〕
하늘 끝이라 서신이 이르지 않음이 한스러워 / 天涯尺素恨浮沈
요초 속의 님 그리며 고향의 숲을 꿈꾸노라 / 瓊草懷人夢故林
고요히 문 닫고 있으니 산골에는 눈이 퍼붓고 / 寂寂閉門山雪盛
쓸쓸히 말 달려가니 바다 구름은 깊어 가네 / 蕭蕭驅馬海雲深
나그네 옷을 마련하지 못한 채 한겨울 맞았지만 / 客衣未授玄冥節
나의 귀양살이는 본디 성상의 본심이 아니었다오 / 臣謫元非聖主心
막다른 길이나마 좋은 일 있어 참으로 기쁘거니 / 頗喜窮途猶勝事
그대에게 붓 휘두르게 하고 나는 길게 읊노라 / 遣君揮筆我長吟
성상께서 일찍이 “삼척은 경관이 아름답고 산천이 맑고 시원하다. 내가 일부러 땅을 가려 유배를 명하는 것은 채(蔡) 아무를 아껴 그가 병으로 상할까 걱정해서이다.”라고 하셨으므로 여섯 번째 구절에서 언급하였다.
네 번째 첩운〔四疊〕
하잘것없는 덧없는 인생 더욱 묻혀 사노라니 / 莽莽浮生更陸沈
빈 숲 감도는 까막까치를 앉아 보기 가여워라 / 坐憐烏鵲繞空林
거대한 바다가 집을 흔드니 외로운 잠 설치고 / 重溟撼屋孤眠淺
남은 촛불로 성에 기대어 만 권 책에 빠져드네 / 殘燭依城萬卷深
병에서 일어나 찬 매화를 산 너머에서 만나더니 / 病起寒梅逢嶺外
눈 갠 뒤엔 밝은 달빛이 호수 가운데 어른거리네 / 雪晴華月動湖心
하늘 끝에서 훈지의 노래를 한번 불러 보다가 / 天涯試奏塤篪曲
웃음 그치고 〈정운〉 시를 적막하게 읊조리네 / 笑罷停雲寂寞吟
다섯 번째 첩운〔五疊〕
구름과 눈이 이리저리 흩날려 산 위 잔도를 덮고 / 雲雪縱橫嶺棧沈
늦은 밤 숲 속에선 슬픈 피리 소리 은은히 흐른다 / 夜闌哀籟暗生林
추운 겨울날 나그네 가는 길은 명사가 아득할 테고 / 寒天客路鳴沙迥
내일 닥쳐올 이별 수심은 푸른 바다보다 깊으리라 / 明日離愁碧海深
필마로 새벽에 길 떠나면 쉽게 몸이 병들 텐데 / 匹馬侵星人易病
날 밝기 재촉하는 이웃집 닭아 너는 무슨 맘이냐 / 隣鷄催曙爾何心
쓸쓸한 이역만리에 나를 알아주는 벗 적으니 / 蕭條絶域知音少
이별 뒤에 시 지으면 그저 혼자 읊으리라 / 別後詩成秖自吟
이형이 떠나고서 서안 머리에 시축만이 남아 있었다. 앞의 시에 첩운하여 삼 일 동안 나빴던 심사를 풀었다〔李兄去 獨案頭詩軸在爾 疊前韻 用洩三日之惡〕
두타산에 걸린 차가운 해는 어둑어둑 가라앉고 / 頭陀寒日黯將沈
허물어진 성곽에는 돌아온 갈까마귀 가득하다 / 殘郭歸鴉已滿林
편지야 기러기 그림자 끊기든 말든 내버려 둘 테지만 / 書札任敎鴻影斷
눈 쌓여 머무는 곳엔 그대 말 발자국이 깊이 남으리라 / 雪花留着馬蹄深
바람 불고 바다 광활한 곳으로 홀로 떠난 그대 / 天風海闊孤征路
재조차 차갑게 식은 여관에 홀로 누운 내 마음 / 旅館灰寒獨臥心
그대 시를 읽어 보니 마치 얼굴 마주한 듯 / 拈見君詩如見面
그리움에 하룻저녁 열 번을 읊조린다 / 相思一夕十回吟
일곱 번째 첩운〔七疊〕
성가퀴 어둑어둑 바다 기운 잠겨 갈 제 / 睥睨荒荒海氣沈
성긴 숲 가 몇 집에선 방앗소리 들려오네 / 數家鳴杵傍疎林
천지는 광활한데 사람은 늙어 가고 / 乾坤莽闊人垂老
갖옷 입고 말 탄 차가운 날에 눈은 문득 깊어 가네 / 裘馬凄寒雪驟深
초가 객점에 달빛 밝은데 어느 곳에 묵었는지 / 茅店月明何處宿
대 침상 어두운 등불 아래 문 닫고 누운 마음 / 簟床燈暗閉門心
궁벽한 시골이라 한산의 돌이 정녕 적은데 / 窮鄕定少寒山石
그대 양양으로 떠났으니 뉘와 함께 읊을거나 / 君去襄陽誰共吟
여덟 번째 첩운〔八疊〕
새벽 바다 아득하여라 별들은 잠기우고 / 曙海冥茫星斗沈
부엉이 울음 그치자 차가운 숲 고요해졌네 / 訓狐啼罷悄寒林
삼동에도 시서 공부에 전념을 못 했는데 / 三冬不爲詩書住
온갖 감정은 도리어 세월 따라 깊어 가네 / 百感還隨歲月深
하늘 끝이라 천고의 작별을 이루지 못했거늘 / 天末未成千古別
꿈속에서도 만 갈래 회포를 다 풀기 어렵고나 / 夢中難悉萬端心
등불 앞에 노복은 머리 숙인 채 졸고 있고 / 燈前一僕垂頭睡
이웃집 닭만이 괴로운 내 시구에 화답하누나 / 獨有隣鷄和苦吟
이날 밤 꿈에 죽은 처를 보았다. 이제 막 이장(移葬)의 예를 치렀으나, 나는 장지(葬地)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시편 안에 언급하였다.
아홉 번째 첩운〔九疊〕
풍진 속에서 크게 웃으며 부침을 겪는 동안 / 風塵大笑閱升沈
외로운 배는 단풍나무 대나무숲에 줄곧 매어 두었지 / 一繫孤舟楓竹林
한낮 집에서 이불 덮고 바라보매 강 눈이 세차더니 / 晝閤擁衾江雪急
어둔 누각에 화각 소리 들리고 성곽 안개 깊어지네 / 暝樓聞角堞煙深
인간 세상에서 금단을 이뤘다는 소식은 아득하기만 한데 / 人間渺渺金丹信
바닷가에 있는 굳센 남아의 마음은 너르고 너르도다 / 海上恢恢鐵漢心
연못 속 물고기와 용이 천년 동안 눈물을 흘렸나니 / 澤裏魚龍千載泣
초소를 흰 마름 곁에서 읊지 말지어다 / 楚騷休傍白蘋吟
열 번째 첩운〔十疊〕
산골짜기 겹겹한데 하얗게 쌓인 눈에 잠겼고 / 崖谷鱗鱗積素沈
뱁새는 분수 따라 평온히 숲 속에 둥지 틀었네 / 鷦鷯隨分穩巢林
음과 양이 번갈아 드니 동장군은 늙어 가고 / 陰陽迭逝玄冥老
형체와 그림자 서로 기대어 초가 깊이 묻혔네 / 形影相依白屋深
천 리 밖의 겨울옷은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것이요 / 千里寒衣慈母線
첩첩 산골 외로운 촛불은 쫓겨난 신하의 맘이로다 / 亂山孤燭逐臣心
화롯불 꺼지고 글 다 쓴 뒤에 말을 잊고 앉았더니 / 爐灰書罷忘言坐
뜨락 가득 불어온 대숲 바람이 절로 시를 읊조리네 / 滿院風篁自作吟
열한 번째 첩운〔十一疊〕
화각 소리 잦아들고 온갖 소리 잠기더니 / 畫角吹殘衆籟沈
죽서루 오솔길 끊기고 눈길이 숲으로 통하네 / 竹西蹊斷雪通林
앞마을에 범이 지난 뒤 갠 날 진흙길이 미끄럽고 / 前村虎過晴泥滑
텅 빈 정원의 부엉이 울음에 밤 숲은 깊어 가네 / 虛院鵂鳴夜樹深
허리띠 점점 헐거운데 외려 기개는 꿋꿋하여라 / 衣帶漸寬猶傲骨
저포를 억지로 던짐이 어찌 마음이 기뻐서이랴 / 摴蒱强擲豈歡心
시름겨운 사람 책상 위에 반생의 시가 있건마는 / 愁人案有潘生什
긴 대자리에서 울음 삼키느라 차마 읊을 수 없네 / 長簟呑聲不忍吟
열두 번째 첩운〔十二疊〕
눈썹과 머리털 성글어지고 병으로 침울한데 / 眉髮蕭疎病思沈
쫓겨난 신하는 황량한 숲에 깃들어 살아가네 / 逐臣棲息寄荒林
오래도록 바다에 천 번 천둥이 울리는 듯하더니 / 長時海似千霆吼
지난밤 눈이 내려 석 자나 깊이 쌓였구나 / 前夜雪爲三尺深
봄을 앞둔 버들과 매화는 처음 생기를 띠는데 / 春近柳梅初氣色
세모에 가진 것이라곤 경서와 신심뿐이라네 / 歲闌經卷且身心
황강의 두 편 부는 모두 한가한 일이었거니 / 黃岡二賦渾閒事
무엇보다 잊기 어려운 노래는 〈수조가〉라네 / 最是難忘水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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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동년 이몽서가 사십 운을 보내 유배 생활의 안부를 묻기에 병중에 차운하여 사례하다 임신년(1752, 영조28)〔李同年夢瑞見贈四十韻 問謫居安否 病中次韻謝之 壬申〕
봄이 도성의 기러기를 움직여서 / 春動秦城雁
시름이 초택의 넋으로 이어졌네 / 愁連楚澤魂
땅 모퉁이 바다는 사방에 일렁이고 / 地維溟四漲
하늘 끝엔 두 검의 원통한 기운 서렸네 / 霄極劍雙冤
이때에 몽서도 죄를 입어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점괘는 타인에 의해 풀리건만 / 卜筮憑人解
풍상은 괴이하게도 우리에게 있구려 / 風霜怪我存
변방 산하에 장차 해가 바뀌려 하니 / 關河且歲籥
근력을 내어 억지로 음식을 먹네 / 筋力强盤飡
오두막은 비리고 음산한 바다를 이웃하고 / 蜒戶隣腥曀
오랑캐 배는 해 뜨는 곳에 머무른다오 / 蠻帆宿紫暾
고을이 순박하니 간혹 거여를 먹고 / 村淳或粔籹
몸이 수척하니 아직 술은 마시지 않네 / 肉瘦未觴樽
여기가 바로 신선의 거처이거니 / 境是神仙宅
내가 온 것도 성상의 은혜로구나 / 吾來聖主恩
태풍 몰아치면 대지에 흙비 내리고 / 颶纏霾大陸
눈발 쏟아지면 곤륜산을 찌르는 듯 / 雪急㨖崑崙
일월 아래 누대는 수려함을 더하고 / 日月樓增麗
우레 같은 폭포는 나무뿌리 뒤집은 듯 / 雷霆瀑倒根
두타산(頭陀山)에 경치가 빼어난 폭포가 있다.
수풀 우거진 곳은 선침의 의혹이 있고 / 草荒仙寢惑
황지(黃池)에 목조(穆祖)의 능침(陵寢)이 있다고 시골 노인들이 서로 전하나, 끝내 확실한 자취를 찾지 못했다.
파도 일렁이는 곳엔 울릉도가 가물거리네 / 濤詭鬱陵昏
생학은 어느 해에 돌아오려나 / 笙鶴何年返
부엉이는 밤새도록 울어 대누나 / 鵂鶹不夜喧
척주(陟州)에 부엉이가 많다는 내용이 미수(眉叟)의 《기언(記言)》에 보인다.
용추(龍湫)가 솟구치매 용이 매양 튀어 오르고 / 湫騰龍每拔
호암(虎巖) 우뚝한 곳에 호랑이 서로 웅크리도다 / 巖挺虎交蹲
용추와 호암은 모두 중대(中臺)의 빼어난 경치이다.
자고 먹는 건 어진 수령의 은혜 입었고 / 眠食蒙賢宰
청량하다는 명성은 지존까지 들으셨도다 / 淸凉徹至尊
성상께서 이 지역이 청량하다 하여 천신(賤臣)을 유배하셨다.
몸이 미천하니 조화를 저버리고 / 身微負造化
세도가 굽혀지니 건곤을 믿을 수밖에 / 道屈信乾坤
반백 머리는 날이 갈수록 희어지고 / 鬒雪行多改
글 샘은 부끄럽게도 점점 더 마르네 / 文泉愧漸眢
훌륭하게도 그대가 곧은 도를 떨치니 / 多君奮直轡
기어올라 넘보는 적들이 없었도다 / 無敵以鉤援
온화한 인품은 말이 없는 옥이었고 / 蘊藉無言玉
늠름한 풍모는 과감히 간언하는 깃발이었네 / 風稜敢諫旛
군이 마침 간관(諫官)으로 있다가 쫓겨났다.
선발된 인재 가운데 성가를 드러냈으니 / 空群見聲價
그대 같은 사람 비상해야 마땅하거늘 / 如爾合騰翻
처음의 포부는 백대에서 어긋나고 / 初服違臺柏
변방 구름은 화번을 연모하도다 / 邊雲戀畫轓
당시에 군의 대인 공께서 수주(愁州)의 수령으로 부임하셨다.
지난해 가을이라 칠월을 추억함에 / 憶曾秋七月
도성 남문에서 나를 전송하였었지 / 送我郭南門
연잇는 화복(禍福)은 변방 말을 따라오고 / 倚伏隨邊馬
푸른 하늘엔 바다 곤붕(鵾鵬) 날개를 거두었네 / 靑冥戢海鵾
나그네 행색은 쉽게 초췌해지지만 / 客來形易悴
시의 기상은 오히려 드높아진다오 / 詩就氣猶軒
산 위 잔도 높아 나는 새도 두려워하고 / 嶺棧飛禽畏
대양은 하도 넓어 별들조차 삼킨다네 / 滄瀛列宿呑
나에게 부쳐 주신 주옥같은 글을 보니 / 瑤麻此見寄
학문의 공력 또한 속이기 어려워라 / 淇竹也難諠
고단한 자취는 교룡이 사는 물가에 있고 / 跡孑蛟螭岸
외로운 마음은 사슴 돼지 사는 마을에 있네 / 心孤鹿豕村
새벽까지 장막이 그을도록 독서를 하고 / 晨煤讀書帳
봄날 살진 물고기를 울타리에 말리도다 / 春膩曬魚藩
지난날 괴로움에 신음하다 보니 / 往日呻吟苦
열흘이 지나도록 약 바른 흔적 남았네 / 經旬藥餌痕
궁벽한 마을에는 《소문》도 없어 / 荒閻無素問
종놈은 무당에게 호소하였지 / 傖僕仰巫言
금단의 화덕을 부질없이 말하지만 / 謾說金丹竈
여기에 사선(四仙)의 단조(丹竈)가 있었다.
끌채에 매인 처지가 슬플 뿐이라오 / 徒悲局促轅
술잔에 비친 뱀이 빌미가 되었으나 / 杯蛇應作祟
수척한 송골매도 날아오를 수 있나니라 / 瘦鶻可能騫
하늘 광활한데 멈춘 구름은 무성하고 / 天闊停雲藹
봉우리 주위에는 흰 장기가 모였도다 / 峯圍白瘴屯
날아가는 노을 보며 장적을 그리건만 / 飛霞憶張籍
높은 걸상은 진번과 떨어져 있도다 / 高榻限陳蕃
요순의 군민으로 만들기를 함께 배웠으나 / 學共君民舜
농사일을 배우려던 번지보다 더욱 부끄러워라 / 羞深稼圃樊
서로 지극한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노니 / 相期大究竟
여인의 예쁨 따위가 무슨 상관 있으리오 / 遮莫女嬋媛
세상사 내버려 두고 베개에 기대어 보니 / 世事仍欹枕
뜰의 봄빛이 훤초에 이미 넘쳐흐르네 / 庭暉已洩萱
회오리바람 일어 모래가 반쯤 뒤집히는데 / 飈回沙半逆
여울 가에 선 꿈은 아득히 흔들리네 / 瀧立夢遙掀
천지는 새를 가두어 둔 새장과 같나니 / 天地禽盛籠
잠영을 호랑이가 발 자르듯 버리리라 / 簪纓虎捨蹯
장차 한만으로 날아올라 노닐 것이니 / 且拚遊汗漫
상원을 싫어한다 말하지 마소 / 休說厭湘沅
곤궁하니 어찌 묻혀 사는 것 근심하랴 / 窮豈愁沈陸
돌아가면 응당 정원을 가꾸리라 / 歸應事灌園
복숭아꽃이 이웃 골짝에 비치리니 / 桃花暎隣洞
훗날 끊임없이 만나기를 기다리노라 / 他日佇源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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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종이를 가지고 와서 글을 구하는 기생이 있기에 장난삼아 써서 주다〔妓有奉牋求書者 戲草以贈〕
물굽이에 기대어 단청 누대를 따로 세웠더니 / 別起粧樓倚曲灣
고운 봄날 새로 피어난 화초가 뜰에 가득하네 / 艶陽新卉滿庭閒
봄이 오니 붉은 도화 심은 것이 후회스러워라 / 春來悔種紅桃樹
화사하게 피어난 꽃이 첩의 얼굴을 시기하네 / 多事開花妒妾顔
두 번째〔其二〕
들판으로 걸어 나가 잠시 난을 캐노라니 / 步出原頭薄采蘭
답청하는 시절인데도 날이 조금 차가워라 / 踏靑時節屬微寒
무단히도 의남초를 서로 다투어 얻느라 / 無端爭得宜男草
벗들과의 한나절 즐거움을 놓치고 말았구나 / 剛失同儕半日歡
세 번째〔其三〕
봄이 오자 춤 배우느라 집을 거의 비우더니 / 學舞春來罕在家
월라의 향기가 교방의 꽃으로 스며들었네 / 越羅香濕敎坊花
가련하다 악부에는 사랑 노래가 많이 있나니 / 可憐樂府多情曲
앞 냇가에서 〈자야가〉를 능숙히 부르누나 / 慣唱前溪子夜歌
네 번째〔其四〕
해 질 녘 대문 앞의 방초 우거진 물가에서 / 日暮門前芳草洲
마름 캐는 노랫가락이 이별의 시름 일으키네 / 采菱歌曲動離愁
한스러워라 짙푸른 연못가에 자란 버드나무여 / 生憎凝碧潭邊柳
북으로 떠난 정인의 배를 묶어 두지 못하였구나 / 未繫情人北去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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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옥호 공과 바다에서 배를 타고 만리도를 방문하다〔同玉壺公浮海 訪萬里島〕
타향살이에 골수까지 병이 들어 / 覊旅病至骨
문 닫고 들어 앉아 날마다 칩거하다 / 閉戶日成蟄
드넓은 바다 위의 만리도를 찾아가려 / 曠然萬里島
상쾌히 창해에 노를 저어 나아가네 / 快意滄海楫
수평선은 해가 뜨는 곳에 가까웁고 / 水天迫日本
구름은 기궤하여 귀신이 서 있는 듯 / 雲詭似鬼立
미미한 이 몸은 진정 창해일속이라 / 身微儘一粟
기분이 불현듯이 구슬퍼지는구나 / 氣像歘悽惻
홍합이며 검은 미역이 자라나서 / 紅蛤與皁藿
자리 곁에 더부룩이 널려 있도다 / 離離羅座側
웃으면서 팔을 뻗어 따 보려 하다 / 一笑送臂摘
파도가 차가워 팔을 다시 움츠린다 / 波寒臂更跼
어부가 갑자기 옷을 벗어젖히고서 / 漁漢忽裸體
만 장 깊은 푸른 바다로 뛰어들어 / 躍投萬丈碧
검은 상투를 거꾸로 물속에 처박으니 / 烏䯻倒能揷
눈 깜짝할 새에 어디로 간 자취도 없다 / 瞥然無去跡
잠시 뒤에 파도 헤치고 숨을 내뿜으니 / 俄頃出波吒
생복이 번쩍이며 손아귀에 가득하네 / 生鰒燦盈握
곧바로 늙은 용의 입술을 더듬어서 / 直搜老龍吻
애오라지 이것으로 가족을 봉양하니 / 聊以資事育
사람이 먹고사는 일이 아니었다면 / 人如非口腹
죽음을 무릅쓰고 어찌 이 일을 하랴 / 捐死豈此業
세상에는 이보다 험한 일이 있나니 / 世有險於斯
환해는 만 겹 높이로 솟구치거늘 / 宦海騰萬疊
아이놈들은 목숨을 하찮게 여겨 / 兒曹薄性命
그 속에 출몰하며 날랜 몸을 과시하니 / 出沒誇身捷
곁에서 보는 자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나 / 傍觀髮爲竦
당사자는 도취하여 위험도 모른다네 / 當者酣不識
지네 너라는 놈이 뱀을 달게 먹듯이 / 蝍蛆爾甘帶
나는야 다 버리고서 내 뜻에 맞게 살리 / 棄置適吾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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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오금잠가〔烏金簪歌〕
오금잠이라 하는 것이 / 烏金簪云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전하는데 / 自麗代傳至今
삼척 사람들이 존숭하여 제사하고 신으로 삼으니 / 陟人尊之祀作神
신당(神堂)이 옛 성의 북쪽에 있도다 / 叢祠立在古城陰
매년 오월하고도 오일이 되어 / 每年五月日有五
잠신이 나와 노닐면 앞다투어 구경한다네 / 簪神出遊爭先覩
늙은 무당이 화려한 옷을 입고 앞에서 이끌면서 / 老巫前導華采衣
큰 머리 장식에 넓은 부채를 들고 덩실덩실 춤추면 / 大髻廣扇翩翩舞
척주부 안 수백 호 백성들 가운데 / 陟州府內數百戶
허리를 조아려 빌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 無有一人不傴僂
생황 퉁소 구슬픈 소리는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데 / 笙簫悲吟斷復連
잠신은 스스로 말을 않고 무당이 대신 전하도다 / 簪不自言巫代傳
너희 집의 식구는 모두 몇인고 / 爾家率口凡幾許
복을 낳고 재앙을 내림이 모두 나의 권세로다 / 産祥降厄皆吾權
어리석은 백성들이 꿇어앉아 아낌없이 바치노니 / 愚氓跪納無所惜
종이며 베며 쌀이며 곡식이며 돈꿰미로다 / 紙布米粟金錢陌
오호라 오금잠이여 / 嗚呼烏金簪
사람들에게 후하게 받고서 무엇을 베풀려나 / 受人厚施將何酬
황천이 위에 있고 천지신명이 벌여 있나니 / 皇穹在上神祇列
네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우리라 / 恐汝胷臆難自由
병자는 낫기 바라고 가난한 자는 부유하길 바라거늘 / 病者求瘳貧求富
네 책임이 너무 과중한 까닭에 내가 걱정하노라 / 爾責傷多吾故憂
오금잠이여 오금잠이여 / 簪兮簪兮
신당의 신이 되지 말고 / 不如不作叢祠神
구렁텅이에 몸을 맡겨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이 나으니라 / 委身溝壑心不役
유치하고 어리석은 소인이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 愼勿學穉騃小人叨重寄
고혈만 빨아먹고 인민을 저버리는 짓을 부디 하지 말지니라 / 辜負人民但肉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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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비 내리는 밤에 김생에게 지어 주다〔雨夜贈金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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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울타리 아래서 짖는데 / 犬吠于籬下
중문을 여는 사람 누구인가 / 重門開者誰
빈 골짝에서는 인기척만 들려도 기쁘거늘 / 空跫聞可喜
빗소리 울리는 때에 그대가 찾아왔음에랴 / 況在雨聲時
두 번째〔其二〕
그대 건지동에서 왔으니 / 君自搴芝洞
응당 오십천 물결을 겪어 봐야지 / 應試五十流
내일 아침이면 모래톱에 모이리니 / 明朝會江潬
이번 길에 배를 타 볼 수 있을 걸세 / 此去可能舟
세 번째〔其三〕
개가 울타리 아래서 짖는데 / 犬吠于籬下
삼경이라 나그네 돌아간다네 / 三更客還去
진흙길 깊고 빗방울이 굵다오 / 泥深雨鈴麤
어둠에 잘 살펴 돌아가게나 / 昏黑愼歸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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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송옹에게 주다〔贈宋翁〕
송옹은 영남에서 온 나그네 / 宋翁嶺南客
씨족에 벼슬아치들이 많거늘 / 氏族多仕宦
어찌 스스로 먹고살지 못하고서 / 奈何不自食
유치의 잔도를 훌쩍 넘어왔는고 / 飄越楡峙棧
열 식구가 황량한 골짜기에 유락하여 / 十口落荒峽
따비밭을 어렵사리 처음으로 마련하니 / 畬田艱始辦
나무숲을 불태우랴 돌부리를 찍어 내랴 / 燒林斫石根
쟁기 잡고 밭갈이도 익숙지 않았더라 / 耒耟操不慣
해마다 연이어 날 가물고 홍수 나서 / 連年旱兼澇
기장밭 보리밭이 황토로 변했으니 / 黍麥赤地幻
칠십 노인에 고기 음식 논할 게 무엇이랴 / 七十肉何論
하루걸러 한 번만 비름국 먹는 것을 / 倂日羹夬莧
집에는 아이들이 배고파 울고불고 / 屋中泣飢荒
부인은 치마에다 눈물을 적셨다오 / 流淚漲裙襻
고향은 험한 산길 너머 아득히 멀고 / 故鄕鳥途外
낙동강이 또다시 사이에 놓였어라 / 洛水復相間
이리저리 떠돌다 물가 마을 찾아와서 / 漂轉來水村
갈대밭 곁에서 나그네 살이 하였다네 / 旅窓傍葦薍
몸을 굽혀 아이들의 서당 훈장 되었거니 / 屈作童子師
학동들의 도움 받아 입에 풀칠하는도다 / 糊口賴衆丱
동이 트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매 / 天明授口讀
땀 흘리며 앉아서 저녁까지 가르치네 / 汗坐及景晏
시를 지어 금당으로 명부를 찾아가면 / 作詩謁琴堂
명부께선 특별히 돌아보며 환대했고 / 明府特回盼
때때로 죽서루 옆에까지 찾아와서는 / 時來竹樓側
못나고 게으른 나를 다정히 방문하였네 / 欵曲訪疎慢
나 역시 타향으로 흘러온 사람이거니 / 我亦流離者
덫과 함정에 걸려 세상 환란 겪는 신세 / 機穽罹世患
한낮 태양은 중천에서 환하게 빛나는데 / 白日赫中天
뜬구름은 제멋대로 부질없이 흘러가네 / 浮雲恣枉謾
본래 우린 호량 아래 노니는 물고기거늘 / 自在濠梁魚
어인 일로 통발 속에 잡히고 말았는가 / 何事被罩汕
난을 몸에 차고 장안을 멀리 바라보매 / 蘭珮望長安
첩첩한 산봉우리를 어떻게 깎아 낼까 / 疊嶂那由鏟
한밤중에 〈백석〉의 노래를 부르노라니 / 中夜歌白石
옷을 당겨도 겨우 정강이만 가리도다 / 挽衣纔至骭
홀로 베고 누우니 바다 악어가 두려웁고 / 孤枕㥘海鰐
듬성한 백발 되니 상강 기러기에 놀라누나 / 短髮驚湘雁
찾아온 송옹의 천진한 모습을 보자커니 / 翁來見天眞
정성스러운 그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로다 / 悃愊非外贗
가련하다 송옹이여 오뉴월이 다 되도록 / 憐翁五六月
아직도 갈포 옷조차 걸치지 못하였네 / 絺葛猶未擐
말세의 습속은 가난한 선비를 박대하니 / 末俗薄貧士
그를 본 사람들은 업신여기기도 하누나 / 見者貌或嫚
고향을 떠난 사람은 천하게 되는 법 / 離鄕人則賤
붕우와 친족들이 꾸짖지 않으리니 / 朋族不其訕
바라건대 송옹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 願翁還故山
작은 냇가에 기대어 초가를 얽고서 / 編茅倚小澗
아들에게는 옛 책을 읽도록 가르치고 / 敎子古書讀
딸에게는 헌 옷 꿰매는 일을 가르치게 / 敎女故衣綻
삼십 일에 아홉 번 먹더라도 좋으리라 / 三旬九食好
기름진 고기반찬을 부러워할 것 없네 / 不須羡芻豢
사람이 진정으로 세상을 달관한다면 / 人如眞達觀
곤붕이 메추라기와 무슨 차이가 있으랴 / 鵾鵬何異鷃
고향으로 수레 돌리기를 늦추지 말지니 / 回車勿虛徐
내 말이 참으로 진심 어린 충고로다 / 我語寔忠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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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7권 / 시(詩)○망미록 하(望美錄下)
객사 주인의 시축에 제하여 주다〔題贈舍館主人軸〕
성안에 집이 수백 호인데 / 城中數百戶
해 뜰 제 기와가 흐르듯 빛나네 / 日出瓦如流
어렵사리 이 집에 들어와 사노니 / 辛勤入此室
죽서루와 가장 가까이 있다네 / 最近竹西樓
두 번째〔其二〕
저녁 무렵 찾아오는 사람 없고 / 日夕無來人
시서만이 고단한 나를 위로하네 / 詩書慰岑寂
부들방석에 앉아 한 가닥 향 피우면 / 蒲團一炷香
때로 산승이 찾아와 자고 가네 / 時與山僧宿
세 번째〔其三〕
문이 동쪽 바다를 향해 열렸으니 / 門對東溟出
아침 해가 떠오름이 늦지 않아라 / 曉旭來不遲
동이를 머리에 인 충정 품은 객이 / 衷情戴盆客
머리를 조아리며 함지에 절을 하네 / 稽首拜咸池
네 번째〔其四〕
적선이 오히려 익힌 음식을 먹어서 / 謫仙猶火食
그대로 하여금 애를 쓰게 하였구려 / 敎汝費經營
먼 옛날의 삼려자에게 부끄럽나니 / 遠愧三閭子
그 사람은 국화 꽃잎만 먹었던 것을 / 但能餐菊英
다섯 번째〔其五〕
문밖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엔 / 門外小溪水
봄 깊어 버들은 나란히 꽃을 피우고 / 春深楊柳齊
나뭇가지 끝에는 별과 달이 가득한데 / 枝頭星月滿
까막까치가 평화로이 둥지를 틀었네 / 烏鵲穩成棲
여섯 번째〔其六〕
눈보라가 텅 빈 창에 가득 몰아치니 / 風雪滿虛牗
책 읽는 겨울밤이 더디게 흐르누나 / 讀書冬夜遲
그대가 정성스레 떡을 만들어 줌은 / 殷勤造餠餌
새벽마다 허기져하는 나를 염려함이라 / 每度念晨飢
일곱 번째〔其七〕
울타리 곁 방초 핀 길은 / 籬邊芳草路
오십천으로 향해 가는 길 / 是向五十川
매일 그 길로 갔다가 돌아오니 / 朝朝往復返
방초가 무성해질 새가 없다오 / 芳草不成芊
여덟 번째〔其八〕
사흘만 머물러도 애착하게 되거늘 / 三宿猶堪戀
어느덧 한 해를 머물렀음에랴 / 於焉況一期
교인이 두 줄기 눈물을 짜내어 / 鮫人兩行淚
그대에게 오언시로 남겨 주노라 / 付與五言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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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篇 漢詩-바2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