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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녹취문: 팔복; 제1복, 가난한 마음과 천국_태승철 (마 5: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8.02|조회수200 목록 댓글 0

 

제1복, 가난한 마음과 천국

(마 5:1~3)

 

 

2011년 첫 번째 오늘의 번제시간을 우리 신년 인터넷 사경회 시간으로 시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누리시기를 바라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8복에 대하여 한 주간 동안 함께 살펴보며 오늘의 번제를 대신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8복이 있는 부분에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그냥 이게 제목이 되겠습니다. 이 한 절에서 표현되고 있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 복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제1복 가난한 마음의 천국》이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선 우리가 대동소이하게 이 귀절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가난한 마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할 때 그 가난한 마음을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그런 전제를 살짝 좀 옆에 두시고 이 본문을 함께 보면 좋겠어요. 

첫 번째는 어쨌든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복은 일단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누가 누리느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이라고 하는 복을 누린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서 한번 복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장로님의 에피소드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시작하려고 해요.

 

은퇴하신 장로님이신데 지방에서 사시는 가운데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시는 걸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방이지만 도시에 살고 계셨고 큰아버지의 집안이 그 도시에서 더 들어가는 궁벽한 시골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큰집에는 아이들이 일곱명인지 여덟명인지 하여간 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많고 사내아이들만 대여섯명이 되는 아주 그렇게 자손이 많은 집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가난했어요. 그리고 또 시절이 해방 전후 또 6·25전쟁 전후 그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니까 온 나라가 다 가난하고 힘들 때지요. 그러니 그 궁벽한 시골 촌구석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복에 관한 이야기가 이 속에서 들립니다. 늘 동네사람들이 그 큰집을 향해서 복 있는 집이다, 복 있는 집이다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복이라고 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왜 그런 이야기를 구태여 하게 되냐 하면 자손이 많기도 했잖아요? 일곱 여덟 명의 자손이 있으니까 자손의 중다함이 5복 중에 하나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자손이 많은 것 자체만 가지고는 어려운 시절에 먹고 살기도 힘든 때는 복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보면 저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집이 동네에서 복 있는 집으로 자꾸 이렇게 일컬어졌던 이유는 너무너무 재미있는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은퇴하신 장로님의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얘기의 그 복 있다고 일컬어지는 그 내용이 도대체 뭐냐 하면 그 당시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다 민둥산이었잖아요? 그 땔감 때문에 그래요. 땔감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서 구합니까? 도회지는 무연탄이라고 그래서 구공탄이다, 무연탄이다, 조개탄, 갈탄 이런 것들을 썼습니다마는 그 시골에 땔감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그때 마차나 우마차가 있지 않았어요? 그 소들이 말들이 다니면서 길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소똥과 말똥이 말라요. 그럼 소똥과 말똥을 주어다가 말려서 꼬득꼬득해진 그것들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의 큰집 아이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새벽같이 일어나서 온 동네방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소똥과 말똥을 다 주워다 마당에 쌓아놉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일어나서 엄마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땔감을 주워오라는 미션을 안고 길거리에 나와 보면 온 동네에 소똥과 말똥을 아예 구경도 못하는 거예요. 심지어는 하다못해 개똥이라도 갖고 가려고 해도 개똥까지 다 집어갔다는 거예요. 그 일고여덟 명의 자식들이 아침에 나와서 온 동네를 쓰나미처럼 소똥과 말똥을 싹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보고 마당에 수북히 쌓여있는 소똥과 말똥을 보면서 늘 이웃집 사람들이 “아이고, 저 집은 자식들이 많고 부지런하고 저 땔감 쌓아놓은 것 보면 분명히 이 집은 복 받은 집이다.” 그랬다는 거예요. 소똥과 말똥을 많이 쌓아 놔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복이라고 하는 게 상황에 따라서 참 다른 거예요. 중국 고서 중에 서경(書經)입니까? 거기 보면 5福이 나오는데

(1)장수(壽)가 나오고,

(2)물질적인 부요(富)함이 나오고,

(3)몸과 마음의 강령(康寧)이 나오고 그 다음에

(4)유호덕(攸好德),

(5)고종명(考終命)이라고 있어요.

유호덕이라는 게 뭐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겁니다. 고종명은 죽을 때 아주 깨끗하고 편안하게 죽는 걸 고종명이라고 그래요.

 

이걸 5복이라고 그랬는데 이게 민간으로 내려오면 좀 달라져요.

유호덕이나 고종명 보다는 자손이 많은 것과 그리고 명예를 얻는다든지 벼슬을 얻는다든지 하는 귀(貴) 그래서 오래 살고,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건강하고, 자손이 많고, 명예을 얻고 중요한 관직을 얻는다든지 벼슬을 한다든지 하는 貴 이게 5복입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바뀌는 거예요.

 

이게 또 바뀔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모델학원에 가면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게 복이지요. 또 어떤 개그우먼 얘기를 들었습니다. 면접을 하러 갔는데 면접하면 웃기는 동작을 해서 오디션을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아무것도 오디션을 안 하고 얼굴만 보고 그냥 합격한 개그우먼도 있대요. 그땐 그게 복이에요. 태어나서 못생긴 거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저주를 받았나 했겠지만 또 그런 상황이 되면 그게 복입니다.

 

복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리스트가 계속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여간 불변하는 리스트는 오래 사는 것, 건강한 것, 물질적으로 부자 되는 것, 요것만큼은 그리고 또 대부분이 貴를 바라지요. 높아지는 것, 좋은 학교 나와서 관직이라도 하고 대통령이라도 되면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그리고 그 동네 어귀에 보면 이곳은 아무개 대통령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팻말까지 있어서 관광지가 되기도 할 정도로 다 좋아하는 거지요.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복의 리스트가 있잖아요? 그 복의 리스트 중에서 우리가 선호하는 복들을 주시려고 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사건을 복음이라고 얘기할 때에 우리가 원하는 5복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사건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없었던 복의 리스트를 새롭게 추가하시려고 오신 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 기존에 있던 복의 리스트 속에 있던 그런 복들을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갖고 오신 새로운 그 리스트에 적혀있는 그 복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이 땅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중국 서경의 첫 번째 책 홍범편이 있는데 그곳에 나오는 5복을 원하든지 아니면 민간이 그저 통속 편에서 얘기하듯이 보통 장터에 살고 있는 우리 서민 민간들이 원하고 있는 5복을 원하든지 아니면 특별한 상황에서 예를 들면 칠팔십 년대에 미제가 많은, 미제 스팸 있고, 미제 믹서 있고 하는 집이 복 있는 집 아니었습니까? 그런 게 복이든지 그런 복을 예수님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건 기독교가 아니고 변질된 기독교요 사이비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복을 갖고 오셨는데 그 복이 뭐냐 하면 바로『천국』이라는 거예요. 그 천국이 이상한 것은 8복 중에 여러분,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할 때 그들의 것임이요 이 단어가 현재형으로 쓰였어요. 그 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미래형입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자가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또 미래형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를 것이다」라는 것도 미래형입니다. 다 미래형이고, 또 맨 마지막 10절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할 때 요게 또 현재형이에요.

 

천국과 관계해서만 현재형 단어를 쓰고 나머지 여섯 개의 복은 전부 단순 미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르게 될 것이다, 애통하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미래형으로 썼는데, 심령이 가난하면 마음이 가난하면 천국이 <지금> 내 것이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 천국이 <지금> 내 것이 된다.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미래형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천국을 갑니다. 그 천국은 미래형이지만 여기서 복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계시다가 그 천국을 우리들에게 갖고 오신 겁니다. 이 세상에 집어 넣어주시는 겁니다.

집어 넣어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뭡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

우리는 예수님 믿으면서 자꾸 이 세상 5복을 원해요.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셨을 거예요.

회개해라. 회개하고 하나님 잘 믿어라. 그러면 부자 될 것이다.

회개하라. 長壽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貴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富裕함이 가까이 왔다. 이렇게 얘기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아, 천국 가는 건 죽은 다음엔 좋아하지만 아무도 이 세상에서 5복은 좋아하되 천국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이 세상에서 누가 천국을 지금 갖기를 원합니까? 교인 중에…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을 걸고 한번 말씀을 해보세요. 천국 좋아해요? 지금? 복 많이 받으라고 할 때? 막연하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을 지금의 천국으로 갖고 오신 거라는 겁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린 장로님의 큰집. 소똥 말똥을 마당 부엌 아궁이 앞에 잔뜩 쌓아놓으면 사람들이 참 복 받은 집이라고 그랬습니다.

서울 장안 4대문 안에 살고 있는 그때로 말하면 종로 안국동이라든지 이런 양반거리에서 살고 있던 분들이 온 나라 안이 힘들지만 서울 4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자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분들이 친척집이라고 해서 가끔 그 집에 놀러 가면 소똥 말똥을 바라보며 복 받은 집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땠겠어요? 이거 포복절도할 일 아닙니까? 정말 포복절도할 일이지요.

자, 그러면 서울과 그 궁벽한 시골의 차이 그것과 이 지구와 천국의 차이 어느 게 더 차이가 극심하겠습니까?

그 시골에서 소똥 말똥 모아놓고 복 운운합니다. 서울 사람이 가보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게 왜 복이냐? 서울 종로거리에서는 소똥과 말똥 피해 다니지 않았습니까? 소똥 말똥 밟으면 재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서울에서 시골에 내려가도 그런데 천국에서 오신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보실 때 천국에서 오신 분의 입장에서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게 복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천국을 보신 분이 이곳에 와서 보실 때 그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겠어요?

제가 79년에 미군부대에서 근무를 했거든요. 미군부대에 들어갔더니 기절하겠더만요. 그 깨끗한 도로며 도로 옆 잔디 언덕 위에 난 인도며 식당이며 숙소며 천국이에요. 천국. 더군다나 저는 79년에 달동네에 있다 갔기 때문에. 그때 그 미군부대 주변에 있는 기지촌 아기씨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복이라는 것은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는 겁니다. 그걸 미군들이 잘 알아요. 어떻게 잘 아냐? 미국에서 왔거든요. 아무리 못 살아도 그 미군부대 주변에 있는 시골에 사는 것처럼 못 살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이들의 마음이 우리나라 기지촌 아가씨들을 사귀는데 아주 담대해지는 겁니다. 알고 있으니까. 그 기지촌 근처에서는 어떻게 차리고 살아도 복이 될 수가 없어요. 미국 가서 하빠리로 살아도 그게 나요. 원래 미군들이라는 게 미국 사회 내에서 그렇게 높은 지식과 고급 경력을 갖고 있는 인력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미군부대라는 곳이 제 눈에 보기에 그렇게 아름답더라는 겁니다.

천국에서 오셨어요.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5복이라는 게 혹시 소똥이고 말똥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그 예수님을 지금 우리가 주님이라고 믿는 거예요. 천국으로 오신 분으로서 천국을 가져온 분으로서 복으로서 이 땅에 가져온 분이 우리의 주님이신데 그 주님의 시각에서 이 세상의 5복이라고 하는 게 소똥과 말똥이 아니면 뭐겠냐 이겁니다.

돈? 소똥 많이 모아놓고 복 받았다고 얘기하는 거 아닐까요?

오래오래 살고 있습니다. 오래 사느라고 채소만 먹고 있고. 맛있는 고기도 침 삼키며 참고 있고.

자, 예수님이 복을 가져 오셨어요. 복을 가져오셨다는 거는 이 세상에서 기존하고 있던 복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굳이 복이 아니라고 말할 것까지 없지만 소똥과 말똥이라고 말할 것까지 없지만 천국이라고 하는 복의 새로운 그 리스트에 기입된 새로운 복의 빛의 안에서 보면 황제의 자리도 빛을 잃고, 부자의 자리도 빛을 잃고 하는 거 아니었겠냐구요. 그랬으니까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처럼 되라고 얘기했겠지요. 안 그러면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이지요.

천국의 빛 아래에서 볼 때 돈이 돈이겠냐 이겁니다. 오래 사는 장수가 장수겠냐 이거에요. 대통령 자리가 그렇게 대단해 보이겠냐 이겁니다. 천국의 빛 아래에서 볼 때..

그런데 천국이라는 복을 우리가 누리지도 못하고 소원도 안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온 교회가 다 세상의 5복을 추구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 천국이 무엇일까?

8복을 해가면서 계속해서 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제 1복이 천국이고 제 8복이 천국입니다. 천국과 천국이라는 복 사이에서 도대체 천국을 얻은 자들이 천국과 관계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8복의 총합이 천국입니다. 결국 천국이 복이라는 거예요. 그것도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받을 수 있는 천국.

그러니까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천국을 가질 생각을 하는 거지요. 오래 살 생각하지 말고 천국을 가질 생각을 하는 거지요.

이게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아직도 5복 그 비스름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면 교인이 아니고 교회가 아닙니다. 이 지구에 복을 새롭게 갖고 오셨어요.

그러면 어떤 자들이 도대체 천국을 갖느냐 이거에요.

그게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갖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천국이라는 복을 새롭게 복의 리스트에 기입해놓지 않으셨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정해놓은 5복을 추구해가는 게 맞아요. 그래야만 해요. 왜 가만히 주저앉고 있습니까? 야곱처럼 뛰쳐나가서 5복을 손에 쥐려고 노력을 해야 되지요. 그럼요! 미래에셋을 창립한 박회장의 말처럼 바람개비가 바람이 안 불 때는 그래서 돌지 않을 때는 달려가면서 돌려야지요. 5복을 향해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천국을 갖고 오셨기 때문에…

그럼 천국은 어떻게 도대체 누리느냐?

간단해요. 마음이 가난하면 돼요. 마음이 가난하면 뛰쳐나가서 쥘 것도 없고, 대단한 계획과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으려고 실행할 것도 없고 마음이 가난하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천국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하여간 천국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이에요. 하여간 진짜 천국에 계시던 분이 오셔서 그 천국을 주신다니까 최고 아니겠습니까?

60년대 7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에 친척 중 한 사람이라도 이민 간 사람이 있으면 동네에서 왕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한국에 남아 있는 친척들을 초청을 해갑니다. 초청받아서 미국 이민 간다고 그러면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즘 여행이 자율화되어 가지고 이민까지 안 가더라도 한 2,3주씩 여행하고 연수도 1년씩하고 다 돌아다닐 수 있어요. 온 세계를 다. 옛날 같은 복은 아니에요. 미국이. 그러나 그 당시에는 미국 같은 복이 없어요.

주님이 천국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주시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천국을 어떻게 갖냐 이겁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된다는 거예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얘기를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그냥 겸손하다 이렇게 얘기해버려요.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 그래야 복이 임한다 …

여러분,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 때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 심리상태가 평안할 수 있어요. 욕심이 적으면 당연히 평안하지요. 그것과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가만히 보면 그냥 마음이 겸손함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 안 믿어도 겸손하면 천국을 받습니까? 예수 안 믿어도 마음이 낮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국민 MC라고 하는 유재석씨, 교회 안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사람이 겸손해요. 그 자리에 선 거에 비하면 참 겸손해요. 그럼 그분이 천국 가진 겁니까? 아니지요.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뭐냐 이겁니다. 가난이 여러 종류가 있어요, 여러분. 마음이 가난하다는 얘기는 참 이상하게 잘 매치가 안 돼요. 가난이라는 말과는... 왜냐하면 가난이라는 것은 그 여러 가지 가난이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난들이 제일 먼저 돈 가난이에요. 돈이 없는 걸 말하지요. 쓰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요. 지불할 돈이 없습니다.

또 지식의 가난을 얘기할 수도 있어요. 뭘 모르겠어요. 까막눈이에요. 무지해요. 꼭 지금 뭔가 지식이 필요한데 그 필요한 지식을 지불할 수가 없어요. 지식이 가난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가난할 수 있어요. 그렇죠? 건강이 가난할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다 가난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참 특이한 표현이에요. 특이한 표현인데도 사실은 해석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돈이 없어 가난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요? 돈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하다, 비천하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냥 마음을 쓸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쓸 돈이 없어 가난하고, 쓸 지식이 없어 가난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쓸 용기가 없어 가난하고. 용기에 가난한 거예요.

쓸 건강이 없어요. 쓸 건강이라는 게 뭡니까? 건강하면 달리기도 하고 싶고 나가서 부지런히 일도 하고 싶은데 그렇게 쓸 건강이 없어요. 건강이 가난한 거지요.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할 때 이 심령의 가난이란 심령에 대해서 가난하다는 얘기입니다. 돈에 대해서 가난한 것처럼. 돈이라는 영역에서 가난한 거예요.

가난이라는 말도 우리가 돈 없어도 가난해도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신학교 다닐 때 제 집사람이 피아노 교습소를 하는데 동네에서 여덟 명 일곱 명 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육전도사였어요. 그거 받아서 그냥 겨우 겨우 먹고 삽니다. 공부 학비요? 이래 뵈도 장학생이었어요. 가난했지요. 그런데 이런 가난이 아니라 이 ptwcov"(4434, 프토코스) 라고 하는 이 본문에 나오는 가난함이라는 말은 구걸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는 가난 거지의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아예 깡그리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쓸 마음이 거지처럼 없다는 거예요. 마음의 부분에 있어서는 거지가 됐다 이거에요. 쓸 마음이 없다는 거니까.

쓸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 무슨 말일까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자식에게 마음을 쓰지 않습니까? 돈을 쓰듯이 돈을 지불하듯이 마음을 쓰지 않습니까? 사업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직장 일에 마음을 쓰잖아요? 아내 생일이 되면 마음을 써서 생일선물을 준비하잖아요. 그렇죠? 이벤트도 하고 그러잖아요? 마음을 써야 되잖아요? 돈 쓰기 전에 마음을 써야 됩니다.

우리 이런 말해요. 마음은 굴뚝같은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돈에 대해서는 가난하지만 마음에 대해서는 부자인 거예요. 아직 쓸 마음이 있으니까.

자식에 대해 마음 쓰지요, 아내에 대해 마음 쓰지요, 남편에 대해, 직장에 대해 마음 쓰지요. 친구에 대해 마음 쓰지요. 내 노후에 대해 마음 쓰지요, 내 건강에 대해 마음 쓰지요, 내 피부에 대해서 마음 쓰지요… 전부 마음 부자들이에요. 쓸 마음이 많아요. 여기도 마음을 지불하고 저기도 마음을 지불하고 마음의 부자들입니다.

천국을 새로운 복으로 가지고 오신 분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음이 가난하다. 마음이 어디에 대해 가난하다는 거예요? 뭐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이 세상일에 대해서 이 천국과 다른 세상, 천국과 다른 세상은 달나라예요? 여러분? 목성입니까? 천국과 상대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그러면 이 지구 위밖에 없잖아요. 이 지구 위에서도 나와 관계된 삶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세계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겁니다. 쓸래야 쓸 마음이 없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온 천국이 바로 지금 너의 것이 된다는 거예요.

자식이 있습니다. 자식이 있는데 자식에게 쓸 마음이 없이 가난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있는데 아내와 남편에게 쓸 마음이 없이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마음을 지불할 게 없다는 거예요. 돈이 가난한 게 돈이 없는 것처럼, 지식이 가난한 게 지식이 없는 것처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없는 거지요.

근본적으로 마음이 없을 수는 없어요. 마음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때라야만 주님께서 새로운 복의 리스트에 끼워 넣은 천국을 지금 내 것으로 갖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이 복이 있나니 라는 말도 makavrio"(마카리오스) 라고 하는 마카르(mavkar) 라고 하는 헬라어 어근을 갖고 있는 분사예요. 마카르는 행복하다는 뜻인데 그러면 이 마카르 행복하다 라는 단어를 쓴 헬라어 용례를 찾아보면 어떨 때 쓰느냐?

호메로스(호머)의 서사시 일리야드나 오딧세이 그리고 그리스 신화 이런 데 쓰여진 이 마카르라는 단어의 용례를 잘 살펴보면 신들의 행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였다는 거예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 서사시에 나오는 신들의 행복을 얘기할 때.

신들의 행복이라는 게 뭡니까?

그리스 신화는 신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할 때 그 신들이 행복할 때 ‘마카르’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면 그 마카르의 행복함이 뭘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종속되지 않는 행복함을 말하는 거였다는 거예요. 이 땅에 돈이 안 벌리면 슬퍼지고 돈이 벌리면 기뻐지고, 이 땅에서 일류대학 들어가면 기뻐지고 못 들어가면 슬퍼지고 하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좌우되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신들의 행복, 땅에서 떨어져 있는 신들의 행복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마음이 가난하면 너희가 이 땅에서 마음이 지불할 것이 없을 만큼 이 땅에 대해서는 완전히 가난한 자가 되어라. 그러면 ‘마카리오스’, 신들이 즐기던 그 행복이 너희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신들이 느끼던 그 행복을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게 될 수 있게끔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의 눈에 재벌의 10조의 재산이 소똥 아니겠습니까? 말똥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그렇게 못 본다고 해요. 이렇게 보면 이해가 가요.

무엇 때문에 초대교인들이 유무상통할 수 있었는지 그 끔찍하게 귀한 피보다 더 귀한 돈을 없는 사람이 막 가져가서 써도 될 수 있게끔 주머니를 열어 놓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천국을 갖게 되어버리니까 소똥 나누어 주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말똥 나누어주는 게 뭐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내일 또 말똥 주우면 되는 거지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 자식들이 구해오면 되니까. 옆집에서 소똥 땔감이 없어서 밥을 못 해 먹는다는데 그까짓 거 소똥 좀 나눠주지 뭘 그래. 그럴 수 있었던 게 그거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돈이 귀해 보일까요?

아직 주님께서 갖고 오신 이 지구 위의 복 리스트에 새롭게 기입되어진 이 새 복, 천국이라는 새 복 이것을 우리가 아직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이 계시면 지금 그 자리에서 천국이 여러분 것이 돼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정에 마음을 지불하지 마세요. 가정에 대해서 마음이 아주 아주 가난한 자가 되세요.

자식과의 관계가 천국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식에 대해서 마음을 지불하지 마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자식에게 뭘 해주고 싶어도 자전거 하나를 사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 자전거 못 사주고, 또 더 크게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는 미국 유학을 보내고 싶은데 하도 경비가 많이 든다니까 못 해주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가난한 거예요. 그런데 아예 돈이 가난해서 못 하는 것도 있는데 마음까지 가난해지라 이겁니다.

돈 가난해도 할 수 없지요. 그 자식과의 관계가. 그런데 마음 가난한 거 못해버릴 게 뭐 있어요. 돈 가난한 상태로 자식들 크고 있지 않습니까? 자식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해지라 이거에요. 자식에게 마음이 지불할 게 없어지라 이겁니다. 사업에 대해서 사업장에서 천국을 누리고 싶으시면 주님이 갖고 오신 복을 누리고 싶으시면 주님의 복은 사업이 잘되는 게 아니에요. 돈 많이 버는 게 아닙니다. 사업장에서 천국이라는 복을 누리시라 이겁니다. 어떤 직장에 다니시든지 직장에서 천국을 누리시라 이거에요. 직장에서 승진하는 게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선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부자인 분이 계세요. 이 세상 내 가정과 내 직장과 내 사업 일에 대해서 마음이 갑부인 분이 계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하시는 마음 씀씀이, 마음을 지불하실 준비가 어느 정도까지 됐느냐?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큼 나를 위해서 그럴 만큼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온 하늘에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내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지불하시고 마음을 쓰시려는 준비가 가득가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나의 삶을 향하여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부자이시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말을 단순히 '겸손하다'라는 말로 '비천하다'라는 말로만 쓸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왜? 내 삶의 곳곳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갑부로 있습니다. 내 사업장에 가면 사업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이 갑부처럼 있으시고, 내 자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갑부처럼 있으세요.

나는 뭐하느냐? 자식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하면 됩니다. 아주 정말 엉덩이가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면 되는 거예요. 사업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하면 되는 거예요. 마음이 지불하려야 지불할 게 없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갑부 같은 마음의 풍요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지불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천국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갑부의 마음이 내 삶에 대해서 갖고 계신 그 갑부의 마음이 막 지불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지불되면 우리는 자식을 향해서 돈 없을 때 마음은 원이로되 돈이 없어 못 해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이 지불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원인데 못 해주시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돈, 오래 사는 거, 건강 이건 복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일 때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이젠 복이 아닙니다. 그걸 아직도 복이라고 생각해 가지고 그걸 못 먹어 꿀꿀해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도 아닙니다. 교회도 아니에요. 천국이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 이게 교회의 특권이고 교인의 특권이지요. 그러려면 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아주아주 가난한 사람 가난해서 마음을 쓸래야 쓸 마음이 없는 사람.

이렇게 되게 해주시기 위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지불하려야 지불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가 되게 해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식을 보면서 내 마음이 십자가에 올라가 붙습니다. 난 죽은 자다. 너한테 쓸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

사업을 보면서 사업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우선 마음의 지불유예(debt moratorium)를 선언하세요. 모라토리엄[moratorium]이라고 하잖아요. 나라가 빚을 졌습니다. 채무를 갚아야 하는데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서 나라 안에 쓰기도 바빠요. 온 나라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지불유예를 선언해버리는 겁니다. 우린 몇 년까지 못하겠다…

자식이 급합니다. 사업문제가 급합니다. 건강이 급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세요. 지불유예를 선언하세요. 마음의 지불유예를 선언을 해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이 세상 모든 “지금 마음을 주세요, 마음을 지불하세요” 하는 모든 빚쟁이들에 대해서 내 자식도 빚쟁이, 내 아내도 빚쟁이, 내 남편도 빚쟁이.

아내가 무서운 빚쟁이잖아요. 생일날 되고 결혼기념일만 되면 뭘 마음을 안 써주나 해가지고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다 빚쟁이에요. 이런 모든 빚쟁이들에 대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세요. 지불유예를 선언하세요. 마음의 지불을 선언하시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완전히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가 되어 버려요.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의 갑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쓰시기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쓰시는 대로 이 세상의 삶이 상상도 못할 방법과 길로 이루어져 나가는 거지요. 요게 천국이거든요. 요걸 복으로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천국을 누리며 살려면 나머지 7가지의 복이 꼭 우리들에게 일어나야지 진짜 내 천국이 된다 이겁니다.

그 얘기를 이번 주 동안 하시자 이거에요.

어떤 급한 일이 있어도 내 마음에 빚쟁이들이 내 마음을 지불되기를 요구하는 모든 빚쟁이들이 난리 아우성을 쳐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시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마음 쓸래야 쓸 건덕지가 없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천국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장에 경험해보세요.

먼저 성령이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십자가에서 마음이 가난하게 되면. 거기에 진정한 평강이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서는 거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의 부자 되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해 가난한 자가 되게 해주시고 오직 하늘과 하나님과 주님을 향해서 온 마음을 다 드려버려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정말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어 천국의 복을 내 것으로 지금 삼아 누리는 자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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