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記-19
약천집 제28권 / 남구만(南九萬)
기(記)
1온양온천 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
2함흥 십경도기(咸興十景圖記) 병서(幷序). 갑인년(1674, 현종15).
3북관 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 병서(幷序)
4함경도 지도기(咸鏡道地圖記)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5망운정기(望雲亭記) 을축년(1685, 숙종11)
6성경 여지도기(盛京輿地圖記)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7용암정기(龍巖亭記) 무인년(1698, 숙종24)
8명고서원(明皐書院) 중수기(重修記) 기축년(1709, 숙종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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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온양온천 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
경자년(1660, 현종1) 가을 자친께서 두풍(頭風)으로 어지럼증을 앓으시기에 온양군(溫陽郡)의 온탕에 목욕하러 가실 때에 실로 내가 모시고 갔으니, 때는 8월 22일 을사일이었다. 내려온 다음 날 예전에 궁전이 있던 옛터를 두루 둘러보니, 담장이 무너지고 섬돌이 망가져서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으므로 선왕(先王)의 유풍을 생각하고 태평성세가 이미 멀어짐을 개탄하여 하루 종일 머뭇거리며 자못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궁전 앞에 찬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 작은 비(碑)가 있는데,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이 그 앞뒤에 기록하였는바, 글자의 획이 닳고 마멸되어 겨우 글 뜻만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재물로 공인(工人)들을 사서 새겼다.” 하였는데, 그 길이가 몇 자에 불과하여 사서인(士庶人)들의 묘표(墓表)에 견주어 보면 채 반도 못 되니, 아! 이는 바로 우리 조종조가 검소함을 숭상하고 간략함을 지켜서 사치스럽게 큰 것을 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지 않은 뜻일 것이다.
거주하는 백성들이 말하기를 “온천의 근원이 본래 궁전 터 아래에 있었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서 살을 데어 목욕할 수가 없으므로 구리로 만든 통으로 온천의 수맥을 끌어다가 오른쪽에는 남탕(南湯)을 만들고 왼쪽에는 북탕(北湯)을 만들었다.” 하였다. 이른바 남탕이란 것은 궁전 터의 오른쪽 약간 앞에 있는데, 위가 지붕으로 덮여 있으니 바로 세조대왕께서 일찍이 임어하셨던 곳으로 지금 일반인들이 목욕하는 곳이고, 이른바 북탕이란 것은 궁전 뜰 왼쪽 섬돌 아래에 있는데, 한 구역에 우물이 두 개가 있어 남탕과 제도는 같으나 돌을 다듬은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남탕보다 나으니 이는 바로 동양도위(東陽都尉)가 “삼대비(三大妃)가 행차하셨던 곳으로 황폐함이 특히 심하다.”라고 말한 곳이다.
이제 동양도위가 이곳에 다녀간 지 또 20년이 지났다. 그리하여 깨진 기와 조각과 자갈이 우물 속에 가득 차 있고 풀뿌리가 우물가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황폐하고 질척거려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으며, 또 외탕(外湯)은 가죽을 다루는 피장(皮匠)들이 더럽혀 놓아서 악취를 차마 맡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혹자가 말하기를 “온천탕 위에 옛날에는 단청한 누각이 있었는데,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접어들어 퇴락하여 무너졌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중년에 악창(惡瘡)을 앓는 자가 와서 목욕한 다음부터 마침내 폐지하고 목욕하지 않는다.” 하였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단순하고 경솔하여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나 동양도위가 기록한 내용에 이르기를 “악창을 앓는 자가 제멋대로 뒤섞여서 목욕했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또한 이 말을 얻어들었는가 보다.
내가 생각건대 하늘이 이미 물과 불을 내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쓰게 하고, 또 임부(壬夫)와 정녀(丁女)로 하여금 서로 그 영험함을 나타내어 자연의 기운이 뒤섞여 신묘한 온천을 빚어내어 만백성의 병을 제거하게 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이 나오시어 하늘의 은혜를 공경히 받들어 몸소 그 복을 누리시고, 또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쓰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리하여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동산과 같아서 모두 인수(仁壽)의 경지에 오르게 하였으니, 어찌 수나라와 당나라의 화청궁(華淸宮)이 다만 음란하게 향락하는 터전으로 쓰인 것과 같겠는가.
선왕이 일을 하실 때에 또 후세에 유익하게 하려고 하셨다. 그리하여 지금 사람에게 미치는 유택(遺澤)이 장차 천지와 함께 무궁할 터인데, 다만 한 번 수리했다가 한 번 폐지되어서 그 공효를 널리 베풀지 못하게 된 것이 한스러우니, 이것이 애석해할 만하다. 어찌 다만 옛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성인(聖人)의 길이 영원히 매몰되게 한 월(越)나라의 풍속만 애석하겠는가.
또 생각건대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남녀는 욕실을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남녀의 분별을 엄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이 온천은 춘분(春分)과 추분(秋分) 때가 되어 원근의 사녀(士女)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그 형세가 한 우물에서 번갈아 목욕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예(禮)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온당치 못하다. 이제 만약 이 폐지되었던 온탕을 열어 남자는 남탕(南湯)에서 목욕하고 여자는 북탕(北湯)에서 목욕하게 한다면 우리 선왕(先王)과 선비(先妃)의 거룩한 덕과 큰 은혜가 심원하게 함께 유행할 것이다. 이미 우리 백성들의 아픔과 가려움을 제거할 수 있고 또 우리 백성들의 예의의 풍속을 이룰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혹자는 선비가 왕림했던 곳은 곧 금지(禁地)라 하여 난색을 표하나 내가 생각건대 선왕께서 왕림하셨던 곳도 이미 일반인의 목욕을 허락하고 있으니, 선비가 왕림하셨던 곳을 부인들에게만 목욕하도록 허락한다면 또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옛날 송나라의 선인 고태후(宣仁高太后)는 말하기를 “만일 백성에게 이롭다면 나는 내 머리카락과 살점도 아깝지 않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우리 선비께서 일찍이 훈계하신 내용이다.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기대어 꽃을 구경하매 천상(天上)의 길이 아득히 막혔으나 성모(聖母)의 진실하고 깊은 뜻을 생각해 보면 어찌 한번 목욕하고 남은 물을 만세(萬世)의 백성들에게 떠 주려 하지 않으시겠는가. 이에 나는 마침내 하인들을 모으고 흙 삼태기와 가래를 장만하여 막힌 곳을 소통시키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며 도랑을 치고 물줄기를 터놓아서 3일 만에 공사가 끝났다. 이미 열어 놓았으나 다시 막히고 이미 수리하였으나 다시 폐지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곳을 맡은 지방관의 책임일 것이니, 나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주-D001] 동양도위(東陽都尉) :
선조의 셋째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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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함흥 십경도기(咸興十景圖記) 병서(幷序). 갑인년(1674, 현종15).
3.북관 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 병서(幷序)
내가 함흥에서 이미 십경(十景)을 얻었고, 도내(道內) 여러 고을에 있는 산과 바다와 누대의 경치가 뛰어난 곳을 또 열 군데 얻었다. 이 밖에 경흥(慶興)의 백악(白岳), 길주(吉州)의 만불(萬佛), 영흥(永興)의 비류(沸流), 안변(安邊)의 광석(廣石)은 단지 이름만 듣고 그곳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모사하는 데에 함께 나열할 수가 없다.
아! 도내에 있는 20여 고을의 볼만한 명승지를 모아 봤자 그 숫자가 겨우 함흥 한 고을과 비슷하니, 이는 아마도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인 곳이 있고 흩어진 곳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아니면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이 가까운 곳은 상세하고 먼 곳은 간략해서인가. 이는 알 수 없다.
관외(關外)의 산천은 본래 거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사이에 또한 이처럼 마음과 눈을 웅장하게 하고 원대한 생각을 부칠 만한 곳이 있는데, 다만 땅이 황폐하고 궁벽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서 널리 알리는 자가 없을 뿐이다. 산과 바다의 경물(景物)의 풍치(風致)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는데도 매몰됨이 이와 같으니, 더구나 광채를 숨기고 감추어 궁벽한 시골에서 말라 죽어 가는 자가 또 어찌 당세에 이름을 날리고 후대에 명성을 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개탄할 만하다.
학포(鶴浦)
안변부(安邊府)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바닷가의 돌벼랑 가를 따라가면 포구 가에 이른다. 포구 동북쪽에는 명사(鳴沙) 수십 리가 바람을 따라 무늬를 이루는데, 혹은 가늘고 혹은 굵어서 찬란함이 흰 비단과 같다. 포구 동쪽에는 사봉(沙峰)이 높이 솟아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눈 더미 같고 때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물이 흘러가는 듯한데 봉우리의 높이가 줄지도 늘지도 않으니, 이것이 신기하다. 포구의 둘레는 20리인데, 수면이 거울처럼 둥글다. 사봉 서쪽에 작고 푸른 봉우리가 물가에 임하였는데, 위에는 소나무와 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등라(藤蘿)가 얽혀 있다. 이곳을 원수대(元帥臺)라고 부르니, 옛날에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포구 중앙에는 또 한 점의 외로운 섬이 있는바, 이름을 율도(栗島)라 하는데 우뚝하게 홀로 서 있어서 그림자가 물결 속에 잠겨 있으니, 양자강(揚子江)의 금산(金山)과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이 이에 비교하면 어떠한지 모르겠다. 사면의 야트막한 산들이 끊긴 듯 이어진 듯 푸르고 영롱해서 채색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포구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는 겨우 배 한 척이 들어갈 수 있는데, 파도에 모래가 밀려와 포구를 꽉 막고 있으므로 포구에 출입하는 배들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
국도(國島)
학포의 사봉 동쪽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10리쯤 들어가면 이 섬에 이른다. 섬의 형세가 삼면은 높고 한 면은 낮은데, 낮은 곳에는 배를 정박시킬 수 있다. 물가에는 흰모래가 마전한 비단처럼 깔려 있고 약간 올라가면 해당화가 비단을 짜 놓은 것처럼 널린 채로 자라고 있으며, 또 조금 올라가면 푸른 대나무가 울창하고 순무가 섬을 온통 뒤덮고 있다.
배를 옮겨 섬을 돌아 동쪽으로 가면 돌벼랑이 점점 높아져서 혹은 수십 길이 되기도 하고 혹은 백여 길이 되기도 한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가닥가닥 나누어 묶어 세운 듯한데, 네모지게 사면이 반듯하고 곧아서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다. 조금 남쪽에 작은 굴이 있는데,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깊고 어두워서 측량할 수가 없으며, 배를 저어 들어가 보면 겨우 삼베 한 필(匹)의 길이이고 좁아서 배가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굴 위를 우러러보면 단사(丹砂)가 돌 속에 숨어 있어 돌 틈 사이로 드러나 있는데, 배에 꽂는 장대로 위를 찌르면 단사가 점점이 배 안으로 떨어진다. 굴에서 또다시 돌아 남쪽으로 가면 돌의 형세가 더욱 높아져 뾰족한 바위가 우뚝하여 우러러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린다. 섬의 네 모퉁이에 묶어 세운 듯한 돌은 부러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비록 길이는 똑같지 않으나 모두 깎아 놓은 것처럼 사면을 이루어 크기가 똑같으며, 굴속의 돌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한 섬이 모두 네모난 돌이 묶여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 기이하다. 포구와 섬은 진실로 천하의 절경이니, 아마도 산세가 북쪽으로부터 와서 금강산(金剛山)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므로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이 지역에 먼저 누설된 것이고, 경포대(鏡浦臺)와 총석정(叢石亭)으로 말하면 다 지류(支流)와 말류(末流)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도안사(道安寺)
정평부(定平府)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금진강(金津江)을 건너 바닷가에 이르면 산이 길게 뻗어서 바다 속으로 거의 10리쯤 빠져 들어간 곳이 있는데, 외로운 봉우리가 우뚝이 솟아 천길 높이 깎아지른 것처럼 서 있는바, 이 도안사가 그 중간에 있다.
좌우에는 비해(裨海)를 끼고 있고, 앞에는 끝없이 펼쳐져 아득한 하늘에 닿은 수평선 밖을 굽어보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안변(安邊)의 학포(鶴浦)와 국도(國島)가 되고, 왼쪽으로 돌면 길주(吉州)의 마천령(磨天嶺)과 성진(城津)이 되는데, 그 사이에 섬과 바위와 산이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나타나기도 하여 혹은 멀리 있기도 하고 혹은 가까이 있기도 하며,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며, 혹은 높이 솟아 날아오르는 새 같기도 하고 혹은 깎아 놓은 칼과 창 같기도 하여 눈앞에 빽빽이 펼쳐져 있다.
절 뒤로 대여섯 길을 조금 올라가면 관일단(觀日壇)이 있는데, 해와 달이 그 앞에서 떠오른다. 관일단에서 약간 서쪽으로 가면 작은 암자가 있는데, 돌을 뚫어 굴을 만들고 인하여 부처를 모시는 감실(龕室)을 만들었으며, 감실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함흥평야가 아득히 멀고 창창(蒼蒼)하여 산악이 작은 개밋둑처럼 보이고 강호가 가는 띠처럼 보인다.
괘궁정(挂弓亭)
갑산부(甲山府)에서 북쪽으로 100리를 가서 혜산진(惠山鎭)에 이르면 이중으로 된 성이 높은 언덕 안에 우뚝이 축조되어 있으며 성 북쪽 귀퉁이에 괘궁정이 있는데, 괘궁정 난간이 성가퀴를 내려다보면서 압록강(鴨綠江)을 굽어보고 있다. 압록강 북쪽 언덕 수십 보 되는 곳에 석탑이 있어 아스라이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데, 속담에 이르기를 “옛날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라비는 남쪽 언덕에 성을 쌓고 여동생은 북쪽 언덕에 석탑을 세웠다.” 한다.
석탑에서 빙 돌아 올라가면 바로 백두산(白頭山) 자락이니, 백두산 정상과 겨우 100리라 한다. 괘궁정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강물이 굽이쳐 돌아 흐르며 들이 평평하고 둥글게 펼쳐져 있어서 매우 시원하고 깨끗한 운치가 있다.
아! 이곳은 바로 백두산의 뿌리요 압록강의 근원이니, 천하의 외진 곳이다. 예전에는 여진(女眞)과 말갈(靺鞨)이 서로 이곳을 소굴로 삼아 도둑질하고 노략질하여 마치 금수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과 같았는데, 어느 때에 불교가 이곳에 전래되어 인공(人功)과 사력(事力)으로 마침내 이와 같이 높고 웅장한 석탑을 세웠단 말인가. 이는 천 년 이내의 일에 불과한데도 아득하여 징험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한문(寒門)을 뛰어넘고 현명(玄冥)을 지나 전욱(顓頊)에게 이것을 물을 수 있겠는가.
석왕사(釋王寺)
이 절은 안변부 서쪽 40리 지점인 설봉산(雪峰山) 아래에 있다. 우리 태조대왕이 잠룡(潛龍) 시절에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꾸고는 산 아래 토굴에 있는 승려에게 찾아가 물으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몸에 서까래 세 개를 졌으니 바로 ‘왕(王)’ 자입니다.” 하였다. 태조대왕이 이에 감동하여 토굴이 있던 터에 절을 세우고 석왕사라고 불렀는데, 그 승려가 바로 무학(無學)이라 한다.
남산역(南山驛)으로부터 절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의 어귀를 찾아 홍살문으로 들어가는데, 첫 번째 건너는 수각(水閣 물가에 지은 정자 )을 단속문(斷俗門)이라 하고, 두 번째 건너는 수각을 등안각(登岸閣)이라 하고, 세 번째 건너는 수각을 불이문(不二門)이라 하는바, 세 누각의 사이가 거의 10리이다. 양쪽 언덕은 모두 기이한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단풍잎과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절에 이르면 크고 화려한 불전(佛殿)과 웅장한 요사채가 온 도의 으뜸이어서 깊숙한 집과 회랑(回廊)이 아득하여 갈 곳을 모를 지경이다. 절의 서쪽 가에 한 누각이 있어 나무로 만든 8백 나한상(羅漢像)을 모시고 있는데, 태조대왕이 원수(元帥)로서 북쪽을 정벌할 적에 낭장(郞將) 김남련(金南連)으로 하여금 길주(吉州)의 광적사(廣積寺)에 가서 배로 나한상을 실어 오게 하고, 판각하여 이 일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요속(僚屬)으로 있던 정몽주(鄭夢周) 등의 이름을 열거하여 썼는데, 판각이 절에 보관되어 있어 아직도 완연하다. 앞에 있는 시냇가에는 용비루(龍飛樓)와 흥경루(興慶樓)가 있는데, 매우 높고 탁 트였다.
성진진(城津鎭)
마천령(磨天嶺)은 단천(端川)과 길주 사이에 있는데, 남도와 북도가 이로부터 나누어진다. 마천령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달려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서 성진진이 되었다. 옛날에 토성(土城)이 있었는데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였으며, 을묘년(1615, 광해군7)에 관찰사 최관(崔瓘)이 석성(石城)을 쌓았다.
이곳은 삼면이 모두 바다이고 오직 뒤의 한 면만 육지와 연하였는데,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성은 내성과 외성이 있으니, 내성의 동쪽 가장 높은 곳은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을 구경하는 봉우리이고, 그 아래는 첨사(僉使)가 거주하는 곳이며, 서쪽에는 외로운 봉우리가 우뚝이 솟아 장단(將壇)이 되었다.
외성의 서쪽 언덕에는 조일헌(朝日軒)이 있으니 바로 객관(客館)이며, 서문(西門)의 서쪽에는 참경대(斬鯨臺)가 있고 동문(東門)의 동쪽에는 망해정(望海亭)이 있으며, 조일헌 위 압봉(壓峰)의 정상에 여초(麗譙)가 있으니, 진북루(鎭北樓)라 한다. 동문 곁으로부터 냇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서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들었으며, 바다의 파도가 충돌하는 곳에는 형편상 성을 쌓을 수 없으므로 나무를 꽂아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이곳의 지형은 앞에는 큰 바다가 있어서 하늘과 함께 끝이 없고, 한 봉우리가 파도가 몰아치는 큰 바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어서 아득하기가 마치 육오(六鰲)의 위에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넓디넓어서 마치 배를 타고 닻줄을 풀어 놓아 물결 따라 오르내리는 듯하니, 관방(關防)의 요해처다운 면모와 유람하는 기이한 경치를 모두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칠보산(七寶山)
명천부(明川府)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문암(門巖)이 있는데, 문암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하늘과 맞닿아 사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이 가운데 석산(石山)이 있는데 색깔이 붉은 노을과 같으며, 여러 봉우리가 높이 솟아 기이하고 빼어나서 천태만상 없는 것이 없다. 이중에 가장 기이한 것은 사암(寺巖), 책암(冊巖), 주암(舟巖), 천불봉(千佛峰), 만사봉(萬寺峰), 호상대(虎像臺) 등으로 불리는 것인데, 혹은 새가 날고 짐승이 달리는 듯하며 혹은 사람과 물건이 많이 모여 있는 듯하니, 비록 구름이 흩어졌다 모이고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도 그 신기함을 다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문암으로부터 10리를 가면 금장사(金藏寺)가 있고 금장사로부터 또다시 20리를 가면 개심사(開心寺)가 있으며, 개심사 뒤에 누대가 있는데 이곳에 앉으면 온 산의 면목을 대강 관망할 수 있다. 개심사에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망해대(望海臺)가 있고 망해대로부터 석봉(石峰)을 넘으면 금강굴(金剛窟)이 있으며 금강굴로부터 10리를 가면 도솔암(兜率菴)이 있다. 도솔암은 사암의 아래에 있는데 지형이 가장 높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옛날에 일곱 산이 나란히 솟아 있었기 때문에 칠보산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중고(中古) 이후로 여섯 산이 바다 속에 잠겨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하나의 산뿐이라고 한다.
지금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에는 조개와 소라 껍데기가 쌓여서 왕왕 무더기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을 보면 또한 이 산이 일찍이 바다에 잠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해에 여섯 산이 다시 육지로 나오고, 바닷물이 이 산을 뒤덮을지는 알 수 없다. 이 산이 기이한 것은 산에 무〔蘿葍〕가 가득히 자라고 있는데 모두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한 것이라는 점으로, 이곳에 사는 승려들은 이것을 식량으로 삼는다.
창렬사(彰烈祠)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어란리(禦亂里)가 있으니 혹은 어랑리(漁郞里)라고도 칭하는데, 이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팔경대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무계호(茂溪湖)가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 이붕수(李鵬壽)가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금상(今上) 을사년(1665, 현종6)에 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창의(倡議)하여 호숫가에 사당을 세우고는 정공(鄭公)을 제향하고 함께 맹세한 사람인 이붕수 등을 배향하였다. 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그 곁에 지어서 유생들이 거주하며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있다. 사당은 서쪽 봉우리 아래의 높은 언덕에 있는데, 앞에 작은 산이 가로질러서 초승달이 막 나온 듯하니, 반은 호수에 잠겨 푸르고 울창하다.
사면의 여러 산이 깎아 세운 듯하여 채색 병풍을 둘러친 듯하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근 호수를 이루었는바, 세로와 가로가 9리쯤 되는데 연꽃과 마름이 푸르고 깨끗하여 씻어 놓은 듯하며 온자(蘊藉)하고 깨끗하고 화려하여 자못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북쪽 지역의 산천은 대체로 거칠고 웅장하여 넓고 탁 트인 구경거리는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산이 굽이지고 물이 감돌며 흘러 이곳만큼 아늑하고 고요한 곳은 없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또한 정공의 충렬(忠烈)을 표창하여 특별히 한 구역을 먼 변방 가운데에 만들어서 그 영혼을 모시고자 해서인가 보다.
용당(龍堂)
경원부(慶源府) 동쪽으로 40리 되는 강가에 동림산성(東林山城)이 있는데, 이 성은 태종대왕 원년(1401)에 도순찰사(都巡察使) 강사덕(姜思德)에게 쌓게 한 것이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목조(穆祖)가 처음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알동(斡東)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으며, 우물가에는 옛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 남아 있다. 지금 성의 동쪽 가에는 세 칸의 사우(祠宇)가 있어 조정에서 매년 향과 폐백을 보내와 두만강(豆滿江) 신에게 제사하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사우를 용당이라고 칭한다.
용당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강의 남쪽에 있는 훈융(訓戎),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와 경원부의 성곽과 증산(甑山), 칠암산(七巖山)이 눈앞에 나열되어 있으며, 강의 북쪽은 훈춘강(訓春江)이다. 춘산현성(春山縣城) 등 여러 지역이 아득히 바라보여 끝을 알 수 없는데, 두만강이 큰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오랑캐와 중국을 나누었다. 이곳은 일월(日月)이 배태된 지역이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기이하고 웅장함이 있는 것이다.
무이보(撫夷堡)
경흥부(慶興府)에서 두만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30리를 가면 무이보에 이르는데, 성이 강의 남쪽 기슭을 내려다보고 있다. 북쪽으로 오랑캐 땅을 바라보면 큰 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 모퉁이를 바라보면 기이한 봉우리가 깎아 놓은 듯이 서 있으니, 바로 알동(斡東) 땅으로 목조(穆祖)가 일찍이 거주하신 곳이다.
무이보에서 약간 내려가면 강 북쪽 기슭에 큰 산이 있고 물이 역류하여 굽어 도니, 바로 목조 왕비의 옛 능이다. 능의 왼쪽 산허리 약간 낮은 곳에 철을 주조하여 용을 만들어서 묻어 지맥(地脈)을 도왔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다른 나라의 국경이 되어서 찾아갈 수가 없다. 넓은 들 가운데에 여덟 개의 못이 서로 잇닿아 있는데, 세속에 전해 내려오기로는 못에 오색 연꽃이 함께 핀다고 하나 신빙할 만하지 못하다. 무이보 뒤에 봉수대가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한번 올라가 바라보면 땅이 다한 곳 밖으로 또 슬해(瑟海)가 있어서 검푸른 빛이 산과 맞닿아 있다.
아! 조선 초기의 위엄과 덕은 비록 두만강 물을 돌려 서쪽으로 흐르게 한다 하더라도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 성조(聖祖)의 옛집과 능이 모두 강을 사이에 두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 가까이 있는데도 이것을 방치하여 오랑캐들에게 주어 살게 하고 국경으로 삼지 않은 것은 무슨 연고인가? 김종서(金宗瑞) 등 여러 사람은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D001] 양자강(揚子江)의 금산(金山) :
금산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양자강 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한다. 당나라 때 배두타(裴頭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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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함경도 지도기(咸鏡道地圖記)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5.망운정기(望雲亭記) 을축년(1685, 숙종11)
생질인 박태유 사안(朴泰維士安)이 좌천되어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이 된 다음 역관(驛館)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운 날에 오르곤 하였는데,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정자의 편액을 망운(望雲)이라 하였으니, 이는 실로 적량공(狄梁公)의 말을 취한 것이다. 이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 사모하고 물건을 보고서 감회를 일으키는 자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마는 유독 적량공의 말이 세상에 전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아! 망운이라는 말은 본래 특별히 볼만한 경치가 아니고, 또 읊을 만한 성률(聲律)이 없는데도 어버이를 생각하는 모든 효자들이 망운을 가지고 구실을 삼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적량공이 효도를 옮겨 국가에 충성한 것이 천하와 후세 사람들에게 심복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한때에 우연히 한 말이지만 또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기에 충분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만약 적량공이 국가에 충성한 것이 저와 같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설령 구구한 효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는데, 하물며 그 하찮은 한마디 말에 있어서이겠는가. 이와 같다면 적량공의 뜻은 구름을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어버이를 생각하는 데 있었으며, 적량공의 효도는 단지 어버이를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실로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데 있었던 것이니, 후세에 적량공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국가에 충성을 바친 것을 본받지 않고 다만 그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이 효도가 되는 것만 안다면 안 될 것이요, 그 어버이에게 효도한 것을 본받지 않고 다만 구름을 바라본다는 한마디 말만 취한다면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생각하고 그리워함이 효도가 될 수 없으며,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봄이 효도가 될 수 없으며, 보는 것에 따라 감회를 부치는 것이 효도가 될 수 없으며, 말로 형용하고 글로 기록함이 효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군주에게 두 마음을 품지 말라.〔不貳〕’는 가르침을 받들고 ‘국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靡盬〕’는 뜻을 생각하여 필경 성취함이 적량공에게 부끄럽지 않은 뒤에야 비로소 효도라고 말할 수 있으니, 오히려 어찌 이 정자(亭子)가 있고 없음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어버이 곁을 떠나 국사에 수고하는 자식은 수레와 말 사이에서 분주하고 손님과 나그네를 맞이할 때를 당해서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다.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오랫동안 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아침밥과 저녁밥을 지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산천이 아득히 막혀 있고 길이 멀어서 발걸음을 머뭇거리며 돌아보매 마음이 답답하여 무언가 맺힌 듯하니, 이러한 때에 이 정자에 오른다면 구름을 바라볼 것이요, 구름을 바라본다면 어버이를 생각할 것이요, 어버이를 생각하면 어버이가 나를 가르쳐 주신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 가르쳐 주신 것을 대략 말한다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청렴하고 삼가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며 공정하게 일하고 사사로움을 잊는 것이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르침을 어기지 말 것을 생각한다면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어버이를 생각함에서 연유하지 않음이 없고,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자의 구름을 바라볼 때에 일어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정자를 짓는 것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 박생(朴甥)은 이 정자가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를 또한 적량공의 말이 세상에 전하는 것과 같게 한다면 거의 훌륭할 것이다.”
[주-D001] 적량공(狄梁公)의……것이다 :
적량공은 당나라의 명재상인 적인걸(狄仁傑)을 가리키는바, 적인걸이 하양(河陽)에 어버이를 남겨 두고 병주(幷州)로 벼슬살이를 나가다가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흰 구름이 외롭게 나는 것을 바라보고 고향에 계신 부모를 그리워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舊唐書 卷89 狄仁傑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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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경 여지도기(盛京輿地圖記)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7.용암정기(龍巖亭記) 무인년(1698, 숙종24)
서생 숙(徐生塾)이라는 자가 서울의 번화하고 부유한 곳에서 생장하였으나 정신이 한가롭고 마음이 고요하여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과 가산의 유무(有無)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며, 장기와 바둑, 오만함과 방탕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문을 닫고 책만 읽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에 일찍이 나에게 글을 배웠는데 중간에 병으로 공부를 중지하였고, 또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의 의술을 익혀서 다소 그 의취를 알았는데, 알고 지내던 유력자에게 만류당하여 고습(袴褶)과 도검(韜鈐)의 사이에 종사한 지가 10여 년이 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를 얻었으나 장차 노쇠한 나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개연히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글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했고, 의술을 배웠으나 통달하지 못했고, 군문(軍門)에서 일하였으나 또한 공을 세우고 업적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이가 빠지고 머리가 세었으며 지기(志氣)가 저하되어 당세에 써먹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넓고 조용하고 적막한 물가에 스스로 물러나서 한가롭고 편안하게 소요하면서 제 몸을 마쳐야 할 것입니다. 가평(加平)의 조종현(朝宗縣) 비렴산(蜚廉山) 아래에 살 곳을 정하니, 이곳에는 큰 냇가에 큰 바위가 솟아 있는데, 두 뿔이 우뚝 솟아 꿈틀꿈틀하여 마치 물을 마시는 용 모양과 같으므로 용암(龍巖)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저는 그 위에 한 칸의 정자를 짓고 마음대로 구경하며 회포를 부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저는 이미 문장을 잘하지도 못하고 무예를 잘하지도 못하여 한 사람의 곤궁한 늙은이일 뿐이니 이곳이 훌륭한 인물을 만나 명승지로 일컬어지게 할 수가 없으며, 이곳 또한 궁벽한 산중의 한 황폐한 곳일 뿐 깨끗하고 수려하며 빼어난 구경거리가 없어서 시인과 일사(逸士)들이 놀고 감상할 장소가 될 수 없으니, 진실로 시부(詩賦)에 읊조리고 문장에 나타내어 후세에 전할 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자를 군자라 하고, 땅은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남이 빼앗으려고 다투지 않는 곳을 고요하고 한가롭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진실로 이 땅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이 땅도 저를 만난 것을 꼭 불행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니, 공은 저를 위하여 용암정 기문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러고 말고. 내 그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내가 병조 판서를 맡았을 때에 그대도 편비(偏裨)가 되었는데, 그때 그대와 같이 있던 무리들 중에는 재주 있고 민첩하여 일을 맡길 만하다고 이름나 그대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그 사람들의 소행을 평소 살펴보면 혹은 파리 머리만 한 작은 이익을 사모하여 죽을 곳으로 달려가 형벌을 받고 질곡(桎梏)에 빠진 자가 있으며, 혹은 분수에 맞지 않는 복을 바라고 무망(毋望)한 사람을 본받아서 끝내 몸을 죽이고야 마는 형벌을 당한 자도 있다. 그런데 오직 그대만은 홀로 물욕 밖에 초연하여, 살아가는 일을 한 바위 위에 맡겨서 비록 오랫동안 곤궁하고 굶주려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후회함이 없으니, 지난날 재주 있고 민첩하여 일을 맡길 만하다고 이름났던 자들에게 비한다면 그 득실이 어떠한가?
내 들으니 용이라는 물건은 본래 숨고 감추는 것을 덕으로 여겨서 혹은 깊은 못 속에 칩거하고 혹은 더러운 진흙 속에 서려 있으며, 또 혹은 변하여 북이 되고 사람의 손톱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는바, 이는 모두 자취를 감추어 그 몸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라 한다. 지금 그대가 이 정자에 처하기를 깊은 못에 처하고 진흙 속에 처하듯 하고 북 같고 손톱같이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이 정자에 올라 바라볼 때에 산천이 두 손을 마주 모아 읍하는 듯한 형세와 마주치게 되며 아지랑이와 구름이 변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말할 만한 것이 없고, 비록 말한다 하더라도 또 어찌 그대에게 보탬이 되겠는가.”
서생(徐生)이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써서 용암정 기문으로 삼는 바이다.
[주-D001] 고습(袴褶)과 도검(韜鈐) :
고습은 옛날에 군복을 입고 말을 탈 때에 두 다리를 가리던 아랫도리옷을 이르고, 도검은 고대 병서(兵書)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의 합칭으로, 병법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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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고서원(明皐書院) 중수기(重修記) 기축년(1709, 숙종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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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집 제3권 / 정탁(鄭琢)
기(記)
1송월헌 중수기〔松月軒重修記〕
2경렴재기〔景濂齋記〕
3가일재기〔可一齋記〕
4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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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월헌 중수기〔松月軒重修記〕
쌍호공(雙湖公) 남중소(南仲素)는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임진년에 왜란을 당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이 이미 수복되자 쌍호공 또한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전란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하루는 그 집으로 공을 찾아가니, 공이 자리를 마련하여 앉히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먼저 송월헌(松月軒)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당(堂) 곁에 일찍이 하나의 헌(軒)이 있었는데 ‘송월헌(松月軒)’이라 편액 했습니다. 왜구의 난이 일어나 전쟁이 극렬하여 서울이 파괴되면서 송월헌 역시 남아 있는 것이 없었으나 늙은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비스듬히 선 채 짙푸르고 울창하여 이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달이 산에서 떠올라 소나무 사이를 비추면 영롱하고 찬란한 빛이 여전히 예전의 풍광과 같습니다. 내가 마땅히 재목을 마련하고 풀을 베어 예전의 터에 새롭게 지을 것이니, 공께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시오.”라고 했다.
내가 이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무릇 사계절을 통틀어 영원히 푸른 것이 소나무며, 억만년을 지나도 항상 밝은 것이 달이다. 때로 뒤늦게 시드는 경우가 있어도 영원히 푸르름이 변치 않고, 때로 가득 찼다가 기우는 경우가 있어도 항상 밝음이 바뀌지 않는다. 영원히 푸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절조(節操)에 가까우므로 군자들이 이것을 본받아 스스로 그 절조에 힘쓰며, 항상 밝아 바뀌지 않는 것이 덕에 비견되므로 군자들이 스스로 그 덕을 밝힌다. 눈으로만 봐도 도가 존재하고 나의 의사와 같다고 하면서 반드시 두 가지 사물을 끌어와서 편액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저 달은 태음(太陰)이라서 태양(太陽)과 짝을 이루고, 둥글었다 이지러지고 밝았다 어두워짐에 저대로 일정한 법도가 있어서, 진실로 사람의 일과 함께 흥폐를 같이 하지 않는다.
소나무는 식물이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 번 만나면 마땅히 수풀을 이룬 많은 나무와 함께 모두 꺾이고 죽어 홀로 재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도 오히려 아무런 탈이 없었으니, 이는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하늘이 묵묵히 지하에서 도와주며 따로 가호(呵護)를 더해서 도가 있는 자의 집안에 영원히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아, 달은 하늘에 그대로 있고 소나무 또한 하늘의 보우함이 있었으니, 대개 모두 사람의 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사람의 일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오직 옛 헌(軒)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일 뿐이니, 이는 진실로 우리 사람이 일을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이 능히 이를 새롭게 하여 옛 헌이 다시 새롭게 되면 소나무와 달이 다시 더 빛나게 되고, 두 사물이 서로 어울려서 경승(景勝)이 한 헌에 모이고 공이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니, 이는 아마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일 것이다. 천사(千駟) 만종(萬鍾)의 영화라도 견주기에 부족하니 공은 힘쓰소서.
아, 봄에 생명이 발아하여 모든 나무가 꽃을 피울 때는 소나무는 푸른 수염과 붉은 껍질로 유독 의연히 서 있고, 가을이 들어 낙엽이 날리고 온갖 꽃들이 다 시들 때 소나무는 뿌리가 넓게 뻗고 옹이가 들쭉날쭉 돋은 채 혼자만이 우람하게 서 있다. 또 여름에 바람을 만나면 생황(笙簧) 소리가 절로 나고 겨울에 눈을 맞으면 굳센 지조가 더욱 굳건하다.
그리고 달은 오직 저 청천을 헤치고 보름에 한 번씩 둥글어져 밝은 빛이 두루 퍼져서 세계가 옥경(玉京)이 되니, 이는 진실로 매우 좋은 것이다. 기타 나머지 밤에는 갈고리 같기도 하고 활시위 같기도 하며 조각난 거울 같기도 하고 반쪽의 수레바퀴 같기도 하며 비록 줄어듦과 보태짐이 있기는 하여도 제각기 운치가 있다.
이는 소나무와 달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한 헌(軒)이 지닌 바가 마땅하지 않는 것이 없다. 공 또한 다시 거문고와 책, 그림을 가지고서 이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고개를 숙였다 들고 허리를 굽혔다 펴고 하는 것을 오직 뜻에 맞게 하며 이것으로써 나의 형체를 기르고 나의 성정을 순화시키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마치니 일단(一段)의 맑은 복은 세상에서 비길 것이 없다.
삼청(三淸)ㆍ십주(十洲)와 백운(白雲)ㆍ황학(黃鶴)도 응당 여기에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표연히 세상을 버리고 영원히 가서 돌아오지 않은 뒤에야 곧 참다운 신선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맞는 말씀입니다.” 했다. 마침내 그 말을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만력 기해년(1599) 중하(仲夏) 하순에 쓰다.
쌍호공은 나의 노우(老友)이다. 천성이 온화하고 대범하며 매우 일찍 도를 들었다. 평소에 기쁨과 노여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외루(外累)로 인해 마음을 속박한 적이 없었다. 어질고 덕이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 선발되어 벼슬이 3품에 이르렀는데, 그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지금 이미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지만 동안(童顔)에 학발(鶴髮)을 하고 있어서 아는 사람은 다 기이하게 여겼으며, 어떤 상국인(上國人)이 그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아, 나를 아는 사람으로는 쌍호공만 한 이가 없고, 쌍호공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나만 한 이가 없다.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경모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새 헌(軒)의 기문을 청하는 뜻이 또 진중하여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때마침 아계(鵝溪) 상공(相公)이 쌍호공을 위하여 이미 기문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삼가 글을 구해 두세 번 봉독(奉讀)하니, 문장 구성이 치밀하여 이치를 말한 것이 엄밀하고〔盛水不漏〕, 글자를 배치한 것이 구차하지 않아 매우 전형(典刑)이 있었다.
이를테면 소나무의 나이가 많고 적음과 집의 세워짐과 허물어짐에서 쌍호공이 변함없이 지켜온 실상에 이르기까지 한 기문에 다 기록하여 진실로 남김이 없으니, 다시 무슨 군더더기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헌에 대해서 다만 최근 언급한 약간의 설화(說話)와 나 자신의 별도 의견만을 끄집어내고 엮어서 말을 만들어, 아계 상공께서 언외(言外)에 밝히지 않는 뜻을 확대하여 기문의 뒤를 이었으니, 아마 쌍호공의 곡진한 뜻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는 사람들은 너그럽게 봐주기 바란다.
[주-D001] 남중소(南仲素) :
남상문(南尙文, 1520~1602)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소, 호는 쌍호(雙湖)이다. 조정에서 그의 행의(行誼)를 가상하게 여겨 금오랑(金吾郞)에 제수하였으며 나중에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아버지는 돈녕 참봉(敦寧參奉)을 지낸 기(淇)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낸 심(愖)의 딸이다. 두보(杜甫)와 소식(蘇軾)의 시를 좋아하였다. 명나라의 양호(楊鎬)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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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렴재기〔景濂齋記〕
3.가일재기〔可一齋記〕
내 친구 예성(蘂城) 안돈숙(安敦叔)이 춘주(春州 춘천)에서 돌아와 종남산 우사(寓舍)로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우거(寓居)하고 있는 고을에 새롭게 별장터를 잡아 ‘가일(可一)’이라 이름을 붙였네. 삼면(三面)이 산으로 둘러 있고 한 면이 물에 가로막혀 있어서 외부인들은 사람이 사는 줄도 모르네. 이곳을 찾아오는 자는 반드시 뗏목을 타고 물을 거슬러 오다가 10여 리쯤 와서 비로소 언덕에 내리면 하나의 골짜기가 보이는데, 산이 밝고 물이 맑아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그다지 양보할 것이 없네. 내가 장차 풀을 베고 돌을 쌓아 작은 집을 짓고 우거하면서 노년을 마칠 생각이네. 공이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시게나.”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성시(城市)에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온 세상이 다 그러하나 달사(達士)는 스스로 멀리하고,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천만년을 두고 똑같으나 고사(高士)는 스스로 피한다. 스스로 멀리하고 스스로 피하는 것은 옛사람들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근세의 군자 중에서도 또한 많이 있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저 사람들이 자신의 덕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동요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대현(大賢) 이상(以上)으로서 수양을 충분히 하여 굳게 지키며 돌아보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스스로 확립하여 그 덕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네. 그러므로 군자는 이를 삼가며, 거처와 연관됨은 그 절실함이 이와 같다네. 지금 돈숙이 정토(淨土)에 터를 잡고 속세를 영원히 작별하여 장차 그 덕을 온전히 할 방법을 찾고 있는 것도 어찌 여기에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저 ‘가일(可一)’ 구역은 별다른 하나의 동천(洞天)이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물이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흐르며, 조망이 탁 트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듯하니, 혼자서 조용히 지내며 생각을 잠재우면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며 모든 인연이 끊어져 한 점의 먼지도 날지 않을 걸세. 이러한 때에 이 마음을 하나로 할 수 있으니 마음이 이미 하나가 되고 나면 덕도 하나가 될 수 있다네. 마음과 덕이 모두 하나가 되면 모든 거짓이 물러가게 되어 삶과 죽음에 망설임이 없어 처음에서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있으니, 이는 거처가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이라네.
아, 돈숙은 이미 그 그칠 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성인 문하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뜻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네. 만약 그러하다면 공부하는 단계와 등급은 순서에 따라 나아갈 수 있으니, 또 어찌 정정안려(定靜安慮)가 방도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하나가 될 수 있는〔可一〕 공부는 진실로 적합한 거처를 얻는 것에 달려 있다네. 운곡(雲谷)에 서원이 있고, 죽림(竹林)에 정사(精舍)가 있는 것 또한 그 공효이니, ‘가일(可一)’로 재사(齋舍)에 편액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돈숙이 일어나 말하기를 ‘알겠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만력 기해년(1599) 초가을 하순에 약포 노인이 쓰다.
[주-D001] 예성(蘂城) :
충주(忠州)의 고호(古號)로, 정탁의 친구 안돈숙은 충주 목사를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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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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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11권 / 권근(權近)
기류(記類)
1보암기(寶巖記)
2고간기(古澗記)
3어촌기(漁村記)
4백운헌기(白雲軒記)
5목암기(牧菴記)
6사불산 미륵암 중창기(四佛山彌勒庵重創記)
7영해부 서문루기(寧海府西門樓記)
8흥해군 신성문루기(興海郡新城門樓記)
9용안성 조전기(龍安城漕轉記)
10졸재기(拙齋記)
11회월헌기(淮月軒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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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암기(寶巖記)
보암은 부도(浮圖) 진 상인(珍上人 상인은 중의 높임말)의 자호(自號)이다. 상인이 일찍이 속세에 있을 적에 현릉(玄陵 고려 공민왕을 뜻함)을 섬겨 벼슬이 오품(五品)에 이르렀는데, 부도의 법을 좋아하고 사모하여 나옹(懶翁)을 뵙고 이름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며, 따라서 머리를 깎으려 하였으나 관직(官職)에 구애되어 하지 못했었다. 현릉이 승하하자 한탄하기를,
“내가 미천한 몸으로 오랫동안 성상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으니, 대저 신하로서 임금에게 보답하는 길은 크게는 광보(匡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필하는 것)하는 것이요, 작게는 분주(奔走)하는 것이나, 이는 모두 지능과 재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분한이 있어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듣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자인(慈仁)하고 박애(博愛)하여 혜택이 유명(幽明 이승과 저승)에 미치는 것으로서, 수행함은 마음에 있어 우매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할 수 있다 하므로, 내가 즐겨하여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 임금께서 갑자기 궁검(弓劍)을 버리시니, 보답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처음 뜻을 이루어 뒤쫓아 명복을 비는 것이 바로 이때다.”
하였다. 이래서 집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은 지 여러 해인데, 금번에 ‘보암’이란 편액(扁額)을 가지고 나에게 그 의의를 부연(敷衍)하여 주기를 청해 왔다.
내가 생각하건대, 정금(精金)ㆍ양옥(良玉)은 천하에 지극한 보배이나 모두 몸 밖의 물건으로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 없다고 해서 손해될 것 없으나 있으면 해를 가져 오기에 적합하니, 이 어찌 귀중한 것이 되겠는가.
옛 성인들은 임금의 자리를 큰 보배로 삼아 인(仁)으로써 지켰으니,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다 그 법이 같았고, 우리 부자(夫子 공자) 같은 이는 그런 덕은 있으나 그 자리를 얻지 못하였고, 보배를 품었으나 시행하지 못하게 되매, 글로 써서 백왕(百王)에게 모범을 보이되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어진이다.” 하였고, 증자(曾子)는 도를 전하여《대학장구(大學章句)》에 밝히되 “오직 착한 것을 보배로 삼는다.” 하였으니, 이에 의한다면 성현들의 이른바 보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인이란 것은 마음의 전덕(全德)이고, 현(賢)ㆍ선(善)이라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나타난 것이니, 사람마다 모두 이 마음이 있어 하늘에서 받아 몸에 간직하고 있음이, 마치 옥이 돌 속에 있고, 금이 광석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한 몸의 주체가 되고, 만리(萬理)의 근원을 갖추어 형철(螢澈)하고 광명하므로, 감촉(感觸)에 따라 반응됨이 당초에는 우매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중인(衆人)은 스스로 혼매하여 잃어버리나, 성인은 타고난 대로 온전하게 지니므로, 옥과 같이 정결하고 금같이 순수하여 혼연히 대성(大成)하였으니, 그 보배로 여길 것이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시경(詩經)》에 문왕(文王)을 칭송하기를 “금옥의 바탕이다. [金玉其相]”하고, 맹자가 부자(夫子)를 찬미하기를 “금으로 시작하고 옥으로 그친다. [金聲玉振]”하였으니, 이는 모두 형용을 잘한 것들이다.
부도(浮圖)들도 부처를 칭송하되 또한 옥호 금색(玉毫金色)이라 하는데, 비록 그 도를 알지는 못하나 역시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아 청정(淸淨)한 보주(寶珠)에 비하는 것이니, 요컨대 또한 마음에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 천(天)ㆍ지(地)ㆍ인(人)이 삼재(三才)인데, 삼재의 도가 마음에 갖추어 있고, 불(佛)ㆍ법(法)ㆍ승(僧)이 삼보(三寶)인데, 삼보의 묘리(妙理)가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마음의 덕이 그 훌륭하지 아니한가. 금이 지극히 강하나 불리면 녹고, 옥이 지극히 단단하나 갈면 갈리지만 오직 마음이란 불린다 해서 녹지도 않고 간다고 해서 갈리지도 않으니,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천지에 가득 차 빈 데가 없는 것이다. 상인이 이를 보배로 하여 잃지 않고 지키며, 이를 보존하여 모자람이 없이 채운다면,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스스로 얻게 될 것이고, 옥호광(玉毫光)이 장차 그로부터 나타나게 될 것이니, 그 보배로움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이다.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17년 갑자년(1384, 우왕10)
[주-D001] 나옹(懶翁) :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강월헌(江月軒)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지공화상(指空和尙)에게서 심법의 정맥(正脈)을 받아 지공ㆍ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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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간기(古澗記)
3.어촌기(漁村記)
어촌은 나의 벗 공백공(孔伯共)의 자호(自號)이다. 백공이 나와 동갑이나 생일이 뒤이기 때문에 내가 아우라고 한다. 풍신(風神)이 소탕하고 명랑하여 친애(親愛)함직한데,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에 올라 갓끈을 휘날리며 인끈을 두르고 붓을 귀에 꽂고 옥새를 맡았으니, 진실로 원대한 앞날을 기대했으나, 소연(蕭然)히 강호에 뜻을 두어 이따금 흥이 나서 어부사(漁父詞)를 노래하면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천지에 가득 차는데, 마치 증삼(曾參)이 상송(商頌)을 노래하는 것을 듣는 듯하여, 사람들의 가슴속을 유연(悠然)하게 하여 마치 강호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니, 이는 그의 마음에 사욕이 없어 사물에 초탈(超脫)하였기 때문에 그 소리의 나타남이 이러한 것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뜻은 고기 낚기에 있는데, 그대는 고기 낚는 낙을 아는가? 대저 강태공(姜太公)은 성인이니, 내가 감히 그와 같이 때 만나기를 기필할 수 없고, 엄자릉(嚴子陵)은 어진 분이니, 내가 감히 그와 같이 개결하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동자(童子)와 관자(冠者)들을 이끌고 갈매기와 백로를 벗삼아, 이따금 낚싯대를 들고 쪽배를 노질하여 조류(潮流) 따라 오르내리며 배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가, 깨끗한 사장(沙場)에 배를 매거나 산수(山水) 좋은 중류(中流)에서, 구운 고기와 신선한 회로 술잔을 들어 서로 수작하다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며 바람은 자고 물결이 고요할 때에는, 배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불고 노를 치며 높이 노래하고 흰 물결을 날리며 맑은 달빛을 헤치노라면, 호호(浩浩)히 마치 성사(星査 은하수로 가는 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그러다가 강에 연하(煙霞)가 자욱하고 짙은 안개가 내리면 도롱이와 삿갓을 펄럭이고, 그물을 던지면 금빛 비늘과 옥빛 꼬리의 고기들이 멋대로 펄떡거려, 보기에도 상쾌하며 마음도 흐뭇해진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 구름이 검어지고 하늘이 캄캄하면 사방은 아득하고 고기잡이 등불만이 깜박이는데, 배 지붕에 뿌리는 빗소리는 느렸다 빨랐다 구슬프게 운다. 이때에 배 안에 누워 아득히 먼 옛날의 창오(蒼梧 순(舜) 임금이 죽었다는 곳)를 생각하고 상루(湘纍)를 슬퍼하노라면, 진실로 시대를 감상(感想)하는 생각이 무한히 일어나게 된다. 그뿐이겠는가. 양쪽 언덕에 꽃이 붉을 적엔 몸이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가을에 요수(潦水)가 다 빠지고 물이 냉철할 적엔 배가 거울 위를 다니는 듯하며, 여름 뜨거운 햇빛에 더위가 쏟아질 적엔 버들 밑 낚시터에 바람이 산들거리고, 겨울 북풍이 눈을 날릴 적엔, 차가운 강위에서 혼자 낚시질하여 사철 따라 낙이 없는 때가 없다.
저 현달하여 벼슬하는 사람들은 구차하게 영화에만 빠지나 나는 당하는 대로 편안하게 지내고, 곤궁하여 어부 노릇 하는 사람은 구차하게 이득만 노리나 나는 자적(自適)하는 데 낙을 두어 현달하거나 침체됨을 운명에 맡기고, 서권(舒卷 곧 진퇴(進退)와 같은 뜻)을 오직 시절대로 하여, 부귀(富貴) 보기를 뜬 구름같이 하고, 공명(功名)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여, 스스로 형해(形骸) 밖에서 방랑(放浪)하니, 어찌 시속을 따라 이름을 낚으며, 환해(宦海 벼슬길)에 빠져 생명을 가볍게 여기며, 이득만 취하다가 스스로 깊은 수렁에 빠지는 자와 같겠는가.
이러므로 나는 벼슬을 하면서도 강호(江湖)에 뜻을 두어, 매양 노래에 의탁하는 것이니, 그대는 어떻게 여기는가.”
하기에 내가 듣고서 좋게 여기고, 따라서 기(記)를 지어 주고, 또한 나 자신도 두고 보려 한다.
홍무(洪武) 을축년(1385, 우왕11) 가을 7월 어느 날
[주-D001] 어부사(漁父詞) :
《초사(楚辭)》의 한 편명. 초(楚) 나라 때 굴원(屈原)이 임금에게 소외되어 방랑(放浪)하여 지은 것인데, 그의 처세관(處世觀)을 어부와의 문답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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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운헌기(白雲軒記)
5.목암기(牧菴記)
부도(浮圖) 겸(謙)이 그가 사는 암자의 편액을 ‘목암’이라 하고, 기(記)를 명유(名儒)와 석덕(碩德)들에게 받았으니, ‘목’에 대한 말을 다하였을 것인데, 나의 벗 공암(孔岩) 허백승(許伯升)을 시켜 나에게 기를 청하니, 내가 어찌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일찍이《주역》겸괘(謙卦 64괘의 하나. 아래도 같음.)를 보건대, 아래는 간괘(艮卦), 위는 곤괘(坤卦)로 되어,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순응하는 것이 겸괘의 뜻이다. 초육(初六 괘의 가장 아래 음효(陰爻))은 유(柔)한 덕으로 아래 있어 겸손하고 또 겸손한 군자(君子)의 상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해석하기를 “낮추어 자신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개 겸손이란, 인심과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천도(天道)도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이 아래로 내려 겸의 이치가 나타나고, 인심에도 이런 이치가 있으므로 그 발로됨이 사양[辭遜]이 되어, 겸의 도리가 행해지는 것이다. ‘천천히 어른의 뒤에 따라가는 공손[徐行後長之悌]’으로부터 요순(堯舜)의 도에 이르기까지 겸의 발로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군자가 공경하고 사양하여 예(禮)를 밝히되, 반드시 겸손하여 낮추는 것으로써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낮게 처신하는 것이 어찌 낮추는 데에서 끝나고 비굴한 데에 지나치게 하라는 것이겠는가. ‘덕(德)은 성(盛)하고 예는 공손하다.’ 하였으니, 덕은 성하고자 하나 능히 어진이에게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존귀하여 광채가 나고, 예는 공손하고자 하되 능히 절도가 있기 때문에 몸을 낮추되 남이 넘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덕이 향상되지 못하고 오하(汚下)에 끝나며, 공손이 절도가 없고 비굴에 지나지 않는다면 너무 비굴하여 남이 넘볼 것이니, 어찌 군자의 자신을 기르는 도이겠는가.
또한 군자의 자신을 기름에는 나에 있어 겸손하기 때문에 남에게 얻음이 있고, 집에서 검소하기 때문에 나라가 풍족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한 것은 요(堯)의 겸손이요, 남에게서 선을 취하는 것은 순(舜)의 겸손인데 온 천하가 다 편안하였고, 궁실을 낮게 함은 우(禹)가 자신을 기른 것인데 구혁(溝洫 논밭 사이에 있는 도랑)에 힘을 다했고, 옷을 검소하게 함은 문왕(文王)이 자신을 기른 것인데 만백성을 감화시켰으며, 이윤(伊尹 중국 고대 상(商) 나라의 명상(名相))이 저자에서 매맞은 것처럼 여긴 것과, 주공(周公)의 토포(吐哺)하기에 부지런히 한 것도 그 겸손이 또한 지극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잘 기르는 사람은 남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저 승전(乘田)이 되자 소와 염소가 잘 자라고, 소를 키우매 소가 살찐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한 성현이 할 일이다.
부도(浮圖)의 학을 내가 일찍이 강구(講究)하지 못하였기에, 내가 겸사(謙師)의 자신을 기르는 것이 무슨 도(道)이며, 장차 남을 기를 것이 어떤 설(說)인지 알지 못하겠다. 다음날 서로 찾게 되면 마땅히 한 번 물어 보아야겠다.
[주-D001] 주공(周公)의 토포(吐哺) :
중국 고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의 아우. 조카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확립시키고, 제도와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주 나라의 문화를 확립했다. 주공은 밥을 먹을 때나 머리를 감을 때라도 어진이가 오면, 먹던 밥을 뱉거나 감던 머리털을 거머쥐고 만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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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불산 미륵암 중창기(四佛山彌勒庵重創記)
7.영해부 서문루기(寧海府西門樓記)
영해는 곧 옛적의 덕원(德原)인데, 산이 막히고 바닷가이므로 땅이 궁벽하고 구석져서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는 심한 추위가 없으며, 고기와 자라ㆍ전복과 조개 같은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옛날 번성할 때에는 백성들이 풍요하고 송사가 드물며, 집집마다 거문고가 있어 사람마다 탈 줄을 알아, 노랫소리와 춤 태도가 맑고 고왔고, 정자와 누각의 경치에 있어서도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다.
시중(侍中) 몽암(蒙庵) 이혼(李混)이 좌천되어 이곳에 와서부터 바다에서 부사(浮査)를 구해서 무고(舞鼓)하는 절도(節度)를 가르쳤는데, 그 소리가 굉장하고 그 춤이 변화를 이루어, 마치 쌍 나비가 훨훨 꽃 옆을 날고 두 용이 성내어 구슬을 다루듯 하여, 화기는 봄을 재촉하고 빠르기는 적(敵)을 쫓듯하니, 악부(樂部)의 최고 장관으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을 관찰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구경하였으니, 실로 한 지방의 아름다운 승지였다.
어쩌다 왜변이 일어나면서부터 날로 쇠퇴하다가 신유년에 와서는 그 화가 더욱 맹렬하여 성읍(城邑)이 빈 터가 되고 여염(閭閻)들이 소실(燒失)되어, 두어 해 동안에 버려져 왜적들의 소굴이 되고, 관리들이 다른 고을로 갔으니, 범과 멧돼지가 옛마을로 내려와 살고, 변방의 방비가 없으므로 왜적이 더욱 깊이 들어와 계해년 여름에는 원주(原州)ㆍ춘천(春川)을 지나 철원(鐵原)의 경계에까지 범하였고, 양주(楊州)ㆍ광주(廣州)에 침입하였다가 공주(公州)에서는 원을 살해했었다.
그 왜적들이 모두 여기 축산도(丑山島)로부터 들어왔었는데, 한 고을이 수비를 실수하자 세 도(道)가 화를 입어, 외부가 무너지매 내부가 피해 입음이 이렇게 참혹했었다.
이듬해 갑자년에 윤공(尹公) 가관(可觀)이 합포(合浦)에 나아가 진수(鎭守)하면서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여기에 와서는 절월(節鉞)을 가시 덤불 속에 세우고서 둘러보며 여러 번 감탄하고, 성을 쌓아 변방 방비를 굳게 하려고 하여 즉시 역문(驛聞)하니, 조정 의논이 좋다고 여기면서도 원[守] 보낼 일이 걱정이었는데, 김군(金君) 을보(乙寶)가 자청하고 나서므로 부인(符印 위임장과 도장 따위)을 주어 많은 장정들을 부리도록 하니, 계림(鷄林)과 안동(安東)의 사졸(士卒) 2천 명을 출동시켜, 뭇 왜적들이 출동하는 속에서 한편으로 방어하고 한편으론 성을 쌓되, 7월에 시작하여 일순(一旬) 동안에 끝내고, 또한 축산도(丑山島)에 배를 대비하고 방수(防戍)를 설치하였다. 그후에는 왜적들이 이곳에 있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 고을이 다시 조성되고 여러 고을이 편안하여지게 된 것은 모두 윤공이 성을 쌓게 한 덕이었다.
이로부터 떠돌던 사람들이 점차 돌아오게 되어, 백성들의 거처가 다소 세워졌는데, 무진년 정월에 실화(失火)하여 연소되고, 공사(公私)의 집이 세워지지 못했었다. 기사년 봄에 병마사(兵馬使) 박후(朴侯) 문부(文富)가 부임하여, 남은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며 관대한 정사를 힘써, 생업을 잃고 이사 간 백성들을 맞아들이고, 사도(私度 사사 도첩(度牒))를 받아 중이 된 아전들을 돌아오도록 하여, 그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 그들의 주림을 구제하되, 온정
을 베풀어 무마하기를 어린애 돌보듯이 하였다.
이해에 왜구(倭寇)들이 다시 와 밤을 타 해안에 정박하였는데, 박후가 듣고, 즉시 성문을 열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가니, 좌우에서 모두들 “왜적들이 어두운 밤을 노리어 사변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데, 우리 쪽이 고단하고 약하여 왜적을 부수기가 쉽지 않으니, 차라리 성벽(城壁)을 굳게 지키며 기다리는 것이 만전(萬全)일 것입니다.”고 하니, 박후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나를 부족하게 여기지 않고 이 지방을 맡기어 백성들의 생명을 맡도록 하였으니, 바닷가에서 소금을 굽는 백성들인들 유독 국가의 창생(蒼生)이 아니겠는가. 적변(賊變)을 듣고도 구출하지 아니하여 그 칼날을 받게 한다면, 내가 비록 구차하게 살아남은들 장차 어찌 죄를 면할 것인가. 달려가 싸우다가 죽는 것이 곧 나의 직책이다. 내가 돌격하여 나가면 왜적들도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고, 사졸에 앞서 왜적을 향해서 달려가니, 왜적들은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그가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적에게 용감함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의 유임(留任)하기 바라는 소망과 관찰사의 포창하는 추천을 받음이 당연한 일이다.
가을이 되어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한가하자, 성을 수축하고 길을 소제하며, 옛터에서 기와를 주워 관우(館宇)를 덮고, 또한 대중에게 의논하기를 “서문(西門)이 화재를 입어 막아 두고 사용하지 못하니, 어찌 다시 짓지 않겠는가.” 하니, 대중이 좋아하여 명령을 듣자 재목을 나르고 기와를 모아 불일간에 이루어졌는데, 성루(城樓)와 관문(關門)이 견고하게 되었다. 성에 문이 셋인데, 동쪽은 땅이 낮고 좁으며 남쪽도 산이 가깝고 좁으며, 오직 서문만이 넓은 들을 안고 있어 툭 트이고 훤한데, 산이 멀리 연달아 서고 바다가 넓게 펼쳐져 한눈에 천리가 보이니, 실로 한 고을의 경치를 독차지하였다.
세 철의 농사일 할 때가 되면 집집에서 모두 일터로 나가는데, 이 문루(門樓)에 올라서 보면 지아비는 갈고 지어미는 밥을 나르며, 낮에는 김매고 저녁에는 돌아가며, 혹은 쌍쌍이 혹은 떼로, 혹은 심고 혹은 뿌리며 온 고을에 이 건너 밭에서 일을 하고, 저 건너 이랑에서 공력을 들이는 사람들이 온몸에 흙이 묻고 바람과 해에 그을리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피곤하게 여윈 천태 만상이 모두 창문 앞 궤석(几席) 아래 전개되어 하나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권농(勸農)을 맡은 사람이 마땅히 날마다 올라와 수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오직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알아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뿐만 아니라, 농사에 힘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권면하도록 할 것이고, 또한 농사짓기의 간난(艱難)함과 밥먹기가 힘드는 것임을 알게 되어 부역을 감하고 징수를 줄이며,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자라나, 반드시 제 노력으로 먹으면서 그 일에 태만하지 않게 될 것인데, 더구나 감히 살을 여위고 뼈를 깎아 그 고혈(膏血)을 착취하여, 비용을 지나치게 하고 재물을 손상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겠는가. 이렇다면, 이 문루(門樓)를 지은 것이 우리 농군에게 이로움이 클 것이다.
저 산 모양과 바다 빛깔의 좋은 경치는 족히 이 문루의 소중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옛날을 증험삼아 오늘을 알 수 있고, 옛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경계할 수 있으니, 옛날에 현가(絃歌)를 즐길 적에도 진실로 하나의 산과 바다였고, 중간에 빈터가 된 때에도 역시 하나의 산과 바다였으며, 이제 다시 성루(城樓)를 세운 이 시점에도 또한 하나의 산과 바다일 뿐으로 산과 바다는 변동이 없으나 사람과 세상은 흥폐가 있는 것이니, 즐거움이 산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의 느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지난일을 생각하면 의당 즐길 만하였지만, 뒷날을 생각하면 또한 상심(傷心)할 만하다. 옛날에 이미 방탕하고 사치하며 안일하고 즐기다가 망하게 되었는데, 지금 도로 안정시키고 다시 진작(振作)하는 처음에, 또다시 전철(前轍)을 밟아서 후환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도 역시 이 문루에 오르는 사람이 마땅히 알아서 경계삼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영해부에 귀양오자 마침 이 문루가 낙성(落成)되었는데, 벽에 걸기를 청하니, 내가 사양할 수가 없다. 아, 몽암(蒙庵)은 무고(舞鼓)를 만들어 한 고을의 빛남을 더하게 하였고, 박후(朴侯)는 문루를 세워 한 고을의 근검(勤儉)이 시작되었으니, 그 전하는 소문과 남긴 혜택의 장구함이 마땅히 하나의 무고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러므로 기를 짓는 바이다.
홍무 23년(1390, 공양왕2) 춘정월 어느 날
[주-D001] 절월(節鉞) :
관찰사(觀察使)ㆍ유수(留守)ㆍ병사(兵使) 등이 부임할 때 왕이 주는 것. 절은 수기(手旗)와 같고 월은 도끼와 같다.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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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흥해군 신성문루기(興海郡新城門樓記)
9.용안성 조전기(龍安城漕轉記)
조전(漕轉 배로 운반하는 것)은 큰일로서 국가의 경비와 공사(公私)의 풍흉(豐凶)이 달린 것이다. 남방의 조운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오직 전라도가 가장 멀어 반드시 바다로 수송한 뒤라야 서울에 올 수 있는데, 왜(倭)가 일어나면서부터는, 조세(租稅) 받는 곳을 해구(海口)에 두지 않고 산에 있는 모든 성(城)에 두었으므로 조세 바치는 백성들이 소와 말에 싣고 험한 산천을 발섭하며, 빙판과 눈길을 오르내려 삼동(三冬)을 지나서야 겨우 끝난다. 봄이 되어 조운할 때가 되면 또 바다로 수송하게 되는데, 길이 멀고 험하여 며칠이 걸려야 닿게 되므로 그들의 농사일은 하지도 못하고 여름이 되어야 끝나게 되니, 겨울에는 얼고 굶주리며 봄에는 주리고 지쳐, 사람과 가축 죽은 것이 길에 즐비하게 되고, 또 그 두량(斗量)의 소모가 두량할 때마다 줄어들어 반드시 조세를 더 받아 보충하는데, 심지어 빚을 내서라도 정액을 내게까지 하니, 백성의 병폐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도관찰사(都觀察使) 노공 숭(盧公嵩)이 이곳을 맡아 내려온 이래로 민생의 이득과 병폐를 빠짐없이 따져서 계획을 세우되, 더욱 조전에 치의(致意)하였다. 장구한 계책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 하매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全州)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발견하고, 나주(羅州)에서는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발견했는데, 모두 바닷가에 언덕이 활처럼 구부정하게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활짝 트였다. 노공은 이에 민중들과 상의하기를,
”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받는다면 수송하는 백성들이 단번에 끝낼 수 있고, 바다로 조전할 때에도 배를 성 밑에다 대고 져다가 실을 수 있으며, 왜적(倭賊)이 오면 굳게 지켜 병한(屛翰 담)이 될 수 있으니,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로운 것이니, 어찌 여기다 성을 쌓지 않겠는가.”
하니, 민중들이 즐겁게 명령을 들으므로 즉시 역문(驛聞)하였는데, 조정의 의논도 좋다고 여겨 이첩(移牒)하여 알리었다.
가을 8월이 되어 농사일이 한가하여지자,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정혼(鄭渾)ㆍ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황거중(黃居中)ㆍ전 판사(判事) 노원명(盧元明)ㆍ전 고부군사 정사운(鄭士雲)을 명하여 용안의 성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의(尹義)ㆍ전 개성 윤(開城尹) 김중광(金仲光)과 정윤부(鄭允孚)ㆍ전 판사 나진(羅璡)을 명하여 영산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니, 각각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좋아하며 나서게 되어, 권장하는 북소리가 멈출 겨를이 없었다. 가래질하며 달구질하며 흙을 뭉치며 주워다 쌓으니, 이미 두텁고도 높으며 튼튼하고도 깎은 듯한데 여장(女墻)을 두르고 성문을 굳게 하니, 바라보매 엄숙하고 다가가매 우뚝하게 높다.
영원히 전할 업적을 한 달 만에 끝내니, 마을 사람과 농부들이 병폐가 없어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 서로들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막빈(幕賓 비장(裨將))들과 좌우 사람들이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기를 청하니, 노공이 곧 편지로 나에게 명하였었다. 이때 내가 익산(益山)에 귀양와 있다가 이미 백성들의 말을 듣고서 아름답게 여겼었는데, 문득 이 명을 받으니, 의리로 보아 글이 졸하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일이란 사세가 같으면서도 의리가 다른 것이 있으니,《춘추좌전(春秋左傳)》에 성 쌓은 것을 썼는데, 그 전(傳 해설)을 쓴 사람은 모두 나무란 것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나무라느냐 하면, 그 시기를 따지면 혹은 봄이었거나 혹은 여름이었고, 그 사항을 따지면 법제도 아니요 의리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성인이 붓으로 폄하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중대한 일임을 나타내어, 그들이 백성들을 아끼고 키우는 뜻이 없음을 나무란 것이다.
이번에 노공(盧公)의 이 일은, 의리로 말하면 백성을 위한 것이요, 그 시기로 말하면 이미 가을이 되었으며, 성이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수송하는데 옛날에 비해 매우 힘이 덜하고, 조운하는 일이 전보다 매우 쉬우며, 바다에 떠서 서울에 닿는 기일이 또한 전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되었으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영구히 힘입을 것이고 보면, 국가에 이로울 장구한 계책과 백성을 아끼는 지성스러운 마음이 지극하다 하겠다. 맹자가 말하기를 ‘편해질 도리로써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한 것을 내가 이 역사에서 보았다. 역사 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대서 특필하여 표양하게 될 것인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이 도(道)의 백성들이 병폐가 제거되고 이익을 보게 된 사람은 지금에 있어 노공의 덕을 즐거워하며 모두 노래부를 것이지만, 몇 대 뒤에 혹시라도 지난날의 병폐가 매우 곤란했던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면, 또한 반드시 지금 노공의 혜택이 매우 원대하게 되었던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를 마땅히 성루(城樓)에 써서 걸어, 이 성을 지키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시로 찬양하여 뒷사람들에게 말하여 주어, 대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다면, 노공의 혜택이 마땅히 진포(鎭浦)ㆍ목포(木浦) 두 포구와 더불어 한없이 같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문(記文)을 쓴다.”
홍무 23년 경오 가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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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졸재기(拙齋記)
11.회월헌기(淮月軒記)
회월헌은 중[僧] 진졸재(眞拙齋)의 편액(扁額)인데, 무학옹(無學翁)이 명명한 것이다. 양촌자(陽村子)가 그 말의 뜻을 물으니, 졸재가 말하기를,
“공(空)은 큰 각(覺)에서 생기는 것으로 바다의 한 점 물거품과 같다. 각(覺)의 체는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고, 공(空)의 성(性)은 없는 데가 없어서, 온갖 만물들의 온갖 색깔이나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나 모두 하나의 각(覺)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마치 하나의 달이 하늘에 있으매 모든 강에 나타나고, 하나의 달이 강에 있으매 모든 배에 나뉘어 비치어, 하나는 하늘에 있고 하나는 물에 있으면서, 위아래가 한 가지 빛으로 혼융(渾融)되어 간격이 없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배도 달을 보면서 남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가는 배도 달을 보면서 북쪽으로 가게 되나, 하나의 달의 본체는 남북이 없으니, 남북으로 나뉜 것을 달이 아니라고 하여도 안 되고, 진짜 달이라고 하여도 역시 안 되는 것이니, 나뉘어 비추는 그림자에 나아가 그 나뉘지 않은 본체를 찾으면 진짜 달이 곧 그 나뉘어 비추는 속에 있는 것이요,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온 천하의 물이 장강(長江)ㆍ회수(淮水)ㆍ황하(黃河)ㆍ한수(漢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황하는 북쪽에 있고 장강과 한수는 남쪽에 있고 회수는 중앙에 있으므로, 회수에 머물렀다 북쪽으로 황하에 도달하고 회수를 따라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에 도달하게 되니, ‘회월(淮月)’이라고 말한 것은 역시 하나의 달이 가운데 있으면서 남북으로 나뉘어 비춤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헌호(軒號)를 명명하게 된 뜻이니, 그대는 글로 써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양촌(陽村)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상하도다. 물과 달의 간격이 없음이여. 하나는 하늘에 있고 하나는 땅에 있어 멀고도 아득하여 의당 서로 떨어져 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은 맑고 달은 밝아 위아래로 간격이 없으니, 무릇 만물의 기류(氣類)가 서로 호응(呼應)하는 데는 물과 달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대개 달이 태음(太陰)인데 물도 역시 태음이며, 달이 이지러졌다 찼다 하는데 조수(潮水)도 달에 따라 소식(消息)하니, 물과 달의 기류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두 가지 물체(物體)인데 ‘명수(明水 제사에 쓰는 물)를 달에서 취한다.’는 말로 본다면 물이 달에서 생기는 것이니, 본래는 두 가지가 아니다.
대저 천지 사이에 가득 찬 만물들은, 모두 한 가지 기(氣)에서 나뉘어지고 한 가지 이치로 관통된 것이니, 크게는 천지도 예외일 수 없고 작게는 털끝만한 것도 유루(遺漏)될 수 없어, 음(陰)으로서 볼 수 없는 귀신과 양(陽)으로서 한정 없는 인물(人物)과, 위로는 하늘에 뜬 해와 별, 아래로는 땅에 붙은 풀과 나무들의 이치가, 안으로는 나의 몸에 근본하고 밖으로는 사물에 갖추어져,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고 언제나 그렇지 않은 때가 없는 것인데, 그 전체는 모두 나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의 작용이 능히 사물의 이치를 통하여 간격 없음이 물과 달보다 더한 것이다.
그러나 달이 물에 나타난 것은 그림자이지 진짜 달이 아니므로, 물이니 달이니 하는 구분이 있게 되지만, 사물에 있는 이치로 말하면, 어디나 진실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사물에 응함에 있어서도 역시 어디나 진실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한 이치로 관통되어 위와 아래와 안과 밖과 크고 작은 것과 정밀하고 조잡한 것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춰 있으니 자신에 반성하여 성실[誠]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른바 ‘성(誠)’이란 것은, 진실하게 하고 거짓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사람이 성실치 못한 것은 이욕이 가린 것이니, 마치 달이 하늘에 떴는데 구름이 가리게 되고, 물이 땅에 흐르는데 진흙이 흐리게 함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욕을 버리고 진실을 보존한다면, 만물의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고, 마음의 전체가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내가 듣건대, 중은 세상의 고난을 해탈하고 윤리(倫理)를 끊는다고 하는데, 이는 마음과 사물의 이치가 두 갈래가 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의 본체가 치우치게 되지 않으며 마음의 작용이 결함되지 않겠는가. 달의 그림자를 떠나서 참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니, 사물의 이치를 버리고서 마음의 본체를 얻을 수 있겠는가. 내외(內外)를 고루 닦고 본말(本末)을 두루 갖추는 것은 성학(聖學)의 완전한 것이다. 내가 다시 요약해서 일러 주노니 ‘물과 달은 그림자이고 사물과 이치는 진실이니, 스님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하니, 졸재가 ‘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기(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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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12권 / 권근(權近)
기류(記類)
1제주 향교기(提州鄕校記)
2수원 만의사 축상화엄법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會衆目記)
3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봉교찬(奉敎撰)
4영덕 객사기(盈德客舍記)
5평양성 대동문루기(平壤城大同門樓記)
6연안부 향교기(延安府鄕校記)
7청심당기(淸心堂記)
8의흥삼군부 사인소청 벽기(義興三軍府舍人所廳壁記)
9정릉원당 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貞陵願堂曹溪宗本社興天寺造成記)
10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
11견탄원루기(犬灘院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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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 향교기(提州鄕校記)
제주(提州)는 양광도(楊廣道 지금의 경기도)에 있는 고을로서 지역이 가장 궁벽하고 풍속이 매우 순박하며,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작은 고을로 관질(官秩) 역시 매우 낮다. 향교가 폐지된 지 이미 오래이었는데, 홍무(洪武) 무진년(1388, 창왕4)에 모든 고을을 승격시켜 현령(縣令)ㆍ감무를 모두 참상관(參上官 정6품 이상 종4품 이하의 관질)으로 하고, 또한 학교를 일으키게 하였다. 금상(今上 태종(太宗))께서 즉위하매 더욱 학교를 중시하여, 기사년 겨울에 나의 동향(同鄕) 친구 김군 수(金君綏)가 관찰판관(觀察判官)으로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일에 직임(職任)을 다함으로써 이 고을의 감무로 뽑혀 보임(補任)되었는데, 직임을 다스린 지 한 해가 지나서, 폐단이 없어지고 백성들이 편하게 되어 공역(功役)을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민중들에게 의논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교화(敎化)로써 근본을 삼는 것인데, 이 고을이 비록 작지만 횡사(黌舍 학교)가 없다. 학교를 세워 경영해서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다면, 자못 국가에서 학교 일으킬 것을 위임한 본의가 아니다.”
하고, 이어 옛터를 둘러보고서 가시덤불을 베어 내고 자갈과 흙을 파내어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만들어 집 1칸을 세우고, 전후 좌우에 모두 부연을 달아 붙이고서, 선성(先聖)의 신주를 봉안(奉安)하여 석채(釋菜)할 대성전(大成殿)으로 하고, 동서에 행랑(行廊)을 각각 4칸씩 세워 제생(諸生)들의 학업하는 곳으로 하고, 그 남쪽에 대문 1칸을 세웠다. 그 곁에 또한 부엌 4칸을 세우되, 거기에다 온돌방을 꾸며 교관(敎官)이 휴식하는 곳으로 하였는데, 제도는 간략하나 자리가 구비되었고 공력은 간단하나 일이 잘 되었다.
신미년 정월에 일을 시작하여 가을이 되자 끝났다. 이에 고을 안 자제(子弟) 약간을 모집하여 가르치되, 민간의 재물을 거두지도 않고 백성의 힘을 수고롭히지도 않고 60여 년간 폐지되었던 학교를 일으켰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해 겨울에 사람을 양촌(陽村)에게 보내어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내가 사양할 수 없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천성(天性)은 누구나 타고난 것이어서 고금(古今)과 지역의 다름이 없으므로,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으나 다만 학문을 강구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다행히도 지금 성군과 현상이 중흥하여, 다스림을 만나 교화가 크게 시행하는데, 김군(金君)이 위로 국가의 아름다운 뜻을 체득하여 폐지된 학교를 새로 경영하여 가르치고 육성하기를 이토록 지극하게 하니, 제생들이 만약 학문하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포기하는 짓이다.
학문하는 방법이 책에 갖추 실려 있으나, 그 요점(要點)은 단지 심술(心術)을 바로잡기에 있을 뿐이니, 심술이 바른 뒤에야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며 고을을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온갖 일을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비록 성현의 글을 잘 읽고 화려한 문장을 잘 짓더라도 역시 소인인 선비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무 24년 신미년(1391, 공민왕3) 겨울 12월 임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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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원 만의사 축상화엄법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會衆目記)
3.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봉교찬(奉敎撰)
불씨(佛氏)의 도는 자비와 희사(喜捨)를 덕으로 삼고, 인과 응보(因果應報)가 틀리지 않는 것을 징험으로 삼는다. 그 말이 몹시 광범위하고 크므로 번역되어 중국에 전하여지고 따라서 사해(四海)에 파급되어 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 오래될수록 더욱 성하여, 위로는 왕공 대신(王公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우매한 남녀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를 바라 존숭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사원(寺院)과 탑묘(塔廟)가 우뚝하니 서로 바라보여 온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 동방(東方)에는 신라 말기부터 받들어 섬김을 더욱 근실히 하여, 성안에 승려(僧廬 사찰)가 민가보다도 많았고, 그중 전각(殿閣)이 굉장히 높고 특별한 것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남아 있으니, 당시 존숭하여 받듦이 지극하였음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고려 왕씨(王氏)가 통합한 초기에 변함없이 그대로 시행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바라 이에 중외(中外)에 사사(寺社)를 많이 설립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 시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과 대(大)는 서로 비슷하므로,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 천여 칸이나 되는데, 안에 못[池] 세 군데와 우물 아홉 군데를 팠으며, 그 남쪽에 또한 5층탑을 세워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다. 그 내용은 옛 문적[舊籍]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누린 5백 년 동안에 누차 전란을 겪었으니 이 절의 흥폐가 한 차례만이 아니므로, 이 탑의 파괴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민왕 때에 이르러 다시 영조(營造)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에 광승(狂僧) 장원심(長遠心)이 권귀(權貴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들을 징발하여 재목을 모았으나 결국에는 성사하지 못했다. 공양군(恭讓君)이 장상(將相)들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의 왕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즉위한 뒤로부터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써 이에 중 천규(天珪) 등에게 명하여 공장(工匠)들을 모아 역사를 일으키도록 했었다.
신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여 옛터를 파고서 나무와 돌로 메워 그 기반(基盤)을 다지고, 겨울이 되기까지 가로 세로 6칸을 세우니, 웅장하고도 넓으며, 5층을 쌓고서 판판한 돌로 덮어, 장차 그 공정(工程)이 끝나게 되었는데, 헌신(憲臣)이 말을 하여 중지되었다. 이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 이 태조를 가리킨다)께서 백관(百官)을 통솔하는 자리에 계시면서 공사를 끝낼 것을 청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공양왕이 무도하여 스스로 손위(遜位)하고 대명(大命)이 우리 전하께 모이었다. 이하는 글이 없어졌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 신무(神武)의 자품으로 하늘과 사람의 호응을 얻어 문득 대보(大寶)에 올라 민중과 사직(社稷)을 주관하시니, 지극한 인(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으로 만물을 키우시며, 여러 어진이들이 힘써 보필하니 치도(治道)가 밝고 융성하여, 온갖 폐단이 모두 개혁되고 갖가지 교화(敎化)가 모두 새로워져서, 무릇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에게 혜택 입힐 정사를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불도(佛道)의 자비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존숭하고 찬양하던 법을 그냥 지키고 없애지 아니하였으니, 창시(創始)하여 큰 법도를 세우고 계책을 끼쳐 후손에게 전한 것이 크고도 세밀했다 할 수 있다.
이에 공장(工匠) 감독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공사가 완성되니, 실로 임신년 겨울 12월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하니, 구름 밖에 꿩이 날듯, 하늘가에 새가 날듯, 금벽(金碧 단청 빛깔)이 휘황하여 반공중에 비치었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중간에는《대장경(大藏經)》을 간직하고, 아래에는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을 안치하니, 국가에 복을 내리어 만세토록 영원히 이로울 것이다. 여름 4월에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열어 낙성(落成)을 하고, 주상께서 신(臣) 권근(權近)에게 그 시말을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신 권근이 그윽이 불설(佛說)을 듣건대, 탑을 세움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층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덕이 높고 낮음을 밝히는 것인데, 5층 이상의 것을 불탑(佛塔)이라 한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공덕보응(功德報應)의 설이 지극히 크고 넓으므로, 아육왕(阿育王)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존숭하여 믿어 절 세우기를 끊임없이 한 것이다.
그러나 양(梁) 나라 때 달마(達摩 보제달마, 선종의 창시자.)가, 절 짓고 탑 세우는 일에 대한 무제(武帝)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조금의 공덕도 없는 것이다.’ 한 것은, 대개 무제가 마음은 닦지 아니하고 재물과 인력만 허비하기 때문에 한 말인데, 이번 일은 재물이 민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력도 농민들을 수고롭게 한 것이 아니니, 그 공덕됨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는가. 공덕이 이미 훌륭하였으니 그 보응(報應)이 더욱 드러나게 되어, 사람과 하늘이 서로 경하(慶賀)하고 유명(幽明)이 모두 힘입으며, 혜택을 한없이 미루어가고 복록(福祿)을 끝없이 이어가게 되어,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함께하여 만세토록 더욱 든든할 것을 진실로 기필할 수 있다.
신 권근(權近)은 두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축사(祝詞)를 올립니다.
불설이 서역에서 생겨났는데 / 浮屠之說興西域
온 세상에 퍼지자 한역됐다오 / 流傳四海因華譯
보응 설명 얼마나 해박하든지 / 其言報應甚宏博
누구나 부지런히 복 빌게 되었다오 / 上下靡不勤祈福
세워 놓은 탑묘들 어찌 그리 높은가 / 塔廟之設何巍嶪
온 천지 사방에 가득하다오 / 彌天之下遍六合
신라 때 가장 지성으로 모셨고 / 新羅奉事最誠篤
왕씨도 변함없이 그대로 지켰지요 / 王氏遵守更無懌
연복사가 여염 곁에 있는데 / 演福寺在闤闠側
그 안에 못이 셋 우물 아홉 있다오 / 中有三池九井鑿
남쪽에 오층탑이 있어 왔는데 / 其南有塔五層閣
언제 무너진지 모르는 것이라오 / 不知何代乃頹壓
여러 대 경영해도 끝내지 못했으니 / 累世重營竟不克
기우는 국운에 될 일이리까 / 運祚將衰焉可得
오직 우리 성군 큰 덕이 있으시어 / 惟我聖君有大德
하늘과 사람 호응하니 임금 되시도다 / 天與人歸膺曆服
오만 교화 새롭고 온갖 폐단 고치되 / 萬化俱新百弊革
불교도 빌려다 나라 복되게 하시도다 / 亦資佛敎利邦國
오층탑 다시 세워 공사 마치되 / 五層復建畢工役
농민 힘 괴롭히지 않으시었네 / 經構不擾農民力
우뚝하게 높이 솟아 송악과 나란한데 / 崢嶸突兀配崧嶽
단청이 하늘에 휘황하도다 / 輝映雲霞燿丹碧
위에는 사리 모셔 영험이 빛나고 / 上安佛骨厥靈赫
중간엔 대장경 그득 모셨으며 / 中庋大藏具萬軸
아래엔 장엄하게 비로를 안치하여 / 下置毗盧備嚴飾
공덕이 훌륭하니 복록이 많으리다 / 功德最勝甚饒益
성군이 만년토록 종석을 받들며 / 聖君萬年奉宗祏
큰 국운 천억 대 연장시키어 / 景祚線延世千億
모든 창생 혜택 입게 하리이다 / 普令群生霑利澤
신에게 노래 지어 돌에 새기라 하시나 / 命臣作詞刻諸石
신의 노래 졸렬해서 읽을 수 없나이다 / 臣詞蕪拙不可讀
다만 이 탑이 무너지지 않아 / 但願此塔無顚覆
나라 따라 한없이 튼튼하기 바랍니다 / 與國鞏固垂罔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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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덕 객사기(盈德客舍記)
5.평양성 대동문루기(平壤城大同門樓記)
평양은 국가의 거진(巨鎭)으로서, 사신이 다니는 길이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인데, 그 무너진 성을 오래도록 수축하지 않았으며, 그 동문인 대동문(大同門)과 남문인 함구문(含毬門)도 모두 신축년 난리에 불타 강토의 방비가 든든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염려되는 일이었다.
홍무 임신년(1392, 태조1) 가을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첫머리에 곧 중추원(中樞院) 조온(趙溫)을 평양 부윤(平壤府尹)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듬해에 정사가 닦여지고 송사가 공평하여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므로, 그해 가을에 왕명을 받아 비로소 옛 성을 수축하고, 그 이듬해 봄에 새로 두 성문을 시작하여 가을에 공사를 끝내고,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하기를,
“특히 평양은 군사와 백성들의 일이 많고 풍속이 사납고 험악하여, 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는 곳인데, 내가 재주 없는 사람으로 다행히 개국(開國)한 초기를 만나 그릇 중한 소임을 맡고 여기에 오게 되었기에, 낮이나 밤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경내(境內)의 수비(守備)를 튼튼히 하려고 하여, 성은 농사 틈에 쌓고 성문은 중들을 시키니, 모두들 나와서 조력하여 세 철 만에 끝이 났다. 초루(譙樓 문루)가 장엄하게 되고 성이 완전하게 되어, 비로소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곳이라 할 만하나, 내가 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왕의 덕이니, 그대는 이 사실을 써서 성문 위에 걸어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없어졌다 일으킨 유래를 알게 하라.”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평양은 곧 고조선(古朝鮮) 때에 기자(箕子)가 도읍하였던 곳이므로, 구주(九疇)는 천인(天人)의 학이고 팔조(八條)는 아름다운 풍속이니, 진실로 우리 동방(東方)이 수천 년 동안 예의를 지켜 온 교화의 터전이다. 아. 아름다운 일인데, 위만(衛滿) 때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동안에 오로지 무강(武强)만 숭상하여 그때 풍속이 크게 변하였고,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요(遼)ㆍ금(金) 및 원(元)과 국경이 서로 이웃이 되어 오랑캐 풍속에 물들어서 더욱 교만하고 사나워졌으니, 이는 마치 기(岐)ㆍ풍(豐)의 땅을 주(周) 나라는 사용하여 인후(仁厚)한 덕화를 일으켰으나, 진(秦) 나라는 사용하여 용맹스럽고 사나운 기질을 이룬 것과 같은 일이다. 대개 그 민중들의 성질이 후중(厚重)하고 솔직하여, 선(善)으로 인도하면 교화에 따르기 쉽고, 맹렬로 구사(驅使)하면 또한 족히 부강한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명 나라 황제가 천하를 차지하여 지극한 정치를 천명하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명 나라 섬기기를 성심으로 하고 아랫사람에게 임하기를 너그럽게 하시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이란 이름을 회복하셨는데, 공(公)은 인명(仁明)하고 개제(愷悌)한 자질로 첫머리에 막중한 선발을 입어 이 도읍지에 부윤(府尹)으로 왔으니, 그가 반드시 덕화를 선양하여 백성들을 선으로 인도하여, 옛날의 교만하고 사나운 풍습을 크게 변화시켜 예의의 교화를 일으켜 그 풍속이 다시 순박하여져, 훌륭한 세상의 유신(維新) 정사에 찬조하게 됨이 실지 이로부터 비롯할 것이니, 어찌 다만 성곽(城郭)이 튼튼하고 문루(門樓)가 장엄하여 옛적보다 나은 것뿐이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이 문루가 긴 강을 내려다보고 멀리 큰 들판에 임하여 아침 햇살과 저녁 달빛의 천태 만상인 경치가 모두 난간 아래 가까운 곳에 모이므로, 멀리 수레나 말을 타고 가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온 지역의 경치를 보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일에 내가 혹시라도 올라가 구경하게 된다면, 마땅히 먼저 백성들을 위하여 황극(皇極)의 훈계를 강론(講論)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기자의 혜택이 동방(東方)에 젖어든 것이 매우 깊어서 비록 만세가 되더라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과, 이번에 천자께서 국호(國號)를 내린 은혜와 전하께서 옛적대로 복구한 덕이 실로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기자가 조선을 다스린 것과 동일한 법도임을 알게 할 것이다. 또 백성들로 하여금 타고난 천성(天性)은 당초부터 화이(華夷 중국과 오랑캐)와 고금(古今)의 다름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능히 노력하여 황극(皇極)의 교훈을 준행하면, 신명과 사람이 조화되고 자손들이 길조(吉兆)를 만나 대동의 뜻에 맞게 될 것임을 알도록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몇몇 친구와 술잔을 들고 바람에 임하여, 강산(江山)의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며 정서(情緖)의 흥취를 펼 때에, 또한 공(公)을 위해 시 한 편을 지어 칭송(稱頌)하며 읊겠다.”
하였다.
홍무 27년 갑술 9월 어느 날
[주-D001] 구주(九疇) :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준말. 《서경》홍범에 기록되어 있는, 우(禹)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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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안부 향교기(延安府鄕校記)
7.청심당기(淸心堂記)
진주(晉州) 강공(姜公)이 젊어서 궁중에 들어가 공민왕(恭愍王)을 섬긴 지 수십 년인데,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소문났고, 뒤에는 부처를 사모하여 마음을 깨끗이하여 냄새 나는 채소와 비린 것을 먹지 않기를 또 수십 년 하였다.
금상(今上)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조야(朝野)가 청명해져, 내신(內臣) 중에 현명한 사람을 신중하게 가려 숙위(宿衛)를 삼았는데, 공이 청렴 결백하기 때문에 중궁(中宮)에 입시(入侍)하게 하고, 무릇 향축(香祝)을 받드는 일에는 반드시 공을 보내어 거행하였으며, 공도 또한 재계와 몸가짐을 더욱 근신하여 마음을 다해 정성을 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양궁(兩宮)의 은총이 날로 융숭하였지만, 공은 항시 공손하고 검소하게 자신을 단속하여, 일찍이 교만하거나 과시(誇示)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는 집에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하여 정결하게 소제하고 분향하며, 매양 궁중에서 나오면 정신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세상 이욕에 담담하였다. ‘청심(淸心)’이라고 스스로 편액(扁額)하니, 이름난 선비와 시 잘 짓는 중으로 칭찬하는 글과 시를 쓴 사람이 여러 명이었는데, 나에게 기(記)를 지어 주기를 부탁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람은 마음이 있으므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어 삼재(三才)에 참여하고,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선(善)한 마음을 충족시키면 성현들과 같게 되고, 그 욕심을 따라가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없게 되는데, 그 기미는 다만 한 생각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함만 같음이 없다.” 하였으니, 대저 욕심을 적게 하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모든 선(善)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맑음이 지극하여지면 마음속이 환하여 인욕(人欲)이 정화되고 천리(天理)가 행해지므로 성현들의 덕을 순치(馴致)할 수 있으나, 만약 한 생각이라도 선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싹트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음침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흙탕물이 맑은 시내를 흐리게 함과 같아 눈은 색(色)을 욕심 내고 입은 맛을 욕심 냄으로써, 나의 밝은 마음은 날로 어두워지고 정욕과 이해의 사심이 분분(紛紛)하게 준동하여, 금수와 다름이 거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맑게 하는 요체(要諦)가 아니겠는가. 강공(姜公)이 이미 이로써 마음을 다스렸으니, 또한 마땅히 이로써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5) 여름 5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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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의흥삼군부 사인소청 벽기(義興三軍府舍人所廳壁記)
9.정릉원당 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貞陵願堂曹溪宗本社興天寺造成記)
홍무(洪武) 병자년(1396, 태조5) 가을 8월 무술일에 우리 소군(小君 왕비) 현비(顯妃) 강씨(康氏)께서 훙(薨)하매, 상께서 마음에 애도하시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추존(追尊)하는 시호(諡號)를 올리되 ‘신덕왕태후(神德王太后)’라 하고, 왕궁 서남쪽 몇 리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장사 지내니, 산세가 감아 돌아 지리[風水]가 길(吉)하게 호응되었다. 그 이듬해 정축년 정월 갑인일에 정릉(貞陵)에 안장(安葬)하고, 또 묘역[塋域] 동쪽에 흥천사(興天寺)를 창건하니,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돌[期年]이 못 되어 일이 끝나니, 불당(佛堂)ㆍ승방[僧寮]ㆍ대문ㆍ행랑ㆍ부엌ㆍ욕실[湢] 등 무릇 칸수 세어서 1백 70여 칸인데, 서까래와 기둥에 금빛 채색이 찬란하였다. 기년(期年)이 되어 소상(小祥)을 지내고 불사[法采]를 베풀어 낙성(落成)을 하고, 밭 1천 결(結)을 내려 공양(供養)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조계종 본사(曹溪宗本社)를 삼아 승당(僧堂)을 설치하고 좌선(坐禪) 공부 하는 것을 영구한 규정으로 하도록 하였다.
9월 정축일에 상께서 신(臣) 권근(權近)을 명소(命召)하시어 이르시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당시 중외(中外)의 일에 근로(勤勞)할 때나 화가위국(化家爲國)할 때에 오직 신덕왕태후의 내조가 실로 많았고, 모든 정사에 임할 때에도 또한 충고하여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니, 어진 보좌를 잃은 것 같아 내가 매우 슬프므로, 저승길에 복되기를 바라 이 절을 창건한 것이며, 또 그 혜택을 미루어 나라가 복되고 만물이 이롭게 되기를 길이 한이 없도록 하게 하려 한 것이다. 마땅히 이 뜻을 밝혀 후세에 보여야 하겠으니, 네가 그 글을 지으라.”
하시기에, 신(臣) 권근은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리기를,
“옛날부터 왕자(王者)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울 적에는 역시 어진 배필이 그 덕을 내조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자의 덕화 시행이 모두 내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 상(商) 나라의 유신(有莘), 주(周) 나라의 태임(太姙)과 태사(太姒)가 사책(史冊)에 찬미되어 천고에 빛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신덕왕태후께서 천품이 참으로 아름다우신 데다가 몸소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여, 일찍이 곤도(坤道)의 순함을 나타내셨고, 능히 건도(乾道)의 강건(剛健)에 짝되어, 효도와 공경이 종묘(宗廟)제사에 극진하고 예의범절이 규문(閨門)에 드러났으며, 올바르게 시작하기를 관저(關雎 《시경》의 첫 편명(篇名))의 교화에 근본하였고, 아랫사람들에게 마음 쓰기를 규목(樛木)의 인(仁)과 같게 하였으며, 낮이나 밤이나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계를 어기지 않아 안일에 빠지지도 않고 사알(私謁 청탁)을 들어 주지도 아니하여, 왕업(王業)을 협조하여 돕고 원량(元良 세자)을 독생(篤生)하여, 한 왕조의 흥왕을 도와 만세의 근본을 세웠으니, 현숙한 행실과 아름다운 규범은 진실로 옛날의 어진 왕후에게 부끄럼이 없습니다. 마땅히 복을 누리셔야 할 것인데도,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어 아름다운 모습이 영영 사라지고 그윽한 혼령을 찾을 길 없으며, 상께서는 내조[壺政]가 없음을 슬퍼하시고 신민들은 국모[母儀]가 안 계심을 한탄하여 휘요(褘褕 왕후의 제복)가 빛이 없고 산릉(山陵)이 침침하여, 구름도 시름하고 달도 슬퍼하는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슬픔뿐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그러나 어지신 덕이 널리 드러나 멀리 중국에까지 들리게 되매, 천자(天子)도 슬퍼하여 칙서(勅書)를 내려 조위(弔慰)하였으니, 애통함과 영화로운 예전(禮典)을 갖추었다고 하겠습니다. 죽백(竹帛 대와 베. 역사를 적는 재료)에 편찬되고 금석(金石)에 새기어져, 실로 도산(塗山)ㆍ유신(有莘)ㆍ태임(太姙)ㆍ태사(太姒)의 공적과 어짊이 비등하고 덕이 같아서 한없이 빛나게 되실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글이 졸하여 만분의 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명을 받게 되니 마음이 떨리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저 부처를 존숭하고 절을 세우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감응되지 않는 것이 없어, 널리 인간 세계를 복되게 하여 부요해지고 유익하게 하기를 한이 없이 한다는 부처의 말이, 어찌 신의 언어(言語)와 문사(文詞)가 형용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더 언급하지 아니합니다.”
[주-D001] 도산(塗山) :
중국 고대의 나라 이름. 우(禹)가 도산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한다.
[주-D002] 유신(有莘) :
중국 고대의 나라 이름. 탕(湯)이 유신씨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漢書 古今人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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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
11.견탄원루기(犬灘院樓記)
경상도(慶尙道)가 남쪽에서는 가장 큰데, 서울에서 경상도에 가려면 반드시 큰 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를 넘어 1백 리 가까이를 모두 큰 산 사이로 가는데, 모든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다가 관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이 관갑이 가장 험악하므로 비탈에 의지하여 잔도(棧道)를 놓아 인마(人馬)가 통행하는데, 위에는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로는 깊은 시내가 임하여 경사진 길이 위험하고 협착하므로,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겁이 나고 마음이 써늘해진다. 여기서부터 몇 리를 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나오며 시내를 건너게 되는데, 이것을 ‘견탄’이라 한다. 호계현(虎溪縣) 북쪽에 있는데 온 나라의 가장 요충(要衝)이자 한 도(道)의 가장 험한 요새(要塞)이다.
견탄가에 전에는 역원(驛院)이 있었으나 무너진 지 오래되어, 지나는 나그네가 쉬어 갈 곳이 없었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개연(慨然)히 다시 세우려고 하여, 곧 그 무리를 거느리고 띠를 베어 움막을 치고 지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한편, 여러 사람을 좋은 말로 권유하여 소요되는 재정을 모아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구워 일을 경영하여 집 몇 칸을 세워 그의 무리와 나그네의 머물러 잘 곳을 마련하였는데, 존비(尊卑)의 자리가 다르고 인축(人畜)의 처소가 다르게 하였으며, 또한 그 남쪽에 누각(樓閣) 두어 칸을 세워 지나는 사람이 누구나 쉬어 가고, 구경할 사람이 누구나 올라가 보며, 고달픈 사람들이 쉴 수 있고, 더운 사람들이 식힐 수 있게 하되, 두어 해가 못 되는 동안에 그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의 무리를 데리고 낭자하게 깔린 돌을 파내어 기울어진 데와 오목한 데를 깎아 내고 펼쳐 관갑(串岬)의 길을 수축하니, 좁던 길과 위험하던 잔도(棧道)가 한결같이 모두 평탄해져, 이로부터는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가는 것과 같아, 도보(徒步)하여도 곱송그릴 것이 없고 말을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위험하거나 떨어질 염려가 없게 되었으니, 대사(大師)의 마음씀이 근간하다 하겠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줌이 크다 하겠다.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에 오는 편에 나의 글로 누각에 기록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사가 반룡대사와 동선(同選)이어서 내가 의리에 사양할 수가 없는 처지이다. 삼가 《주례(周禮)》를 고찰하건대 ‘무릇 국도(國道)의 10리에 여(廬 집)를 두고, 30리에 숙(宿)을 둔다.’ 하였고, 또한 후세에 10리마다 장정(長亭) 하나, 5리에 단정(短亭) 하나씩을 둔 것은 모두 손님과 나그네들을 우대한 것이다. 국가에서 역(驛)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달하고, 원(院)을 두어 상려(商旅)들을 혜택 보게 하니, 공사(公私)의 분변과 상하(上下)의 분별이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역에는 관리가 있어 그 직책을 받들지만, 원에는 단지 밭만 주어 사람을 모집하여 주인 노릇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비록 비옥한 평야(平野) 지역이라 하더라도 옛날 원 자리만 있지 주인 노릇 하는 자가 없어서 군데군데 모두 이러한데, 더구나 깊은 산중 척박한 땅이겠는가. 또한 평야의 인가(人家)가 가까이 있는 곳에는 비록 원이 없더라도 오히려 기숙(寄宿)할 수 있지만, 산골의 몹시 험악한 곳에는, 해는 저물고 길은 멀며 사람도 지치고 말도 느른한 데다가, 범이 나올까 두렵고 도적이 있을까 걱정스러워 나그네들의 근심이 이보다 심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 대사(大師)가 이 원을 세워 이 험악한 길 다니는 사람들이 사관(舍館)하게 하였으니, 그 공이 다른 데 원을 세운 것보다 천백 배만 될 뿐이 아니다.
우리 벗이 일찍이 부도(浮屠)의 법을 들어 알아, 무릇 사람들에게 이익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길과 다리를 수축한 것과 원관(院館)을 세운 것도 모두 그 속의 한 가지 일이다. 그 공덕 보응(功德報應)의 말은 내가 배우지 못했으므로 언급하지 않거니와, 이는 대사 자신이 스스로 짐작하기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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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13권 / 권근(權近)
기류(記類)
1농은기(農隱記)
2청하현 의창 해사기(淸河縣義倉廨舍記)
3극적루기(克敵樓記)
4덕방원기(德方院記)
5광탄원기(廣灘院記)
6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7독락당기(獨樂堂記)
8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
9덕안전기(德安殿記)
10우정기(雨亭記)
11대화루기(大和樓記)
12월파정기(月波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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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농은기(農隱記)
나의 동년(同年) 김군 독(金君篤)이 청렴 개결한 지조를 지켜 불우하게 세상을 지내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기를,
“현달하면 도(道)를 펴고 궁곤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길이다.”
하고, 세상에서 물러나 이산(尼山) 들에서 농사 지으면서 스스로 호(號)를 농은(農隱)이라 하였다.
국가가 개옥(改玉 나라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한 뒤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군에게 공주도 유학교수(公州道儒學敎授)의 소임을 제수하자, 군이 말하기를,
“크게는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것과 작게는 인재들을 교육하는 것이, 비록 그 효과는 넓고 좁음이 있으나 사람에게 미치는 바는 동일하여, 모두 우리 유자(儒者)가 할 일이다. 내가 평생에 배운 바를 비록 한 시대에 펴지 못할망정, 진실로 한 고을만이라도 선(善)하여지게 한다면 이로써 족하다.”
하고, 즉시 나와 왕명(王命)에 응하여,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교훈과 효제충신(孝弟忠信)의 도리로 여러 해 동안 부지런히 후진들을 교도하고 권면하였다.
무인년 여름에 사람을 시켜 양촌(陽村)에게 청하기를,
“민생의 근본은 농사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선비가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돌아가기 마련인데, 나도 이에 힘쓴 지 오래더니, 지금 조정의 명을 받고 향학(鄕學)에 와 있으나 나이 이미 노쇠하여 힘써 할 수 없으므로, 사직하고 농토로 돌아가 농사일을 하며 손자들이나 가르치다가 나의 여생을 마치려 하오. 번지(樊遲 공자 제자)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우리 부자(夫子)께서 ‘늙은 농군만 못하다.’는 것으로 책망하셨는데, 그가 한창 젊은 나이로 성인을 상종하면서 그 원대한 것은 묻지 않고 오직 농사짓는 법 배우기를 청하였으니, 그 거칠고 비루함이 심하므로 책망하심이 당연합니다. 이윤(伊尹)은 성인의 자품으로서 천하를 자기의 임무로 알았으나 또한 산야(山野)에서 농사 지으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즐겼고, 공명(孔明)은 숨은 용(龍)과 같은 덕을 지니고서도 몸소 남양(南陽)에서 밭 갈며 임금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 아니하였으니, 이 두 분이, 탕(湯)의 초빙과 선주(先主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없었더라면 모두 농사일에 몸을 바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향학(鄕學)에서 자제(子弟)들의 학업을 닦아 주지 못하는 자가 농사를 버리고 장차 무엇을 하겠습니까? 스스로 벼슬을 구하는 것도 귀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요, 스스로 공ㆍ상(工商)에 뛰어드는 것도 달갑게 여기는 바가 아니며, 스스로 이단(異端) 속에 빠지는 것도 마음 편케 여기는 바가 아닙니다.
봄에 갈고 가을에 수확하여 위로는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이며, 더러는 산에서 나물 캐고 더러는 물에서 고기 잡고 더러는 막대 짚고 혼자 거닐고 더러는 술잔 들고 벗을 맞이하여, 부귀(富貴) 때문에 욕됨이 없고, 지취(志趣)를 즐겨서 근심을 잊으니, 헌면(軒冕 높은 벼슬아치가 사용하는 수레와 관(冠))과 규조(珪組 높은 벼슬아치의 인장과 인끈)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나의 시골에서의 즐거움인데, 그대는 기(記)로 지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듣고서 그 절개를 고상하게 여기고 그 기풍(氣風)을 흠모(欽慕)하였으나 아득하여 더위잡을 수가 없다. 군이 젊었을 적에 일찍이 서기(書記) 일을 맡았었는데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또 서장관(書壯官)이 되어서는 왕명(王命)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니, 쓸모있는 재질로서 그 포부를 펼 수 있었는데, 걷어 간직하고 농사 지어 먹고 사니, 그 지조가 이러하다. 구차하게 이윤(伊尹)이나 제갈량처럼 때 만나기를 사모하지도 않고, 구차하게 장저(長沮)ㆍ걸익(桀溺)처럼 개결한 짓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은 자리나 차지하고 녹(祿)에 구구하여 세상에 도움도 없으면서 그만둘 줄을 모르니, 어찌 그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어찌하면 벼슬을 버리고 가서 양사송(良耟頌 양사는 《시경》주송(周頌)의 편명)을 읽고, 격양요(擊壤謠)를 노래하며 군(君)과 더불어 널찍한 들판에서 상종할 수 있을 것인지.
[주-D001] 장저(長沮)ㆍ걸익(桀溺) :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섭(葉) 지방의 은자(隱者).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이들이 짝지어 밭일 하는 것을 보고,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물었는데, 이들은, 공자가 천하를 주류(周流)하면서 쓸데없는 노고를 한다고 비난만 하고,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論語 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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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하현 의창 해사기(淸河縣義倉廨舍記)
3.극적루기(克敵樓記)
나의 벗 정군 수홍(鄭君守弘)이 성(省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관(郞官)으로 있다가 안성(安城)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업적[政績]이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이 힘입어 안정되었다. 고을 해사(廨舍)의 동루(東樓)를 수리하고서, 향학(鄕學)의 장(長) 정한(鄭翰)을 서울에 보내어 양촌(陽村)에게 편지 전하기를,
“동루는 본래 거창(居昌 본관) 신군 인도(愼君仁道)가 원으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紅巾賊)이 송도(松都)를 함락하자 승여(乘輿 임금의 수레)가 파천(播遷)하였다. 적은 선봉(先鋒)을 보내어 사자(使者)라 핑계하고 모든 고을을 침략하니, 이 때문에 북쪽 30여 고을이 풍문만 듣고 항복했고, 심지어 공복(公服)을 갖추고 맞이하는 자까지 있었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쪽으로 넘쳐 장차 온 나라가 망하게 되어 막을 길이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만이 앞장서서 의기(義氣)를 분발하여, 거짓 항복하는 체 잔치를 차려 호군(犒軍)하고 취하자 섬멸하매, 적들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고, 국가에서도 회복하여 중흥하는 공을 이룰 수 있었으므로 그 의열(義烈)을 표창하여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계묘년에 신군(愼君)이 원으로 와 이 동루를 세웠는데, 이 누각은 적에게 분발한 공로와 지관(知官)으로 승격된 영화를 정표(旌表)한 것으로서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군이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름은 짓지 못하였고, 또한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지도 못한 지가 지금 이미 삼기(三紀 1기는 12년)나 되어, 늙은이는 죽고 젊은이는 늙었는데, 또 그대로 오래 간다면, 이 고을이 나라에 공이 있은 것과 이 동루가 이 고을의 중요한 것임을, 뒷사람들이 장차 알게 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대로 두고 수리하여 썩은 것을 바꾸어 견고하게 하고서 ‘극적루’라 이름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의 글을 얻어 후일의 증거가 되게 함으로써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대대로 그 전일의 의열을 잊지 않도록 하려 한다.
한편 가까이서 보면, 산이 동ㆍ북쪽에 막아 섰고, 울창한 소나무와 높다란 교목(喬木)들이 우거져 깊숙하며, 남쪽에 있는 큰 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아전들의 집 10여 호가 그 안에 점철(點綴)되어 있고, 펀펀한 밭 수십 경(頃)이 그 밖에 뻗쳐 있고 뽕나무와 삼[麻]이 밭둑에 잇닿고 벼와 곡식이 이랑에 그득하다. 봄에는 갈고 여름에는 김매며,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모든 고을 사람들의 그 안에서 일하는 것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천흥산(天興山)ㆍ청룡산(靑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불쑥 머리를 내밀고 조회(朝會)하는 듯, 읍(揖)하는 듯 병풍처럼 둘러, 아무리 보아도 한이 없는 것은, 곧 이 누각의 좋은 경치이다. 옛날에 한 문공(韓文公 한유. 문공은 시호이다.)도 등왕각(滕王閣)에 올라보지 않고서 기(記)를 지었으니, 보지 않은 것 때문에 사양하지 말고 기를 지어 주기 바란다.”
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왕씨(王氏)의 고려 5백 년 동안에 극심한 침략을 받은 것으로는 충렬왕(忠烈王) 경인년(1290)의 합단(哈丹)과 공민왕 신축년의 홍건적 같은 것이 없었다. 철령(鐵嶺)의 방어가 무너지자 합단이 마구 들어오기를 마치 빈 고을에 들어가는 듯 원주(原州)까지 왔더니, 충갑(沖甲)이 필부(匹夫)로서 팔뚝을 휘두르고 호통치며 그 무리를 섬멸하였으니, 지금도 아름답게 여긴다. 송도[松京]가 함락되자 홍건적이 또한 치열하여 군사를 나누어 남으로 내려올 때 당하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강하(江河)가 터지듯 하여 도도(滔滔)한 기세를 막을 수 없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이 충성을 바치어 적을 섬멸하는데 우뚝하게 큰 방파제(防波堤)가 되어 그 넘쳐 흐르는 기세를 막았으니, 그 공렬(功烈)의 거룩함이 충갑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마땅히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만세토록 본보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아, 충의(忠義)는 인도(人道)의 큰 절개이고 왕화[王敎]의 큰 발단인데, 정군(鄭君)이 일찍부터 충효(忠孝)의 자질로 인의(仁義)의 학문을 강구(講究)하여, 뜻을 세움이 높고 지조를 지킴이 확고하여 이미 우뚝하게 뛰어났다.
이제 그가 이 고을에서 정사하면서 첫머리에 이 일을 고증하여 우뚝이 이 누각의 이름을 계시하여 무한한 뒷사람을 권장하였으니, 이것 또한 기록해야 할 일이다. 뒷날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이 전 사람의 의열(義烈)을 상상하고, 정군의 취지를 생각하여, 덕(德)을 좋아하는 타고난 양심(良心)에 감동되는 바 있다면, 충의(忠義)와 지조 있는 선비들이 많이 나게 될 것이니, 왕화(王化)에 도움됨이 어떠하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적(敵)을 극복하는 공은, 반드시 위급한 국난(國難)을 겪은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여러 대 만에 겨우 있게 되는 것이니, 절의(節義) 있는 선비들이 비록 감동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그 뜻을 나타내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일은 대소(大小)가 있으나 그 이치는 같은 법인데, 무릇 천리(天理)를 해치는 물욕(物慾)이 모두 적인 것이니, 염치를 해치는 탐오[貪黷], 인(仁)을 해치는 폭정[苛暴], 공정[公]을 해치는 아사(阿私), 정직을 해치는 편곡(偏曲)은 모두 적으로 여기어 극복하여 다스려야 할 것들이다. 유(類)에 따라 길러서 사물(事物)에 미루어 가면, 일상 생활 속에 무릇 스스로 그 사심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니, 어디에서나 적을 극복하는 공부 아닌 데가 없게 되어, 의리를 미처 다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말하기를 ‘사심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하자 ‘청컨대 이 말씀을 일삼아 공부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정군의 뜻이 자못 이에 가깝다 하겠다.”
하였다.
홍무 31년 무인 후오월(後五月)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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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덕방원기(德方院記)
5광탄원기(廣灘院記)
광탄원은 양경(兩京 서울과 개성(開城)) 사이의 한 중간에 위치했으므로 나그네들이 대부분 쉬거나 자고 가는데, 담장과 집이 퇴락하여 기숙(寄宿)할 수가 없게 되었다. 판화엄(判華嚴) 오공(悟公)이 측은히 여겨 다시 세우려고 저축했던 돈을 희사하여 중건하였다. 앞에 누각(樓閣)을 세웠는데, 아래로 큰길에 임하고 펀펀한 들을 내려다보고 있어 올라가 조망(眺望)하노라면 시원하여 속세의 피로를 씻을 수 있다.
나에게 기(記)를 청하므로, 내가 승낙하며 시말(始末)을 물으니, 오공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오래 전부터 임금께서 알고 계시어 은혜를 내리심이 가장 두터웠으니,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고 또한 사방의 은혜에 보답하려 함이다.
하고, 다시 말하기를,
“기(記)를 짓는 것은 남에게 알리려 함인데, 나의 공덕이 어찌 남들이 알고 모르는 데에 있겠는가. 이는 기가 없는 것만 못한 일이다.”
하므로, 내 또한 그렇다 하고 짓지 않았다.
기묘년 여름에 내가 옛 서울에 가다가 여기서 아침밥을 먹게 되었기에, 따라서 웃인방[楣]에 기(記)를 적어 전일에 승락했던 것을 이행하고, 또 내가 지나게 된 것도 기록한다. 이때 오공은 왕명으로 석왕사(釋王寺)의 주지가 되었으니, 상거가 천 리나 된다. 공이 이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나 역시 오공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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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7.독락당기(獨樂堂記)
단양백(丹陽伯) 우공 현보(禹公玄寶) 자신이 편액(扁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사마군실(司馬君實 이름은 광(光))과 범희문(范希文 이름은 중엄(仲淹))이 모두 유술(儒術)로서 벼슬이 재상(宰相)까지 되었는데, 도덕과 업적도 서로 막상막하였다. 범공(范公)의 말에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긴다.’ 하였으니, 그 뜻이 크고 그 인(仁)이 넓어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 천하를 구제한 것은 당연하다. 성현의 도는 독선(獨善)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남도 그렇게 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벗이 찾아오면 즐겁다.’고 한 것은 공자이고, ‘대중과 함께 즐겨야 한다.’ 한 것은 맹자이다. 두 분이 모두 공자ㆍ맹자의 도를 배운 분들인데, 범공의 뜻은 이와 같이 크고, 사마공은 ‘독락(獨樂)’으로 그의 동산을 이름 지었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군자의 낙은 본과 말[本末]이 있으니, 마음속에 얻어진 것은 본이고 나타나서 사물에 미치는 것은 말이다. 마음속의 즐거움으로부터 미루어 사물에 미친다면 천지 만물이 모두 나와 일체가 되어, 어느 하나도 나의 낙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동류(同類)이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미쳐 가야 한다. 그러므로 ‘벗이 먼 데서 찾아오면 기쁘다’ 했고, ‘영특한 인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즐겁다’ 하였으며, 한 시대에 나타나서는 낙지(樂只)의 시가 지어졌고, 후세에 와서는 낙리(樂利)의 혜택이 멀리까지 미쳤다. 그 낙이 만물에 미치게 되면, 크게는 금수 어별(禽獸魚鱉)이 모두 제대로 되고, 작게는 뜰의 풀도 없애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만물과 내가 모두 대화(大和) 속에 싸여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는 것이니, 그 낙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만물에 미치기란 다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낙이 충족되지 못하여 근심되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뭇사람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널리 은혜를 베풀고 뭇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ㆍ순(堯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으니, 더구나 그보다 못한 사람이겠는가. 대개 마음속에 낙이 있는 사람은 외물(外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언제나 호연(浩然)하게 그대로 있어, 반성하여 보아도 잘못이 없고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아래로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독락’이다. 범공(范公)은 극도로 만물에 미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사마씨(司馬氏)는 오로지 스스로 낙 얻음을 말한 것인데, 자득(自得)한 낙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만물에 미치기를 극도로 할 수 없는 것이니, 두 분의 말은 서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낙을 자득함에는 또한 깊고 얕은 차이가 있어서, 공자 문하의 고제(高弟)들이 친히 성인에게서 배웠지만 그들의 성취된 바가 역시 각각 달랐다. ‘거마(車馬)와 의복을 같이 쓰다 해져도 유감이 없다.’고 한 자로(子路)의 뜻을 크다고 할 수 있으나, 증점(曾點)의 ‘동자(童子)를 데리고 관자(冠者)들과 읊조리다 돌아오겠다.’고 한 가슴속이 유연(悠然)한 낙과 비교하면 차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만물에 미치는 순간에 있어서 본 것이요, 안자(顔子)의 ‘한 그릇 밥과 한 주발 물로 누항(陋巷)에서 지내되 낙을 고치지 아니했다.’는 것은 곧 공자가 ‘거친 밥에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눕더라도 낙이 또한 그 속에 있다.’고 한 것과 거의 가까우니, 이는 참으로 마음속에 자득하여 홀로 즐긴[獨樂] 것이다. 천 년이 지난 뒤에 염계 선생(濂溪先生 북송(北宋)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이 일찍이 이를 알아차려, 매양 배우는 사람들에게 공자와 안자의 즐긴 바가 어떤 것인가를 찾도록 하였는데, 두 정 부자(程夫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이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대개 염계 선생은 가슴속이 쇄락(灑落)하여 광풍 제월(光風霽月)과 같았던 분인데, 오직 이와 같은 뒤에야 공자와 안자가 즐기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이런 것이 근본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어떤 사람은 예 예 하며 물러갔다.
얼마 지난 뒷날 내가 단양(丹陽) 우(禹) 정승을 뵈었는데, 이때 공(公)이 정승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지낸 지 여러 해였다. 그의 당(堂)에 ‘독락(獨樂)’이라 편액하고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비록 사마씨(司馬氏)를 사모하지만, 뜻이 사마씨와 꼭같은 것은 아니다. 봄날 아침 꽃을 보노라면, 꽃이 즐길 만한 것이었지만, 꽃이 나와 함께 즐겨 주지 아니하고, 가을밤에 달을 보노라면, 달이 즐길 만한 것이지만 달이 나와 함께 즐겨 주지 아니하며, 구름 속의 기이한 봉우리와 눈 속의 빼어난 소나무가 즐겁게 구경할 만하고, 진기한 새소리와 반가운 빗소리가 즐겁게 들을 만하여, 무릇 이목(耳目)에 접하는 만물들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비록 한이 없지만, 한 가지도 나와 즐기는 바가 같은 것은 없으니, ‘독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書]은 혼자도 보는 것이어서 강론이 필요치 않고, 시(詩)는 혼자도 읊조리는 것이어서 화답[唱酬]이 필요치 않고, 술은 혼자도 마시는 것이어서 꼭 손님이 있지 않아도 되며, 느지막이 일어나고 피곤하면 잠자며, 더러는 정원을 거닐고 더러는 평상에 누워, 오직 생각 가는 대로 그림자와 함께 다니니, 이것이 내가 한가히 지내며 홀로 즐기는[獨樂] 것이다.
지금이나 전 일을 회상하건대, 흥망(興亡)과 득실(得失)의 변천이 한없어, 지난 일이 이미 모두 꿈이지 진실이 아니고 보면, 앞날의 일 또한 그 진실하기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외람되이 무능한 몸으로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하였지만 별 일 없었고, 오랫동안 환란 속에 있었지만 온전하였으며, 성명(聖明)의 조정을 만나 태평한 세상에서 늙어가니, 이보다 다행함이 있겠는가? 이미 가버린 전 사람들을 조위(弔慰)하고 아직 남은 여생을 자축(自祝)하며, 온 세상이 영리(營利)에 급급함을 보기만 할 뿐 홀로 바라는 것 없이 스스로 족하니, 이것이 내가 자신을 어루만지며 홀로 즐기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記)를 쓰라.”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기에 일찍이 어떤 사람과 논했던 것을 내놓으며, 이어 고(告)하기를,
“대개 사람이 물욕이 있으면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 근심이 많고, 물욕이 없으면 천리(天理)가 스스로 밝아서 어디서나 태연하게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공(公)께서는 일찍이 주자(周子)ㆍ정자(程子)의 학문으로써 공자ㆍ안자의 낙(樂)을 강구하여, 귀(貴)할 때에 당해서는, 범희문(范希文)의 뜻으로 우락(憂樂)을 삼고 사마군실(司馬君實)로 사업(事業)을 삼았으며, 벼슬을 버리고 물러감에 당해서는, 곤궁과 재액(災厄)이 극히 참혹했으나 공은 처신하기를 태연히 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였고, 슬픔과 즐거움 영화와 곤욕 따위의 외부(外部)로부터 닥쳐오는 것이 마치 한서(寒暑)와 주야(晝夜)처럼 공의 앞에 교대하였으나, 공은 그 사이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믿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공의 마음속에 낙을 완전하게 하였으니, 이는 중인(衆人)은 알지 못하는 것이고 군자(君子)만이 홀로 얻는 것입니다. 또 더구나 공은 공이 이루어지고 명성이 성취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수양하며 여생을 즐김이, 또한 사마공(司馬公)이 낙양(洛陽)에서 한거(閑居)하던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 독락으로써 이 당(堂)을 이름함이 마땅합니다.
아, 공의 즐기는 마음이 속에 충만하여 온 당(堂) 위에 나타났으니, 만약 큰 천지와 많은 만물에까지 미루어 간다면, 한 당 위에서 같이 화기에 차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D001] 낙지(樂只)의 시 :
《시경》 소아(小雅) 남산유대(南山有臺)에 “반가운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樂只君子 民之父母]” 하였는데,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10장에 인용하기를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나니, 이를 백성의 부모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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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
9.덕안전기(德安殿記)
건문(建文) 3년 여름에 태상왕께서 옛날 잠저(潛邸)의 동쪽에다 자리를 잡고 다른 새 집[殿]을 세우라 명하였는데, 가을에 공사가 끝나자 곧 신(臣) 권근에게 명하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사제(私第)로 광명사(廣明寺)ㆍ봉선사(奉先寺) 두 절을 만든 것은, 국가에 이롭기를 도모한 것이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대신 국가를 차지했는데, 우러러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처럼 장차 이 전사(殿舍)로 정람(精藍 정사(精舍))을 만들어 연원히 대대로 국가가 복되게 하는 곳으로 하여, 위로는 선대(先代)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민생들을 이롭게 하여, 종사(宗社)가 영구히 든든하고 전통을 한 없이 전하게 할 것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정전(正殿)에는 석가(釋迦)가 출산(出山)하는 영정(影幀)을 만들어 걸고, 또 북쪽 웃인방[楣]에 선반을 만들어 그 중앙에《밀교대장경 (密敎大藏經)》 한 질(帙)을 모시고, 동편에 새로 조각한 《대자능엄경 (大字楞嚴經)》 판본(板本)을 간직하고, 서편에 새로 조각한 《수륙의문 (水陸儀文)》 판본을 간직하였으며, 좌우에 행랑을 만들어 참선(參禪)하고 강(講)하기에 편리하게 하였고, 옆에 자그마한 각(閣)을 세웠는데 방소(方沼)가 내려다보이게 하였으며, 부엌ㆍ창고ㆍ대문ㆍ행랑이 모두 적당한 자리에 설치되어, 공력은 비록 측금(側金)보다 못하나 소원이 이미 전륜(轉輪)에 주도하였다. 저승에서도 명복(冥福)을 받게 되고 이승에서도 복리를 얻게 되어, 혜택을 한없이 미루어 가고 국운(國運)을 끝없이 전해 감으로써, 마침내 세속[凡塵]을 초탈하고 정각(正覺)을 증명(證明)하게 되는 것이 곧 소기(所期)의 목적이니, 네가 마땅히 기(記)를 지어 후세에 전해 보임으로써 만세 자손들로 하여금 지켜가고 변함이 없도록 하라.”
하시었다.
신(臣) 권근이 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나와 삼가 기(記)를 썼다.
이해 가을 9월 어느 날
[주-D001] 전륜(轉輪) :
전륜장(轉輪藏) 또는 윤장(輪藏)이라고도 한다. 경전(經典)을 넣어 두는 책장으로 회전하도록 만든 책 궤. 이것을 돌리면 찾는 경전을 자유로이 찾을 수 있고, 속인들은 이것을 돌리기만 하고 읽지 아니하더라도 공덕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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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우정기(雨亭記)
11.대화루기(大和樓記)
울주(蔚州)는 동남쪽 큰 바닷가에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가장 멀다. 고을에서 서쪽으로 두어 마장에 큰 내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어져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동쪽으로 꺾이는 데가 물이 가장 많고 넓으며 맑고 깊으니, 곧 황룡연(黃龍淵)이다. 그 북쪽에 돌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절벽처럼 서 있는데, 역시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동쪽으로 돌면서 우뚝한 산이 되어 강 남쪽에 서 있고, 이름난 꽃 기이한 화초와 매화ㆍ대나무ㆍ산다(山茶) 따위가 겨울을 지나면서도 향기롭고 무성하니,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
신라 때에 처음으로 북쪽 벼랑 위에 절을 세웠는데 이름이 ‘대화사’이고, 그 서남쪽에 누각(樓閣)을 세웠는데 아래로 깊은 못[淵]에 임하였고, 뜰 밖으로 산이 가로질렀으며 바다는 하늘가에 닿은 듯하여, 올라가면 구경하는 맛이 가장 기이하다.
건물(建文) 원년 기묘년 봄에 지금의 국구(國舅 왕의 장인) 여흥백(驪興伯) 민공 제(閔公齊)가 사명을 받들고 여기에 왔다가, 그 남쪽 누각이 이미 없어지고 서쪽 것도 썩어서 쓰러지려는 것을 보고는, 절월(節鉞)을 멈추고 방황하다 둘러보고 한탄하며 개연(慨然)히 새로 세울 뜻을 두었고, 조정으로 돌아가서도 일찍이 잠시나마 잊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신사년(辛巳年) 봄에 판관(判官) 안군 노생(安君魯生)이 이 도(道)의 안찰사(按察使)로 나가게 되어, 공(公)에게 찾아가 작별할 때 공이 이 일을 이야기하니, 안군(安君)이 대답하기를,
“감히 조심하여 듣지 않으리까. 밤낮없이 이 누각을 새로 세워, 공의 근간하신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미 부(部 임지(任地))에 가서는 영을 거행하고 정사를 엄숙히 하여, 곧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재목을 깎고 기와를 굽게 하고 지주(知州) 손군 광연(孫君光衍)이 힘을 다해 감독하매, 백성을 번거롭히지도 않고 한 달이 못 가서 영조(營造)하였으니, 규모와 제도가 전보다 더욱 웅장했다.
그해 가을에 여흥공(驪興公 민제)이 또한 어태(御胎)를 모셔다 성산(星山)에 안치(安置)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이르기를,
“누대(樓臺)나 정관(亭觀)을 설치하는 것이 비록 정사와 상관이 없는 듯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구경하며 피로와 안일을 조절하는 것으로서, 나라마다 없는 나라가 없다. 울주(蔚州)의 대화루는 참으로 한 지방의 기이한 경치이기에, 내가 그 황폐하여 무너진 것이 마치 태평한 치세(治世)에 누(累)라도 되는 듯 애석하게 여겨지기로, 일찍이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이미 새로 세웠었는데, 이제 내가 또 사명을 받들고 그 도에 가게 되었다. 이 일을 글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누가 나라 안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 그러나 궁벽하고 먼 변방에 있기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며 읊조리는 사람이, 버림받은 나그네가 아니면 안비(按轡)ㆍ부부(剖符)한 한 지방이나 한 고을을 맡은 사람들이다. 재집(宰執 재상)이나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한 번 지나가기도 또한 일인데, 더구나 존귀한 국구(國舅)로서 품질(品秩) 높은 후백(侯伯)이요 또한 일찍이 총재(冢宰)를 지냈으며 백관(百官)을 총괄하던 공과 같은 분의 행차가 한두 해 사이에 두 번이나 임하였으니, 이 누각이 생긴 이래 또한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공은 풍신(風神)이 깨끗하고 마음속이 초탈하며 글과 행실과 지조와 의리가 조정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비록 부귀한 처지에 처해서도 평소에 한적(閑適)한 지취를 말하는 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이 이 누에 올랐을 적에 쇄락한 회포가 풍월(風月)과 함께 맑고 광대한 도량이 해천(海天)과 같이 클 것이니, 이래서 공이 즐겁게 여기며 잊지 못하는 것이다. 공이 이 마음을 미루어 온 나라와 함께 즐긴다면, 우리 백성은 장래 희망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공을 모시고 가서 공의 뒤를 따라 올라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위에서 한 잔 들고 읊조리며 갖추 그 경치를 기록하게 될 것인지.
신사년 겨울 10월 어느 날 적는다.
[주-D001] 안비(按轡)ㆍ부부(剖符) :
안비는 안찰사(按察使)를 말한 것. 《後漢書》에 “안비하고 수레에 오르며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었다.[按轡登車 有澄淸天下之志]” 하였는데, 범방(范滂)이 어사로 나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부는 부표(符表)를 이분(二分)하여 그 한쪽을 간직하는 것. 곧 수령(守令)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옛날 한(漢) 나라 때에, 길이 6치의 대나무 쪽에 표를 하여 둘로 나누어 한 조각은 나라에 두고 한 조각은 임명받은 사람이 간직하여 임명의 증표(證票)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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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파정기(月波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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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14권 / 권근(權近)
기류(記類)
1.신재기(信齋記)
신재 한공(韓公)의 휘(諱)는 상경(尙敬)이다.
나의 동료(同寮) 참지(參知) 한공(韓公)의 호(號)는 신재이다. 조사(朝使 중국 사신) 단목 선생(端木先生)이 그 편액(扁額)을 예서(隷書)로 쓰고 또한 서술(敍述)하기를 매우 자상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고 이어 기(記)를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참지는 우리 종가(宗家)의 택상(宅相 생질(甥姪))으로서 친하게 지낸 지 이미 오래이고 또한 동료이어서, 의리에 글을 잘 못한다 하여 사양할 수가 없다.
대저 사람의 성(性)은 곧 하늘의 명(命)인데, 하늘의 명이 원형이정(元亨利貞)하며, 심원(深遠)하고 간단이 없음은 성(誠)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부여(賦與)되어 오상(五常)의 성(性)이 된 것이며,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인데, 성인들은 그 천성대로 하는지라 하늘과 같이 순일하나,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면강(勉强)한 뒤에야 그 천성의 덕을 충족하게 되며, 면강하여 충족해 갈 수 있는 것이 신(信)의 작위(作爲)인 것이다. 외부에 의해서 되어지거나 거짓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타고난 천성 속에 갖추어진 것이지만, 다만 사람들이 물욕에 가리어 힘쓰지 않아서 걱정이다.
대개 하늘의 성(誠)이란 곧 사덕(四德 원ㆍ형ㆍ이ㆍ정(元亨利貞))의 실(實)로서, 사람에 있어서는 또한 실심(實心)이 되는 것이니, 인(仁)은 측은(惻隱)히 여기게 되는 이치인데, 그 측은하게 여김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신(信)인 것이다. 의(義)와 예(禮)나 지(智)에 있어서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성이 원형이정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면, 신이 어찌 인ㆍ의ㆍ예ㆍ지와 별개이겠는가.
나의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事物)에 시행하여 가면, 하는 일마다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감동시키는 것마다 응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크게는 천지, 그윽하게는 귀신, 미세하게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信)으로써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대저 천지와 만물은 본래 한 이치인지라, 나에게 있는 진실한 마음으로 저에게 있는 진실한 이치를 촉발(觸發)하면 간격없이 묘하게 합쳐짐이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른 것이니,《서경(書經)》에 ‘지극한 정성은 신명을 감동시킨다’고 한 것과,《주역》에 ‘신의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친다’고 한 것이, 대개 이를 말한 것이다.
무릇 학문하는 사람이 몸을 닦는 방법과 임금이 정사하는 요령은 이보다 더욱 간절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들을 교훈함에는 ‘삼가고 미덥게 하라’ 했고, 또 ‘충신(忠信)을 주로 하라’ 하였으며, 나라 다스림을 말함에는 ‘일을 공경하고 미덥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가 서로 전수(傳授)하여 저서(著書)할 적에도 모두 정성스럽게 치의(致意)했던 것이다.
수사(洙泗)의 여음(餘音 유풍(遺風))이 끊어지자 변사(變詐)가 날로 일어나,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시대에는 적적하게 아는 사람이 적다가, 송(宋) 나라 때에 이르러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물(物)에 적응(適應)하고 어기지 않는다’ 하고, 또 ‘진실하게 함을 이른 것이다’ 하여, 능히 전현(前賢)들이 천명(闡明)하지 못한 이면을 밝혔으니, 학자들에게 매우 공이 있다. 그러나 성품에 있는 본체를 가리킨 것이 아니요, 곧 학자들의 절실한 사항에 나아가 사물(事物)을 접응하는 용(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이를 두고 이렇게 논하였다.
“물(物)에는 각각 그 이치가 있고,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동일하니, 진실 아닌 것이 없다. 불은 건조한 데로 나아가고 물은 습한 데로 나아가는 것은 물(物)의 진실한 이치요, 물은 아래로 흐르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것이라고 함은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다. 불을 쓰고 싶으면 반드시 건조한 물건을 태우고 물을 돌리고 싶으면 반드시 낮은 데로 소통시킨 후에야, 일하기가 쉽고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물에 적응하고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가령 누가 불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뜨거운 것이라 하고, 물을 묻는다면 나는 차가운 것이라고 말해 줄 것이니, 이는 나의 진실한 마음을 다해 말해 주는 것이다. 이에 그 사람이 불을 쥐자 손이 뜨겁고 물을 마시자 이가 차가워지면, 나의 말이 진실이고 망령이 아니라고 할 것이나,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 말하지 아니하여, 불을 차가운 것이라 하고 물을 뜨거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반드시 나를 망령이라고 할 것이니, 이른바 ‘진실하게 함을 이름이다’ 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고 벗들과 사귀는 일상 생활이나 사물을 응접할 때에 어디서나 진실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면, 그 신(信)이 커져서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감격(感激)시키는 데까지도 이르게 될 것이다.”
지금 공(公)이 이 신(信)을 서재(書齋)에 편액(扁額)하고 스스로 면강(勉强)하니, 근본하는 바를 알았다 하겠다. 마땅히 그 처사를 정밀하고 자상하게 동작을 의리에 맞게 하여, 나라 사람들에게도 옳게 보이고 임금에게도 지우(知遇)를 받게 될 것이다.
옛사람들이 남긴 법칙을 고찰하여 사공(事功)에 시행한 업적은 단목 선생(端木先生)의 서술(敍述)에 다 말하였으니, 내가 어찌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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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대산 관음암 중창기(五臺山觀音庵重創記)
3.식파정기(息波亭記)
이공(李公)의 휘(諱)는 원(原)이다.
송도(松都)의 서북쪽 여러 산골의 물이 모여서 긴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는데, 건너다니는 곳을 벽란((碧瀾) 나루라고 한다. 국도(國都)와 가깝기 때문에 건너는 사람이 많고 산 근방이기에 물살이 빠르며 바다가 가까우므로 조수가 거세어서, 건너다니는 사람들이 매우 병폐로 여겨, 국가에서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강 기슭 벼랑 밑에 전부터 초루(草樓)가 있었는데, 나루를 맡아 보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강은 바다와 하늘에 닿고 산은 들판 언덕에 가로 놓여 이리저리 구불구불하고 광막하여 아무리 보아도 가없으니, 매우 뛰어난 경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둘러 건너는 나루터이지 유람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오직 건너기에만 급하게 여기므로, 올라가 눈여겨 구경할 틈이 없게 된다.
임오년(壬午年) 가을에 철성(鐵城) 이공(李公)이 사명을 띠고 와서 우도(右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적에 여기에 와 머무르며 둘러보고 찬탄하다가, 벼랑 위로 올라가 마땅한 자리를 보게 되자,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사토(砂土)를 깎아내어 새로 정자를 세우고, 식파정(息波亭)이라 편액하니, 대개 경치 좋은 데다 정자를 지음으로써, 건너다니는 괴로움을 풀게 한 것이다.
순찰하는 여가에 반드시 와서 쉬되, 오기만 하면 며칠 밤씩 지내며 읊조리고, 돌아가기를 잊었으며, 또한 전 사람들의 초루시(草樓詩)에 차운(次韻)하여 그 뜻을 표시하였는데, 정자의 경치가 좋아 옛 초루에 비하면 십배 백배뿐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체대(遞代)되어 돌아와서 나에게 기(記)를 청하니, 내가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은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선 좋아하기를 싫어할 줄 몰랐는데, 어려서부터 개연(慨然)히 지조[志節]가 있어, 일찍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긴다’는 말을 사모하여, 언제나 스스로 외고 읊조리며 자신도 그와 같이 하기를 기대(期待)하였기 때문에, 그 문무의 재략(才略)과 중외(中外)에 나타난 공적이 우뚝이 빼어나서, 족히 범공(范公)에게 필적할 만하고 그 품은 마음도 범공과 같이 컸다.
대개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에 좋은 경치로서, 무릇 구경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즐거움이 모두 그 자신의 느낌에 관계되었으나, 범공의 근심과 즐김은 홀로 천하와 관계되었었고, 지금 공은 이 정자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같이 즐기고, 또한 그 근심을 물결이 자도록[息波] 하기에 미루어 갔으니, 이는 그 마음에 근심함과 즐거워함이 모두 남을 돌보기에 있은 것이고, 자신의 한 몸에는 관계되지 않은 것임을 볼 수 있다.《시경》에 이르기를 ‘마음속에 재덕(才德)이 갖추어 있으므로 밖에 나타나는 것도 그와 같다’ 하였으니, 뒷날 묘당(廟堂) 위의 보상(輔相) 자리에 있게 되면, 세상을 위해 근심하고 즐거워한 공효를, 송(宋) 나라의 범공(范公)만이 독차지하게 하지 않을 것을 또한 점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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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천신치향교기(利川新置鄕校記)
5.임정기(林亭記)
나의 동년(同年) 대사성(大司成) 단양(丹陽) 장 선생(張先生)이 능히 밝은 경술(經術)로 후학(後學)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유임(留任)하거나 천임(遷任)하거나 간에 언제나 국학(國學)의 장관이 되었었다.
그 풍도(風度)가 표연(飄然)하고 금회(襟懷)가 쇄연(灑然)하여 세속의 풍조를 초탈하였고, 비록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산림(山林)의 선비 태도가 있었다. 그 스승으로 말미암아 출신하여 대부(大夫)와 사(士)가 된 사람이 가는 곳마다 많았다.
영락(永樂) 원년 여름에 내가 지성균(知成均)으로 외람되이 그의 윗자리에 있게 되어, 그 경의(經義)를 강설(講說)하는 것을 들으니 의논이 자상하고 절당하여, 정조(精粗)와 본말(本末)을 빠짐 없이 지적해서 진술하되, 삼연(森然)히 법도가 있었으며, 나이 60이 넘었으나 그 강한 의지가 정연(挺然)하여 조금도 쇠하지 않았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죽주(竹州)는 우리 외가 상재(桑榟)인데, 우리 집이 대대로 살았습니다. 터가 있어 집을 지었고 전토가 있어 농사 지어 먹을 만하며, 소나무ㆍ밤나무ㆍ배나무ㆍ대추나무ㆍ뽕나무ㆍ산뽕나무가 집을 둘렀는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울창하게 숲을 이루었으며, 그 아래 네모지게 못을 파고 연을 심었습니다. 내가 장차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돌아가 늙으며, 무성한 숲의 맑은 그늘 아래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기 때문에, ‘임정’이라고 편액(扁額)했으니, 그 의의(意義)를 부연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 부자(夫子)의 말씀에 ‘사람의 도는 정사에 민감하고 땅의 도는 나무에 민감하다’고 하였는데, 대개 근본이 있는 것은 그 발달이 반드시 쉽게 됨을 말한 것입니다. 대저 땅의 도가 나무에 있어서, 그 뿌리를 심어 싹이 트게 되면, 피어나 자람이 빠르지 않으면서도 빨라서, 그야말로 소나 염소가 뜯어 먹거나 도끼와 자귀로 찍어내지 않으면 그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 날마다 달라지고 달마다 더 자라서, 두어 해가 못 되는 동안에 울창하게 우거져 숲을 이루며, 풍상(風霜)이 여러 번 바뀌고 세월이 오래될수록, 천장(千章)의 늙은 줄기가 성하게 하늘에 닿아 비록 천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니, 이는 근본이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덕을 심음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 마음을 조존(操存)하여 근본을 세우고 성정(性情)을 함양(涵養)하여, 가지를 퍼지게 하여 덕 쌓기를 심후(深厚)하게 하고 지속하기를 유구(悠久)하게 하면, 영화(英華)가 온몸에 나타나게 되고 자손들에게 여경(餘慶)이 미치고, 입언(立言 교훈)이 한없이 전해질 것이며, 만약 그것을 발전시켜 정사에 시행하면 또한 당세를 덕 보이고 후손들을 유복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니, 그늘이나 보고 세월을 보내면서 구차하게 현상만 유지하는 사람의 소위와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詩人《시경》의 시를 지은 사람)이 위(衛) 나라 문공(文公)을 찬미한 시에 ‘개암나무ㆍ밤나무ㆍ산유자나무ㆍ오동나무ㆍ가래나무ㆍ옻나무를 심었다’라고 했는데, 해설한 사람이 ‘나무를 심는 사람은 10년 뒤에나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빠른 공효를 바라지 않음이 이러한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렇게 편액하신 것도 또한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되었다고 하기에, 그대로 써서 기(記)로 하였다.
이해 가을 8월 초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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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영흥부 학교기(永興府學校記)
7.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五臺山西臺水精庵重創記)
강원도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크고 작기가 비슷하게 둘러섰으므로, 세상에서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중앙의 것이 지로(地爐), 동쪽 것이 만월(滿月), 남쪽 것이 기린(麒麟), 서쪽 것이 장령(長嶺)이고, 북쪽 것은 상왕(象王)이라 하여 드디어 다섯 가지의 성중(聖衆)이 늘 머물고 있다는 말이 있어 불교(佛敎)를 믿는 사람들이 굉장하게 떠들어대나, 우리 유가(儒家)에 있어서는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더 말하지 않는다.
서대(西臺) 밑에서 함천(檻泉 솟아나는 물)이 솟아나서, 빛깔과 맛이 보통 우물물보다 낫고 물의 무게도 또한 무거운데 우통수(于筒水)라고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가다 한강(漢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가 중령(中泠)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통수의 근원에 수정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옛날 신라 때 두 왕자(王子)가 이곳에 은둔하여 선(禪)을 닦아 도를 깨쳤기에, 지금도 중[衲子]으로서 증과(證果)를 닦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처하기를 즐겁게 여긴다. 임신년(壬申年) 가을에 불에 탔는데, 이때 조계종(曹溪宗)의 시 잘하는 중 나암 유공(懶菴游公)과 목암 영공(牧菴永公)이 모두 명리(明利)를 버리고 이 산에 들어왔다가, 암자의 서까래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서 측은하게 여겨 비탄(悲歎)하며 다시 세우려고 화소(化疏)를 가지고 곧 산을 나서 널리 권선(勸善)하므로, 시중(侍中) 철성(鐵城) 이공 임(李公琳) 및 그의 부인 홍씨(洪氏)와 중추(中樞) 고흥 유공(高興柳公) 및 그의 부인 이씨(李氏)와 여러 단가(檀家 시주하는 집)들이 이를 듣고서 모두 기뻐하며 각기 돈과 곡식을 시주하였다.
계유년 봄에 바야흐로 공사를 시작하게 되어, 다시 함천(檻泉) 옆 숲 밑에 가서 지형을 보니 매우 절승이므로, 곧 나무를 베고 그 지면(地面)을 깎아내니 옛날 주추가 그대로 있어 옛터가 완연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서로 경하(慶賀)하며 모두들 말하기를,
“아마 하늘이 화재를 내어 그 전 누추하던 것을 태워 버리고 더욱 좋게 짓도록 한 것이거나, 두 공(公)이 재생(再生)하여 옛터를 발견한 것이거나, 아니면 도안(道眼)이 갖추어져 저절로 옛사람들과 합치된 것이 아닌지. 이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일 것이다.”
하며, 곧 즐겁게 일에 나와 공사를 마치게 되었는데, 불당(佛堂)은 오량(五梁 보가 다섯 줄로 된 집)으로 다섯 칸이고 욕실(浴室)이 두 칸으로 되어, 그 규모와 제도가 그다지 별다르지 않은 것은, 간편함을 따른 것이었다. 나암이 또한 유공(柳公)과 함께 새로 미타(彌陀)와 팔대보살(八大菩薩)을 그려서 불당 중앙에 걸었고, 고동(古銅) 향로 및 정병(淨甁 물병)과 기구[什器]들을 모두 갖추었으며, 경찬회(慶讚會)를 이미 세 번이나 하였고, 수선(修禪)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머무르게 되니, 암자로서는 할 일을 다한 것이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앞으로 이 암자에 있는 사람들이, 신라의 두 왕자와 같이 득도(得道)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지. 언제나 청소[掃漑]를 잘하여 황폐(荒廢)하지 않도록 하되, 기우는 것은 붙잡아 세우고 썩는 것은 바꾸어서 두 공(公)의 뜻을 떨어뜨리지 않고 이 산과 함께 무궁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또한 화재를 만나 다시 숲이 되어 알 수 없게 될는지. 모두 기필할 수 없으니, 이는 다음 사람들의 책임에 달린 것이다.
나암(懶菴)이 나에게 와서 기(記)를 청하였으니, 대개 이것으로써 장래를 경계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나암과 도는 비록 다르나 서로 안 지가 오래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의 말을 써서 기(記)로 하였다. 나암은 세족(世族)으로서 부귀를 버리고 가사를 입었는데, 명성이 매우 높아 지금은 양가 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가 되었다 한다.
영락 2년 2월 16일
[주-D001] 중령(中泠) :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서북쪽의 양자강(揚子江) 속에 있는 샘. 강물과 함께 흐르면서도 이 물은 특히 섞이지 않고 찬맛을 그대로 지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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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법왕사 조사당기(法王寺祖師堂記)
9.금교역루기(金郊驛樓記)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명 나라의 신하가 되어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여, 해마다 닦는 직공(職貢)을 감히 조금이라도 어기지 않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사방 많은 나라 중에 오직 조선(朝鮮)이 가장 충순(忠順)하다 하여, 해마다 사신[使命]을 보내어 성교(聲敎 제왕의 교화)를 선양(宣揚)하여 관개(冠蓋 사신 행차)가 잇달아 앞뒤의 사신이 서로 바라보였으니, 상하(上下)의 관계가 회합하다고 하겠다.
금교역이 왕경(王京)에서 서북쪽으로 겨우 30리 거리에 있는데, 조사(朝使 중국 사신)가 올 때나 복명(復命)하러 갈 적에, 번번이 여기에서 자게 된다. 대개 사신이 올 적에는 왕이 반드시 미리 대신을 보내어 여기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백관을 거느리고 의위(儀衛)를 갖추어 교외(郊外)로 나가서 맞이하면, 사신도 또한 아침에 들어오고, 갈 적에는 왕이 교외에다 공장(供帳)을 치고 전송하며, 또 대신을 보내어 위로하여 전송하므로, 사신이 반드시 늦게야 오게 되므로 일찍이 여기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고, 음식 대접하는 비용도 다른 역참에 비하여 몇 곱절이나 된다.
전부터 객관(客館)이 있었으나 좁고 누추하며 낮고 습하여, 찌는 듯한 더위와 장맛비에는 답답증이 더욱 심하여 바람을 쏘일 곳이 없으므로 오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여겼다. 영락(永樂) 2년 가을 8월에, 나의 벗 대령(大寧) 최군 자고(崔君子固)가 문학(文學)과 재간이 있어 풍해도찰방 겸팔참정역사(豐海道察訪兼八站程驛使)로 뽑혀 팔참을 순시(巡視)하게 되었는데, 일에 임한 지 한 달 만에 섶[薪]과 꼴[蒭] 따위가 모여 쌓이고, 무릇 공비(供費)에 수응(酬應)할 것이 갖춰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말하기를,
“이 역참은 왕경(王京)과 가장 가깝고 사신 행차가 오갈 때 반드시 쉬는 곳인데, 마루와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국가에서 중국 사신을 높이는 뜻에 맞지 않으니, 어찌 옛것을 헐고 새로 세우지 않겠는가.”
하고, 곧 나라에 계문(啓聞)하여 결정을 얻었었다. 이리하여 9월에 일을 시작하여 재목을 구해 들이고 기와를 굽되, 백성의 힘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농사철이 되기 전에 공사를 이루게 되었다. 중앙에 당(堂)을 높이 세우고 좌우에 방[室]을 붙였으며, 바로 왼편 방 앞에 누각(樓閣) 세 칸을 세웠는데, 크고 높게 트였으나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그 밑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한서(寒署)에 쓰기 편리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2월 초에 끝났는데, 그해 여름에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이 누각이 비록 강이나 바다를 조망(眺望)할 구경거리는 없지만, 산과 구릉이 고리처럼 둘렀고 들과 언덕이 이리저리 잇달아, 갤 때면 좋고 비 올 적엔 기이한데, 아침 놀과 저녁 연기가 한없이 변하는 모양은 소인(騷人 문인)들에게 읊조리는 흥취를 제공할 만하고, 난간에 가득한 맑은 바람은 말발굽에서 일던 더러운 먼지를 씻을 만하고, 발[簾] 사이로 비치는 밝은 달은 손님 대접하는 자리의 아취(雅趣)를 돋울 만하니, 이는 기(記)가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자네가 한 일이 공은 매우 큰데 말은 매우 간략하니, 참 겸손하도다. 대저 누각(樓閣)을 세우는 것이 왕정(王政)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마는, 정사의 잘잘못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전(郵傳)을 두어 명령을 전달하고, 여사(旅舍)를 설치하여 나그네를 기숙(寄宿)하게 함은, 삼대(三代) 때의 정사에서도 조심해서 하던 일이다. 그러므로 옛날 주(周) 나라 단자(單子)가 초(楚) 나라에 사신 가면서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손님이 와도 사관(舍館)을 지정해 주지 않아 나그네들이 기숙할 데가 없는 것을 보고, 드디어 진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우전은 사명(使命)을 접대하는 것이고, 원관(院館)은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이니 매우 조심해서 하는 일인데, 그대가 능히 국가에서 위임(委任)한 뜻을 체득하여, 먼저 그 위적(委積 두고 쓸 것)을 많이 쌓은 다음 사관을 개수(改修)하였고, 올라가 구경하며 근심을 풀 곳까지 마련하여 그들(사신)의 마음이 위로되게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조사(朝使)로 오는 사람들이 더욱 우리나라의 중국 섬기는 정성과 정사 잘 해 감을 알게 될 것이며, 나라에 사람이 있어서 다스리는 정사가 길이 태평을 누리게 될 것이니, 이야말로 큰 공이 아니겠는가. 올라가 구경하며 읊조림을 무어 말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최군(崔君)은 세주(世冑 대대로 국록 먹는 가문)로서 과거(科擧)에 장원으로 뽑혀 대간(臺諫)을 지내며 일찍이 조정에 현달하였다가 지금은 역정사(驛程使)로 좌천되었으나, 자신이 낮게 여기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에 임하고 겸손하게 몸을 갖는다. 이와 같이 재질이 크고 역량이 넓으니, 앞날 크게 쓰인다면 나랏일에 공이 있음을 헤아릴 수나 있으랴.
영락 3년 여름 6월
[주-D001] 직공(職貢) :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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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남곡기(南谷記) 장제(張躋)
11.월강기(月江記)
근세(近世)의 중[浮屠] 중에 가장 저명한 사람은 나옹(懶翁)인데, 호가 강월헌(江月軒)이니, 대개 형상이 나타나 천기(天機)에 응(應)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로부터 그의 도(道)를 존숭하는 사람들이 거개 물[水]과 달[月]을 취하여 스스로 호(號)하되, 작은 데서 취한 것으론 계(溪)ㆍ간(澗), 큰 데서 취한 것으론 호(湖)ㆍ해(海)인데, 물은 큰 것 작은 것이 있으나 달은 다름이 없고, 사람은 지혜스럽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지만 본성(本性)만은 선(善)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니, 비유(比喩)하기를 잘 했다고 하겠다.
지금 보경(寶鏡)이 또한 호를 ‘월강’이라 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나옹(懶翁)의 호를 따다가 거꾸로 맞춘 것이다. 대저 강이나 달을, 나옹이 어찌 사유(私有)할 수 있는 것이랴.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어서 눈이 있는 것이면 다 볼 수 있고, 강은 땅에 있는 것이어서 입 달린 것이면 다 마실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그 나옹이 되게 된 까닭을 찾는다면 그 자신에게 있고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닌데, 나옹이 어찌 사유(私有)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가 자호(自號)한 것을 가져다가 나의 호를 삼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호칭(互稱 하나는 강월(江月) 하나는 월강(月江)임을 이름이다)되어 저절로 체(體)와 용(用)이 분간되었으니, 강월(江月)이라 하면, 작용에 따라 그 본체에 소원(溯源)하는 것이고, 월강(月江)이라 하면 본체로 말미암아 그 작용에 달하는 것인데, 본체와 작용이 그 근본이 같고 위와 아래가 간격이 없는 것이니, 사(師)가 이를 두고 체득(體得)하고 성찰(省察)하되, 언제나 그 마음의 본체가 담연(淡然)히 맑고 밝게 함으로써, 사물에 응하는 작용이 감촉(感觸)대로 하여도 틀리지 않기를, 달이 강에 비치듯이 하고 강에 달이 뜨듯이 한다면, 비록 그가 ‘강월’이라 하여도 되고 비록 그가 ‘월강’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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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상주 풍영루기(尙州風詠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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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4권 / 유몽인(柳夢寅)
기문〔記〕
1감로정기〔甘露亭記〕
2요영정기〔耀榮亭記〕
3자오와기〔自娛窩記〕
4분국기〔盆菊記〕
5치재기〔恥齋記〕
6만향당기〔晩香堂記〕
7임실의 동헌 중수기〔任實東軒重修記〕
8연경으로 가는 길에 유람할 만한 곳을 기록하여 동지부사로 떠나는 참지 윤 방 가회를 전송하다〔燕京沿路可遊者記送冬至副使尹 昉 可晦參知〕
9순천향교 중수기〔順天鄕校重修記〕
10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압운〔贈金書狀朝天記 押韻〕
11양진정기〔養眞亭記〕
12쌍암기〔雙巖記〕
13월선정기〔月先亭記〕
14사계당기〔沙溪堂記〕
15재간당기〔在澗堂記〕
16능성의 만향정기〔綾城晩香亭記〕
17강선루기〔降仙樓記〕
18이양당기〔二養堂記〕
19조 수재 서재기〔趙秀才書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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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감로정기〔甘露亭記〕
내가 예전에 듣건대 상서로운 징조가 내리는 것은 반드시 감응한 바가 있어서이니 경전에 나타난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중세에 이러한 일이 바람이 일듯 일어나면서부터 유자(儒者)는 깊이 경계하였다. 옛것들을 전적에서 살펴보면 영지(靈芝), 예천(醴泉), 신작(神雀)이라는 것들을 나는 본디 믿지 않는다.
만력(萬曆) 39년(1611, 광해군3)에 나는 관직을 떠나 고흥(高興)으로 돌아왔다. 고흥은 바로 내 성씨의 본관이니 시조께서 처음으로 일어나신 지 이제 4백 년이 되었고 선대의 묘와 후손들이 이곳에 있다.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내가 이미 세상에 쓸모가 없어졌기에 이 곳 산과 바다의 승경을 즐겨 도구(菟裘)처럼 은거할 곳을 만들 생각을 하였다. 이듬해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쉽게 이름을 짓지 못하였다. 이해 4월 정원에 있는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잎사귀에 이슬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침햇살에 빛이 번뜩이고 사람이 손을 대면 모두 손에 달라붙었다. 모습은 쌀로 빚은 진한 청주(淸酒)와 같고 맛은 꿀이나 엿처럼 달고 시원하였다. 집안에 있는 여자애가 나뭇가지를 끌어 잡고 혀로 핥아보더니 그것을 가리켜 ‘꿀비[蜜雨]’라고 하였다. 연로하신 분께 물어보아도 역시 일찍이 보았거나 기억하는 분이 없었다. 이날 나는 마을에 있는 친척과 함께 바다 밖 십 리에서 준치를 낚시하려고 언덕굽이에 배를 대고 그늘로 가서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또 산에 가득한 초목들의 잎사귀 위에 지난번처럼 이슬이 흠치르르하게 내린 흔적을 보았는데 그 달콤한 맛이 또한 똑같았다. 나는 매우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길,
“이것이야말로 옛날의 이른바 감로(甘露)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 황충(蝗蟲)이 생기는 마을에 봉황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 일이 많아 나는 별장을 떠나 조정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은명(恩命)을 받아 가선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조정에 돌아가서는 다시 가의대부에 가자되고 갈충진성 위성공신(竭忠盡誠衛聖功臣) 영양군(瀛陽君)에 봉작되었다. 조카인 유숙(柳潚) 또한 분충병의형난(奮忠秉義亨難) 공신의 훈적에 들어 품계가 한 등급 올라 통정이 되었고 우리 형님 또한 이 덕분에 4품이 가자되었다. 우리 아이 유약(柳瀹)은 적장손(嫡長孫)이라 6품의 봉록을 초과해서 받고 얼마 후에 또 알성시(謁聖試)의 합격자 명단에 다섯 번째로 뽑혔다. 유숙의 아이 우화(于墷) 또한 9품의 반열에 들었다. 금년 2월에는 부친께서 자헌대부 이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어 군(君)의 봉호를 받으셨다.
아!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움은 한 집안에서 독차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고흥에선 유씨(柳氏)가 큰 성씨이고 선령(先靈)이 노니는 곳이다. 마침 내가 여기에 있을 때 이전에 없었던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고 또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우리 집안에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예수(禮數)가 있었으니, 하늘이 징조를 보여서 우리 유씨를 위해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하늘에 계시는 선령이 묵묵히 도와줘서 그러한 것인가. 혹여 그러할 수 있는 이치는 사전에 묵묵히 부합하여 뭇사람들이 눈으로 모두 목도한다면 더 이상 허탄한 부류가 아닌 것이 분명함을 나는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을 감로정(甘露亭)이라 짓는다.
정자는 호산(虎山)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큰 바다가 북쪽을 지나간다. 여름이면 남풍이 바다의 습한 기운을 몰아 북쪽으로 가고 겨울이면 북풍이 바다의 습한 기운을 거두고 구름과 안개를 몰아낸다. 그래서 바다가 항상 맑고 습한 기운이 없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 동쪽에 있는 수덕산(壽德山)은 기이한 바위가 많고 소나무와 참나무 등 온갖 수목도 많다. 서쪽에 있는 비파도(琵琶島)는 모습이 비파처럼 생겼다. 큰 바다 쪽의 해안에는 멀리 푸른빛의 산이 있으니 곧 보성산(寶城山), 장흥산(長興山) 등 여러 산들이다. 길게 읍하는 것처럼 바다의 좌우를 향해 이어진 것은 오른쪽이 섬무도(銛鉧島)이고 왼쪽이 목마장(牧馬塲)인 도양도(道陽島)이다. 정자 아래로는 수십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으니 모두 유씨 집안으로 대나무와 매화, 귤나무 등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정자는 조수가 드나드는 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못에는 높이 솟은 대나무 수천 줄기가 있는데 노송 수십 그루가 그곳을 감싸고 있어서 아래에서 바라보면 인가(人家)가 보이지 않는다. 어책(魚柵)이 오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데 조수에 따라 출몰하여 마을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만력 40년(1612) 5월에 정자가 처음으로 완성되었고 근래에 나무껍질로 덮은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였다.
만력 42년 갑인년(1614)에 고흥의 후인(後人) 가의대부 한성좌윤 유몽인(柳夢寅)이 기문을 쓰다.
주-D001] 감로정기 :
이 글은 저자가 직접 세운 감로정에 대한 기문이다. 저자는 1611년(광해군3) 벼슬을 그만두고 고흥(高興)으로 귀향한 다음 이듬해 감로정을 세우고, 1614년 이 기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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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영정기〔耀榮亭記〕
3.자오와기〔自娛窩記〕
내 일찍이 퇴지(退之)의 글을 읽어보니, “황량한 곳에 곤궁하게 살다보니 초목이 무성하고 나가려 해도 나귀가 없어서 이 때문에 사람들과 왕래를 끊은 채 방 안에서 스스로 즐길 수 있었다.” 라는 말이 있었다. 퇴지는 곤궁한 자로 남들이 즐기지 않는 것을 즐기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나는 이 뜻을 깊이 생각하여 내 원고의 이름을 《자오편(自娛編)》이라 하였다. 강가의 별장에서 머문 3년 동안 더욱 문장에 힘써 지은 시문이 대략 5, 6백 편이고 읽은 책 또한 수십 권이었는데 그 즐거움을 숨기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신졸수(申拙叟)가 십 리 밖에 있는 나를 방문하였고 얼마 안 되어 편지를 보내 자기 집의 기문을 청하였는데 또한 이름을 자오와(自娛窩)라고 하였다. 어쩌면 이렇게 졸수(拙叟)는 내가 예전에 즐거워했던 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아 도리어 나로 하여금 기문을 쓰게 하는지, 나와 졸수는 곤궁하게 늙어가고 퇴지를 사모하는 것이 도모하지 않아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해보니 대나무와 과일나무가 몇 이랑의 동산을 뒤덮었고 뜰 안에는 풀들이 한 자나 자라나 있으며 이끼가 길에 가득하여 다니기에 미끄러웠다. 말은 돌려보내 거름이나 나르게 하고 들보에 수레를 달아놓고 판자문을 닫은 채 종일 자물쇠를 걸어두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뼉을 치고 무릎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랫소리가 금석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책 상자를 열고는 내게 명현들의 기문과 명문 수십 편, 도서(圖書) 한 책에 대해 주묵(朱墨)으로 수정한 것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노인이 직접 모은 것이었다. 《예기(禮記)》, 《의례(儀禮)》, 《통전(通典)》, 《가례의절(家禮儀節)》 등과 같은 예서(禮書)를 섭렵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전주(箋註)를 내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여 집안의 후학들로 하여금 배우지 않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집의 한 장쯤 되는 강석(講席) 안에서 공손하게 대답하며 배움을 따르는 것은 모두 삼천 삼백의 예학(禮學)이어서 성대하게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 세상에서 이 도를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세상 사람이 크게 즐거워하는 것에는 큰 근심이 따른다. 대부분 외부에서 즐기는 이목과 신체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삼아 그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이 벌판을 태울 듯하니, 하루아침에 숭산(崇山)과 태산(泰山) 같은 화가 들이닥친다면 쥐가 뿔로 지붕을 뚫고 참새가 어금니로 지붕을 뚫고 도망치듯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지금 졸수의 문밖은 큰 길이 뚫려 있어 벼슬살이하며 영리를 쫓는 자들이 밤낮없이 소란스럽게 하는데도 졸수는 홀로 그 곤궁함을 즐기며 서적에 의지하고 있으니, 나의 뜰아래가 바로 도랑이어서 백관(百官)의 거마들이 가득하여 쌀알 같은 먹이를 다투느라 떠들썩한데도 나는 홀로 그 곤궁함을 즐기며 백구(白鷗)와 더불어 세상일을 잊은 것과 진정 똑같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즐거워하는 바를 즐기니 서로 바라보며 자연스레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아는 자만이 이 즐거움에 대해서 함께 말할 수 있다. 나는 노인이 내게 기문을 요구한 것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마침내 기문을 쓴다.
천계(天啓) 원년(1621, 광해군13) 6월에 고흥(高興) 유몽인(柳夢寅)이 삼가 기문을 쓰다.
[주-D001] 자오와기 :
이 글은 1621년(광해군13)에 저자가 신식(申湜, 1551~1623)이 세운 자오와(自娛窩)에 대해 쓴 기문이다. 신식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지(叔止),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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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국기〔盆菊記〕
5.치재기〔恥齋記〕
보통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흔쾌히 만족하지 못하면 곧 부끄러워한다. 사람이 성인이 아니니 누군들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워할 만한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 부끄러움이 더욱 심할 것이니, 만약 부끄러움을 알아서 고칠 수 있다면 끝내는 부끄러움이 없는 데에 이를 수 있다. 나의 벗 조대이(曺大而) 공은 약관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서 질병에 걸렸다. 병중에 《심경(心經)》을 읽다가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이른바 제 몸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며 스스로 경계하여 병을 고치는 좋은 약으로 삼았다. 이어서 그것을 자신의 당호(堂號)로 삼았다. 대개 이천은 타고난 기질은 약했는데 30세에 점점 성해졌고 4, 50세에 비로소 완전해져서 70세를 넘어서도 근력이 젊었을 때보다 줄어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숙(張思叔 장역(張繹))이 이천이 타고난 기질이 약하다고 여겨 후하게 보생(保生)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 의심하자, 이천이 “진실로 욕심을 억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이지 보생하는 말단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으니, 참으로 경중과 대소를 잘 알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있으면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니 비록 얼굴이 붉어지고 말이 막히더라도 오히려 깊이 숨긴 채 남들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그런데 지금 대이공은 홀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또 글씨로 써서 편액으로 걸어 놓았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는 데서 연유하였다가 끝내는 양생(養生)과 양심(養心)을 깨달아 양쪽에서 그 요체를 터득하여 이천이 부끄러워하는 바를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삼았으니, 그 부끄러움은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천의 이른바 제 몸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이란, 주색(酒色)처럼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자들이 모두 경계할 수 있는 만큼 젊은 시절 스스로 부끄러움에 일삼을 것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의 욕심은 무엇인들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부끄러워할 만한 것에는 또 주색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명리에 대해 자신의 욕심을 따르다가 끝내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로다.
오호라! 장사숙은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가 근본으로 돌아가는 이천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견해가 부끄러워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이공은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가 장사숙이 이천에게서 의심을 풀게 된 것을 통해 자신의 질병이 부끄러워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가 대이공이 ‘치(恥)’를 자신의 당호로 삼는 것을 통해, 이천이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장사숙이 부끄러움을 배우며 대이공이 부끄러움을 사모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군자의 부끄러움이야말로 모두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다. 이천은 치심(治心)을 통해 보생을 이루었고, 대이공은 보생을 통해 치심을 터득하여 또한 이천이 부끄러워하지 못한 바를 부끄러워하였다. 나는 이를 통해, 대이공이 능히 스스로 마음에 흔쾌히 만족한 것이 부끄러움이 있는 데서 연유하여 끝내 부끄러움이 없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겠노라.
[주-D001] 치재기 :
이 글은 저자가 조탁(曺倬, 1552~1621)이 살고 있는 치재에 대해 쓴 기문이다. 조탁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ㆍ치재(恥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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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향당기〔晩香堂記〕
7.임실의 동헌 중수기〔任實東軒重修記〕
대장괘(大壯卦)에서 뜻을 취한 이래로 건물을 지어 조습(燥濕)을 피하게 되었다. 건물의 제도가 날로 번다해져 구연(九筵)부터 시작하여 점차 만 명을 수용하고, 흙으로 만든 세 층의 섬돌부터 시작하여 점차 늘어나 왼쪽에는 척(墄)을 내고 오른쪽에는 평평하게 하며 삼헌(三軒)과 구급(九級)을 만들었으며, 지붕을 인 띠 풀과 서까래만 있던 것이 바뀌어 원앙(䲶鴦)과 용린(龍鱗)을 새긴 겹겹의 굽은 들보와 화려한 서까래로 장식하였다. 마침내 화려함이 과하여 사치스러워지고 사치함이 과하여 피폐해졌다. 나무가 성하면 불이 생겨나고 불이 다 타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천하의 지극한 이치이니, 이는 옛날부터 반드시 징험된 일이다. 그러므로 2백 년 동안 태평했던 우리나라의 높고 낮은 성대한 궁실에서부터 산꼭대기에 세우거나 골짜기에 걸쳐서 지은 것, 모든 도읍과 산수에 이르기까지 건물들이 꿩이 날아가는 듯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 웅장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운수현(雲水縣 임실)은 호남 전체에서 길목이 되는데 왕명을 받들어 공무에 나갈 때 사자(使者)가 말을 타고 오가는 갈림길이고 수레를 달려 지나다니는 곳이다. 이 고을을 다스린 자 가운데 일을 처리하고 정사를 행하는 것이 훌륭한 자가 있었는데 그 재능을 과시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 그 지역에서 가장 뛰어나는 데에 힘을 썼다. 기둥과 마룻대를 높이 세우고 붉고 희게 단장하여 꾸며서 빈객들로 하여금 제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 번 병란을 당해 쓸쓸히 잿더미만 남은 옛터가 되어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와 동년(同年)인 김일숙(金一叔)이 운수(雲水)를 다스린 4년 동안에 고을에는 조세와 정역을 포탈하거나 정사를 해치는 교활한 아전들의 폐해가 없어져 온갖 정사가 잘 이루어졌다. 재화를 헤아리고 경중을 따져서 중폐(重幣)로 경폐(輕幣)를 균형 맞추고 경폐로 중폐를 균형 맞추어 오민(五民)의 살림이 넉넉해졌다. 날로달로 새기고 다듬으며 이쪽을 깎아내고 저쪽을 긁어내어 일 년이 되자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의 제도가 이루어졌다. 층층의 낭떠러지를 깎아내어 단을 쌓고 앞 뜰을 없애 못을 만들었으며 둘레의 담장을 따라 계단을 만들고 산꽃, 들꽃, 대나무, 연꽃 등을 줄지어 심어 수풀을 만들어 예전의 모습보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럽게 만들지 않았다. 공사가 끝나자 편지를 보내 내게 부탁하기를,
“오랜 객지 생활에 돌아갈 생각뿐이라 상소를 올려 병을 핑계로 관직을 떠날까하네. 그대는 글 솜씨를 아끼지 말고 동갑 친구를 위해 글을 써주게나.”
하였다. 나는 부탁하는 것이 간절하여 이 집에서 묵어보았는데 새로 만든 건물을 보니 아름다웠다. 또 이웃 고을에 부임해 있는 터라 우리 형의 정사를 물어보아도 훌륭하기에 기문을 쓰노라.
[주-D001] 임실의 동헌 중수기 :
이 글은 임실 현감(任實縣監) 김두남(金斗南)이 중수한 동헌에 대해 쓴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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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연경으로 가는 길에 유람할 만한 곳을 기록하여 동지부사로 떠나는 참지 윤 방 가회를 전송하다〔燕京沿路可遊者記送冬至副使尹 昉 可晦參知〕
9.순천향교 중수기〔順天鄕校重修記〕
승평 부사(昇平府使) 유영순(柳永詢)이 관직을 떠나 돌아가자 승평(昇平 순천)의 유사(儒士)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기를,
“우리 부사는 재직할 때 사문(斯文)에 힘써서 향교(鄕校)를 중수하여 성인의 영령이 의탁하게 하였고 유자(儒者)들이 또한 귀의하게 만들었다. 우리처럼 변방의 비루한 선비들이 이 덕분에 모두 학문을 좇고 선(善)을 따르게 되었으니, 한 마디 말로 그 공적을 기록하지 않아 후세에 민멸되게 해서는 안 된다. 용성 부사(龍城府使) 유몽인(柳夢寅)이 문장이 뛰어나다고 하니 그가 지은 글은 필시 한 시대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침 체직되어 바닷가 고을 고흥(高興)으로 돌아가 살고 있으니 기문을 부탁하여 들보에 걸어 놓는다면 지금과 후대에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고흥으로 달려와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두려운 마음에 사양하며 말하기를,
“아! 저 향교라는 것은 부자(夫子)를 모시는 사당이니 내 어찌 우스꽝스러운 말로 더럽힐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문장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다 해를 입은 게 여러 번이다. 이제는 바다 끝에서 재주를 숨긴 채 생애를 마칠까하니 그대들은 돌아가시게.”
하였다. 두 번 세 번 사양해도 허락되지 않기에 삼가 그 전말을 물어 서술하노라.
승평부(昇平府)에 예전에 향교가 있었으니 성에서 동쪽으로 4리쯤 되는 산기슭에 있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兵火)로 인해 모두 타버리고 난리가 끝나자 곧 성의 북쪽에 창건하였다. 그런데 지세가 한 쪽으로 기울어 있고 또 대로를 끼고 있어 시끄러우니 우리 성인의 영령을 편안히 모시기엔 매우 부적합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여러 유생들이 성의 서쪽 산 아래 후미지고 조요한 곳을 골라 성묘(聖廟)를 세웠지만 미처 보수하진 못하였다. 이듬해 경술년(1610) 유공(柳公)이 부임하여 감개하여 다른 일을 돌아 볼 겨를도 없이 훌륭한 장인들을 모으고 좋은 재목을 실어와 벽을 세우고 문을 만들고 붉은색과 흰색으로 단장하였다. 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만들어 날개처럼 벌여 세우고 담장을 두르고 빗장을 단단히 채웠는데 일 년도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이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전계(轉啓)하자 향과 축문이 내려왔다. 신해년(1611) 봄 상정일(上丁日)에 선성현(先聖贒)의 위패를 옮겨 안치하고 또 오현신(五賢臣)의 위패를 새로 봉안하여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고 석채례(釋菜禮 석전제(釋奠祭))를 지냈다. 보궤(簠簋), 변두(籩豆), 희준(犧尊), 상뢰(象罍) 등의 예기(禮器)들을 모두 정비하여 사당의 동북쪽 모퉁이에다 창고를 지어 보관해두고 또 그 옆에 전사청(典祀廳)을 지어 희생(犧牲)을 살피고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곳으로 삼았다. 신문(神門)의 바깥으로는 땅을 닦아 평평하게 만들어 세 개의 들보를 이어 명륜당(明倫堂)을 짓고 각각 세 개의 기둥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지었다. 서책 몇 권을 모아 강독(講讀) 자료로 삼고 쌀 몇 섬[斛]과 베 몇 단(段)으로 이자(利子)를 불리고 속전(贖錢) 대신에 바친 노비 몇 명을 시켜 여러 선비들의 음식을 공급하게 하여 공사를 마쳤다.
오호라! 승평의 땅은 바닷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가 쉽사리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유공은 사문(斯文)의 인물이다. 다스림에 있어 수선(首善)을 정사의 급선무로 삼아 곤란한 상황에도 오히려 거사(擧事)가 훌륭하니 그 근본을 아는 것이다. 유공이 떠난 뒤에 승평의 선비들이 그의 공적을 추모하고 기려서 후대에 드러내었으니 그 옛 일을 잊지 않은 것이다. 유공은 그 근본을 알고 여러 선비들은 그 옛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 훗날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듯 학문과 덕이 높은 유자들이 흥기하여 사문(斯文)을 보위하고 태평성대를 빛낼 것임을 나는 알겠노라. 이 어찌 민월(閩越)의 구양첨(歐陽詹)이 상곤(常袞)으로 인해 진사(進士)가 된 것에 그치고 말겠는가. 내가 마침 이 고을 근방에 살아서 유공의 정사를 익히 들었고 또 여러 선비들의 간청을 존중하여 기문을 쓰노라.
[주-D001] 순천향교 중수기 :
이 글은 순천 부사(順天府使) 유영순(柳永詢)이 1611년(광해군3) 중수한 향교에 대해 쓴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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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압운〔贈金書狀朝天記 押韻〕
11.양진정기〔養眞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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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학천(鶴泉) 옹은 시인이다. 약관의 나이 때부터 시를 전공하여 세상만사는 제쳐두고 시에만 전념하였다. 나는 학천과 오랫동안 한 마을에 살았는데 백수가 되어도 처음처럼 친하게 지냈다. 일찍이 그를 면려하며 말하기를,
“시는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일이네. 그대는 어째서 곤궁함을 피하지 않고 시를 일삼아 스스로 고생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학천이 말하기를,
“시가 어찌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겠는가. 나는 본래 시에 곤궁한 사람이네. 시는 잘못을 징계하고 선(善)을 계발하는 것이니 참된 성정(性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네. 나는 어릴 적에 성현의 글을 읽으며 크게는 세상에 배운 것을 펼치고 작게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를 영예롭게 만들고자 했지만 늙도록 이룬 것이 없다네. 차라리 농부로 살면서 경서(經書)를 몸에 지니고 김을 맬지언정 끝내 남에게 꼬리를 치며 동정을 구하는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네. 그래서 정자 하나를 지어 편액을 ‘양진(養眞)’이라고 할까하니 이는 도연명(陶淵明)의 ‘초라한 집에서 참됨을 기르니 거의 스스로 이름을 잘 보존하겠네.’라는 시구의 뜻에서 취한 것이네.”
하였다.
그 후에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 학천은 담박하게 생활하면서 작은 정자를 만들고는 그 이름을 ‘양진’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시가 어찌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겠는가. 나는 본래 시에 곤궁한 사람이네. 시는 잘못을 징계하고 선을 계발하는 것이니 참된 성정에서 벗어나지 않지. 자신은 어릴 적에 성현의 글을 읽으며 크게는 세상에 배운 것을 펼치고 작게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를 영예롭게 만들고자 했지만 늙도록 이룬 것이 없어 차라리 농부로 살면서 경서를 몸에 지니고 김을 맬지언정 끝내 남에게 꼬리를 치며 동정을 구하지는 않았네. 그래서 정자 하나를 지어 편액을 양진이라고 했으니 이는 도연명의 「초라한 집에서 참됨을 기르니 거의 스스로 이름을 잘 보존하겠네.」라는 시구의 뜻에서 취한 것이네.’라고 하더니 그렇게 되었구나. 아! 학천 옹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니 곤궁함 또한 즐거움이구나. 강산(江山), 풍월(風月), 운로(雲露) 따위나 읊조리는 자가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참됨을 길러 스스로 이름을 잘 드러내어 세상에 구애받지 않아야 할 뿐이네.”
하였다. 마침내 이를 써서 기문으로 삼노라.
주-D001] 양진정기 :
이 글은 성여학(成汝學, 1557~?)이 세운 양진정에 대해 쓴 기문이다. 성여학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학안(學顔), 호는 학천(鶴泉)이다. 시에 재능이 있었으나 평생 불우하여 시학교관, 조지서 별좌 등 한미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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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쌍암기〔雙巖記〕
13.월선정기〔月先亭記〕
탄은(灘隱)은 멋스럽고 풍치 있는 당세의 아름다운 공자인데 그의 시와 그림은 천하의 으뜸이다. 나는 그의 시에 평하기를,
“소리가 있는 그림이다.”
라 하였고, 그의 그림에 평하기를,
“소리가 없는 시이다.”
라 하였으니, 이는 나의 사적인 말이 아니라 천하의 공론이다.
일찍이 〈삼청첩(三淸帖)〉을 지었는데 간이(簡易 최립(崔岦))가 서문을 쓰고 석봉(石峯 한호(韓濩))이 글씨를 써서 한 시대의 보배가 되었다. 다만 이 정자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찬미한 글이 없으니 내 어찌 쉽게 기문을 쓸 수 있겠는가. 무릇 소리가 있는 그림과 소리가 없는 시를 가지고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거처하니 필시 하늘이 만들고 땅이 보관해두었다가 적당한 사람에게 남겨준 것이리라.
내가 보건대, 월선정(月先亭)은 공산(公山 공주)의 만사음(萬舍陰)에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산(鷄龍山)이 누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니산(尼山)이 두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계룡산의 한 줄기가 멀리서 뻗어와 우뚝 서 있으니, 마치 조물주가 몰래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울타리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이어져 있으며 뜰에는 온갖 초목이 늘어서 있다. 봄꽃이 활짝 필 때면 붉고 흰 꽃들이 서로 비추고, 여름날이 길 때면 구름과 노을의 형태가 변하며, 높은 바람이 불고 깨끗한 서리가 내릴 때면 온갖 수풀이 비단처럼 펼쳐지고, 얼음과 눈이 아로새겨질 때면 수천 봉우리가 옥처럼 서 있다. 이는 본디 이 정자의 사계절 경치로 소리가 있는 그림과 소리가 없는 시에 도움을 주었을 터인데 유독 달이 먼저 떠오른다고[月先] 편액을 단 것은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정자의 주인은 예악(禮樂)을 닦은 하간왕(河間王)이나 강호(江湖)에 있으면서 궁궐을 그리워한 자모(子牟)와 같은 사람이다. 부귀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종신토록 녹을 받아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임금을 연모하는 정성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가히 지내고 홀로 거처하여 산수 사이에서 마음대로 노닐고 있으니 장차 세상을 피해 은거하여 번민하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은 아직 식지 않고 천 리나 떨어진 궁궐을 늘 생각하여, 정자에서 소요할 적에 밝은 달이 가장 먼저 비추는 것을 마치 임금의 안색을 보는 것처럼 유쾌하게 바라보니 그 심정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뜰 앞에서 달에 절하고 금(琴) 한 곡조 연주하여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는 이에 술잔을 들고 달을 바라보며 노래하기를,
저 달이 떠오르는 것은 / 如月升兮
우리나라가 모든 나라 중 가장 먼저로다 / 我東方先萬國兮
맑은 달을 보며 / 見月之淸兮
외로운 신하는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도다 / 獨孤臣同休戚兮
밝은 달이여, 밝은 달이여 / 明月兮明月兮
비록 변화하고 순환하지만 / 雖有盈虗消息兮
만고토록 오늘과 같구나 / 亘萬古如今日兮
하였다. 광산(光山) 김 아무개가 그 노래를 듣고서 아름답게 여기고는 그 뜻에 화답하여 응수하였다.
왕손이여, 왕손이여 / 王孫兮王孫兮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가 / 胡爲乎不歸
강의 풀은 무성하고 / 江草兮萋萋
산의 달은 밝고 밝구나 / 山月兮輝輝
임금의 성덕을 노래하고 읊고 / 歌詠兮聖德
태평성대를 그림으로 그리는구나 / 圖畫兮太平
나의 수레바퀴에 기름칠하고 나의 말에 꼴을 먹여 / 脂吾車兮秣吾馬
그대와 함께 휴명한 임금을 떠받드리 / 與子共載兮休明
노래가 끝나자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어, 서로 마음을 드러내며 이 정자에서 달빛에 함께 취하였다. 아! 이 정자가 없었다면 나의 광언(狂言)을 펼칠 길이 없으리. 이를 기문으로 삼노라.
[주-D001] 월선정기 :
이 글은 이정(李霆, 1554~1626)이 공주(公州)에 세운 월선정(月先亭)에 대해 쓴 기문이다. 이정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다.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에 봉해졌고,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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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사계당기〔沙溪堂記〕
15.재간당기〔在澗堂記〕
재간당(在澗堂)이 두류산(頭流山) 서쪽 기슭에 있으니 진사(進士) 김화(金澕)가 살고 있는데, 그는 처사(處士)이다. 승평 부사 유순지(柳詢之 유영순(柳永詢)의 자)는 처사의 외속(外屬)인데, 선영이 그 기슭에 있어 성묘를 마치고는 나를 재간당(在澗堂)으로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내가 막 용성(龍城 남원)에 부임한지라 수령의 봄날 순행이 있기 전에 아름다운 산수 유람을 위해서 먼저 가보았다. 살고 있는 곳을 살펴보니 풍곡(風谷)이란 골짜기가 목동(木洞) 상유(上游)에 있었다. 골짜기에는 절이 있고 절 아래에는 샘물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산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또 높고 가파른 바위들이 총총히 종횡으로 늘어서 있는데, 샘물이 그 위로 넘어가고 그 아래로 흘러가 콸콸 쏟아져 깊은 연못을 이룬다. 연못의 남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단풍나무, 소나무, 감나무, 밤나무, 진달래, 철쭉 등의 초목이 많았다. 절벽 아래에는 땅을 평평하게 다져 단(壇)을 만들어 놓았는데 열 뼘 되는 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있어 수십 이랑을 뒤덮고 있다. 단의 동쪽에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어 당까지 이어져 있는데, 그 집은 겨우 세 칸이니 곧 재간당이다. 동쪽으로는 두류산의 여러 봉우리를 마주하고 있어 짙푸른 빛깔이 창에 가득하다. 앞으로는 절벽이 펼쳐져 있는데, 샘물이 이곳에 이르러 아래로 떨어져 흰 물결을 날리면서 천둥소리를 내니 곧 수용암(水舂巖)이다.
이에 술상이 진설되고 풍악소리 울려 퍼지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유순지가 술잔을 잡고 김 처사에게 권하며 〈재간〉 시의 첫 번째 장을 노래하기를,
고반(考槃)이 시냇가에 있으니 / 考槃在澗
석인(碩人)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 碩人之寬
홀로 자고 깨어 말하며 / 獨寐寤言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 / 永矢不諼
하였다. 나는 이어서 술을 권하며 두 번째 장을 노래하기를,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 考槃在阿
석인의 마음이 여유롭도다 / 碩人之薖
홀로 자고 깨어 노래하며 / 獨寐寤歌
길이 이 즐거움에서 넘지 않기를 맹세하도다 / 永矢不過
하였다.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장이 남아 가기(歌妓) 향옥(香玉)에게 시켰다. 그러자 술잔을 올리며 노래하기를,
고반이 뭍에 있으니 / 考槃在陸
석인이 소요하는 곳이로다 / 碩人之軸
홀로 자고 깨어 또 누으며 / 獨寐寤宿
길이 이 즐거움을 남에게 알리지 않기로 맹세하도다 / 永矢不告
하였다. 술자리가 끝나자 각기 취한 몸으로 두류산에 들어가 노닐었으니, 그 내용은 《두류록(頭流錄)》에 기재되어 있다.
[주-D001] 재간당기 :
이 글은 김화(金澕)가 두류산(頭流山) 기슭에 세운 재간당에 대해 쓴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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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능성의 만향정기〔綾城晩香亭記〕
17.강선루기〔降仙樓記〕
관서(關西) 지역에는 누대가 많은데 강가에 있거나 산에 의지하고 있어 중국 사신이 연로에 감상하니 《황화집(皇華集)》에 휘황찬란하게 기록된 정자들이 고을마다 있다. 그런데 궁벽 되어 고요하고 소슬하여 세속을 훌쩍 벗어난 형상을 하고 있는 곳으로는 오직 성천(成川)의 강선루가 으뜸이다. 이 누대의 주인이 되는 자는 필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옥당서(玉堂署)와 금마문(金馬門)을 떠나 이곳에 왔기에 ‘강선(降仙)’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 강산이 매우 절경이라 노을을 먹으며 날개옷을 입은 신선이나 거처하기에 마땅하므로 ‘강선’이라 불렀을 것이다.
만력(萬曆) 38년(1610, 광해군2)에 나의 이종사촌 형님인 홍준(洪遵) 사고(師古)가 성천을 다스리게 되었다. 홍 군은 두 조정에서 시종신(侍從臣)이었는데 외직으로 나아가 이 누대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치 옥황(玉皇) 상제의 향안(香案) 받들던 관리가 《황정경(黃庭經)》의 글자 하나를 잘못 읽어 귀양 왔지만 여전히 봉래산(蓬萊山)의 도관(道觀)에서 떠나지 않은 것과 같다. 홍 군을 위로하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홍 군은 하늘을 날아야 할 사람인데 땅으로 내려와 누대에 머물게 되었구나. 누대가 비록 승경이지만 땅으로 내려왔으니 어찌하랴.”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옛날 임진년에 삼도(三都)가 모두 전란(戰亂)에 휩싸였을 때 유독 이 곳만은 오롯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때 학이 끄는 수레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나라가 중흥하는 기틀을 열었다. 임금이 이 지역을 왕업(王業)을 일으킬 만한 곳으로 여겼으니 시종신이 아니면 처할 수 없고, 누대의 이름을 ‘강선’이라 지었으니 평범한 사람이 편안히 여길 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형님에게 명이 이른 것이로다. 예전에 내가 관서 지역의 어사로 나와 이름난 누대를 두루 돌아보았지만, 유독 이 누대가 궁벽하여 고요하고 소슬한 것을 사랑하여 이 누대에 오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강선’이란 호칭이 마침 내 신세와 맞았다. 그래서 일찍이 파촉(巴蜀)의 무협(巫峽), 사천(四川)의 누강(漏江),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의 안개, 양대(陽臺)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는 광경 등을 모두 나의 금낭(錦囊) 안에 담아둔 것을 스스로 자랑하였는데, 수십 년 후에 나의 묵은 자취를 밟는 자가 다시 우리 집안에서 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하니 신선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 비록 형님보다 아우가 먼저였지만, 화려한 누대의 주인이 되어 강산을 마음대로 즐기는 데 있어선 오늘날 우리 형님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군자가 듣고서 노래하기를,
높은 누대에 신선이 내려오니 / 樓之高兮仙斯降
쟁그랑 패옥 소리 옥녀의 모습이네 / 珠珮珊珊兮玉女景
신선을 따라 내려왔지만 / 從仙之降兮
이 누대엔 오래 있지 않으리 / 無久于斯樓
천상에 누대가 있으니 / 玉京有樓兮
그곳에서 뭇 신선들과 노닐 것이네 / 其與衆仙遊
하였다. 그러자 사고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누대가 이와 같은 말을 얻었으니, 비록 중국 사신이 감상하고서 《황화집》에 기록하더라도 이보다 훌륭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급히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이 글을 현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주-D001] 강선루기 :
이 글은 평안도 성천(成川)에 있는 강선루에 대해 쓴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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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양당기〔二養堂記〕
19.조 수재 서재기〔趙秀才書齋記〕
우리나라에는 사족(士族)을 귀하게 여겨 양반(兩班)이라 일컫는데, 양반이라고 하는 것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족 가운데 궁벽한 마을에 사는 자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면 양반이라는 지위를 보존하는 경우가 드므니 군대에 충원되거나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여 일반 백성들의 모습과 차이가 없다. 다만 충의위(忠義衛)는 선인의 공적에 힘입어 비록 우둔하고 빈곤하더라도 양반의 지위를 잃지 않으므로 일단 충의위에 이름이 소속되면 곧 방자하게 스스로 자부하여 기꺼이 머리를 숙여 배움을 청하려고 하지 않고 백성들의 세금에 힘입어 넉넉하게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혹 과거 급제를 권하면, “이는 하늘에 달린 것이니, 더군다나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이랴.”라고 한다. 설령 여기에 뜻을 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불과 몇 장 정도로 된 책 한 권만 읽고서 명성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명성을 이루지 못하면 포기해버리고 되레 하늘을 탓한다.
지금 조씨(趙氏)의 아들 경인(景仁)과 경의(景義)는 충의위에 소속되어 있다. 은진(恩津)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양반이라 일컬어졌는데, 그 지역이 도성과의 거리가 수백 리도 되지 않아 임금의 교화가 멀지 않은데도 풍속이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은진현(恩津縣)에 인접한 십여 고을에 훌륭한 선생이 없어서 이 때문에 형제들이 스무 살이 되도록 따라 배울 사람이 없었다. 마침 내가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계부(季父)인 조흡(趙洽)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제게 두 명의 조카가 있는데 제법 총명하여 가르칠 만한지만 궁벽한 마을에 살아 훌륭한 스승이 없기에 스무 살이 되도록 따라 배울 사람이 없습니다. 듣건대, 선생의 문장이 당대에 으뜸이라고 하니, 내치지 않으신다면 외람되이 선생에게 조카를 부탁할까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두 아이를 불러 인사를 받았는데, 기운과 재능이 출중하고 두 눈동자가 총명하니 모두 사랑할 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앉아라,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사족이 아니면 동반과 서반의 반열에 들 수 없다. 지금 너희들은 사족으로 양반이라 일컬어지니 행운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이 가난해져 양반이 된 자가 농업에 종사하기도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며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한다. 그런데 너희는 충의위에 이름이 소속되어 일반 백성들처럼 고생하는 수고로움은 없으니 행운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족으로 양반이 되고,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지도 않고 군대에 복무하지도 않아서 고생하는 수고로움이 없는 만큼 반드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늘 아래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것은 모두 몇 만의 나라들이겠으며, 나라 안에 총총하게 살아가는 것은 모두 몇 만의 사람들이겠는가. 사람 가운데 작디작아 미미한 자들은 바로 너희 형제들이 아니겠는가. 너희의 일개 명성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음을 하늘이 과연 알겠는가? 하늘이 과연 알아준다면 하늘은 또한 수고롭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너희의 명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희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지, 하늘이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너희가 읽는 것은 책인데, 그 한 줄은 모두 몇 글자이며, 그 종이 한 장은 모두 몇 줄이며, 그 책 한 권은 모두 몇 장이며, 그 한 질은 모두 몇 권인가? 그런데 천하의 책은 또 모두 몇 질이겠는가. 형편상 수백 번을 읽지 못하니 모두 멍하니 잊어버리고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니, 학문의 길에서 여유롭게 노닐며 이룰 수 있겠는가. 내 비록 노둔하지만 문장에 종사한 지 40여 년이 되었다. 처음 내 나이가 16, 7세 이전에 읽은 것은 모두 나의 소유물이 되었지만 자라면서 점점 알자마자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스무 살 이후에 체득한 것은 모두 나를 떠나 사라져버렸으니, 항상 입으로 되뇌고 마음에 명료한 것은 모두 어릴 적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총명한 것도 한계가 있고 세월은 빨리 흘러가니, 지금 어린 나이의 너희들도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나처럼 마흔 살이 될 것이니, 소자들은 힘쓸지어다. 하늘에 달려있다고 해서 스스로 태만하지 말고 넉넉한 삶 따위에 스스로 만족하지 말며 충의위에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크게 이루기를 기약하여 조금도 방기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가 동반과 서반에서 명성을 떨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장차 현인에서 성인이 되고 성인에서 하늘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그 광대한 성취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하였다. 이에 경인과 경의는 재배하고 물러갔다.
다음 날 노복을 시켜 재목을 구해 작은 서재를 만들고는 아침저녁으로 더 배우기를 청하였다. 서재가 완성되었기에 나는 기문을 써서 면려하노라.
[주-D001] 조 수재 서재기 :
이 글은 조경인(趙景仁), 조경의(趙景義) 형제가 세운 서재에 대해 쓴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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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유고 제4권 / 유몽인(柳夢寅)
기(記)
1겸산루기〔兼山樓記〕
2첨학정기〔瞻鶴亭記〕
3일수재기〔日修齋記〕
4화옹 한거기〔禾翁閒居記〕
5화방재기〔畫舫齋記〕
6봉오기〔蓬塢記〕
7부망자 오음당기〔浮忘子午陰堂記〕
8교연정기〔蛟淵亭記〕
9유예당기〔游藝堂記〕
10석소기〔石巢記〕
11수족당기〔睡足堂記〕
12물염정기〔勿染亭記〕
13청금당기〔聽琴堂記〕
14온진정 중건기〔蘊眞亭重建記〕
15오대조고 주부공 정려게판기〔五代祖考主簿公㫌閭揭板記〕
16정금원기〔停琴園記〕
17산인동기〔散人洞記〕
18향사례기 임진년(1772, 영조48)〔鄕射禮記 壬辰〕
19북청부 연노인기〔北靑府宴老人記〕
20경이재기〔景肄齋記〕
21교용정 중건기〔敎用亭重建記〕
22열녀 임씨 정문음기〔烈女林氏㫌門陰記〕
23남산구려기〔南山舊廬記〕
24금성 보국사 중건기〔金城補國寺重建記〕
25법운암기〔法雲庵記〕
26변산 내소사기〔卞山來蘓寺記〕
27용천사 향각기〔龍泉寺香閣記〕
28용천사기〔龍泉寺記〕
29중대암기〔中臺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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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겸산루기〔兼山樓記〕
화산(華山)은 우리나라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세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하게 나란히 솟았는데 또한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한다. 남쪽에 응수(鷹峀)와 백악(白嶽)이 있는데 왕궁이 그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천관(天冠) 바위가 산마루에 있는데 위쪽은 평평하여 들보가 있는 것 같고, 아래쪽 세 곳은 몸체가 반듯하며 그 높이는 구름을 뚫는다. 옛날 주(周)나라의 고사(高士) 윤희(尹喜)와 송견(宋銒)이 모두 화산관(華山冠)을 만들어 썼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 이와 비교해 어떤지는 모르겠다. 천관 바위 아래에서 이수(耳水)가 나와서, 바위 골짜기를 감고 돌아 더러 폭포가 되기도 하고 연못이 되기도 하면서 동쪽으로 흘러간다.
이계(耳溪) 홍한사(洪漢師)가 이수 계곡의 상류에 집을 지었다. 기둥 몇 개의 집인데 오른쪽으로 꺾어 누각 한 칸을 만들었다. 천관봉과 삼각산이 서북쪽에 있어서 엄연한 모습이 마치 선생과 어른이 아랫목에 나누어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 기상이 각기 달라서 공경할 만한 것이 있고 사랑할 만한 것도 있으니 여러 산의 미덕을 이 누각이 겸하였기에 마침내 겸산루(兼山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는 대개 《주역》 〈간(艮)괘〉의 상을 취한 것이다.
이애(泥崖)는 서울 남산의 북쪽인데, 홍군이 여기에 집을 지었다. 응수ㆍ백악과 서로 인접한 채로 지내게 되었으니, 이것은 화산의 얼굴이고 이계는 화산의 등에 해당되어, 홍군은 화산의 얼굴과 등을 또한 겸하고 있다. 홍군이 이애에 있을 때는 앞으로는 조정과 저잣거리가 모여 있고, 오극(五劇)과 삼조(三條)가 교차하는 곳에 임하여서 건장한 말과 화려한 수레, 우산을 메고 짚신을 신은 사람들, 노래하거나 울고 떠들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으니 이는 동(動)의 극치이다.
홍군이 이계에 있을 때에는 누각 하나가 골짜기의 우거진 수풀사이에 있을 뿐 사방에 이웃이라고는 없었다. 골짜기 밖으로 나서야 인가 일고여덟 채가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으니 빈터에 밥 짓는 연기도 이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종일토록 책상과 향로만 상대할 따름이었으니, 이는 정(靜)의 극치이다. 같은 산의 얼굴과 등인데 그 동(動)과 정(靜)이 어찌 서로 이다지도 다른 것인가. 마치 사람의 이목구비와 손발의 동작은 모두 얼굴 앞에서 이뤄지는데 오직 등은 멈춰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주자(朱子)는 〈간괘(艮卦)〉의 단사를 풀이하면서 말하기를 “등에 멈추어 자기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은 멈추어 있으면서 그치는 것이고, 뜰을 가면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면서 그치는 것이다. 동(動)과 정(靜)이 각각 제자리에 그쳐 모두 정(靜)을 주장한다.” 하였다. 지금 홍군은 이애(泥崖)에서건 이계(耳溪)에서건 모두 간지(艮止)의 의미를 터득했는데, 이계에서 즐기려고 하는 것은 그의 뜻이 정(靜)의 정(靜)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괘는 아래에 있는 두 음(陰)의 세력이 성대하여 나아가고자 하지만 위에 있는 양(陽)에게 저지당하고, 하나의 양이 자리의 끝에 머물러서 또한 그치고 나아가지 않는 모습이다. 음과 양이 모두 그쳐서 간괘가 되었는데, 음은 뒤에 있고 양이 앞에 있으니 장차 반드시 점점 나아갈 것이다. 음양의 그침과 나아감은 모두 점진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인이 괘의 순서를 정할 때 진괘(震卦) 다음에 점괘(漸卦)를 받지 않고, 바로 간괘(艮卦)로 받았으며, 간괘 다음에 점괘로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성인이 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요, 그 저절로 그러함에서 기인했기에 또한 고요한 것이다. 마침내 이러한 뜻으로 〈겸산루기〉를 쓴다.
[주-D001] 삼각산(三角山) :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산봉으로서 백운대(白雲臺), 인수봉(人壽峰), 만경대(萬鏡臺)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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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첨학정기〔瞻鶴亭記〕
3.일수재기〔日修齋記〕
우리나라 제도는 부마(駙馬)에게 관작〔爵〕을 주되 관직〔職〕을 주지는 않는다. 지위는 공고(公孤)와 동등하지만 조정의 각종 정사와 논의에는 참여해서 알 수는 없다. 천하를 구제할 재주와 포부가 있더라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세상 또한 그 재주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마들은 자신을 수양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절로 쉽게 해이해진다. 집ㆍ의복ㆍ음식ㆍ거마ㆍ하인ㆍ집기ㆍ금은보화ㆍ진귀한 노리개 따위의 재물로 몸을 보양하고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일찍이 가난이나 어려움이 그 뜻을 거스르거나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절로 쉽게 안일해지는데, 이것은 임금의 외척이기 때문이다. 어진 사대부를 사귀는 것은 드물고, 날마다 함께하는 이들이라고는 궁녀와 구사(丘史)와 잡희(雜戲)나 기예(技藝)의 부류들로 입고 먹을 것을 구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절로 쉽게 방탕한 데로 흘러가니, 진실로 본래의 성품이 뛰어나게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해이하고 안일하여 방탕으로 흐르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부마 가운데 자신을 수양해서 후세에 모범으로 전할 만한 사람은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많지 않은 것이다.
분서(汾西) 박공(朴公)은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부마이고, 또 왕비의 의친(懿親)이다. 향기롭고 화려한 것을 사절하여 물리치고, 평소에 때 묻은 옷과 해진 갓으로 지내며 쓸쓸하기가 한미한 선비와 같았다. 만 마리 말이 분주히 치달리는 가운데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수많은 유언비어들이 하늘을 찌르는 때에도 이름을 온전히 했으니, 이것이 공의 훌륭한 점이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조정이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으로 사명(辭命)을 왕복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문형(文衡)을 공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과거의 사례를 가지고 따지는 이가 있어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문집》 16권이 세상에 전한다.
공은 백사(白沙)와 현헌(玄軒)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계곡(谿谷)과 월사(月沙)를 비롯한 이들과 늘 문루(文樓)에서 모였는데 귀주(貴主)가 주안상을 손수 준비했다. 공의 행실과 문장이 비록 돈독한 자기 수양에서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사우(師友)들의 보익(補益)함도 많았다.
오늘날의 금성위(錦城尉)는 곧 공의 5세손이다.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할 만한 포부를 지녔으나 쓰이지 않고 있다. 일찍부터 성시(城市)를 싫어하여 그윽한 곳에서 조용히 수양하며 살려고 했다. 그러나 또한 감히 대궐을 멀리 떠날 수는 없어 소동문(小東門) 밖 안암동(安巖洞) 북쪽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한 작은 언덕을 골라 재(齋)를 세우고 일수재(日修齋)라 이름을 붙였으니, 그 뜻이 크도다!
군자의 자기 수양이란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는 것에 여유가 있어서 남에게까지 미칠 수 있으면 미치는 것이다. 남에게 미칠 수 있는 것이 있어도 미칠 형세가 되지 못하여 미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사람의 불행이니,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어찌 남에게 미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울러 자기마저 포기할 것인가.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 수양의 요체는 매일 반성하는 데 있다. 보통 사람들이 날마다 말하고 행동하면서 때로는 일처리에 기운이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지혜가 주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더라도 천천히 이치로 생각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에 어제의 말과 행동을 생각해보면 반드시 뉘우칠 만한 것이 있으니, 내일에 오늘의 말과 행동을 생각해보면 또한 반드시 뉘우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뉘우치면 곧 고쳐서 날마다 계속 해나간다면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50에 지난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는 것에 가까워질 것이니 이렇게 날을 쌓아서 나이가 50에 이른 것이다.
분서공이 일찍이 시에서 읊기를 “나는 29년의 삶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라고 했는데, 29년 동안의 삶이 어찌 모두 잘못이었겠는가. 이것은 맹렬히 반성하고 깊이 뉘우친 것이다. 주공(周公)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다. 지금 공은 분서공을 스승으로 삼아 날마다 독실하게 반성하니, 선조의 아름다움을 이어 백세토록 부마 가문의 모범이 될 만하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공이 이미 문미(門楣)에 새겨 넣은 것이 있으니 이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나를 어리석게 여기지 않고 기문을 구하므로 감히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주-D001] 관작〔爵〕 :
일반적으로 관원(官員)의 등급은 계(階)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품(品)과 작(爵)의 두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정3품 통정대부’라고 할 때 전자는 품(品)이고 후자는 작(爵)에 해당한다. 품은 18품계가 정해져 있는 데 반해서, 작은 대개 품과 일치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더 세분화되었다. 그래서 같은 정2품이지만 가선대부, 가정대부, 자헌대부, 정헌대부의 네 가지 작이 존재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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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옹 한거기〔禾翁閒居記〕
5.화방재기〔畫舫齋記〕
마음을 맑게 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다스림의 근본이다. 요순(堯舜)의 사업도 욕기(浴沂)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몸이요, 몸이 머무르는 곳은 집이니, 집 또한 도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관청은 나의 집이 아닌데도 몇 달 몇 년을 계획하고 머무른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수령이 되어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따금 정자나 재사(齋舍)를 짓고서 눈을 기르고 귀를 기르며 몸을 길렀다. 외면을 길러서 내면에 미쳤던 것이니 건물을 짓고 꾸미는 것을 군자들은 사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타락하여 송사가 번다하고 세금이 증가하여 징수 독촉이 엄해지면서부터 장부(帳簿)의 기한에 맞추느라 날로 고달프니 생각이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다. 근년에 백성들이 가난한데 사대부는 더욱 심하다. 다행히 녹봉을 받는 사람이라도 녹봉이 박하여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 외관(外官)은 낫다고 하지만 2천 섬을 받는 중국의 지방관과는 다르다. 항상 공사(公私)의 비용이 부족해서 돌아보건대 또한 다른 데 힘이 미칠 겨를도 없다. 옛날의 정자와 재사(齋舍) 가운데 유명한 것도 황폐하고 무너져 수리를 못하는 곳도 많은데 하물며 새로 짓는 것임에랴!
옥천군(玉川郡)의 응향각(凝香閣)은 호좌(湖左)의 명승이다. 응향각의 서쪽으로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작은 거룻배를 띄웠다. 대숲과 여러 가지 나무로 둘러서 그윽하고 조용한 것이 사랑할 만하지만 툭 트인 느낌은 부족했다. 동양(東陽) 신후(申侯)가 이 고을을 다스린 것이 이미 3년이 되었다.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다스려져 관아와 백성이 모두 한가로웠다. 마침내 응향각 서남쪽 연못과 냇물 사이 긴 둑이 있는 곳에 공금 수백 금을 출연하고 재물을 모아서 사람을 고용하여 재사 한 채를 지었다. 아래 몸체는 배를 본뜨고 위는 채색한 누각을 앉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누선(樓船)이 연안에 정박한 것 같았다. 앞으로 넓은 들과 큰 길을 굽어보고 있어 곡식을 볼 수도 있고 길 가는 사람의 노래 소리도 살필 수 있으니 한가하게 쉬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화방재(畵舫齋)’라 편액을 하였으니 이는 중국 활주(滑州)에 있던 구양수(歐陽脩)의 화방재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구공(歐公)은 죄로 폄적되어 만 리 남짓이나 수로를 지나왔기에 배에 빗대어 경계(警戒)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신후는 비록 오래도록 작은 고을에 머물러 뜻을 크게 펼치지는 못했지만 순풍과 잔잔한 물결을 만나 오연히 편안한 침석에서 살아왔으니 구공과는 다르다. 구공의 〈화방재기〉는 연희(宴嬉)로 끝마쳤지만 신후의 뜻이야 또한 어찌 이것을 주로 했겠는가. 큰 것과 근본을 알아 기르려는 바가 있을 뿐이다. 백성들 또한 신후가 길러준 덕택에 백 리 안이 마땅히 안도하고 삶을 즐겼으리라.
비록 그렇지만 퇴청한 뒤 여가에 여기에서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있을 때 대숲은 움직이지 않고 시내와 여울 소리 잔잔하면, 황연히 오호(五湖)의 물안개 속에 떠있는 것 같을 것이다. 때로 혹 큰비로 미친 물결이 돌에 부딪쳐 시끄러우면 마치 염여퇴(灩澦堆)의 바위가 말만 할 때 지나는 것 같을 것이다. 아, 즐거울 때도 있고 또한 두려울 때도 있으리라!
[주-D001] 욕기(浴沂) :
기수(沂水)에서 목욕한다는 뜻으로, 물욕(物慾)에 초연한 것을 가리킨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자신의 포부를 말해 보라는 공자의 요구에 증석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사람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 뒤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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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봉오기〔蓬塢記〕
7.부망자 오음당기〔浮忘子午陰堂記〕
예로부터 광달(曠達)한 선비들은 ‘잊음〔忘〕’에 관해 즐겨 말했지만, 잊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은 드물었다. 외물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의 반응이란 저절로 멈추지는 않는다. 닥친 일에 응할 겨를도 없는데 지나간 일을 연역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예측하니, 순(順)과 역(逆)의 다른 경계가 마음속에 일어났다 사라졌다 일정치가 않다. 그러니 비록 눈을 감고 귀를 막고서 편벽한 곳에 홀로 머물더라도 그 마음의 변화가 이어지는 것이 끝이 없으니, 이것을 눌러 둔다는 것은 끝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잊으려고 하면 잊으려는 마음과 잊을 수 없는 마음이 서로 버티고 다투어 더욱 어지럽게 엉클어지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마치 불길을 잡아 끄려다가 불길이 더욱 번지는 것과 같다.
도가(道家)와 석가(釋家)는 모두 ‘잊음’을 중시하지만 또한 이 마음을 갑자기 모두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침내 존상(存想)이라는 방도와 화두(話頭)라는 방법을 만들어 마음을 한편의 밋밋한 염두(念頭)에 의지하여 모든 다른 어지러운 생각을 물리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천은자(天隱子)의 좌망(坐忘)도 좌치(坐馳)라는 비아냥을 면치 못했다. 부처가 입적(入寂)하여 사리(舍利)가 나온 것을 스스로는 여래(如來)의 지극한 공이라고 여기니, 그 마음이 응고되고 꽉 막혀서 유연히 승화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유가(儒家)에서는 일찍이 ‘잊음〔忘〕’이란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앞에 섞여 닥쳤을 때 매우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워할 만한 것들이 있더라도 외물을 각각 외물에 맡겨두어 내가 관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마치 고운 것과 추한 것이 빈 거울 속을 번갈아 지나가는 것과 같으니 이는 ‘잊음’을 일삼지 않으나 잊어버리는 것과 곧 같은 것이다. 그 방법은 천리와 인욕의 구분, 선과 악의 기미를 살펴서 이 마음을 밝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교(圯橋) 이공(李公)은 낡은 집에서 쓸쓸히 산다. 겨울 추위에도 굴뚝에 불을 때지 않고, 평상 하나를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누워 지낸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시험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이는 금년에 65세다. 그 사이 며느리 하나, 딸 둘과 사위 둘을 잃어서 인정상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다 겪었다. 그러나 안색은 옥빛이 퍼지고 수염과 머리털은 하나도 흰 것이 없어 내가 일찍이 공경하면서도 기이하게 여겼었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부망(浮忘)’이라고 자호(自號)했습니다. 내 정신은 허공에 떠서〔浮〕 흩어졌고 세상의 일은 잊었기〔忘〕 때문입니다. 서하(西河)의 들판에 집을 지어 오음당(午陰堂)이라고 편액(扁額)하였는데 그 지명을 따라서 지은 것입니다.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아! 나는 이에 공이 늙고 곤궁해도 쇠약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공의 ‘잊음〔忘〕’이 그 제대로 된 방법을 터득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저 ‘오(午)’라는 것은 반양(半陽)과 반음(半陰)을 말함이요, ‘음(陰)’이라는 것은 그 기미(幾微)를 살펴서 경계한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은 잊어도 될 것은 다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끝내 잊지 않은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지 않은 뒤에야 잊어도 되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저 잊어도 될 것을 잊고자 하면서 그 보다 먼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줄을 모르는 것은 또한 우활(迂闊)한 것이리라.
[주-D001] 존상(存想) :
도가 수련법의 하나이다. 당(唐)나라 때 도사인 사마승정(司馬承禎)은 《천은자(天隱子)》에서 “‘존’은 나의 신을 보존하는 것이요, ‘상’은 나의 몸을 생각하는 것이다.[存, 謂存我之神, 想, 謂想我之身]”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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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교연정기〔蛟淵亭記〕
9.유예당기〔游藝堂記〕
유예당(游藝堂)은 남원부(南原府) 남쪽으로 약 30리에 위치한 두동(豆洞)에 있다. 두동은 호좌(湖左)의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지리산은 높이 하늘에 닿았는데 원기(元氣)가 서쪽으로 내달린 것이 큰 들판에 이르러 원통산(圓通山)이 되었다. 교룡산(蛟龍山)ㆍ고정산(高政山)ㆍ보련산(寶連山) 등 여러 산이 세 방향에서 에워싸고 있다. 마치 공자가 엄연하게 자리에 계시자 여러 제자들이 줄지어 모시는데 화락하고 굳센 모습으로 혹은 거문고 연주를 멈추어 가거나 혹은 단장보(端章甫)를 하고 큰 띠를 두른 채 서있는 것만 같다. 큰 강이 그 앞을 지나는데 요수(蓼水)는 원통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굽이굽이 돌아서 흘러 강으로 들어가니, 조물주가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 둔 것이 매우 지극히 구비되어 있다. 그렇다면 요수 남쪽의 통명산(通明山)과 동악산(動樂山)은 먼 곳으로부터 온 좋은 벗일 것이다.
두동은 그 가운데 놓여 있으니 오구(奧區)이며, 땅은 평탄하다. 고려가 망해갈 즈음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낸 김충한(金冲漢) 선생이 은둔할 때 수풀을 베어내고 처음 터전을 세웠는데 자손이 대대로 지켜오다가 마침내 번성하여 현달하게 되었다. 오(吳)ㆍ유(柳)ㆍ변(邊)ㆍ이(李) 네 성씨가 차례로 들어와 집을 지었고 또한 창성하였다. 모두 선생의 먼 외손들인데 산천이 영기(靈氣)를 길러서 유명한 사람이 대대로 나왔다. 덕행으로 향속(鄕俗)에 모범이 된 사람도 있고, 충의로 국난에 달려 나가 남원부와 인근 현에 배향된 사람도 있으며, 유일(遺逸)로 명망이 매우 높은 사람도 있다. 문단의 집이(執耳)로 걸출한 사람이 연이었으며 크고 작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여러 대에 끊이지 않았으니, 성대하도다.
집안마다 모두 서당이 있었고 당(黨)에 상(庠)이 없지 않았다. 계미년에 학당을 두동에 세워서 글벗이 모여 강습하는 곳으로 삼았다. 주부자(朱夫子)의 서재 이름을 취해서 유예당(游藝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신해년과 임자년에 거듭 큰 흉년이 들어서 유예당은 이로 인해 수리되지 못한 채 무너진 곳이 많았다. 기해년(1779, 정조3) 봄에 두동의 유생(儒生)들이 재물을 모으고 힘을 내어 옛터의 동쪽으로 한 언덕을 넘은 곳에 옮겨 세웠다. 유중진(柳重鎭)과 오현조(吳顯祚)가 실제 일을 주관했고, 낙성할 때 편액은 옛 것을 그대로 썼다.
유예당의 ‘예(藝)’는 6예(六藝)를 뜻한다. 옛날 소학에서는 6예의 문장으로 가르쳤는데 여기서 문장이라는 것은 명물(名物)의 호칭일 뿐 실제 그 일은 아니다. 여덟 살 아이들이 그 일을 능숙하게 실행할 수 없으므로 먼저 그 문장을 익히게 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알도록 한다면 그 문장이 진실로 상세하고 명확해서 그들이 자랐을 때 실행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 문장들이 다 사라졌으니 그 일을 장차 무엇을 따라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이치는 없어지지 않는 법이니 진실로 큰 것에 뜻을 두고 스스로 마음에 터득해서 천리(天理)에 의거해 실천한다면 절문(節文)의 사이에야 고금(古今)의 차이가 없을 수 없겠지만 6예에 통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을 것이다. 이 당에 머무르는 모든 군자들은 스스로 비하하거나 작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본말을 모두 거행하고 내외를 함께 수양하여 독실하게 그치지 않고 한다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어 앞선 사람들의 미덕을 잇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저 ‘유(游)’는 성정에 적절한 범위에서 사물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오래하게 되면 기쁨은 저절로 생길 것이다. 기뻐하게 되면 그것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왕년에 나는 관북(關北) 지방에서 부사(府使)를 지낸 적이 있었다. 향사례(鄕射禮)를 강습하려고 제도에 맞춰 물건들을 준비했다. 선비 100여 명을 선발하여 의식을 익히게 하고 18일 만에 실행하게 하였다. 백시(白矢)와 삼련(參連)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명물(名物)ㆍ도수(度數)의 사이와 읍양(揖讓)ㆍ진퇴(進退)의 즈음에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은 여전히 볼만 했었다. 여러 선비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고, 담을 빙 둘러 관람하던 산골과 포구의 백성들은 더러 소매를 잡으며 들어올리기도 하고 더러 경쇠 모양으로 구부리며 일어나기도 했는데, 선비들의 행위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이는 마음속으로 감동하고 기뻐하는 바가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예와 하나의 예절을 따라해 본 것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감동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6예를 모두 실행하여 옛날의 도(道)를 강습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능히 해낼 사람이 있다면 내가 비록 늙었지만 장차 옷자락을 올려 여미고 아랫자리에 달려가 가르침을 청하리라.
[주-D001] 30리 :
원문의 ‘一舍’로, 중국의 군제(軍制)에서 군사가 하루에 삼십 리를 걷고 하룻밤을 묵는다는 데서 연유해서 흔히 30리 되는 거리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50리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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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석소기〔石巢記〕
11.수족당기〔睡足堂記〕
수족당(睡足堂)의 당호(堂號)를 본 사람들은 모두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시에서 인용했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대몽(大夢)〉은 공명이 지은 시가 아니다. 그 시에서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워주려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스스로 과시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평생을 나 자신은 아노라.”라고 한 것도 의심스럽다. “성패(成敗)와 유불리(有不利)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쓰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라는 것이 공명의 뜻인데, 어떻게 일찍이 평생을 점쳐서 미리 스스로 단정했겠는가. 그렇다면 여섯 차례 기산(祁山)에 출전한 일과 가을밤 북두에 제사 지낸 일은 모두 성공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것인가.
옛사람들이 〈추풍사(秋風辭)〉를 한 무제(漢武帝)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긴 것은 기운(氣韻)과 풍격(風格)으로 논했기 때문이었으니, 지금 〈호자하가(瓠子河歌)〉를 가지고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대몽〉의 시를 〈출사표〉와 〈양보음(梁甫吟)〉과 비교해 보면 그 유사하지 않음이 〈추풍사〉와 〈호자하가〉의 차이보다 더하다. 〈대몽〉 은 힘이 약하고 격조가 속되며 음운(音韻)이 가볍고 맑으니, 한(漢)ㆍ위(魏) 사이의 어투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른바 ‘수족(睡足)’이 이미 공명(孔明)의 시어가 아니라면 수족당의 주인은 마땅히 취할 바가 없다. 공명은 일찍 초당(草堂)을 떠나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있었고, 또한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평생 잠잤던 시간을 계산해보면 아마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족당의 주인은 태평한 세상에 태어나 지금 노년에 이르렀고, 봄가을 할 것 없이 해를 마치도록 넉넉히 한가롭다. 자고 싶으면 자고 생각할 것이 없으니 꿈꾸는 일도 없을 것이요, 깨고 싶으면 깨고 남이 깨워줄 필요가 없으니 반드시 공명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주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저를 알아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기문(記文)으로 써주기를 원하기에 마침내 써주었다.
[주-D001]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시 :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비(劉備)가 남양(南陽) 초당(草堂)으로 제갈공명을 찾아갔을 때 읊었다는 시를 가리킨다. 실제 제갈공명의 시라는 증거는 없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워주려나, 평생을 나 자신은 아노라. 초당에 봄잠은 넉넉도 한데, 창밖의 해는 길기도 하구나.[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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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물염정기〔勿染亭記〕
13.청금당기〔聽琴堂記〕
광릉(廣陵) 이자(李子) 면지(勉之)는 배움에 뜻을 두고 옛사람이 마음을 다스린 글을 많이 읽었다. 도성 남쪽에 작은 집을 짓고 청금당(聽琴堂)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그 뜻이 아름답도다!
소리는 마음에서 생기는데 소리를 조율한 것이 음악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사람을 깊이 감동시킨다. 음악의 소리에서 금성(金聲)은 굳세고 석성(石聲)은 분별하게 하며 죽성(竹聲)은 멀리 퍼지고 혁성(革聲)은 떠들썩하며 토성(土聲)은 탁하다. 오직 사성(絲聲)은 애절한데 슬픔은 사람을 더욱 깊이 감동시킨다. 깊이 감동하면 방탕해진 마음이 거두어져 청렴해지고, 청렴하면 반듯하게 모가 나서 사욕에 유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문고의 ‘금(琴)’자는 금지한다〔禁〕는 뜻이니 사특한 마음을 금지하는 것이다. “군자는 아무 까닭 없이 금(琴)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음악을 말할 때는 반드시 예를 말하니 음악이라는 것은 안을 교화하는 것이요 예라는 것은 밖을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둥글고 예는 모나며, 음악은 혼합되고 예는 주밀하며, 음악은 온화하고 예는 엄격하다. 경례(經禮) 3백 가지와 곡례(曲禮) 3천 가지는 “밥을 크게 뜨지 말고 국을 흘리면서 마시지 말라.”라는 데까지 이르니, 또한 주밀하지 아니한가. ‘무(毋)’는 금지하는 말이니 또한 엄격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예와 악은 어느 한쪽만 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자(李子)가 ‘금(琴)’으로 당호를 삼은 것은 대개 내면을 칭하여 외면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래로 예(禮)는 여전히 전하는 자가 있어 준수하고 행하였으나 음악은 사라져 고찰할 수가 없으니, 그대가 거문고를 좋아한다 한들 장차 무엇을 따라 그 음악을 듣겠는가.
한겨울에 나는 풍암(楓巖)의 아래에 거처했는데 뜰에 듬성듬성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때로 바람이 불면 서로 감응하며 운다. 그 소리는 유장하게 날려서 맑게 멀리 퍼지는데 그 모호한 것은 궁(宮)인지, 희미하게 작은 것은 치(徵)인지 알 수 없다. 여운이 가냘프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니 장차 끝나려는가? 밤중에 적막할 때 옷깃을 단정히 하고 말없이 앉아 들으면 티끌 묻은 더러운 마음이 모르는 사이 저절로 사라지니 그대 또한 그 천기(天機)를 찾을지어다.
[주-D001] 금성(金聲)은 …… 떠들썩하며 :
악기의 재질에 따른 소리의 특성을 말한 것이다. 《예기》 〈악기(樂記)〉에 “(금속으로 만든) 종소리는 쟁쟁하다. …… 군자는 종소리를 듣고 무신(武臣)을 생각한다. …… (돌로 만든) 경의 소리는 맑다. 맑은 소리로 분별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기에 목숨을 바칠 수 있다. …… 대나무 악기 소리는 멀리 퍼진다. 멀리 퍼지는 소리는 만날 생각이 들게 하고, 만날 생각이 들면 대중을 모을 수 있다. …… (가죽으로 만든) 북소리는 떠들썩하니 떠들썩하게 해서 움직이게 만들고, 움직이게 해서 군대를 나아가게 한다.[鐘聲鏗 …… 君子聼鐘聲, 則思武臣. …… 石聲磬, 磬以立辨, 辨以致死. …… 竹聲濫, 濫以立會, 會以聚眾. …… 鼓鼙之聲讙, 讙以立動, 動以進衆.]”라는 구절을 축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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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온진정 중건기〔蘊眞亭重建記〕
15.오대조고 주부공 정려게판기〔五代祖考主簿公㫌閭揭板記〕
《동국삼강행실(東國三綱行實)》편에 “신색(申𣽤)은 순창군 사람이다. 편모를 모심에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했다. 어머니 상에 한결같이 예법제도에 의거해서 치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상례를 지키지 못함을 서러워하여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 어머니와 합장하고, 아버지를 위해 3년 동안 추상(追喪)을 하며 여묘살이를 하되,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66세였다.”라고 하였고, “신상용(申尙溶)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묘살이를 하면서 몸소 제사 차반을 차렸다. 아침과 저녁으로 묘소에 오르고 눈과 비가 내려도 멈추지 않았고, 슬퍼하는 모습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죽만 마시면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너무 슬퍼하여 시력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행실이 알려져 함께 정려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행실을 서술하여 팔방에 간행 배포했다. 사람의 자식이라면 장차 보고 느끼는 것이 있도록 한 것이다.
신색은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추증되었고 신상용은 음직(蔭職)으로 장사랑(將仕郞)에 보임되었다. 장사랑공은 주부공의 조카이고, 호는 칠휴(七休)이다. 진주 덕천동(德川洞)에 산 적이 있었는데, 진주 사람들이 그 행실에 감동을 받고 사모해서 오두(烏頭)를 설치해서 그 터를 표시했다. 주부공의 정려는 명릉(明陵 숙종(肅宗)) 병신년(1716, 숙종42)에 개수하였고, 금상(정조(正祖)) 4년 경자년(1780)에 중건했다. 장사랑공의 정려는 중간에 후손이 군의 동쪽 화산(華山) 아래 묘 앞으로 옮겨 세웠다. 세월이 오래되어 썩고 무너져 그 현손인 첨추(僉樞) 우징(宇澄)이 와서 말하기를 “묘소는 정려가 아니므로 당연히 옛 마을에 두어야 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주부공의 마을에 나란히 세웠는데 같은 지붕에 다른 방이다.
주부공은 곧 이조 판서로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휘 공제(公濟)의 증손이며, 증 이조 참판 행 전주 부윤 호 귀래(歸來)의 5세손이다. 귀래의 아버지는 증 영의정 고령부원군 행 집현전 직제학으로 호는 암헌(巖軒)이며,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 증 좌찬성으로 호는 호촌(壺村)이며, 증조는 예의 판서로 호는 순은(醇隱)이니 귀래와는 4세의 관계다. 모두 영호남의 서원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신씨(申氏)들은 충효와 청절을 집안에 전해서 주부공의 종숙으로 집의(執義)에 증직된 휘 언식(彦湜)은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조정에 알려져 침랑(寢郞)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5세 손녀는 민도수(閔道洙)의 처가 되었는데 열녀로서 영조 때 정려되었다.
[주-D001] 추상(追喪) :
부모상을 당했을 때 사정이 있어 상주 노릇을 하지 못한 경우, 훗날 복상(服喪)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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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정금원기〔停琴園記〕
17.산인동기〔散人洞記〕
순자강(鶉子江)은 좌우에 큰 산을 끼고 있다. 굽이굽이 수백 리를 가다가 순창군의 동쪽에 이르러 호수가 되는데 지호(紙湖)라고 한다. 지호의 왼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산인동(散人洞)이라고 한다. 산인은 곧 순창군 사람 양씨(楊氏)다. 양씨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으로 연산군이 세도를 크게 망치는 것을 보고 진사인 동생과 함께 여기에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강가에 큰 바위 두 개가 있는데 길쭉하면서 모가 나고 정상부분은 평평하여 앉을 수 있다. 남쪽의 것을 배암(培巖)이라 하고 북쪽의 것을 돈암(墩巖)이라 하는데, 산인 형제가 낚시터로 삼고 배(培)ㆍ돈(墩)이라고 자기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무릇 은거하는 선비는 그 산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그윽한 생각과 한가한 흥취를 붙인다. 최고운(崔孤雲)의 홍류동(紅流洞)ㆍ분옥폭(噴玉瀑)ㆍ음풍뢰(吟風瀨)ㆍ자필암(泚筆岩)이 이런 경우다. 예로부터 이런 사례가 매우 많은데 식자들은 이것을 현학적이라거나 사치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또한 그 은둔하는 이의 덕에 해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산인이 곧장 그의 이름으로 바위를 명명한 것은 장차 스스로 천히 여기고 물고기 잡고 나무하는 무리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이니, 이는 그 은거하고자 하는 뜻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추강(南秋江)은 성품이 고고해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거늘 김 아무개를 위해 〈감정기(鑑亭記)〉를 지으면서 산인의 재주를 칭송하며 김씨와 산인의 우정을 축하했다. 산인의 재주에는 틀림없이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인의 후손가를 방문해 보아도 징험할 만한 시문이 하나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산인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헌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산인의 시문을 후손이 잃어버려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대개 산인이 시문을 전하지 않은 것이다. 명성이 이미 한 시대에 알려졌어도 기어이 세상에 섞여 살며 감추려 했을 것이거늘 더구나 재주를 내면에 갈무리한 경우이겠는가? 자손들에게도 전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으랴.
아, 산인은 장차 민멸되고 말 것인가. 공자는 말하기를 “은거한 이가 일곱이다.”라고 했는데 일곱 사람은 과연 어느 시대 사람이고, 그들이 살았던 곳은 과연 어디이며, 성명은 과연 무엇인가. 살았던 시대와 살았던 곳, 성명을 모두 살펴볼 길이 없는데 하물며 그 행적이야 과연 어떻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찬송이 백이(伯夷)와 우중(虞仲), 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처럼 행적이 뚜렷한 사람들과 별다름이 없는 것은 실제 그러한 행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인의 재주와 행실은 그 한두 가지조차 얻을 수 없으나 사람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골짜기를 가리켜 산인동이라 하고 그 바위를 가리켜 아무개의 바위라고 한다. 지나는 사람도 반드시 공경하고 사모하니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 산인의 행실을 이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바위가 마멸되지 않는 한 산인의 이름도 따라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산인은 비록 한 시대에 은둔하였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끝이 없을 것이다.
[주-D001] 순자강(鶉子江) :
전북 남원 대강면과 전남 곡성 입면, 그리고 옥과면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섬진강의 일부 하천이다.
[주-D002] 양씨(楊氏) :
양배(楊培)ㆍ양돈(楊墩) 형제 가운데 형인 양배를 가리킨다. 연산군 시대의 무오ㆍ갑자 두 사화를 겪은 후 벼슬을 단념하고 동생인 양돈과 함께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頤齋遺藁 卷23 梅堂慕亭二楊公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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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향사례기 임진년(1772, 영조48)〔鄕射禮記 壬辰〕
19.북청부 연노인기〔北靑府宴老人記〕
내가 청해(靑海)를 맡은 다음 해인 임진년(1772, 영조48)은 내가 환갑이 되는 해였다. 아들 해주(海柱)가 와서 장차 회갑연을 베풀 것을 두세 차례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는 바람에 이 예를 어버이께 행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 녹봉으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기에 관청 주방의 좋은 음식을 만나게 되면 매번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하물며 내 생일날이겠느냐.”라고 하였다.
불초한 나는 조상의 보살핌을 받고 나라의 은혜를 외람되이 입어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 경인년(1770, 영조46)에 승지로 조정에 들어가 야대(夜對)를 하게 되었는데, 임금께서 하문하시기를 “승지에게는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는가?”라고 하시기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승지도 나처럼 지극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구나.”라고 하셨다. 인하여 한참을 주르륵 눈물을 흘리시더니 말씀하기를 “승지는 오늘날 섬기는 이가 나 한 사람이니 나를 두고 멀리 가지 말라.” 하셨다. 미천한 신하가 감읍하며 물러났는데, 하물며 임금의 연세가 바야흐로 많으신데 어찌 궁궐을 멀리 떠나 오랫동안 있겠는가.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서울에서 거리가 천여 리이고 이미 해도 넘겼다. 아, 나는 어버이를 이미 섬길 수도 없는데, 나라를 저버린 죄 또한 커서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를 뿐 작은 정성조차 스스로 펼칠 수가 없구나. 이에 18명의 사장(社長)에게 명하여 79세 노인을 찾아 치은헌(致恩軒)으로 맞아들여서 잔치를 벌이니 모두 43인이었는데, 평양(平壤)에 거주하는 한 사람이 와서 또한 함께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연세가 높은 분을 우대하십니다. 지금 군과 현에서 쌀과 고기를 하사하는 일이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여러 어르신은 대성인이 태어나신 해에 태어났으니 다른 노인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에 번거롭게 발걸음을 하시게 했으니, 오늘 밤은 길이 즐기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모든 노인들이 다 일어나 절을 하기에 나 또한 절했다.
또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 가운데 80세 장수하며 50년 재위하신 분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중국의 경우 오제(五帝)는 상고 시대의 사람들이니, 태화원기(泰和元氣)가 한창 왕성했던 시대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대(三代)에 이르러서도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목왕(穆王)이 있을 뿐입니다. 은나라의 대무(大戊)는 재위가 75년이었으니 그 나이는 반드시 80세를 넘었을 것입니다. 무정(武丁)은 재위가 50년을 넘었다지만 그 나이는 알 수 없습니다. 주나라 이하로는 이런 사례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삼한 시대 이전은 역사 기록이 없고, 삼국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태조왕과 장수왕이 있을 따름입니다. 신라의 진평왕과 백제의 다루왕(多婁王)ㆍ기루왕(己婁王)과 고이왕(古爾王)은 재위가 혹 50년, 52년, 53년인데 그 나이는 알 수 없습니다. 고려 시대는 이런 사례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올해 79세요 재위하신 지 49년인데 요 임금처럼 정사에 게으른 법도 없으셨고, ‘새벽녘에도 크게 덕을 밝히시는 것’은 탕 임금과 같았으며,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겨를이 없이 바쁘신 것’은 문왕과 같으셨습니다. 모든 정사를 직접 처리하시느라 지나치게 수고로울 지경인데도, 조정의 신하들이 휴양(休養)하시라고 많이들 청해도 결국 듣지 않으십니다.
아, 그 굳건함은 하늘과 같으시니 하늘은 반드시 무궁한 복록을 내리셔서 산마루와 같고 언덕과 같이 그 천년만년을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온화한 기운은 널리 팔역(八域)에 넘쳐납니다. 위로는 띠와 홀을 찬 사람부터 아래로는 여항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매우 많지만, 나이 80세 되는 노인들이 지금 한 읍에 40여 명이나 있으니 대단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옛적에 분열되어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장수왕이 나라를 향유한 지 오래라고 하지만 살육하고 경작하는 와중에 고아와 과부는 울부짖었고 백성들은 그 삶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신라가 통일을 하기는 했으나 대동강과 철령 이북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고려는 멀리까지 국경을 개척했다지만 경계는 도린포(都麟浦)에 그치는 바람에 이 땅은 여전히 여진의 소굴이었습니다. 거란과 금나라, 몽고와 왜의 침략이 잇달았고, 금과 비단을 실어 나르고 전쟁과 수자리에 동원되느라 편안한 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 이르러 두만강 이남은 모두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고 예악과 문물은 비로소 천황(天荒)을 개척하니 만물이 모두 우러러 보았고, 삼계(三堦)는 두루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은 과거 우리나라에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세상에 나서 우리 임금님의 신하와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며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라고 하자, 모든 노인들이 다 일어나 절했고, 나도 절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영고왕(寧考王)이 처음 즉위한 갑인년(1674)으로부터 지금까지 99년인데 이는 우(禹) 임금과 계(啓), 문왕과 무왕조차 불가능했고, 삼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들은 영고의 시대에 나고 자라서 지금 왕의 세상에 늙어가니 이 또한 이천년 동안 없던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축씨(祝氏)의 《유서(類書)》에 이르기를 ‘격양가를 불렀던 노인은 당시 나이가 50세였다.’ 하는데 우리들과 비교하면 가장 젊습니다. 우리 고을에 106세 되신 분이 있으니 우리들은 감히 노인이라 칭할 수도 없습니다. 저 격양가를 부르던 사람을 노인이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또 한 노인은 말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같지 않으니, 요 임금 때의 구주(九州)에서도 이러한 잔치를 베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주방의 사람은 안주를 내오고 술을 맡은 사람은 술을 내오며 악공은 음악을 연주하였다. 술과 단술을 차려서 원하는 대로 마시게 하고, 음주에 수량을 정하지 않고 양껏 마시게 했다. 먼저 거문고를 타고 노래할 것을 명하니 가동(歌童)이 〈천보(天保)〉와 〈남산유대(南山有臺)〉의 시를 세 번씩 외웠다. 뭇 음악에 따라 춤을 추었는데 일곱 번 춤을 추자 날이 저물었다. 광주리에 구장(鳩杖) 하나와 황세건(黃細巾) 하나씩을 담아 여러 노인들에게 올리자, 모두들 지팡이를 짚고서 돌아갔다.
해주(海柱)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엊그제 유생 300명과 함께 향사례를 행하였고 오늘 여러 노인들과 잔치하니 금년에 나의 즐거움이 많았구나. 이것은 모두 임금님의 은혜이니 다시 무엇을 하겠느냐. 또한 내가 벼슬한 지 20년에 백성들이 공적인 일로 관정에 들어온 자 가운데, 갑술년(1694, 숙종20) - 영조께서 태어난 해이다. - 과 기사년(1689) - 선고께서 태어난 해이다. - 에 태어난 사람인 줄을 알면 곤장을 치거나 수감하지 않았으니, 너는 내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주-D001] 청해(靑海) :
북청의 별칭이다.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을 시조로 하는 청해 이씨의 본향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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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記 19.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