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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서 바울로, 충격에서 생활화로
(사도행전 9:1~22)
10.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1~9절까지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의 교회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단계입니다. 앞서 우리는 십자가 충격, 부활 충격, 승천 충격의 여파가 예루살렘 교회를 완전히 휩쓸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 폭탄이 터지면 그 충격파에 의해 사람들이 날아가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이 세 가지 충격에 휩싸여 진행되던 예루살렘 교회에 이어서, 실제로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도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본문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실제로 목격한 사도들과, 목격의 충격 없이 증언만으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생활화해야 되는 사람들이 준비되어 가던 시기입니다. 한편 이 준비의 시기에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충격의 시대에서 생활화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의 주역이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전환되는 사건은, 교회가 충격의 시대를 넘어 생활화의 시대로 개막되는 단계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실제로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추진력은 실제로 목격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를 보면서 나옵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보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할 계기나 동기 혹은 동력이나 추진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십자가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의 동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속에 있는 죄악의 크기에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 생활화의 동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사울이라는 청년이 개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은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의 바람을 앞장서서 이루며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면 이러한 사울을 묘사하기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잔멸하다’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멧돼지가 잘 정돈된 포도원에 들어가 날뛰며 초토화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예전에 바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부하들을 시켜 어른들을 다 잡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같이 있던 대여섯 살 소녀가 무서워서 도망을 칩니다. 사울이 이 모습을 보고 소녀를 쫓아가서 죽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네로가 로마에 대화재를 일으킨 후에 그 누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씌우고 박해하던 때입니다. 때는 67년경으로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서 로마의 지하 감옥에 있던 시기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만 사도 바울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죽였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소녀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제자들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던 바울의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9장 27절에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가졌던 자아의식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십자가에 대하여 집착하고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던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에 언제나 십자가를 생활화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예수를 믿는 잔당들을 뿌리뽑겠다는 분노에 사로잡혀 어린아이까지 서슴없이 죽였습니다. 그러한 대량 학살자의 모습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내려올 때 다시 그러한 모습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과거를 보면서 도저히 십자가에서 내려오려야 내려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싸움은 가는 곳마다 박해하던 유대인들과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박해를 받았기에 사도 바울의 싸움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대량 학살자로 살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거의 모습에서 지금을 산다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사는 것은, 십자가를 알기 전의 자기 모습이 정말로 싫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이 땅에서 살던 모습은 대량 학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죄가 하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때 그러한 자기 모습이 다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었기에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그리스도인들의 대량 학살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왜 하필이면 대량 학살자인 사울에게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시대를 개막하게 하셨을까요? 십자가는 이제까지 살아온 나 자신이 너무나 싫고 이전의 나와 연결된 자로서 오늘을 살아감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실패이고 가장 큰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사도 바울이 되어 십자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은 대량 학살자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러왔지만, 사람을 죽인 적은 없는데 대량 학살자라니 무슨 소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의 손에 죽는 일이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셨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내 안의 죄를 바라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 없는 나를 싫어하는 자들만이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속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는 곧 빗나감입니다. 사장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배우자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는 대신에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내 주체성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쓰지 않고 이 세상을 내 멋대로 사는 일에 사용합니다.
지구상 80억 인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이 빗나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재감을 느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좋음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내 주체성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합니다. 이 빗나감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 죄인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것이 죄입니다. 돈을 좋아합니다. 건강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형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빗나감의 죄를 알아듣게 번역해 주십니다.
우리는 배우자 앞에서 하나님보다 배우자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이 빗나감의 죄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죄 없는 사람을 칼로 죽이는 대량 학살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십니다. 영어로 ‘I am a boy.’는 ‘나는 소년이다.’라는 간단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국어로 번역을 해줘야만 알아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 대신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열망하는 대신 세상 것을 열망하는 것이 죄인지를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 죄를 번역해 놓은 사건이 사울의 삶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히틀러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감독과 똑같은 짓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사울로 하여금 대량 학살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울에 의해 죽임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자마자 아버지의 품에 안겼기에 그들이 손해 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자기 속에 있는 죄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과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16절을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도 바울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본을 받음이란 곧 사도 바울의 생애를 통해 번역된 죄악을 내 속에서 발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속에서 저질러지는 죄악은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본받아 십자가를 생활화하려고 한다면 ‘하나님! 나는 사울의 대량 학살자의 모습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기회와 상황만 주어진다면 나도 사울처럼 얼마든지 대량 학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히틀러와 다를 바 없고,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600만을 죽이던 감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도 바울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모르게 기억하기조차 싫은 죄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만 알고 있는 죄악,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죄악이 있습니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한 것이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어서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과거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이 끊어지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고자 할 때마다, 그렇게 후회스럽고 수치스럽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던 나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러한 나로서 오늘을 살게 됩니다.
그런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십자가를 전하게 하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속에 대량 학살자로 번역될 수 있는 죄악이 들어있다는 것을 사울을 통해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집착했던 이유는 자기 속의 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원한다면, 실제로 살아계신 나의 모든 주체성을 올인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 됩니다. 사울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의로움이 충천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분노로 변하여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마음에는 자기 의로움이 최고치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가장 지독하게 본래의 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 얻을 자들이 사도 바울을 본받는 모습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사도 바울을 성인으로 추앙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성인도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아무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대량 학살한 자였으며, 그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 저지른 일일지라도 용서받지 못했을 텐데, 그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울이었던 사도 바울을 내 죄를 이해하기 위한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울과 같은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해서 죄와 무관한 자가 아닙니다. 십계명에 언급되는 살인도 한 적 없고, 간음도 한 적 없고, 도둑질도 한 적 없고, 거짓말도 한 적 없고, 탐내지도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나의 의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못하게 하신 것뿐입니다. 그렇게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그토록 무시무시한 일을 하게 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에서 사도 바울은 밤낮 괴로워합니다. 물론 십자가로 죽은 자가 되었기에 과거로부터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심리묘사를 통해 공감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칭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본받을 수 있어야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고, 그래야만 영생 얻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어우러지는 형태는 동서남북 진영 짜기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쳐주신 대로입니다. 선민들은 광야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형태로 진을 짰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동서남북 교회는 이러한 취지를 그대로 살려낸 것입니다.
동서남북의 형태로 어우러지는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이제까지 살던 나와 연결된 자로서 오늘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울의 대량 학살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내 속의 죄를 번역하여 깨닫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죄인들입니다.
진정한 교인이란 내 속에 있는 죄의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하여 죄를 지적할 수 있는 용기도, 자신도, 확신도, 힘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모임이 교회임을 알아야 교회는 성령의 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내 속의 죄를 번역해 주셨습니다. 사장님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사장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였는지를 알기 쉽게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번역해 주신 것입니다. 돈을 바라느라 하나님을 바라지 못하는 상태가 사울이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학살자의 모습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나는 사울을 통해 번역된 대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남편 노릇을 합니다.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아내 노릇을 합니다.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부모 노릇을 하고 자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일 무서운 일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울의 모습으로 번역된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지긋지긋해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자기 의로 충만했던 것처럼 온 세상은 자기 의로 충만한 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대량 학살자의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기 속의 죄를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반드시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내 속에 사울과 똑같은 죄악이 들어있음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같은 성군의 삶에서도 밧세바 사건을 통하여 탐심과 간음과 살인과 거짓말의 죄를 범하게 허락하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들은 사울에게서 나타났던 대량 학살자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성군 다윗에게서 나타났던 간음과 살인과 도둑질과 거짓말과 탐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에 대한 탐심으로부터 간음과 살인과 도둑질과 거짓말의 계명을 다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사도 바울에게도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들어있는 죄악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아는 사람에게만 구원과 은혜는 주어집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과 죄악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로 전하는 사도 바울을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로부터 충격에 휩쓸려 가던 교회의 시대를 생활화의 시대로 개막하는 주인공으로 만들어내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의인은 교회 바깥에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온 세상에는 불행한 의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는 행복한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죄의 크기를 보고 아는 자들만이 그 죄가 어떻게 용서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돈이 벌리든 벌리지 않던,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던, 세상일이 형통하든 아니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량 학살자로 번역되는 죄의 크기가 100억 원 어치라고 한다면, 기독교 종교인들은 자기에게 10만 원 어치 정도의 죄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10만 원 어치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의 크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10만 원 어치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생각할지라도 99억 9990만 원어치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여기기에 십자가를 생활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교인과 교회의 생활이 이따위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100억 원 어치에 해당되는 대량 학살자의 모습을, 내 속에 있는 죄의 무게와 크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십자가를 잊어버렸다면, 의식에서 십자가를 망각했다면 무조건 대량 학살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관건은 대량 학살자로 번역되는 죄악의 크기를 담고 있는 나를 얼마나 미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나를 미워할 수 없다면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구원도 영생도 믿음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크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의인은 교회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의롭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우느라 십자가를 붙잡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교인으로 견뎌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못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 자신을 마음에 제일 안 들고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그러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교인입니다. 이러한 교인됨을 잃어버리면 교회도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으로서 교회에 모인 자들입니다. 죄인으로서 교회를 사는 자들입니다. 죄인임을 알기에 죄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압니다. 100억 어치의 죄를 모르는 사람이 10만 원 어치의 죄만 깨닫고, 10만 원 어치를 탕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즐거움과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죄의 본래의 크기를 봐야 탕감받은 기쁨도 생깁니다. 죄의 크기를 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만 죄가 없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이 즐거움과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저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죄악입니다. 대량 학살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번역되는 죄를 안고서는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과 구원의 감격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에 이어서 두 번째 복음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은, 내가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번역될 정도로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고 알려서는 안 될 과거가 있습니까? 그 과거를 살려내서 십자가 생활화의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 과거 속에서 오늘의 내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과거 속의 내가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지긋지긋해하는 자들이 교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속에 있는 죄를 보며 경악하고 그 죄의 정체를 본래의 크기대로 알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에서 죽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가지는 영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교회 안에서 죄인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을 향하여 불행한 의인들에게 사도 바울을 본받아 대량 학살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