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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내 삶과 교회의 실제 조직력
(사도행전 6:1~7, 8:1~8)
6장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장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내 삶과 교회의 실제 조직력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시즌3에서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를 시작하기 전에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는 동안, 사도행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교회의 시작 단계를 동서남북 교회에 하나하나 대입하며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조직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기에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교회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신학적 지식은 의미가 없는 신학자들 간의 놀음일 뿐입니다. 십자가, 하나님 사랑, 주의 기도는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태여 모토를 걸고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는 ‘교회와 성령의 생활화 과정’에 대하여 2주간 말씀을 나누는 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고, 교회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교인의 삶과 교회의 조직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살아 움직이는 조직력이신 성령의 활동을 철저하게 방해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내 삶과 교회의 실질적 조직력이 성령이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목회를 하던 때의 예배당 조직도를 떠올려봅니다. 담임 목사가 있고 부목사님과 장로님들로 이루어진 당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밑에는 제직회가 있고, 선교부, 교육부, 봉사부 등의 각 부서가 있습니다. 부서 아래에는 다시 부서에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특별운영위원회 같은 것이 세워질 때가 있고, 남녀선교회나 교회학교도 운영됩니다. 교회 밖으로 나와 개인의 삶에도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형제자매관계 등 혈육을 중심으로 한 형식적인 조직이 있습니다. 이것을 형식적인 조직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음이 아닌 육체를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형식적인 조직의 교인을 담게 되면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를 부르짖고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조직의 회원을 담고 있는 단체에 성령의 역사는 불가능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인 규약을 따라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법적으로 부부라고 해서 마음까지 부부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자식관계나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 온 관계라고 할지라도 성령이 이끄시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반드시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맺어진 조직으로써 굳어진 모든 관계는 성령이 나를 붙드실 수 없는 원인이 됩니다.
부부관계에서 법적으로 부부로 묶여있는 것과 실제로 성령이 부부 사이의 마음을 붙잡으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부모자식관계에서도 성령이 부모와 자식의 마음을 붙잡으실 수 있습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설령 친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성령이 임하실 수 있는 조건을 갖추면 그 관계는 성령이 이끄시게 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인간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런 형식적인 조직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고, 실제 조직력이신 성령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박해받음에 따라서 교인 각자의 삶도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기본 틀이 완전히 깨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이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상황을 요약해 봅니다. 6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충격사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오르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입니다. 사도들은 특정한 사상체계나 대단한 교훈을 가르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에 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세 가지 사건을 증언하였습니다. 그 증언 속에 계시는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믿으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문제가 하늘에서 해결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내가 신경 쓸 것이 없으므로 성령이 사시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이로부터 실제로 성령이 이끄시는 역사가 나타났고 교인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인들이 많아졌고 교회에서는 매일매일 과부들에게 구제를 행했습니다. 당시 과부는 요즘 상황과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기에 구제가 꼭 필요한 대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교인이 늘어남과 함께 헌금도 많아졌기에 과부들에게 매일 먹을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히브리파에 속한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에 비해서 더 좋은 대우를 받았고, 헬라파 과부들은 매일 제공되던 끼닛거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차별적 행위가 발생했는지 안타깝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열두 사도는 구제 업무를 전담할 일곱 집사를 선출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무척 유명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2~4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교회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형식적인 조직의 단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집사는 열두 사도와 형식이 비슷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 가룟 유다가 누락되었을 때 맛디아를 뽑았던 것처럼, 일곱 집사에도 결원이 생기면 새로운 인원이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집사의 임무가 많아진다면 다시 사람을 뽑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직화의 첫 걸음을 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성령은 교회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써야 했던 것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들이 구제와 봉사에 열중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성령은 일부러 교인들이 많아진 상태에서 문제가 발생되게 하셨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열두 사도가 합의를 보게 하셨고 일곱 집사를 뽑게 하셨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에 집중하면 되리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초대 교회 시기에 말씀 사역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주인공들은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스데반 집사님과 빌립 집사님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말씀 사역과 관련하여 열두 사도 중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언급되고, 오히려 스데반 집사님과 빌립 집사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교회의 진행 과정이 본래 사도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로 이루어지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어떤 직분을 갖고 있든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 수가 많아진 결과는 박해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없을 될 정도로 교인이 많아지자, 성령은 박해를 가해서라도 이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선출된 일곱 집사가 과부의 구제나 봉사에 집중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집사들 덕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더 이상 구제의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에 대해 일부러 갈등을 만드셨고, 열두 사도에게 집사를 선출하는 결정을 내리게 하십니다. 이때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에 힘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집사가 선출되자마자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에 의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선출된 일곱 집사들은 어떤 사도들보다 강렬하게 말씀 사역에 힘쓰게 됩니다.
교회는 사도든 집사든 교인이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 외에 다른 관심거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다른 관심거리가 생겨날 정도로 사람이 늘어나거나 조직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를 통해서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들에게 성령이 전하고자 하신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낯섭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예배당 조직은 어떻게 하든지 예배당 울타리 안에 많은 사람들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로부터 조직에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회는 당회대로, 제직회는 제직회대로, 구역은 구역대로, 선교회는 선교회대로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보다는 업무에 집중했습니다.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갈등과 문제가 생겨났고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지만 단언컨대 평생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전념하는 목사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있을 때 임영수 담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행정적인 일을 원치 않으시고 조용히 묵상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조차도 한 달에 30개 이상의 회의에 의장 역할을 수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부목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락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의 목사들도 겪는 문제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예배당 건물과 예산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가 믿음이 제일 좋습니다. 예배당 조직에 들어오고 난 후에는 믿음을 잃어갑니다. 종교적 습관으로 예배당에 출석하고 업무에 관여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도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기억하고 마음이 날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그대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본문은 교회의 조직화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방법을 취하시는 것일까요? 초대 교회는 성령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신 교회였습니다. 이 초대 교회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들에게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조직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 이외의 것들을 관심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조직은 당연하고 마땅히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성령께서는 핍박을 통하여 교회를 깨뜨리시고 흩어지게 하십니다. 교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조직이 깨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더불어 교인 각자 삶의 틀도 완전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믿음을 유지하는 자들은 사도들 외에 다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 이외의 관심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인간관계가 문제 된다면 교회는 흩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어제 밤에 80 명의 성도님들이 모이셔서 17개의 동서남북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하지 못한 분들도 계셨습니다만 그것은 각 교회에서 챙겨주실 것입니다. 미국 뉴저지에서 신청하신 분이 계신데 아직 진영 짜기가 완성되지 않아서 다른 분들의 신청을 기다리는 중이기도 합니다. 80 명이라고 해봐야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고, 정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성령에 의해서 어떻게 이끌려 가느냐는 것입니다. 한 교회마다 네 명이 모인 곳도 있고 다섯 명, 여섯 명이 모인 곳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할 일은 각자 십자가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십자가 예수님께 집중할 때 성령이 교회를 이끄실 수 있고, 내 가정과 내 삶도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 대해 감독과 집사, 장로 등에 관한 직분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예배당 건물도 없을 때입니다. 한 성이나 한 도시 안에서 여기저기 예수님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때 감독과 집사는 목사, 당회, 제직회, 운영위원회, 선교회, 교회학교 같은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감독과 집사가 했던 일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기를 돕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삶이 어떻든지 무조건 하늘에서 기쁨과 만족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은 나의 주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감독이나 집사는 이 일이 안 되는 성도님들을 돌보고 이끌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조직상의 직분이 아닌 역할상의 직분이었던 것입니다.
동서남북 교회로 모이는 네 사람 혹은 다섯 사람의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인 분들 중에는 한 발자국이라도 앞서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 있는 성도들을 이끄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앞서서 하는 입장에서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보다 앞서 나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아직 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제 수준까지라도 끌어가고자 하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저대로 진보하면서 진보한 만큼 여러분을 세워 드리고자 할 것입니다. 조직 안에서 감독이 아니라 역할상의 감독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에 대해 살아있는 조직력이십니다. 구역장이나 권찰이 성도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조직이 붙드는 것일 뿐입니다. 진짜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이 붙드십니다. 네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이 모일 때 성령이 각자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붙들림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통로를 통해서만 임하십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름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시간에 성령은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직 십자가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박해를 받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신경 쓸 거리가 많아지자 박해를 가하십니다. 이 상황을 보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의 조직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 가족관계,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가 다 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삶을 세워나갈 조직이 다 깨진 상태에서,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 그것들을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세워나가는 것이었을까요?
교인들은 삶의 터전을 다 잃고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신경 쓸 것이 많은 혹독한 상황에서 자기 안의 십자가만을 지켜냅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만 전하고 다닙니다. 그러다 굶어 죽은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기록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삶은 성령이 세워나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삶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 예수님을 마음 안에서 지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예수님만으로 충만해지게 되었고 십자가 예수님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1장을 보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삶의 틀과 조직이 깡그리 무너진 상태에서도 오직 마음에서 십자가 예수님만을 지켜내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나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누가 나를 나쁘게 볼 것인가 좋게 볼 것인가,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할 것인가 어떨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나를 지키려는 의식에서 생겨납니다. 타인의 생각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일지를 염두에 두고 지켜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기억하고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를 지킵니다. 건강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를 지킵니다. 부부관계나 친구 관계를 비롯한 각종 관계에서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만을 지킵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는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마될 뿐이지 진짜 해결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지켜낼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만 할 수 있으면 박해를 받아서 삶 전체를 깡그리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그 삶은 성령이 세워나가십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저 자신이 여러 번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성령이 다시 삶을 세워 나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교회의 조직이란 말함과 들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자가 있고 십자가에 대해 듣는 자가 있습니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가 될 수 있고, 듣는 자도 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인 십자가를 말함과 들음이야말로 교회의 조직이기에 다른 조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십자가의 도를 말함과 들음은 아메바같이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조직이 유지되는 동안에 교인 각자의 삶을 성령이 세워나가십니다. 교회 조직은 아메바 같은 단세포 이상의 조직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듣는 자도 말하고 말하는 자도 듣습니다. 말함과 들음의 쌍방 간의 조직 외에는 다른 조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조직이 생기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삶을 꾸려가는 방법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로 기도하시고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삶의 현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지켜내면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여러분의 삶도 세워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이고 유일하며 진실한 삶의 비결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삶의 걱정이나 근심이 생길 때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문제 때문에 발생한 마음의 불편함은 하나님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몸으로 만나는 외부적인 환경과 무관합니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걱정된다면 사람들은 전화하고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여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구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생기면, 문제의 해결도 성령이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문제는 외부 문제의 해결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내 안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말씀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 충격을 받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문제를 하늘에서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사도들은 증언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성령으로 이끌려지는 삶, 성령으로 이끌려지는 교회를 생활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너무나 좋은 진리와 유일한 길을 두고도 생활화지 못했던 연약함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 개인이 소속된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계신 성령님의 조직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 속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