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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걸러낸 교회의 성령충만
(사도행전 1:12~26)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증인이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후에 백이십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에 전념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에 앞서 사도 베드로는 회중들 앞에서 한 가지 정리해야 할 문제를 제안합니다. 열두 제자 중에는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자살하였고, 이에 따라 열두 사도에는 결원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열두 제자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 제비 뽑아 맛디아를 선출합니다.
사도는 곧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하고, 승천과 이어지는 사건으로써의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들은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승천 사건이라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세 가지 사건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도 충격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습니다.
십자가 충격을 받아서 나타나는 일은 마음으로 집착하고 애착하던 세상과의 결별입니다. 마음과 세상의 밀착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충격을 통하여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가장 두려운 일인 육체의 죽음이 파괴됩니다. 마지막으로 승천의 충격을 통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 폐쇄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기존에는 마음에 둘 삶의 영역을 세상 안에서만 찾았습니다. 이 세상 폐쇄성이 승천 충격을 통해 파괴됨으로써 천국이 일일생활권의 마음 둘 곳이자 직접적인 현실로 주어지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명은 이러한 충격을 통하여 고꾸라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의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전체 중에서 십자가 충격과, 부활 충격과, 승천 충격 앞에서 마음이 고꾸라지고 녹다운된 자들이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백이십 명으로부터 유대 종교와 이스라엘 전체를 등지고 교회는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이들은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에 의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상태가 깨지고 세상 폐쇄성이 파괴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천국을 마음 둘 현실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안점을 둘 곳은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를 걸러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교회는 교회답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전에 열두 제자에게서 가룟 유다를 걸러내는 일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백이십 명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는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직전에 새로운 사도로 맛디아를 뽑는 이야기가 선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가룟 유다를 걸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습니다. 교회가 존속하고 교회답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룟 유다를 걸러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십자가 충격을 자발적으로 회피하는 사람들은 걸러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충격을 받아서 이 세상을 향한 애착과 집착과 밀착이 마음에서 무너져 내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온통 세상에 밀착된 상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충격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을 포함합니다. 가족도 세상입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 때문에 마음이 세상에 밀착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좋은 아내라서 남편에게 밀착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남편이라서 아내에게 밀착되는 것이 아니며, 좋은 부모라서 자녀에게 밀착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밀착되는 이유는 죄와 저주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세상에 밀착된 상태에 대해 충격을 받으라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충격을 받고 고꾸라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끝까지 믿으려면 충격을 받고 세상 밀착 상태가 고꾸라지고 녹다운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밀착하고, 세상에 대해 애착을 갖고, 세상에 대해 집착하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보존하기 위하여 십자가 충격을 피하거나 우회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가룟 유다이며, 가룟 유다의 계열에 속한 자들입니다. 모든 교인들 안에는 가룟 유다의 유전자적 속성을 갖고 있기에 계속 걸러내야만 합니다.
십자가 충격은 우리의 죄와 저주에 바탕을 둔 의식체계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마음 채울 거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을 붙잡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기쁨 거리를 찾으려 할 때 제일 무서운 일은 몸이 죽는 것입니다. 몸이 죽으면 더는 세상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직 세상에만 마음을 두는 폐쇄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충격은 이 의식체계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체계를 유지한 채로 교인들 틈에 끼어들어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 계열의 사람들을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교회는 무늬만 남은 기독교 종교로 변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오히려 교회가 걸러내야 할 세상 밀착 상태를 격려하고 북돋우고 인정합니다. 세상에 대한 열망이 활활 타오르도록 기름을 부어줍니다. 천국은 지금 마음을 둘 곳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갈 곳이라고 속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건강과 장수를 최고의 복으로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자칭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충격을 통해 이러한 가룟 유다를 걸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인들 마음속에 있는 가룟 유다적 속성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것이 분명해지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더 이상 따라가서는 안 되겠다고 피하고자 합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제자들 간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제자들은 예상 못 한 십자가 충격에 얻어맞아 그 자리에서 녹다운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십자가 사건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자발적으로 피해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는 함께할 수 없다고 결별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지금 기독교 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오직 십자가 생활화 하나만을 붙잡고 외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아들들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교회 안에 들어온 가룟 유다 계열의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붙잡고 그 상태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십자가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십자가 충격을 가하지 않으면 교회는 없어지고 맙니다. 무늬만 교회인 종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종교는 세상과 밀착되어 있고 애착하는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신을 만들어 내고 삶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에 근간을 두고 세워진 의식체계에서는 ‘이 세상이 좋다, 세상에서 만족을 얻어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바람을 갖게 됩니다. 실로 지긋지긋한 상태입니다. 저는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누구에게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제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제비 뽑아 맛디아를 선출합니다. 백이십 명 중에서 사도를 하고 싶은 사람이 손을 들어서 뽑았던 것이 아닙니다. 제비를 뽑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주권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무엇인가 있다는 존재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찾아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인간은 세상을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인간의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 때문에 세상살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본래대로라면 이 세상 것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만 세상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래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은 세상 것을 바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인간은 위의 것을 바라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몸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살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으로 천국살이를 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내 몸으로 세상살이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성령으로 살아야 되고, 교인도 성령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충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고,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고, 바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내가 십자가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생활 현장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생활 현장에 대해 죽어야 성령의 세상살이가 시작되고 성령의 교회살이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대화를 하거나 함께 생각을 주고받을 때 절대로 잊어서 안 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네 명이 모인 동서남북 교회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서 성령살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살이 안에서 나의 과오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십자가 생활화의 실패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다짐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정적인 차원에서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인간은 존재감을 느끼고 좋은 것으로 마음을 채우는 천국살이를 해야 됩니다. 세상살이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충격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성령의 세상살이가 이루어지지 않고, 성령의 교회살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와 저주의 근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세상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마음에 스며들어올 수 있습니다. 미래의 문제가 마음에 스며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스며들어 온 세상은 일종의 독소입니다. 이것을 걸러내야만 합니다. 마음에 스며든 세상은 두려움, 걱정, 불안, 염려, 근심, 불만, 불평, 짜증, 신경질, 시기, 질투, 탐욕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의사도 상담사도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부부관계 때문에 상담을 해도 마음에 부부관계라는 세상이 들어온 상태를 전제로 하고 상담하기에 답을 얻지 못합니다. 남편이 마음에 아내를 담고 있고, 아내가 마음에 남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안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담고 있는 마음이 십자가 충격을 받아서 고꾸라지고 녹다운되어야 하나님에 의해서 부부관계는 설정될 수 있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돈이 들어왔기 때문에 걱정, 근심, 불안, 불평과 같은 온갖 느낌이 생겨납니다. 돈이 스며들어온 마음이 십자가 충격으로 고꾸라지고 녹다운되어야 돈과의 관계에서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기능은 비유적으로 신장 투석과 닮았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몸이 양분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독소들도 들어있습니다. 그러한 독소는 양분과 함께 혈관으로 들어갔다가 신장에서 걸러지고, 노폐물과 수분은 소변으로 배출됩니다. 그런데 신부전으로 인해서 기능이 약해지거나 못하게 되면 배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먹어서 흡수된 모든 독소와 노폐물이 걸러지지 못한 채 혈관 속에서 흐르게 됩니다. 수분도 제대로 배출이 되지 않아서 몸이 붓습니다. 당뇨병이나 신장병을 앓는 분들을 보면 돌아가시기 직전에 전신이 부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신장 투석을 해야 합니다. 외부에 있는 인공신장으로 피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다시 몸으로 주입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주일에 서너 번씩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와 저주를 바탕으로 인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속으로 세상이 스며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태는 끊임없이 신장 투석을 해야 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 신장 투석의 기능을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내 마음에 스며들어 온 세상이 걸러지고, 없어지고, 깨지고, 부서져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내 마음 상태가 퉁퉁 부어오르게 됩니다. 내 마음 상태가 세상의 독소에 의해서 부풀어 오를 때 나타나는 증상이 두려움, 불안, 걱정, 근심, 염려, 시기, 질투, 짜증, 신경질, 불평, 불만 등입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전부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마음의 독소가 해소되지 않고 노폐물이 빠지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인 각자나 교회 모임에서나 끊임없이 십자가 충격을 들이댐으로써, 마음속으로 쉬지 않고 스며드는 세상이라는 독소를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몸을 입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죄의 힘을 억제해야만 합니다. 죄의 힘이 억제된 상태에서 성령의 힘이 활발하게 펼쳐질 수 있는 현장으로 내 의식 상태와 마음 상태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장 투석을 하듯이 십자가 충격을 통해 마음을 끊임없이 투석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백이십 명 성도가 달랐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십자가를 피해 갑니다. 십자가를 생활 현장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백이십 명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고꾸라지고 좌절했지만 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버리면 살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놓을 수 없고, 십자가를 붙잡자니 못 박혔기에 세상에 대해 살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집착할 수도 없고, 애착할 수도 없고, 소원을 발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백이십 명 성도는 이러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고꾸라져서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십자가 충격으로 고꾸라진 백이십 명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성령이 세상살이를 해나가시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기독교 종교 내에서 가룟 유다 현상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세 가지 충격을 주셨습니다. 이 충격은 삶의 현장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지금처럼 예배당이라는 현장에 모여 있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지만 교인들은 회당을 빌려 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되는 현장은 삶의 현장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세 가지 충격을 받는다면 더는 삶의 현장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삶의 현장은 성령에 의한 세상살이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 때 이러한 모습은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가룟 유다보다 더 교활한 방식으로 십자가를 피해 왔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 그 안에 십자가를 걸어둡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십자가조차 이미지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십자가를 걸지 않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간혹 십자가를 언급할 뿐입니다. 그것도 죄 사함이라는 문제에 국한시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처럼 희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이로부터 십자가는 예배당 안에 가두었습니다.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예배당에 가두었으니 십자가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착각합니다. 십자가가 소중하기에 예배당 안에 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생활 현장에 나갈 때는 십자가를 뿌리치고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런 교활한 가룟 유다의 행태를 기독교 종교 전체가 드러내면서 교회는 없어지고 기독교 종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들 가운데 누구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의 예표인 어린 양을 바치는 십자가를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스며들어온 마음을 죽이는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 종교 전체는 버려지게 되었고 교회는 백이십 명 성도로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백이십 명 성도로부터 다시 시작하기 전에 성령께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뽑게 하십니다. 제비 뽑아 맛디아가 새로운 사도로 선출되는 장면이 기록된 뒤에 성령충만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교회는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사람을 쫓아내는 곳입니다. 십자가 충격을 우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세상 집착과 세상 애착과 세상 밀착 상태를 놓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십자가 충격으로 쫓아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내 마음속에서도 세상 집착과 애착과 밀착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려는 죄와 저주의 의식체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 충격으로 고꾸라뜨리고 쓰러뜨리고 녹다운시키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동서남북 교회는 어쩌면 교회사 이천 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온라인 인터넷 시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배당이 온라인 예배를 이용하고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갖는 모임을 온라인으로 올려놓은 형태입니다. 우리는 오프라인에는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온라인이라고 하는 땅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전대미문의 새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정방형 구조와, 선민이 출애굽을 하여 어우러진 형태는 성전 중심의 동서남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성도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하는 동서남북이라는 틀을 따서 완전히 새로운 온라인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동서남북 교회를 시작합니다.
지역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 한계가 있는 이유는, 심지어 미국 서부의 LA나 시애틀에서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시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동서남북을 신청하신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차가 있기에 이분들을 연결해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와 지방을 초월해서 앞으로 진영 짜기가 계속될 것입니다. 순서대로 진영을 짜야 하는데 같은 지역에서만 참여하시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있든지 온라인상에서는 가깝습니다.
이렇게 동서남북 교회를 시작하는데 현재까지 65명의 성도들이 신청하셨습니다. 15~16개의 동서남북 교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몇 개가 만들어지느냐, 얼마나 많이 참여하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동서남북 교회가 세 교회든, 다섯 교회든, 열 교회든, 백 교회든 문제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려면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충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자신이 고꾸라져야만 합니다. 교회는 세 가지 충격에 의해 고꾸라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집착이 고꾸라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고꾸라지고, 세상 외에는 마음 둘 곳이 없다고 하는 세상 폐쇄성이 고꾸라져서 마음을 하늘에 두어야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신장 투석처럼 마음을 투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죄와 저주의 근성은 죽을 때까지 따라붙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을 치는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신장 투석을 하듯이 스스로 마음을 투석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신장 투석의 기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신부전 환자들이 평생 신장 투석을 하듯이 우리는 마음을 투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 오늘의 번제 말씀이 진행됩니다. 주일 저녁에는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이 이루어집니다. 화요일 저녁에는 동서남북 교회 모임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섯 번의 모임이 신장 투석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룟 유다를 축출하고 내 안에서 가룟 유다적 속성을 축출하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짜증이 나고 힘든 이유는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에 돈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건강 문제가 마음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마음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투석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듣고 투석을 합니다. 동서남북 교회로 함께 모여서 의논하고 이야기하면서 투석을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충격에 쓰러지는 것을 돕고, 부활로 다시 일어나서 마음은 천국살이를 하고, 이 세상에서는 성령이 세상살이를 하는 온전한 형태의 삶을 위하여 이야기하고 돕고 격려하고 끌어주고 당겨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진짜 교인으로 진짜 교회를 살아볼 때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라는 신장 투석기를 통해 삶에 집착하고, 삶에 애착을 갖고, 삶에 밀착되어서 세상이 끊임없이 스며 들어오는 내 마음을 고꾸라뜨리고, 넘어뜨리고, 녹다운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성령에 의한 세상살이가 되고, 여러분의 마음은 천국살이를 하는 진정한 교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신장 투석기를 오늘도 풀가동함으로써 마음에서 모든 독소가 빠져 나가고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에서 가룟 유다적 요소를 온전히 축출해 낼 수 있도록 저희를 끊임없이 권면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