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말씀 왕성한 교회, 각자 입에 달렸다
(사도행전 6:7~15)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말씀을 나누기 전에 광고를 드립니다. 본래 오늘 저녁 7시 30분은 십자가 온라인 교회 생방송 시간입니다. 4월 10일부터 시즌3가 시작되고, 4월 16일부터는 동서남북 교회가 정식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합니다. 지난주 화요일에는 동서남북 교회 전체가 모임을 가졌습니다. 돌아오는 화요일에 모이는 동서남북 교회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정식으로는 4월 16일이 첫 모임이 되겠습니다. 동서남북 교회는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기에 참여하실 분들은 계속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저녁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 시간에는 동서남북 교회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함께 나누며 동서남북 교회가 모였을 때,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서로 숙지하고 시작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읽기만 해도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사도행전 12장에도 등장합니다. 교회의 탄압에 의해 사도 중 첫 번째로 야고보가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징벌을 받아서 벌레에게 먹혀 죽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19장 2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을 전했을 때와 관련하여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말씀이 흥왕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존립하는 목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야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본문 7절에 이어서 곧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 흥왕한다는 이야기의 의미를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가 전하는 말씀은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 십자가 사건으로 계시된 말씀, 계시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다만 형태상으로는 세 가지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 이후에 베드로 사도에 의한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설교가 등장합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2장 32~33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아버지께서 살리셨고 그 하나님 아버지가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셔서 승천하게 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와 사귐을 갖고 계시는 중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면, 마음은 육체를 벗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갖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이 부활할 때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예수님과 같이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 내 마음은 하나님을 상대하므로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동안에 땅에서는 성령께서 내 몸과 지정의를 장악하셔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제 시즌3을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 1절로부터 모든 구절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는 성경의 해석을 해나갈 것입니다. 모든 구절이나 문단이나 장에서 십자가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질적인 연합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고 듣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영상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씀을 전하는 영상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연합하고, 땅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어떤 본문에서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석이 된 것이 아니고 말씀도 아닙니다.
가끔 다른 설교도 겸해서 듣는다는 분들이 계시기에 저도 다른 설교를 들어봅니다. 그런데 말씀이 아닌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표현력도 좋고 설득력과 호소력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 설교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연합한다는 이야기가 빠져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 말씀의 해석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다시 본문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하였고 이와 같은 의미의 말씀이 다른 두 곳에서는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더라,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는데 성령으로 지혜가 충만한 가운데 말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잡아다 공회에 놓고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누명을 뒤집어씌웁니다. 그러나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이에 굴하지 않고 설교를 이어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처럼 들은 말씀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된 상태에서 내 입으로 말씀을 전하는 일이 교인 각자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은 왕성하고 흥왕하게 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을 자기 입으로 전하다가 순교한 첫 번째 교인은 사도들이 아닌 스데반 집사님이었습니다. 말씀이 왕성했다는 의미는 들은 말씀이 내 것이 되었고 반드시 내 입으로 그 말씀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이 내 입으로 나올 수 없다면 그 말씀은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소멸되고 맙니다.
이어서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기사와 표적을 나와 관련 없는 일처럼 생각하며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기사와 표적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연합해서 살고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 시대에 기사와 표적이 나타날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시대 그 장소 그 상황에서 기사와 표적이 필요했기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들어 올리셨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계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내게 보내주셔서 성령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로 연합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요체입니다. 그럴 때 기사와 표적도 나타날 수 있지만 초점을 맞추어야 할 일은 기사와 표적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느냐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흥왕한다는 것은 들은 말씀이 내 것이 되면서 내 입으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소설에는 작가의 정신이 들어있듯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습니다. 성령충만은 항상 말씀충만과 같이 갑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 그 말씀이 나와야 함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또한 내 입으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하나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옛날의 나 같으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인상이 좋다 나쁘다. 혹은 말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아니다. 또는 저 사람은 배경이 이렇고 저렇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나 말투가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겠다는 결의가 있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 말씀의 기초이자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만나고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말씀이 흥왕한다는 것은 듣는 말씀이 내 것이 되어서 내 입으로 나올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흥왕하는 것과 성령충만은 같이 가게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이제까지 시즌1과 시즌2를 합쳐서 거의 6,000개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6,000개의 설교를 들으면서 한 번이라도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입으로 말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를 다룬 시즌1, 2를 통해 성경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재들이 있었습니다. 천지창조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모든 소재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선민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흥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들은 말씀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다면 내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는 것 같아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십자가 생활화가 진짜 십자가 생활화인지를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것이 되었다면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말해본 적이 없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다는 구절에 이어서, 스데반 집사님이 말씀을 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은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안에서 말씀이 흥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흥왕한다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오늘의 번제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신뢰를 가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더 이상 주저하거나 쭈뼛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설득력, 표현력, 호소력이 다 부족한 최악의 설교자입니다. 설교는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말씀을 모든 성경 구절에서 찾아내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러한 설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그런 설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 사상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첫 번째 설교가 명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오른손으로 끌어 올리셔서, 아버지와 교제하고 계시며, 그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의식 속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은 성령에 의해서 장악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많은 말씀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때 1,200만 명을 헤아리던 기독교 인구는 이제 2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상태는 말씀이 흥왕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흥왕함이란 단순히 온라인상에서 갖가지 말씀이 범람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말씀의 흥왕함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말씀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다양한 소재로 같은 주제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들은 말씀을 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말씀이 왕성해지는 것이고 흥왕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실제로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일이 확연하게 확인될 수 없습니다. 소설에 작가의 정신이 반영되듯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는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현재 교인들의 상황은 여관이나 호텔과도 같습니다. 여관이나 호텔은 손님이 머물다가 떠나면 다른 손님을 받습니다. 한 말씀을 듣다가 또 다른 말씀이 들어옵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소화되고 내 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들은 말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집이 되지 못하고 말씀이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는 호텔이나 여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말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의 정도나 깊이를 더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분이 두터워지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듦이란 곧 들은 말씀이 내 안에서 왕성해지고 내 입으로 그 말씀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여관이나 호텔 같은 상태였기에 그러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하나 들어왔다가 곧 나가고, 또 다른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갑니다.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입으로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귀는 코끼리 귀처럼 커져 있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입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야기하고 계신 것일까요? 교회는 귀로 들은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서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날마다 두터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설교와 목사님을 찾습니다. 설교는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성경의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반복하여 듣는 가운데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친분입니다. 새로운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한다는 말이 기껏해야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잘해.’라는 것이 전부라면 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설교 잘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흥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입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내용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생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더라.’라는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온라인상에서는 말씀이 홍수를 이룹니다. 그런데 정작 들은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잘한다는 소리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인구가 1,200만에서 200만으로 줄어든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7절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왜 말씀의 전문가였던 제사장의 무리가 그리스도의 도에 복종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던 하층민들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보기에도 이 현상 자체가 기적이었기에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도에 복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8,000여 명이나 되는 제사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분명한 말씀을 전했던 것은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그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친교를 갖고, 이 땅에서는 성령을 따라 삽니다. 이 말씀이 다양한 소재를 통해 반복되는 가운데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자 실제로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소화되지 못하는 말씀으로 변화가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십자가에서 죽었다니까 반응하지 말자. 옛날 같으면 화를 낼 일이지만 화를 내지 않겠다.’라는 마인드컨트롤 수준의 변화일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효과는 아닙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연합을 이루는 사위일체야말로 십자가 복음의 효과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마인드컨트롤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들은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을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소규모 모임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마음에서 흥왕해야 하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처지가 다릅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서 같은 말씀을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말씀을 들었지만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의 처지가 다르기에 백 가지 말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내 처지에서 내 것으로 만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형편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흥왕해야 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서남북 교회로 모인 사람들에게 내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내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중에 생긴 일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돈이 문제인 상태에서 말씀을 듣고, 어떤 분은 돈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말씀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처지에서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때의 적용되는 예로써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의 재료로 삼을 뿐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중에 필요한 만큼만 재료로 쓰이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흥왕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어떤 분은 ‘목사님이 삶을 모르셔서 한가로운 이야기를 하신다. 지금 당장 돈 문제가 터지고, 건강 문제가 터지고, 자녀 문제가 터졌는데 사무엘서의 사울 왕의 이야기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서 돈에 대한 말씀이 흥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건강 문제가 생기면 여러분의 마음에서 건강에 대한 말씀이 흥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녀 문제나 직장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과 가장 무관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 마음에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직장 문제가 터졌다고 해서 마음에서 직장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말씀이 흥왕하는 상태는 실제 직장 문제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재정 문제가 터졌다면 실제 재정 문제와 마음속의 재정 문제에 관한 말씀이 흥왕하는 상태는 무관한 정도가 아니고 백해무익합니다.
그러면 삶에서 각종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치게 만들 뿐입니다. 날마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말씀이 흥왕하는 상태는 그 자체로 지옥입니다.
돈 문제가 생기고, 건강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창세기의 말씀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나와 에덴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에덴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해 내고, 십자가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를 제쳐두고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들은 말씀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중에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 앞에서라도 지금 들은 말씀의 요지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들은 말씀을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내 입으로 전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삶의 문제는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면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만나는 그 영이신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삶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흥왕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질 때 전지전능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 본문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을 통해 십자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조금이라도 더해갈 수 있다면 실제 삶의 문제에 대해 가장 가까운 해답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문제가 생기면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함을 통해 문제가 내 안에서 흥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 혼자서는 힘들기에 동서남북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번제의 말씀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표현력도 없고 설득력도 없고 호소력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젬병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표현력과 설득력과 호소력의 재미를 다 갖춘 목사님들이 전혀 전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내가 연합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말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기 때문에, 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것 이외의 말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충분히 분별하실 수 있습니다.
못하는 설교라도 모든 구절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발견해 내고, 여러분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초대하기에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과 나의 친분은 점점 두터워집니다. 30~40분 설교를 들었다면 5~10분 정도를 나만의 처지에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의 독특한 처지에서 내 것으로 만든 말씀을 입으로 말해 봅니다. 이것이 어렵고 어색하고 힘들 수 있지만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여러분보다 더 배웠기에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성경 지식을 많이 가졌던 사도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성경도 없었으며 신약 성경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초대 교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자기의 형편과 처지에서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들은 말씀을 자기 입으로 말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고, 흥왕하여 더하게 되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여관이나 호텔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들어와 내 것으로 정착하는 말씀의 집이어야 합니다.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을 통해 우리가 들은 말씀을 처음으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은 교인들이 모이지만 각자의 처지에서 들은 말씀을 이야기할 때 새로운 말씀이 됩니다. 방송을 통해 들은 말씀을 다른 성도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들으며 말씀은 왕성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왕성함을 위하여 이 땅의 교회는 존재합니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패턴을 따라 동서남북의 형태로 어우러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동서남북의 형태로 어우러짐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왕성함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왕성함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와의 연합은 점점 두터워지고 쌓여갈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삼은 성도들이 동서남북으로 모여 서로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두터워집니다. 또한 내가 말씀을 전함으로써 영이신 하나님과의 친분은 두터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위일체의 형상이 온전히 갖추어질 때까지 동서남북 교회로 모여서 함께 힘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교회에 모여서 말씀을 내 입으로 말할 때 틀릴 수도 있고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불구가 된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만 코끼리처럼 커졌지, 그 하나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전할 수 있는 입이 없습니다. 동서남북 교회는 이 입을 떼는 시작점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우리의 평균 학력보다 높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고 각자 자기 것으로 만들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들은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함으로부터 성령은 충만하게 임하시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의 영과 만나야 한다. 이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내 입으로 말씀을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이야기할 수 없다면 말씀 속에 들어계신 하나님의 영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옛날에 선배 목사님들이 콩나물시루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지는 것 같아도 무럭무럭 자라듯이, 예배당에 와서 앉아있는 교인들이 말씀을 다 잊어버리는 것 같아도 신앙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당에 나오기면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끌어온 교회는 1,200만이라는 숫자까지 갔다가 이제는 200만 명도 예배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 붓듯이 말씀이 빠져나가는 것을 말씀이 흥왕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소설 속에 작가의 정신이 들어있듯이 하나님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과 실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입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단지 마인드컨트롤 용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해 의심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반드시 내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 것이 되었다면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기본 바탕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을 교인으로 살아오신 분들도 어색할 수 있지만 어색하다고 못할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정해졌고 앞으로 생겨날 동서남북 교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저녁에는 동서남북 교회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락하신 동서남북 교회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만들어질 동서남북 교회들이, 이 세상의 말씀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전초기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들은 말씀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입으로 다시 말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