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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녹취문: 팔복과 십자가와 성령_태승철 (마 5:3-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8.15|조회수171 목록 댓글 0

팔복과 십자가와 성령

(마 5:3-10)

 

 

2011년 인터넷 신년 사경회 오늘 마지막으로 함께 합니다. 여전히 본문은 마태복음 5장에 있는 팔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3절부터 10절까지만 같이 읽는데 어제께 우리가 팔복과 오복을 비교했습니다.

오늘은 팔복이 주 포인트가 아니라 팔복의 여덟 가지 전제가 있지 않습니까? 여덟 가지 조건이라고 그래야 될까요? 그래서 어떻게 읽냐 하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까지만 읽고 10절까지 여덟 개의 복을 계속해서 절절이 내려갑니다. 그 팔복의 내용은 읽지 않고 한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거기까지 봅니다.

  

여러분!

 팔복을 우리가 2주 동안 함께 사경회로 서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2주 동안 팔복과 오복을 비교하면서 사경회를 마친 뒤에 그저 제 소원은 한 가지 바뀌면 좋겠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그런 생각 하지 않습니까? 건강도 안 좋습니다. 사업도 잘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또 그저 내가 인생을 왜 사는지도 모르게끔 모든 게 다 별 볼일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이 있어요. "참 지지리도 복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박복할까." 그 의식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개통된 천국 안으로 들어가서 팔복을 누리지 못하고 팔복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개통을 모른 채 대통령이 된 분, 천국 개통을 모른 채 재벌이 되신 분, 천국 개통을 모르면서 노벨평화상을 타신 분, 이런 분들이 지지리 복이 없는 겁니다.

돈이 없고, 건강이 안 좋고, 세상적으로 하는 일이 지금 성공하지 못한 내가 지지리 복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의식 하나만 바뀌어도 우리는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다 라고 하는 말 한마디 내용이 바뀔 때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돈도 허락하시고, 건강도 허락하시고, 장수도 허락하시고, 모든 걸 다 허락하시겠지만, 그 모든 오복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제 그저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한 수단이요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돈으로 이루셔야 될 일이 많은 경우에 박집사님에게 나보다 더 많이 주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부럽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 이게 바로 팔복을 누리는 상태가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볼 오늘의 문제는 팔복이 있다 팔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팔복에 여덟 가지 전제가 따라붙습니다. 조건이라고 말해야 될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뭐 조건인 것이지요.

왜 조건이다 라는 말을 이렇게 하기가 조심스럽냐 하면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급이 은혜로 얻는 구원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만약에 조건을 제시했는데 조건을 잘 이루었다. 그것이 나의 공로가 되어서 복이 주어진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조건이라고 말하고 전제라고 말하더라도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이 팔복이라고 하는 건 천국을 입국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입국 자체가 무슨 대단한 공로가 아니지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에 입국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먼저 유학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팁을 줘요. 어떤 팁을 주시냐 하면 기숙사에 들어가서 기숙사 월세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시청에 가게 되면 월세의 지원금이 나온다는 거예요. 600마르크를 내었거든요? 그런데 한 100마르크 정도의 돈이 지원금으로 나와요. 저는 자식이 없이 공부를 했습니다마는 자식을 두신 가족이 유학을 왔을 경우에는 아이들 양육비가 지원이 나옵니다. 뭘 잘했다고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온 이국 이방인 유학생들에게 집세를 지원해주고 아이들을 키우는 양육비를 지원해주고 그리고 TV시청료 같은 걸 감면해주고 뭐 우리가 잘했다고… 입국한 거밖에 없어요. 그것도 내가 원해서 입국한 거밖에 없어요. 그런데 입국했다고 하는 독일 내 입국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러한 은총을 입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의 전제는 쉽게 말하면 천국을 들어가는 천국에 입국하는 행위라는 겁니다. 입국해서 봤더니 여덟 가지의 복이 주어지더라. 입국하는 행위의 모습을 여덟 가지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보여주고 계시는 거지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천국은 내가 시장을 가도 내 머리 위에 있고 내 삶과 접해 있으니까 내가 가정에 있어도 나와 접해 있습니다. 학교를 가도 있고 어디든지 그래서 유비쿼터스라고 하는 것처럼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이게 유비쿼터스 아닙니까?

어디서든지 천국에 접속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접해 있습니다. 접해 있으니까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여덟 가지의 전제를 통해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고, 그리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이러한 전제들을 통해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면에서 좀 문제가 있어요. 시장에서 장사하며 물건 사는 바쁜 와중에 학교에서 공부하며 직장에서 돈 벌고 직장상사들 눈치 보며 직장생활 할 때 어떻게 팔복이 누려질 수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덟 가지의 전제를 기억하며 그것을 수행해나가겠습니까? 어떻게 애통하겠으며 어떻게 마음이 가난한 자가 직장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겠습니까? 무슨 수로 온유함이라는 덕목을 내가 삶에서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여덟 가지 전제는 우리 한 가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내가 지금 어떻게 이루느냐 문제를 제기했잖아요?

그 전에 알아야 될 것은 예를 들어 온유함이 있잖아요? 이 온유함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격적인 덕목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온유함은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온유함, 믿는 사람들끼리도 사람과 사람 간에서 보여지는 온유함, 온유한 장로님 온유한 권사님 이런 온유함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아주 직선으로 연결되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맞춤형 주문형 온유함이라는 겁니다.

애통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이 틀어진 상태에서의 애통함입니다. 주문형 애통함이라는 거예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라는 것도 서울대학도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 기준에 드는 게 의거든요. 회사도 입사시키려면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기준에 들어가는데 하나님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의예요.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여덟 가지 전제를 우리가 어떻게 여덟 가지를 무려 삶의 순간순간 이루어가면서 천국으로 입국해서 팔복을 누리며 살아가겠느냐는 거예요. 따로 날 잡아서 신년 사경회 한다고 산속에 들어가서 그 산속에서 있으면서 지낼 순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팔복을 누리고 내려와선 또 다 까먹고 이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팔복과 십자가와 성령을 주제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제가 처음에 제목을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렇죠? 자, 이 팔복의 전제를 이룸에 있어서 우리가 이런 문제 어떻게 실천적으로 그것을 행할 수가 있느냐 이거에요.

  

여러분, 성공하는 기업들의 일곱 가지 습관,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 법칙…

일곱 가지 습관 또 다 잊어버렸어요. 여러분 뭐죠? 주도적이 되라. 두 번째가 목표의식을 가져라. 그 다음 상호이익을 꾀하라. 저는 스티브 코비의 삶을 한번 지켜봤으면 좋겠어요. 그분은 일곱 가지 습관을 이루고 있는 건지.

성공하는 기업들의 여덟 가지 습관. 리더십의 개인의 카리스마가 문제가 아니라 리더십이라는 것은 비전의 문제다 이게 첫 번째거든요. 그 다음에 기억이 안 나요. 내가 기업을 경영하고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공을 지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법칙을 수행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도 누가 그걸 지켜갑니까? 당장 몸이 피곤하면 움직이기가 싫은 게 사람이에요. 이 상사에게 욕 한번 들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게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니까 중학교 때지요. 순자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노자를 읽고 논어를 읽고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고 이러기 시작한 때가 중학교 때였거든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제시하는 원칙이 있어요. 어떤 주제든지 간에 그 주제에 해당되는 어떤 덕목을 이룬다거나 복을 받거나 이러기 위해서는 일, 이, 삼 법칙이 있습니다. 일, 이, 삼, 사가 될 때도 있고. 그래서 전도사님과 목사님들 설교할 때마다 말씀하시는 법칙 1, 법칙 2, 법칙 3, 그거를요 경전을 마음에 두고 있는 어린 중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정말 성실하게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법칙 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그다음 주일에 가면 또 다른 법칙 일이삼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가면 또 다른 법칙 일이삼이 주어져요. 어쩌다 절기 예배 때 주중에 예배를 한 번 더 드리게 될 경우에는 법칙 일이삼이 그 위에 더 주어지는 거예요.

그때 제가 깨달은 게 있어요.

목사님들도 설교 중에 제시하는 일이삼을 행하지 못하고 계신다.

왜 그러냐? 그 법칙 일이삼을 노트를 보고 말씀하세요. 적어온 설교 노트를 보고. 행하시면서 살고 계신다고 그러면 노트를 보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지요. 지금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한 거지요. 어떻게 매주 말씀하시는 일이삼 법칙을 매주 수행하고 계시겠어요? 일이삼 법칙의 제목도 모르고 계시는데.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고 계시는 판인데. 안 돼요.

 

성공. 기업의 성공이 돈 버는 겁니다.

성공하는 사람.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거 한 가지에요. 성공이라는 게.

한 가지를 위해서 일곱 가지 습관을 얘기하고 여덟 가지 법칙을 얘기하고 설득이라는 하나의 성공적 설득을 위해서 여섯 가지 법칙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덟 개의 복에 여덟 가지의 전제가 있는데 그 여덟 가지의 전제를 이루기 위하여 단 하나를 제시하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의미가 뭐냐?

그거를 간단하게 펼쳐보면 여덟 면으로 펼쳐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연구하고 느끼면 느낄수록 8면뿐만 아니라 백 면 200면 천 면도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주님께서 공생애 첫머리에 정말 공생애 첫머리입니다. 첫머리에 내가 이 공생애에 마지막으로 이룰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듯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를 자신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복을 말하자면 여덟 개의 복이 주어질 텐데 그 여덟 개의 복은 여덟 가지의 전제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 여덟 가지의 전제가 바로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단 하나의 행동의 의미다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단 하나의 행동이 팔면체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마음의 청결함, 긍휼이 여김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될 전제들인데 이것들이 주님의 십자가 하나 붙잡으면 내가 애통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동안에 애통함의 조건에 충족되고, 마음이 가난한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는 가운데 마음 가난함의 전제가 충족되고, 긍휼히 여김의 전제가 충족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한 거. 애통한 게 뭐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내 마음에 살처럼 느껴지는 가까운 측근들 그러니까 나인 성 과부에게 아들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런 가까운 살처럼 느껴지는 자들의 죽음을 내 마음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애통해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십자가의 의미가 뭡니까?

자식 앞에서 내가 죽은 거예요. 애통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자식 앞에서 죽은 것만인가 봤더니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게 뭐에요? 마음이 가난해지더라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는 게 사도 바울의 말대로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거거든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 마음의 지불을 다 거둬들이는 거예요. 지불했던 마음들을 회수하는 겁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냐?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세상을 이륙한다는 거라 이겁니다. 세상을 이륙하다 보니까 세상 위에 떠있어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그러니까 대통령을 봐도 긍휼히 여길 수가 있고 위에서 보니까. 낙차가 있어야 긍휼히 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온유한 자, 온유한 자가 되려고 하다 보니까 내 생각과 내 판단의 뼈가 없어야 되고 내가 내 스스로 내 생을 위하여 갖게 되는 소원의 뼈가 없어야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남의 계획이 부드러운 나의 마음 안으로 아무 저항감 없이 들어올 수 있더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내 판단이 죽고 내 소원이 죽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십자가 하나를 멋모르고 붙잡고 있는데 여덟 가지의 전제조건이 다 이루어지면서 내 삶에 접해져 있던 개통된 천국의 관문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 안에 덩그러니 내 마음이 입국해서 서 있게 되게 된다는 거지요. 참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여러분?

  

성공 하나를 위해 기업의 이윤 하나를 위해 흑자 경영 하나를 위해서 여덟 가지의 습관을 배워서 실천해가야 되는데 어마어마한 율법주의입니다. 성공하는 일곱 가지 습관, 긍정의 힘 이게 다 율법입니다. 여러분! 이게 다 율법주의에요.

율법주의가 뭡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이용해서 오복을 얻으려는 게 율법주의 아닙니까? 율법이 나쁜 게 아닌데 율법주의가 되면 나빠요.

복음주의가 뭡니까? 복음을 가지고 오복을 얻으려는 게 복음주의에요. 아주 고약스러운 거지요. 기복신앙이 바로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라는 건 제가 만든 말이에요. 율법주의에 준해서 조어를 한번 해 본 겁니다.

기복신앙이 뭡니까? 복음을 가지고 오복을 얻겠다 라는 겁니다.

오복이 뭐에요? 이 세상의 빛들이에요.

팔복이 뭐에요? 천국에서 느끼게 되는 복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하나 붙잡으면 이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 땅에 오복이 빛을 바랠 수밖에 없는 그런 복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상황이 이제 우리가 성령에 관한 얘기를 할 때가 되었어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마음이 가난해졌고 내 마음에 살과 같이 붙어 있던 정말 살을 끊어내는 것 같은 애통함을 겪으면서 그들과의 관계가 죽었어요. 그러면서 내 마음이 천국으로 입국을 했습니다. 몸과 연관돼서 몸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벌어지던 이 삶의 현장을 떠나 버린 거예요. 몸이 있으니까 자녀도 있고 몸이 있으니까 배우자도 있고 몸이 있으니까 회사도 나가고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이 세상에 살과 같이 붙었던 이 마음이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면서 천국에 들어갔어요.

 

기도해야 돼요. 여러분! 제가 기도라는 말을 비율적으로 보면 강조를 많이 안 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대전제 중에 전제에요.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면서 입국할 수 있습니다.

 

자, 입국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팔복은 하나님과의 교통과 관계에요.

자,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시잖아요. 위로가 뭐에요? 내 측근이 다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죽음을 경험하는 애통함을 가졌더니 천국으로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위로해주신다. 하나님이 당신을 나의 측근으로 내주시는 거예요. 다른 모든 측근이 없어지니까.

자,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통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게 팔복인데 문제는 내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느끼느냐 이겁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는 몸의 오감관을 통해서 대상들과 관계했습니다. 애인과 관계하고, 사업장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돈을 보고 돈을 쓰면서 그 돈 쓰는 재미를 느꼈고 마음이 느낀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로 죽고 천국에 마음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이 하나님을 느끼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을 느껴야 팔복이 내 것이 되는데 전부 하나님과 관계되는 거니까요. 전부 팔복 전체가 다.

 

어떻게 느껴요?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거예요.

천국으로 입국하자마자 그 경계선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는 그 순간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시면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이 몸을 통하여 세상의 대상들을 느꼈던 것처럼 하나님을 대상으로 느끼게 해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기점으로 접점 아닙니까? 세상과 천국이 붙어 있는 접점인데 십자가를 기점으로 세상적으로 나오면 내 마음이 몸을 통하여 외부세계를 느끼며 살아가게 되고, 내 마음이 십자가를 기점으로 천국으로 입국하게 되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서신서 전체를 관통하면서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얘기하는 것은 마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몸을 통해 느끼게 되는 느낌을 따라 살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천국으로 들어가서 성령을 통하여 느껴지는 천국의 세상을 마음에 느끼면서 살아가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지요.

  

성령의 역사가 바로 팔복을 실제 실감이 나도록 내 것이 되게끔 해주는 역사를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천국에 입국하게 하는 사건이라면 천국에 입국해서 천국의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내게 붙어서 역사해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내 마음이 아! 천국을 느끼는 거예요. 몸을 통하여 지금 밖에 나가면 영하 10도다.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이 천국에서 천국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 한번 실제의 예를 성경을 통해 한번 들어봐요.

자, 오순절 강림 사건이 있습니다. 오순절 강림 사건을 전후해서 일어난 사건들을 한번 잘 살펴봅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시게 된 사건은 주님께서 약속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고 하는 약속이 주어집니까?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했고 그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자 부활하신 주님께 마음이 붙어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다 회수했습니다. 오직 그 사람들이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먹고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니까 그 주님 앞에서 마음이 다 주님께로 드려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다 끌어 모아가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붙잡을 때 마음이 입국하는 과정이에요. 주님의 죽음과 연합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될 때 그때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에요.

자, 이제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께 드렸던 사람들이 다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천국에 입국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사건이 뭡니까?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이거 중요해요. 여러분! 십자가를 경험하고 십자가 사건을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승천하신 주님 따라서 천국에 입국하게 되고 그 다음에 성령이 강림하면서 그리고 성경의 기록은 무섭고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뛰쳐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방언이 나오고 기적과 이사가 행해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주의는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방언이 터졌고 기적이 나타났고 이사가 행해진 일에 주목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포커스가 맞추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운동을 하는 분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늘 성령운동은 방언과 기적과 이사로 대표됩니다. 그리고 그게 항상 이슈가 되는 겁니다. 아! 기적이 일어났다,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다, 정말 불치병이 나았다. 그리고 형통하더라. 아! 정말 성령이 강림하면서 내 생이 형통하기 시작한다, 방언을 말한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마음이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말하고 기적을 행하시기까지는 이미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천국에 주님 따라 올라간 제자들의 마음이 천국에서 팔복을 누린 것이에요. 이 면을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님은 이 땅에서 기적을 행하시고 이사를 행하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전에 팔복을 내 것이 되게끔 해주시는 분이라 이겁니다.  

이들이 뛰쳐나간 이유는 뭡니까?

너는 내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일컬음을 받고 나서 마음에 영원성의 복을 갖게 된 겁니다. 어! 죽음이라는 게 없네!! 그전까지는 벌벌 떨고 있어요. 두려워서 못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했지마는 두려워하는 자들이에요. 자기의 스승을 죽인 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런데 그들이 뛰쳐나갑니다. 그들 앞에 나가서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전합니다.

왜? 너는 내 아들이다. 아들이라는 말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요? 영원성이 들어 있어요. 그 영원성이 성령을 통하여 마음에 느껴집니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사용했던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도 적용이 되네!

성령께서 그것을 느끼게 해줘서 영원한 아들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팔복을 먼저 느끼고 기적을 행하고 방언을 했다고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팔복이라는 걸 몰라요. 팔복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이들이 지금 마지막 단계 핍박을 받는 단계 삶의 현장의 단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어떻게 다르냐 하면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하면 내가 권세를 줬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성령을 통한 권세하고는 다른 거예요. 파송하시면서 권세를 주신 겁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 안에 있지만, 주님이 떠나시고 난 뒤에 보혜사의 성령이 아니라 일시적인 겁니다.

그렇게 전도를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귀신을 쫓아냈던 자들이 십자가에서 다 도망가니까 그거는 보혜사 성령님의 시점이 아직 아닌 거지요. 그런데 그들이 와서 주님께 보고할 때에 난리가 났어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까 어! 세상에 귀신이 쫓겨나가는 겁니다’ 하고 기뻐하며 난리가 났어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 그러세요?

그게 기뻐할 일이냐? 너희가 권능을 행하고 기적을 행해서 귀신이 쫓겨나가고 이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고 이 땅 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그건 기쁨의 대상이 아니다. 너희가 마음에 기뻐해야 될 대상은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이 바로 기뻐할 대상이다 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대상을 바꾸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게 기쁩니까?

그게 다 양파껍질 벗기듯이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속에 동기와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서 오복을 추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귀신이 쫓겨가면 대우를 받습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대우를 받습니다. 앉은뱅이 하나 일어나면 앉은뱅이 하나 일어나는 그 사건 당 교인이 천 명 만 명 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걸 기뻐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걸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라.

그런데 천국에 기록된 사실을 기뻐하는 이 변화를 위해서 오순절 강림 사건까지 보류됩니다. 제자들이 천국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할 수 있기까지는 성령강림 이전에는 불가능했다는 거예요.

  

자, 귀신을 쫓아내고 좋아했습니다. 이 사건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건을 한번 잘 보세요.

성령강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게 기쁘고 방언하는 게 기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성령이 강림한 뒤로는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 뒤에 사람들이 그들을 숭배하러 왔을 때 큰일 난 것처럼 “사람들아 왜 이러냐 내가 한 게 아니다” 기뻐하기는커녕 벌벌 떱니다.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그리고 자꾸 뒤로 물러납니다. 베드로를 숭배하려고 솔로몬 행각에 몰고 갔잖아요. 자꾸 뒤로 물러납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러면 안 돼. 큰일 나.”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기적을 행했습니까? 그러면 광고하지 말고 조용히 입 다무세요.

주님께서 뭐라 그러세요?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왜? 그 사람이 불쌍해서 기적을 행했지마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이 몰려오게 됩니다. 사람이 몰려오는 자체가 세상은 뭐라 그러냐 하면 귀하게 되고 성공한 것입니다. 오복이 충족된 겁니다.  

주님이 경계하십니다. 그걸 기뻐하지 마라. 이 땅 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이 땅에서 나를 통해 하나님이 권능을 행하실 때 그걸 기뻐하지 마라. 이미 너의 기쁨은 천국에 입국한 마음이 팔복에서 충족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팔복이 충족이 되어진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서 기적이 일어날 때 그 기적을 “아니야 아니야 쉬쉬” 왜?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기적 하나 보고 몰려올 때 오해하는데 그 오해한 길만큼을 돌이켜서 제대로 오게 하려면 기적이 안 일어나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고 오잖아요? 십자가 볼 때 다 도망가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될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마음이 이 세상에서 이루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것은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나는 십자가 붙잡고 천국 입국했으면 이 세상에 대해선 끝인 겁니다.

그 끝이 한번 끝났다가도 또 다시 십자가에서 기어 내려오고 또 다시 내려오니까 날마다 죽는다는 것뿐이지요.

  

성령의 역사는 여러분 팔복을 내 것으로 해주면서 동시에 오복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겁니다. 오복을 얻게 해주는 게 아니에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는 오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성령을 받지 못해도 성령 받은 목사님 밑에 가서 부흥회 하면서 그분에게 안수기도 받으면서 문제 해결을 원하고 형통을 원합니다. 성령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팔복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려고 주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또 다른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팔복으로 누리게끔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오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돈 많이 벌잖아요. 베드로가 그 솔로몬 행각에서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친 것 때문에 존경을 받을 때 막 밀쳐내는 것,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 사람들을 막 쫓아내고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과 비교하면 돈 많이 벌릴 때 돈을 두려워하세요. 돈이 많이 벌릴 때 돈을 멀리하세요. 너무 몸이 건강할 때 건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건강한 몸에서 모든 죄악이 다 나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 무슨 죄악을 저지르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오복처럼 무서운 놈들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 오복처럼 무서운 원수가 없는 거예요. 내 마음을 천국에서 끌어 내립니다.

  

여러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복으로 갖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이에요.

위로의 복? 하나님이 옆에 계시는 것이에요.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이런 연합관계로 하나님이 사역을 해나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는 복? 봄에서 기쁨이 나오는 거거든요. 모든 것이 팔복으로 끝나는 거예요.  

팔복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복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받을 복이 없다는 거예요. 그다음엔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다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자! 팔복의 이야기를 이제 마칩니다.

여러분! 팔복을 받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가야 됩니다. 입국해야 됩니다. 천국의 관문이 주님의 십자가에요. 우리 삶에 늘 붙어 있어요.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이 하나의 고백이 하늘나라 올라가서 하나님 한 분과 여덟 가지 방면으로 교제가 이루어지는 팔복이 이루어지기 위한 여덟 가지 전제가 있는데 그 여덟 가지 전제를 한 번에 충족시켜 줍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땅에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 내가 죽은 자라는 고백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직장이든 시장이든 가정이든 학교든 어디든 내가 죽은 자인데 이 땅에서 일은 이뤄져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인데 꼭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기도하는 시간이 없으면 십자가도, 성령님의 강림도, 팔복도, 하나님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주 동안 사경회 한 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십자가 붙잡고 천국에 입국하면 내 마음이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성령이 강림해주실 것이에요. 성령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강하게 느끼시면서 팔복을 누리시고 난 뒤에 눈을 떠보세요. 세상이 이 땅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을 거예요. 저벅저벅 걸어 나가셔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행해나가시면 다 복이지요.

그러다 또 들어와서 또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 십자가 붙잡고 또 기도하고 입국해서 하나님의 팔복을 또 누리면서 또다시 새날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칠십 평생 365일 팔복이면 팔복을 몇 번 누려야 될까요? 수십만 번 수백만 번 누려야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복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2주간에 걸친 팔복을 주제로 한 인터넷 신년 사경회를 허락해주시고 이끌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기도하면서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여 팔복이 내 것이 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에 들어가게 하시고 팔복으로 배부른 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움직이시고 행동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어 드리며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에서 복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 있는 2011년이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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