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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교회의 성령충만 조건, 삼 충격
(사도행전 1:6~11)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삶과 교회의 성령충만의 조건은 세 가지 충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세 가지 충격을 받아들일 때, 성령은 충만히 임하시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예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 이 사건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백이십 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하는 중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계기로 이 세상에 신약시대의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잘못된 교회, 교회가 아닌 종교를 교회로 오해하고 고집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부인함은 곧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은 교회의 시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요? 이미 틀에 짜여있는 기독교 종교의 예배당 회원이 되어서 종교 생활을 해왔던 것 외에는, 오순절 성령충만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명 성도에게 성령충만이 임했던 사건 전후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즌3의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2주 동안 도움닫기를 할 것입니다. 높이뛰기나 멀리뛰기 선수들이 일정한 거리를 달려와서 도약하는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도움닫기이듯이, 우리도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2주 동안 도움닫기의 기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주제는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교회와 성령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교회를 피한다는 것은 믿음을 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기본 개념을 확실히 하고 입장을 정리해야 될 때가 됐습니다. 시즌1과 시즌2에서는 몸담고 있던 예배당, 예배당이 소속된 교단이라는 틀 안에서 기독교 종교를 문제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교회가 아니며, 복음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도 아니며, 구원받았다는 확신과는 다르게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외치기 시작한 지 1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시즌3에서는 몸담았던 기독교 종교가 되어버린 예배당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구분입니다. 천국은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내 마음이 가서 머물러야 될 하늘 아버지의 집입니다. 24시간 육체로 사는 동안에 천국을 마음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 둘 곳입니다.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육체의 몸이 아니라, 마음이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성도가 어우러져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컫는 것입니다. 같은 천국이지만 육체의 몸을 입고 있을 때는 마음 둘 곳으로써의 의미를 갖고, 육체의 몸 대신 마음이 신령한 몸으로 갈아입고 난 뒤에는 새 삶의 터전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 예루살렘 성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란 하늘에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된 교인 전체의 어우러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상 속에서는 이미 새 예루살렘 성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교회란 육체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이 땅에서 이루어질 성도들의 어우러짐입니다. 이 어우러짐은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구약시대부터 선민들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동서남북으로 진영을 짜기가 가장 우선적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알려진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앙에 모신 성곽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성곽의 모습은 정방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동서남북 각 방향에는 세 지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곽의 기초석들이 열두 제자라고 했습니다. 구조적으로 네 방면으로 세 제자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동서남북과 관련하여 우리가 네 명씩 모임을 갖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열둘이라고 하는 숫자는 완전 숫자로서 선민 전체를 상징합니다. 실질적인 면에서는 열두 명이 모이게 되면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없고 몇 사람만 이야기하다가 끝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상대로 만들어진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 재림 이후에 그 구상대로 채워질 모든 성도의 어우러짐인 새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따라 이 땅에서의 교회는 동서남북으로 진영을 짜며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들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동서남북 제1교회, 동서남북 제2교회와 같은 식으로 하여 지금까지 동서남북 제11교회까지가 확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신청한 순서대로 나갑니다. 제일 먼저 신청한 분과 동서남북을 이룰 분들이 나중에 신청했더라도 제일 먼저 신청한 분이 속한 곳이 제1교회가 됩니다. 두 번째로 신청한 분이 속한 곳이 제2교회가 됩니다. 충청남도에서 비닐하우스로 딸기농사를 지으시는 부부께서 제일 먼저 신청하셨고, 그분들이 속한 교회가 동서남북 제1교회가 되었습니다. 제2교회는 일산에 사시는 싱글인 분이 신청하였습니다. 이분께서는 싱글들의 모임으로 동서남북을 하고 싶으시다는 요청을 하셔서 일산에서 싱글들의 모임이 동서남북 제2교회가 되었습니다. 제3교회는 경남남도 창녕에서 목사님 부부가 신청하셨습니다. 그분들을 중심으로 장로님 세 분과 함께 다섯 분이 모이게 되는데 이분들이 동서남북 제3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11교회까지 늘어났습니다. 만들어지는 대로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며 진행될 것입니다.
문제는 땅에서 이렇게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교회가 이루어지는데, 이 교회의 교회다움과 교회로서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관건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각각의 동서남북 교회를 성령께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통해 설교를 하고 있는 제가 동서남북 교회를 관장하고 컨트롤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동서남북이라는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딴 이 땅의 어우러짐인 교회도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모일 수 있는 교회를 위해 돕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제가 옛날에 목회를 할 때처럼 부목사님을 두고, 전도사님들을 두고, 장로님을 세우고, 권사님, 집사님, 권찰들을 세워서 교회를 조직으로 이끄는 형태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동서남북으로 어우러지는 한 교회, 한 교회를 관장할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평소에 성령이 이끄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까요? 예배당을 다닐 때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 궁금증이 생깁니다. 동서남북 교회가 몇 교회까지 이루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하나하나를 성령께서 인도해 나가셔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완전히 장악하셔서 이끌어 가실 수 있을까요? 참 믿음을 갖고 있다면 참 교회를 사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참 교회를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어제 오후에도 78세 되신 권사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오신 권사님입니다. 굉장히 총기가 뛰어난 분이신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설교의 제목을 외우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셨습니다. 저도 이제 65살이 되어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입니다만, 몸을 입고 사는 인생의 기간 동안에 참 교회를 살아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 믿음이 있다면 참 교회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종교는 우리의 정든 울타리였습니다. 이제까지는 기독교 종교까지도 참 교회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려 20년 가까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갈 길을 가라는 확신을 주셔서 동서남북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속한 동서남북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대답은 성령님께서는 이 땅으로 출장 나오신 하나님의 주체성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주체성이 이 땅으로 출장 나오신 영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강력하게 활동을 하신다면 내 주체성이 이 세상을 향하여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내 주체성이 완전히 죽는 것은 ‘주체성을 죽이라’는 명령에 의해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땅으로 출장 나오신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님께서 걸리적거림 없이 마음 놓고 활동하실 수 있도록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주체성이 완전히 죽을 수 있을까요?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당신을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세 가지 충격을 집어넣어 주십니다.
제가 언젠가 파입(破入)이라는 표현을 써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파입(破入)은 깨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깨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충격파가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 충격을 통해서 이 땅으로 출장 나오신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님께서 걸리적거림 없이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마음 놓고 활동하실 수 있는 판이 깔릴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충격에 의해 성령님께서 활동하실 수 있는 판이 깔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세 가지 충격 중에 마지막 충격이 마무리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충격의 첫 번째는 십자가 충격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십자가는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잔인한 처형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최악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던 모든 꿈과 바람과 소원이 파괴되는 무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이 세상에서 내 소원과 바람 중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루는 건 고사하고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사소한 소원이나 바람조차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80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해서 아예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원조차 할 수 없는 십자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직접 당하시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받았던 충격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충격의 강도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이 결정됩니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받은 충격의 강도를 우리는 그동안 시즌1과 시즌2를 지나며 18년 동안 조금씩 채워왔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듯이 제자들의 충격의 여파, 충격의 온전한 힘, 충격의 정도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채워왔던 것입니다.
이 충격이란 세상에 대해서 소원과 바람조차 할 수 없는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충격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 십자가를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내용을 가장 먼저 깨달은 자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전까지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제일 먼저 파악하였으나 이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태에서 세상에 대해 소원조차 할 수 없는 자리로 가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지금 예배당에서 이 충격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기에 성령충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한 번에 받아야 했던 충격의 강도를 오랜 기간을 거쳐서 점차적으로 쌓아가듯이, 세상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바람이 없고 소원이 없는 상태로 접근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이는 동서남북 교회와 내 삶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면 제자들이 바랐던 십자가 충격의 강도를 어쨌든 가까이 채워나가야 합니다. 충만하지 않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시려면 어느 정도라도 이 충격에 가까이 가야 합니다.
두 번째 충격은 부활 충격입니다. 제자들은 능력 많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이것 또한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느꼈던 부활의 충격을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동안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과의 정혼에서부터 결혼까지의 기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제일 무서운 사건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육체의 죽음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부활의 충격을 받으면 육체의 죽음은 내 의식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강도의 충격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핵잠수함이나 핵발전소가 핵의 힘을 조금씩 내보내면서 터빈을 돌리듯이 오랜 기간을 거쳐서 부활의 충격파를 축적하고 모아왔습니다. 이로부터 육체가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육체가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일시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 양 예수님과 정혼하고 결혼하는 기간 동안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충격을 통해 육체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성령이 마음 놓고 활동하실 수 있는 판이 깔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충격은 승천의 충격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비행기나 헬리콥터는 물론이고 열기구나 수소 풍선 같은 것도 없던 때입니다. 하늘은 새나 곤충들이 날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몸이 떠오르십니다. 이러한 현장을 보았던 제자들에게 임했던 충격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붕 뜨면서 저 높은 구름에 가려질 때까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이 어찌나 정신을 못 차리는지 천사가 나타나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속히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이 승천의 충격이 제자들의 마음에 특별한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발로 땅을 딛고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세상이 삶의 전부라고 느끼며 살았습니다. 오늘도 뉴스를 들어보면 80억 인구가 사는 지구의 모든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이러한 뉴스에서 단 한 마디라도 이 땅의 삶의 현장과 무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자들 또한 땅을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몸이 그대로 붕 뜨시더니 하늘로 사라지십니다. 이로부터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명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이 충격 때문에 제자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동안 제자들에게 마음 둘 곳은 미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셔서 천하만국을 다스리실 때 자기들은 장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수평면상에서 미래를 향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직으로 올라가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마음은 위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천의 충격파로 인해서 제자들의 마음에서 삶의 터전으로써의 이 세상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될 삶의 영역은 이 땅이 아니라는 충격의 여파가 마음속에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보았던 모든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 저도 데리고 가세요.’라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이 아무러면 이 세상보다 못한 곳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일, 매듭짓지 못한 일, 찝찝한 일, 거북한 일을 다 남겨두고라도 가야 할 곳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내 눈앞에서 육체를 입으신 모습으로 승천하고 계신데,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승천의 충격은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고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만 마음을 두게 합니다.
제가 독일에 가 있을 때 저희 어머니의 마음은 한국에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간 아들을 따라 어머니의 마음도 독일에 와 있었습니다. 애인이 미국으로 출장을 가면 마음은 한국에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출장 간 애인을 따라 미국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이 승천의 충격은 마음을 완전히 하늘에 붙들어 매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핵폭탄 같은 충격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 충격파를 오랜 세월을 두고 십자가 생활화를 거듭 반복하면서 조금씩 쌓아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에 교회를 드러내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고, 나 자신의 삶도 성령충만한 삶이 될 것인가를 세 가지 충격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충격, 부활의 충격, 승천의 충격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종합적인 효과는, 이 세상에서 몸은 살아있으나 마음으로는 살 수 없는 자들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추진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직도 이런저런 나의 주체성으로부터 판단하고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십자가 충격과 부활 충격과 승천 충격은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십자가에서 완전히 못 박힌 상태, 마음을 하늘에 둘 수밖에 없는 상태, 육체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게 해줍니다. 이렇게 나의 주체성이 걸림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출장 나오신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께서는 마음 놓고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고, 내가 참여하게 될 동서남북 교회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저는 목이 터져라 이 충격파를 방송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앞으로 13년 이상 계속 던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충격파, 부활의 충격파, 승천의 충격파를 계속해서 던질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충격파가 모이고 모여서 제자들이 직접 보고 일시에 받았던 충격의 수준까지 이른다면, 성령충만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약속대로 선물로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고, 여러분이 속한 동서남북 교회를 이끌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제는 성령으로 사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신약의 교회 시대가 열린 것과 같습니다. 나 개인의 삶에도 성령의 시대가 열려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충격받을 각오를 하시길 바랍니다. 충격을 받아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소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충격을 받아서 육체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충격을 받아서 오직 마음은 하늘에만 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말씀을 끊임없이 전달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취지에 맞추어 세 가지 충격이 제자들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시며 말씀을 상고하시고 함께 호흡을 맞춰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 가지 충격의 강도가 십자가를 직접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환송하던 제자들의 충격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가 이제 성령의 시대를 여는 놀라운 은혜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