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삶을 묻다.
송유옹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보조를 맞출 수가 없어 걸기적거리기는 것이 미안해서 싫은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그들과 나의 여행의 정서적 목적이 달라 내 감정에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로 여행을 즐긴다.
나는 자연과 사람이 주목적이다.
그래서 특히 시골여행을 가면 시골장 옆에 잠자리를 정하고 시장을 가고, 시장에서 자고, 시장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정을 느끼며 알아간다.
어려서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수학여행을 가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후에도 단체로 몰려 여행을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단체여행에 대한 추억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묻지마 관광에서 생기는 로맨스도 알지를 못한다.
초등학교 때에는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지만 자존심 상해서 몸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친구를 조금은 이해할 나이인지라 저희들이 보살핀다고 함께 가자지만 오히려 그것이 미안하고 싫어서 가질 않았다.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자기들끼리 찍은 여행지에서의 사진들을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당히 유치하기도 했었는데, 어쩌면 여우의 청포도같은 가지못한 서운함의 감정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늦게 들어간 대학의 졸업여행은 교수들과의 정서적 차이가 마음에 들지를 않아 여행을 거부하고 그 여행비에 더하여 혼자서 여유롭게 한려수도를 돌았었다.
여수에 계셨던 형님 댁에서 하루 자고 섬진강을 타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날 아침에 라디오에서는 장송곡만 흘러 나왔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역사의 날이었다.
나라가 어수선 하겠구나 생각하며 곧 바로 나머지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군산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1996년 과외교사시절 자동차 면허시험에 한번 응시 합격하고 바로 아반테를 구입했다.
그날이 9월 1일이었으며 동시에 또한 처음으로 아파트를 장만하여 입주하던 날이기도 하였다.
내게는 일생의 전환점이 된 역사적 날이었다.
오로지 누구의 보탬도 없이 내 힘으로만 이 두가지를 동시에 실현하였던 날이다.)
내게 자동차가 생긴 이후에는 시간과 여유만 있으면 그 동안의 보상이라도 받을 심사로 자동차 여행을 즐겼다.
도보여행과 자전거 하이킹이 그리도 부러웠지만 언감생심이었고...
그러면서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시장과 막걸리의 참맛을 깊이 깨닫게 되어갔다.
이런 것들을 두루 갖춘 곳이 시장이었고, 그것도 시골 5일장이면 금상첨화였다.
각 곳의 여행을 다니며 마시는 막걸리는 그 지역의 인심과 닮아있다.
막걸리의 맛은 물의 맛인지라 그 곳 물의 탁도에 따라 막걸리 맛도 깔끔도가 달랐다.
그 중에서도 누룩냄새가 많이 나는 진짜 막걸리를 나는 좋아하고 많이 마셨다.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자동차를 장만해야 하겠다고 작정한 슬픈 계기와
그래서 차를 마련한 것이 나의 평생에 가장 탁월하고 멋진 전화위복의 자전적 선택이었던 일이 된 사연과 막걸리 맛에 대한 추억은 언제 따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시골 5일장이
지금은 상설시장들에 밀려 자연발생적인 시장은 거의 없어지고,
특화된 전통의 멋거리로 지방자치단체등에서 의도적 부활을 도모하기는 하지만 많이 쇠퇴된 것이 현실이다. 시골 오일장 그곳에 가면 특별한 특산물뿐 만이 아닌 사람들의 냄새가 너무 좋았다.
흥정에 흥정을 하고 덤에 또 덤을 얹어주며, 욕지거리 섞어 댓거리하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정겹고 좋은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시장거리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천방지축 다니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혼자서 남원에 갔다.
군산에서 남원이야 별로 먼 거리가 아니어서 한 바퀴 돌고 추어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내친 김에 구례로 넘어갔다.
역시 시장근처의 모텔에 잠자리를 정하고 시장구경을 나섰는데..
그날은 장날이 아니었다.
장거리에는 장이 서야 활기가 있지
장이 없는 날의 시골장터는 다른 때 보다도 더 쓸쓸한 법이다.
남원에 왔다가 내친김에 계획없이 들른 것이라 장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돌아서기 서운해서 가게에서 막걸리 몇 병과 마른 오징어 몇 마리를 안주 겸 저녁 군것질거리로 사서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폐장된 우시장 거리를 돌아드는데 (우시장은 소를 묶을 수 있는 나무기둥등의 특색이 있어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가 있다.) 어디서 희미한 장구소리가 들렸다.
잘 치는 가락장구는 아니었지만 농악가락 이었다.
그 곳으로 따라 가 보았다.
대부분 장구소리가 있는 곳에는 주막을 찾을 수 있는 것이 경험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쓰러져가는 아주 허름한 주막이었다.
여기까지 왔고, 바로 이런 곳이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냥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대문도 없는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인을 찾았다. “계셔요?”
엄마보다도 더 늙은 할머니가 어린 아이를 업고 나왔다.
“여기 막걸리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술은 있는디 안주가 없어서..”
“그냥 대충 먹으면 됩니다.”
“이것 밖에 없는디..‘’
부엌 탁자에 양재기를 덮어놓은 대접에 김치를 넣고 지진 물고기였다.
“모리가 장날잉께 오는 손님도 없고.. 그랴서 안주를 안 만들었는디... 이거이라도 자실라요? 술값은 싸게 해 드릴께라.” 할머니는 미리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신다.
“그럼요. 괜찮지요. 그리고 막걸리 값 안 깎아 주셔도 되요.”ㅎㅎㅎ
할머니가 상을 차리신다.
주안상이라야 붕어 지진 대접을 내 앞에 밀어주고 막걸리 사발만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웨서 오셨소? 여기 분이 아닌 거 같은디?”
“예, 군산에서 왔어요.”
“군산이 어디여? 예서 머요?”
“예, 구례에서 쭉 올라가면 전북 서해 바다 쪽에 있어요.”
“예, 여기는 장날이면 사람이 많이 오는디, 워디라고혀도 난 몰러서 건성으로 대답혀요.”ㅎㅎㅎ
“그러시지요.”ㅎㅎㅎ
“술은 장모가 따러도 여자가 딸면 더 맛있다는디 내가 한잔 쳐드릴까라?”ㅎㅎ
“그러세요.”
나는 건성으로 한잔을 마시며, 아까부터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그런데 칭얼거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고 말이었다.
“엄마, 엄마.”
할머니에게 자꾸 엄마라 부른다.
“저, 할머니 애기가 몇 살이에요?”
“인제 세 살 되요.”
“왜 할머니에게 자꾸 엄마라고 하네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긴 한숨을 쉬신다.
그런데 그 한숨에 아까부터 섞여서 들리는 장구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할머니, 장구는 누가 치셔요?”
“예, 우리 동무가 놀러 와서 치고 있지라.”
“할머니도 장구 치셔요?”
“찌끔 소시적에 풍물귀경 따라 댕길 때 조금 쳤지라.”
“할머니 친구 분도 술 하시면 함께 하시게 나오시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그라면 좋아 할끼라요.”
주막 할머니보다 허리가 더 굽은 할머니가 나오셨다.
우리 셋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옛날 장거리의 황금시대에 지리산에서 나오는 맛있고 싱싱한 나물 이야기를 안주삼아 나누었다.
그런데 할머니 등에 업혀 잠시 잠들었던 아기가 “엄마, 엄마”하고 칭얼댄다.
내가 오징어를 한 마리 주었더니 할머니가 다리를 떼어 주었고, 그 아기는 그것을 빨아 먹느라고 조용했다.
“할머니, 힘드시는데 아기를 계속 업고 계시네요? 어디다 잠깐 내려 놓으시지.”
“야는 내 등짝에서 떨궈지면 죽는 줄 아는 애라서. 잠잘 때만 옆에 끼고 자지라.”
”왜? 엄마 아빠는요?“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고 친구 할머니가 말한다.
“애미는 도망갔고, 애비는 어떤 년 끼고 어디서 사는지 코빼기도 볼 수가 없다요.”
“아~~~ 왜요?”
“애비란 놈이 노가다를 댕기다가, 워디서 한나 끼고 온 년이 애비가 벌이가 안 좋다고 새끼 까질러 놓고는 어떤 놈과 배가 맞었는지 없어져 버렸소. 그라서 요것도 지 애미 얼굴도 익히지 못허고 지 할미를 엄마 엄마하고 안 그라요!”.......
“나도 인제 나이 많아 곧 뒈질텐디, 이것 워찌헐까 모르것소.”
막걸리 두어잔에 붉으레하게 젖은 눈가에 여기저기 섞인 사투리 욕지거리를 하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신다.
그랬구나.
그냥 혼자 짐작이나 하고 말걸~~
“할머니, 그런 얘기 그만하고 장구나 한번 쳐 보시오.”
친구 할머니가 쳐 주는 장구가락 속에는 우리 셋의 아니 아이까지 우리 넷의 한과 눈물이 베어 나온다.
취기와 슬픔에 더 이상 마시기가 버거워 일어나니
“모리가 장날인디 나물이 겁나 나올틴디. 나물 자시고 가면 안돼요?” 하시며 눈으로 붙잡으신다.
“아. 애들 수업이 있어서 내일 아침에 올라가야 해요.”
“이곳 나물들 겁나 맛있다고 서울에서도 나물사러 오는디.
글코 나도 나물 잘 무친다고 근동에서는 알어주고....” ^^
“어떻게 해요. 다음에는 장날에 맞추어서 또 올께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계시고 있으셔요.”
그리고 헤어져 다음날 돌아왔다.
할머니 등에 업혀있던 계집애는 이제 다 큰 처녀가 되어있을 텐데....
별 사연없이 잘 자랐을까?
왜 사연이야 없었겠으랴만..
이제 할머니의 나물 맛은 영원히 못 볼 것이고..
나도 무던한 놈이다.
한 번 더 다녀오지....
요즘도 길을 가다 그 만한 아이를 보면,
엄마 얼굴도 모르는 그 애가 생각이 난다.
그 엄마는 그 애의 얼굴을 기억할까?
그후 장구를 배우고 나서
장구를 치면 그 소리속에 두사람의 얼굴이 가락처럼 떠돈다.
눈물을 그렁거리던 두사람..
나에게 서예를 하고 사군자를 치며 장구를 배우라고 말하던 나의 까망이와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를 업고있던 주막집 할머니가!
삶의 여행에는 이런 슬픔도 있는 법인데…
그러나 여정에 늘 슬픔만 있으면 어찌 긴 여행을 하겠는가?
이런 성정을 지녀 혼자 여행다니기를 좋아하는 내가
얼마 전에는 저희들이 돌봐 준다고 수학여행을 함께 가자던 이제는 늙어버린 중고등학교 동창의 친구들과 드디어 하루의 여행을 다녀왔다.
결국은
그들이 나를 휠체어에 앉혀 결국은 나를 돌봐주면서 그때 못찍었던 사진들도 찍어가면서 노익장들을 발휘했다.
아마 그날 몸살들 났겠지만 어느 놈하나 몸살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지금도 그때의 싱싱한 친구들이다.
그래서 인생 수학여행을 끝내기 전 친구들과 여행은 했다.
그래서 또
길에서 삶을 묻고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