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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 결과 기껏 ‘말하기’가 바뀌었다
(사도행전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로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말씀을 함께 읽기 전에 광고를 하겠습니다. 오늘 주일 저녁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는 수요일, 금요일, 지금 나누는 말씀을 가지고 했던 나눔의 시간은 갖지 않습니다. 그 대신 7시 30분에 생방송으로 동서남북 교회 현황과 앞으로 진행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4월 10일부터 시즌3이 시작되기에 다음 주 안에는 동서남북 교회가 완전히 결성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동서남북 교회는 시즌3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어쨌든 시즌3과 동시에 출범하게 될 동서남북 교회는 지금 16개 교회가 준비되었고 70명 정도가 지원해 주셨습니다. 네 명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정에 따라서 다섯 명, 여섯 명으로 결성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 십자가 온라인 모임에서는 내가 속한 동서남북 교인들과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시작하며, 나는 몇 번째 교회에 속해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동서남북 교회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팀링크(www.teamlink.co)라는 앱을 다운로드하여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역사상 예수님의 교회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다면 구약까지 포함합니다만,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추종하신 자들로부터 시작된 교회를 예수님의 교회라고 한다면 바로 그 시작 장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제목을 “성령충만 결과 기껏 ‘말하기’가 바뀌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동서남북 교회로 모여 나눔을 할 때도 중요합니다만, 저는 별거 아닌 것 같은 제목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결국 십자가이기에 제목을 염두에 둔다면 동서남북 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기는 훨씬 편해질 것입니다.
본문은 성령충만을 통하여 교회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의 결과를 생각할 때 기적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다든지 죽은 자를 살린다든지 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의 결과는 꼭 이러한 기적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더라도 누구나 대기업 회장 같은 위치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나 몇몇 집사님들에게 특별한 사명이 주어져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성령충만을 받았던 백이십 명 모두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2~3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똑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일까요?
4절을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의 공통적 결과는 말하기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성령충만 결과 기껏 ‘말하기’가 바뀌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껏 ‘말하기’가 바뀐 것이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일까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등학교 아이들은 받아쓰기 시험을 봅니다. 선생님이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고 부르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씁니다. 다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일은 말하기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하기가 바뀐다면 듣는 것도 바뀌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가 바뀌는 상황이란, 받아쓰기 하듯이 성령이 구술(口述)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성령충만을 경험한 백이십 명 전체가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그토록 강렬하게 열망하던 나라의 독립을 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판도를 인정하고 각 도시로 떠나 말씀을 전했을 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전에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적으로 싸우기도 하였으나, 성령충만 뒤에는 그러한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뒤로는 이 세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성령충만 사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곧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도들을 위시하여 백이십 명은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변화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회의 시작은 십자가 충격으로부터 준비되었습니다. 십자가 충격에 부활 충격이 가중되고, 또 예수님께서 공중부양을 하듯이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 충격이 가중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충격은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과 성도들의 마음속에 어마어마한 파괴를 가져옵니다. 이 충격으로 인해서 세상에 대한 모든 바람과 소원이 좌절되고 근절되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충격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거나 소원할 수 없다는 것이 팔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의식체계나 가치체계와는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오직 세상에 대한 바람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은 예수님의 추종자들 마음속에 존재하던 세상을 좋아하는 가치체계가 완전히 파괴됩니다. 기존에는 세상을 좋아하는 가치체계가 형성되고 언어체계가 형성되어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체계가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세 가지 충격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에게 무지막지한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기존의 의식체계, 가치체계, 언어체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파괴로부터 이루어진 성령의 충만함이 새로운 의식체계와 언어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결국 세 가지 충격의 충만은 파괴의 충만을 가져옵니다. 파괴의 충만에 이어서 성령은 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성령을 구해야 한다.’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 충격을 내 안에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모아서 본래의 크기대로 만들어 낼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살고 있었던 가치관, 언어체계, 생각 방식, 의식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야 성령이 방해받지 않고 움직이실 수 있으므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새로운 언어체계를 만드시는데 그것을 본문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돈이 안 벌려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그 마음을 잘 압니다. 그동안 돈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가게를 하나 열었는데 손님이 오지 않습니다. 그 심정이 어떤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볼 때 갖고 있는 가치체계와 언어체계에 의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돈이 안 벌리는 상황에서 ‘인생이 정말 고달프다. 오늘도 실패했다. 완전히 좌절했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은 실패, 좌절, 걱정과 같은 언어들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존의 의식체계, 가치체계, 언어체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은 이러한 체계를 무지막지하게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르게 합니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기에 결국은 성령의 생각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없는 말은 말이 아니라 소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이란 단순히 성령이 구술하시는 말씀을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셔서 말하게 하시는 언어체계를 갖게 되면 돈이 안 벌리는 똑같은 상황에서도 연결되는 단어가 바뀝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 오늘 돈이 안 벌린 상황은 아버지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 이어지는 앞으로의 모든 나날이나 재정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아버지는 계획하고 계신다. 그러니 오늘 돈이 안 벌리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서 내 인생의 백수, 천수를 내다보시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규정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할 때 주어지는 생각입니다. 언어체계와 의식체계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기존의 언어체계와 성령에 의한 언어체계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오늘 돈이 안 벌렸어도 이것은 아버지 주권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돈이 안 벌리면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아직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이 본래의 크기대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충격의 크기가 과반이 넘어서 60%만 되더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 잠시 걱정하더라도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매듭지을 수 있습니다. 아직 왔다 갔다 한다면 의식체계와 언어체계가 충격을 통해서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부서져야 완전히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충격 이후에 제자들은 이 세상일에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존재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회사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고, 집에서는 배우자의 존재감이나 자녀의 존재감을 크게 느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이 가해지면서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체계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는 상태가 됩니다. 존재감을 그렇게 느끼면 언어체계가 존재감을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십자가 충격에 의해서 새롭게 언어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하나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러한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대단한 것은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말하기가 바뀐다는 것은 의식체계와 언어체계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내가 마주하는 지구 전체가 다른 지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서 지구를 뒤집어엎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지라도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충분히 기쁘고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옛날의 언어체계와 가치관과 의식체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말하기가 바뀌면 일어나는 일이 사도행전 7장 이후에 잘 드러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때 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사방으로 흩어져도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 충격과 부활 충격과 승천 충격을 전하고, 그 사건을 재현시켜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도 이 충격을 받으십시오. 이 충격을 받아야만 옛날의 의식체계와 언어체계는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놔두고 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흩어진 교인들의 삶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이들은 들어가서 쉴 방 한 칸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의식체계가 바뀌고 언어체계가 바뀌자, 그것을 나쁜 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2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헬라어 프노에(πνοή)로써 성령을 뜻하는 프뉴마(πνεύμα)의 원형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바람과 영을 동일하게 루아크(רוּח)로 표현합니다. 성령이 바람 같다는 것은 나와 구별되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분명히 나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에 대해 하나님의 주체성이 외출 나오신 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성령이 임하셔서 나타나는 일이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이것을 의식체계와 언어체계가 바뀐다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볼 때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불어도 눈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나뭇잎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일하심은 외부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람같이 임하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나와 분리된 상태에서 구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에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언어에 의해 작용합니다. 감정조차도 언어에 기반을 둡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면 돈이 안 벌리면 슬픕니다. 반면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라는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면 돈이 안 벌려도 슬플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은 언어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일이 언어가 바뀌는 것입니다. 언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똑같은 조건이라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기적을 일으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를 뒤집어엎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불의 혀가 의미하는 것도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혀(tongues)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 언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령충만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것으로 연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중에는 귀신이 주는 방언도 있습니다. 정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핵심은 언어체계가 바뀌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평상시에 쓰는 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6~8절을 보면 각 지방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쓰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되면, 내 말을 듣는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말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각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방언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취지가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A라는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말이 무엇인가를 아는 분은 부모님도 아니고, 배우자도 아니며, 스승도 아니며, 이 사람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출장 나오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실 때는 A라는 사람에게 해야 될 가장 적절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제일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맞는 방언입니다. 저 또한 방언을 했지만 본문에서 언급된 방언의 의미는 단순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난 곳의 언어로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내 처지에 딱 맞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에 의해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의도하는 바는 그 사람의 형편과 특별한 상황에 맞는 말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통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반응이나 태도를 보이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을 만날 때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그들의 형편에 맞는 가장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응은 우리의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설득시키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로부터 제자들의 변화를 보면 더는 세상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의식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현상적인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기대가 성령충만을 방해합니다. 돈이 좋고, 건강 장수가 좋고, 이 세상의 형통이 좋고, 명품이 좋고, 재밋거리 찾아다니는 것이 즐겁고, 이러한 가치관으로 형성된 언어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며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라지만 성령은 임하실 수 없습니다. 구하고 구해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자 이제 성령충만은 믿음 생활과 관련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성령충만을 그저 모토처럼 외치는 교단들이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일렬로 쓰러뜨리는 행위 등을 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기에 진짜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말하기가 달라져야 하고 생각하기가 달라져야 합니다. 십자가 충격과 부활 충격과 승천 충격을 받았다면 기존의 언어체계나 가치체계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성령에 의한 다른 언어체계, 다른 가치체계, 다른 의식체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에 신청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이, 성별, 사는 지역 정도를 보내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LA에 계시는 전도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또 한국과 생활패턴이 다르기에 참여함에 있어서 마음에 부담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존의 삶의 패턴이 있기에 부담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삶을 살던 패턴 속에서 화요일 오후 8시에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전도사님이 막 웃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회사를 나가는 것은 월급 때문입니다.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는 거래를 위해서입니다. 동창회에 나가면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아는 사람끼리 밥을 먹기 위해서 만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분은 ‘그래서 예배당에 나가지 않느냐?’라고 대답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내내 가정에서 시장에서 직장에서 어느 곳에서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 적도 없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예배당에 나올 때 정말로 십자가를 위해서 나올까요? 예배당에 나올 때 제직회, 바자회, 선교회와 같은 프로그램만 생각하는 동안 예배는 건성으로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직분이 없다면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영적인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정말로 십자가 때문에 만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시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삶을 지속하고 있는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정도로 내 삶의 의식체계와 언어체계가 충격을 받아 무너져 내림이 없는데 성령의 충만을 바랄 수 없습니다.
동서남북 교회를 신청하신 분들 중에는 처음 뵙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청하시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지 그분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당신들 이름을 내놓고 기다리고 계신 분들에게 이미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외모는 다 다릅니다. 기존의 언어체계와 의식체계 속에서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을지라도 외모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아서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사느냐, 잘 사느냐 못 사느냐,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가 신분을 나누는 기준일 수 있습니다. 막말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동서남북에 신청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원을 조사해서 그 사람을 빼거나 할 수는 없고 실제로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름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와 연관된 외모는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마음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동서남북 교회에서 만날 때는 이러한 껍데기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충격을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너무 크기에 껍데기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잘살던 못 살던, 외모가 내 스타일이든 아니든, 교회는 십자가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의 어우러짐입니다. 어우러짐이 교회의 존재 방식입니다. 물론 어우러지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생존 방식은 어우러짐이라는 것입니다.
자꾸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이 애달프게 호소하신다.’라고 하십니다. 애달프게 호소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객관적으로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광고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는 동서남북 교회 현황과 앞으로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4월 10일부터는 시즌3이 시작될 것이고, 4월 16일부터 동서남북 교회의 첫 번째 모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제 동서남북 교회의 교인들을 만나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에 대해서 오후 7시 30분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여러분의 생애의 스케줄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십자가 때문에 어우러지는 시간이 없으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러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기존의 기독교 종교가 바로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십자가 충격을 받은 자들이 어우러짐을 통하여 세상에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야 될 때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우러짐이 없다면 새 예루살렘 성의 어우러짐도 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건강 장수도 아니고,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잘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받았던 세 가지 충격의 본래 크기에 하루빨리 도달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만 말하는 언어체계의 변화, 가치체계의 변화, 의식체계의 변화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조건 이대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