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배부름
(마 5:6)
오늘 아침도 계속해서 8복, 네 번째의 복을 함께 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린 자의 복, 배부름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배부름이라고 하는 복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것은 의라고 하는 게 굉장히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마는 복을 선언하고 계시는 지금 이 맥락에서는 배부름이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배부름이라고 하는 복이…
여러분, 우리가 보통 공부 열심히 하면 서울대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한다라는 말이 먼저입니까? 서울대라는 복이 먼저 머리에 들어옵니까? 서울대에 대해서 듣고 알고 하다보니까 서울대가 좋았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하면 취직도 잘 된다, 서울대를 졸업하면 평생 사람들이 대우해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래 서울대라는 게 어떤 복인지 알고 나니까 아, 서울대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공부를 열심히 해라. 길이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거 아닙니까? 목적지가 결정되고 부산을 가려면 부산이 먼저입니다. 경부선을 타라. 나중입니다.
그런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항상 우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의 참모습도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 할 경우가 있습니다.
배부름의 복!
이 배부름의 복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 복이에요.
헌 복이 뭐라구요? 5복입니다.
이 5복이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새 복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갖고 오신 것이고 5복은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예수님과 상관없는 지역에서,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구태의연하게 촌스럽게 복의 세계에서 너무 낙후된 그런 복이 바로 5복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완전히 brand new 복을 갖고 오셨다는 거예요. 그중에서 배부름의 복이 있다는 겁니다.
이 배부름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복이냐 라는 걸 알려면 우리가 배고픔이 뭔가를 알아야 돼요. 배고픔이 있으니까 배고픔의 고통이 있으니까 배부름이 복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배고픔에 얽혀있는 비밀이 여러분 도대체 뭡니까?
배고픔에 얽혀있는 비밀은 배고픔은 독립적이다 라는 겁니다.
배고픔이 독립적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쉽게 말하면 지금 내가 굉장히 자장면이 먹고 싶습니다. 아니면 피자가 먹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장면이 결핍돼서 배가 고픈 게 아니잖아요? 피자가 없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게 아니잖아요? 자장면이 없는 그 결핍을 느끼는 것이 배고픔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거꾸로 배고픔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먼저 느끼고 그다음에 아, 이 배고픔을 어떻게 채울까 생각하다가 어떤 사람은 중국집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양식집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한식집에 가서 된장찌개 먹는 거 아닙니까? 배고픔이 먼저라 이겁니다.
그래서 지금 자장면이 먹고 싶지만 자장면이 결핍됐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이겁니다. 아무리 자장면이 먹고 싶다가도 자장면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직장 동료가 붕어빵을 잔뜩 사왔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픈 김에 붕어빵을 막 먹었어요. 자장면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그래서 자장면의 결핍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이게 바로 배고픔의 비밀이라는 거예요. 배고픔이라는 것은 자장면 이전에 피자 이전에 된장찌개 이전에 먼저 있었다…
자, 음식의 세계에서 되어지는 배고픔의 비밀 이야기는 뭐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마음의 배고픔으로 가게 되면 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자장면이 고파요. 그런 것처럼 돈이 고파요. 돈이 고프면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돈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만족하지 못한다. 내 마음에 굶주림이 느껴진다.
또 회사에서 승진하고 싶어서 뭔가 일을 성취하고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공이 고프다고 생각해요. 요번 일은 꼭 성공해야 되겠는데. 내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자장면이 먹고 싶을 때 자장면 이전에 배고픔이 독립적으로 먼저 있었던 것처럼 돈이 고플 때 정말 돈 얼마만 있으면 좋겠다고 돈이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 건강이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5복이 굉장히 고프잖아요? 5복이 있으면 좋겠다 좋겠다 굶주림이 느껴지잖아요? 그러면 5복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족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의 배가 고픈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의 배가 고픈 게 먼저 있었고 배고픔이 먼저 있었고 마음의 고픔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배고픔을 어떻게 채울까 두루두루 찾아보다가 돈을 자장면으로 생각하고 먹고 싶어 하고 건강을 먹고 싶어 하고 5복을 먹고 싶어 하게 되었다 이겁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배부름의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절대로 돈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돈에 대해서 고픔이 느껴지고 갈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돼요. 이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원래 돈과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배고픔이 생겼고 그리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나는 지금 돈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느껴야 돼요.
돈이 아니라도 다른 것으로 배가 부른다면 여러분 돈 안 찾게 돼요. 먼저 있는 배고픔에서 가지가지 것을 향한 나의 갈증이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나면 배부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어요.
배고픔이라고 하는 것은 5복과 연관되어 있다 라고 하는 오해를 벗어나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뭔가 결핍이 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만 있으면 내가 만족하다고 느끼는 것 그건 다 오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 연관되기 이전에 이미 내 안에는 배고픔이 있어서 그 배고픔이 뭐로 나타납니까? 욕망으로 나타나고 야망으로 나타납니다.
야망이라는 게 건설적인 야망이든 아니면 아주 나쁜 야망이든 간에 그 야망, 또 어떤 것에 집착하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다 사실은 이 고픔을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먼저 배고픔이 있었고 그리고 그 배고픔을 채우려고 선택하는 겁니다.
사춘기 때는 부모를 떠나 친구들로 채우려고 하고 있고, 청장년이 되면 애인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고, 그래서 장년과 노년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성공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고 돈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인데 배고픔은 그것들과 상관없이 이미 존재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져오신 새 복은 무엇이냐?
새 복이 뭐예요? 여러분?
그 배고픔을 돈과 관계 이전에, 건강과 관계 이전에, 지금 내가 건강이 안 좋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건강은 안 좋아도 내 배는 부를 수 있다는 거예요. 단지 내가 배고픔을 건강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뿐이지…
이렇게 세상의 5복과 관계없이 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배고픔을 주님께서 배부름으로 바꿔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 하나도 없는데 어! 배불러요.. 만족해요..
내가 건강이 별로인데 내 마음이 만족해요..
그러니까 세상의 5복이 빛바랠 수밖에 없는 배부름을 하나님이 주님을 통해서 나한테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잔뜩 배가 불렀는데 어머니가 시장에 갔다 오시면서 제가 보통 좋아하는 빈대떡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배가 부르면 맛있는 것에 대해 감각이 무뎌진 게 아니라 빈 구석이 없기 때문에 채울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갖고 오신 복이 뭐냐 하면 이렇게 이 세상의 5복과 관계하기 이전에 이미 배가 부른 상태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아요? 여러분? 이게 바로 주님이 갖고 오신 새 복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 이 네 번째의 복 배부름의 복은 기가 막힌 거예요. 뭐가 기가 막히냐?
어제 신문 봤더니 삼성 얘기를 제가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이 돈을 제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기업이 삼성이다 보니까 상징적인 의미에서 삼성이나 현대나 엘지 얘기를 자주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시고 들으시면 되는데 삼성에서 어제 이건희 회장님이 43조를 내년에 투자한다고 결정했다고 그래요. 43조! 저는 그게 뭔지를 몰라요. 43조가 뭘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경기도에서 어디 먼 들판이나 이런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시내 예를 들어 대형마트가 있다 그러면 옥상이 넓게 비어있지 않습니까? 그런 빈 공간들에 태양열 접지를 경기도 전역에 공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기를 생산해내고 전기를 팔기도 하고 에너지를 저축하고 그 경기도 내에 그런 공사 예산이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2조인가 그런 거 같아요. 하여간 10조 아래에요. 그런데 삼성이 내년에 투자할 게 43조라는 거예요.
왜 투자합니까? 더 많은 이윤을 향해 나가는 거예요. 43조를 투자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는데도 아직도 돈이 고픈 거예요. 43조의 재산을 갖고도 사람의 마음은 배부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꼭 이윤을 향해서 나가는 것만이 아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뭐 삼성이라고 하는 대기업을 계속해서 경쟁회사보다 더 앞서게 하려고 하며 투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결국 마지막에 어떤 대단한 명분이 있더라도 삼성 가족을 먹이기 위한 것이다, 기술의 진보를 위한 것이다, 뭐라고 하더라도 이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기업이라는 건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43조를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것은 투자 말고도 내가 챙기는 이득이 다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이득이 있고 43조를 투자할 수 있을 만큼 되어도 돈의 고픔은 끝이 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몇백 조를 갖고도 해결할 수 없는 배부름의 문제를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대통령 한번 하잖아요. 그러면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이명박 대통령이라도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4대강 사업 아직 마무리도 안 지었는데 4대강 사업 마무리 잘 짓고 그다음에 4대강 사업이 잘돼서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면 이제 운하까지 파자. 이런 마음 있을 수 있어요. 있다고 확정하는 게 아니라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전성기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잘해서 전성기가 온 게 아니에요. 이미 전성기에 다다랐을 때 대통령이 됐어요.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한번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임금이 되어도 만족시킬 수 없고 43조를 투자할 수 있는 재력이 생겨도 돈 고픔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돈으로 마음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돈 한푼 안 들이고 건강이 있거나 없거나 내가 예쁘거나 안 예쁘거나 내가 높은 벼슬에 올랐거나 안 올랐거나 내가 학벌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주님께서 이건희씨도 못하고 이명박 대통령도 못하는 배부름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복이 아니고 뭐가 복이겠습니까?
돈이 앞에 굴러왔어요. 그런데 보기를 돌처럼 보이는 거예요.
돈을 많이 모으는 게 복입니까? 돈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돌처럼 보이는 게 복입니까?
에이, 나는 그래도 돈을 많이 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마음이냐? 복 올 때 문 닫는다는 속담이 있어요. 아니, 무슨 복이 오는 것을 문을 닫아버립니까?
그럼 5복은 뭐 하는 거냐?
5복은 物流, 여러분 물류가 뭔지 아시죠? 물질의 흐름. 그냥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의 5복은 흘러가는 겁니다. 나를 거치면서 방향이 틀어져가지고 흘러가는 거예요. 교회에도 헌금도 하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돈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지요.
내가 오래 산다. 5복입니다. 그러나 그 오래 사는 것이 무엇이 필요합니까? 내 배가 지금 부른데.. 오래 살고 싶은 것에 대한 고픔이 없어요. 굶주림이 없어요. 그럼 오래 사는 동안에 뭐하냐? 결국은 내 배가 부르면 머슴 배 생각이 난다고 내가 배가 부르니까 다른 사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내 배가 부르지 않지 않습니까? 내 배가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을 위한 선행을 하지요? 결국 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되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타인을 위한 선행을 통해서 칭찬을 받고 칭찬에 고팠던 배가 부르려고 하고, 타인을 위한 선행을 했다고 하는 자긍감(pride)이 또 내 배를 채우려고 하고, 배가 고픈 한 내 배를 채우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아무리 선행이라고 보여도 그 선행은 내 배가 고픈 한 내 배를 채우는 거예요. 기부천사라는 말하잖아요? 내 배가 주님이 주시는 배부름으로 배부르지 않는 한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돼요.
여러분!
그럼 이러한 배부름의 복이 어찌해야 주어집니까?
이 배부름의 복은 로봇에게 입력하듯이 그냥 그렇게 주어질 수는 없잖아요. 나무나 동물에게 무슨 본능이 주어지듯이 그렇게 주어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 배부름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헬라어의 뜻이 동물들이 풀을 뜯어 먹고 살이 포동포동하게 찌는 그런 뜻의 동사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배부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이 해석서를 보고 연구서들을 보면 의를 갈망하라, 의를 추구하라 이렇게 얘기해요.
배부름의 복은 어떻게 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여러분?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의를 갈망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해요. 이거는 완전히 비기독교적이고 비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거는 의를 향하여 굶주림과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에서 한 가지 앞에서 얘기한 것과 연결 지으면 배고픔과 갈증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겁니다. 배고픔이 이미 있고 우리가 돈을 찾았던 것처럼 배고픔이 이미 있고 우리가 건강을 찾았던 것처럼 배고픔을 채우려고 5복을 찾았던 것처럼 배고픔 자체는 이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에 굶주렸다는 얘기는 배고픔의 이유를 의가 없기 때문이다.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건강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사람들이 나를 인정을 안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고 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배고픔은 이미 있는 거예요. 배고픔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야망하고 욕망하고 집착하고 사랑하는 거 아닙니까? 그 배고픔을 채우려고.
새삼스럽게 의라고 하는 것을 내가 수고하면서 자발적으로 의를 추구하겠다고 결정하고 그 추구를 위한 행동을 해야 되는 것처럼 설명을 한다고 그러면 이건 사이비 종교가 돼버려요. 사이비 이단이 돼버릴 수가 있어요. 비기독교적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자, 좀 더 중요한 포인트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갈망과 주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주림과 갈증 배고픔은 이미 우리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냐?
인간은 여러분, 내가 배고플 때 돈이 없다고 생각하면 돈을 추구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할 수가 있어요. 또 건강이 모자랄 때 건강을 위해 노력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를 고파할 때 그 인기를 얻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하고 노래연습도 하고 이러면서 노력할 수 있어요. 승진이 고프다고 느끼니까 승진을 위해 노력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의를 위해서는 노력할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돈은 죄인도 벌 수 있어요. 은행 강도질을 해도 걸리지 않으면 돈을 버는 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인기도 사람들의 인기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인기를 얻을 수 있어요. 신창원 같은 사람 도망자 잡히지 않았어요. 영웅이 됐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의 팬이 생기지 않아요? 이 세상의 5복은 의가 없어도 내가 지금 이 자연인의 상태로서 얼마든지 추구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의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내 상태가 죄인인 상태이기 때문에 의라는 걸 건드리면 의도 더럽혀져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의를 위해서는 내가 꼼짝달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라는 건 죄인이 아닌 건데 의롭다라는 말을 받기 전까지는 내가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 죄인인 상태에서 의를 추구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추구해 들어가는 자체가 다 의까지 더럽혀져요. 내가 무슨 수로??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여러분 기억하시죠?
바리새인이 뭐라고 그래요? 의를 추구했던 자입니다. 나는 의롭다. 왜? 금식하고 율법을 지키고.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의롭지 못하다. 가슴을 치며 통탄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는 얘기는 우리 수학 통계에서 나오는 얘기에요.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하면 맞다는 겁니다. 그렇죠? 잘못된 것을 잘 됐다고 하면 틀리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의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의라고는 없는데 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든지 의를 내가 가졌다고 본다는 것은 그것은 틀린 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여러분 내게 의가 없다는 것을 보는 건데 어떻게 봅니까? 의를 돈 추구하듯이 추구해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이제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느냐?
자, 첫 단계. 내게는 배고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예를 들어 5복에 대한 필요를 느껴요. 돈이 필요합니다. 건강이 필요합니다. 오래 살고 싶습니다. 승진하고 싶습니다. 인기를 얻고 싶습니다. 이런 필요를 느껴요. 이때 깜짝 놀라는 거예요.
배고픔이 있고 그 배고픔이 뭔가를 요게 있었으면 좋겠다, 요게 있으면 만족하겠다고 생각이 들고 느낌이 들어올 때 두 번째 단계 스스로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 아니다. 내가 지금 배고픈 이유가 무엇이냐? 내게 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보는 거라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불평이 생기고 불만이 생깁니다. 이때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내 마음이 불만스러운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보는 거라는 겁니다.
배고픔, 이게 굶주림 아닙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런데 우리는 의를 추구해 갈 수가 없어요. 의를 이룰 수가 없어요. 의를 바라볼 수도 없어요. 단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의가 없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어떨 때 봅니까? 나의 굶주림이 발동될 때.
자식이 서울대 들어갔으면 너무 좋겠는데 라는 말을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 때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 자식이 서울대학에 못 들어가서가 문제가 아니라 내게 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의가 없어서 생긴 배고픔을 자식이 서울대 들어가면 만족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요번 2011년 사업에서는 이 정도 흑자를 올렸으면 좋겠는데…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 그 사업이 그만큼 돼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가 없어서 배가 고픈 것인데 내가 그걸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매 삶의 순간 순간마다 이렇게 내게 의가 없어서 배가 고픈 거구나 이걸 인정하라는 거예요.
배고픔은 있어요. 그리고 그 배고픔이 돈과 연결되어 표현되고 건강과 연결되어 표현되고 5복과 연결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배고픔이 표현될 때마다 굶주림이 표현될 때마다 갈증이 표현될 때마다 아! 아니야. 내 갈증의 원인은 내 배고픔의 원인은 내게 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인정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발로 뛰어가면서 의를 추구해갈 수 없다는 겁니다. 돈은 추구할 수 있고 명예는 추구할 수 있고 인기는 추구할 수 있고 건강도 추구할 수 있지만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의는 우리의 힘으로 추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의를 향해서는 단지 내게 의가 없다는 것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배고픔의 갈증의 표현이 일어날 때마다 5복과 연결되어서 일어날 때마다 그때마다 속지 말고 아니다. 내 만족의 유일한 근거는 의가 될 수밖에 없는데 내 배고픔이 이렇게 창궐한 이유가 바로 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인정하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예요.
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돈을 요구하고 있고, 의로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의가 고프기 때문에 실은 자식의 성공을 목말라 하고 있고, 내가 의가 없기 때문에 지금 애인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내 배고픔의 문제는 애인으로 될 것도 아니고 자식으로 될 것도 아니고 돈으로 될 것도 아니다. 오직 의가 있어야 되는데 의가 없구나…
이 사실에 여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예요. 의가 없구나! 그래서 배가 고프구나.
그럼 의가 뭐예요? 여러분?
의를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될 도리라고 나와요. 그 도리를 지키면 의로운 거고 도리를 안 지키면 불의한 겁니다. 그런데 너무 객관적이고 제 삼자적인 과제로서만 이해가 됩니다.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가 뭡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 라는 겁니다. 너 내 마음에 든다. 그게 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가 고픔이 느껴질 때 돈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다고 느껴지고 이럴 때마다 배고픔이 내 속에서 발동하는 거 아닙니까? 배고프면 꼭 이 세상의 5복과 연결되어서 나타나요.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그럴 때 아니다 하는 거였어요.
그럼 뭐가 없다? 하나님이 내게서 마음에 들어 할 구석이 하나도 없다 라는 거를 인정하는 겁니다. 의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어필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내 미모?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내 재능?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께 어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내 속은 완전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캘빈이 말한 대로 루터가 말한 대로 완전히 죄인입니다. 완전히 썩어버린 상태입니다. 마음에 들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는 거예요.
마음에 든다는 게 여러분 뭐예요?
하나님 마음에 들면 배부르다 이겁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면 돈 필요 없고 건강 필요 없고 그것을 갈증 나 하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돈이 오면 단지 돈을 방향을 틀어서 흐름으로 내보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배불러진다는 거예요. 이게 배부름이에요.
쉽게 말하면 남자들 아주 쉽게 아내를 배부르게 할 수 있어요.
아내가 인터넷으로 옷 한 벌 샀습니다. 그걸 입고 나오는데 처음 본 옷이에요. 야! 멋있다. 이 한마디 하면 아내는 마음속에서 배불러서 죽어요.
미장원 갔다 왔어요. 내가 이제까지 본 중에 최고다! 이 한 마디면 내 마음에 든다 이거잖아요. 그러면 배불러 죽어요. 이상하게 내 마음에 든다고 그러는데 자기가 배불러 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인생사 따져보면 다 마음에 드냐 안 드냐에요.
무엇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면 배부른 겁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에 들어갔다. 서울대가 정한 기준을 통과해서 서울대에 받아들여진 겁니다. 배가 부른 거지요.
부자의 기준이 있습니다. 부자 되고 싶다는 그 기준에 받아들여진 겁니다. 그러니까 부자 되서 돈을 쓰는 것은 얼마 안 돼요. 먹고 놀고 별의별 옷과 백을 다 걸쳐도 그게 몇 푼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43조를 투자한다. 이건희씨가 자기가 부자로서 돈 쓰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의 한계가 얼마겠어요? 일 년에 일억 될까요? 그런데 그 돈 자체 쓰는 것보다 부자라고 하는 기준 재벌이라고 하는 기준에 받아들여진 것이 지금 만족감을 주는 게 아닙니까? 그 만족감이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바로 이렇게 마음에 든다고 하는 게 배부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정한 부자의 기준에 들면 내가 배불러지는 것이고, 서울대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들면 내가 배불러지는 것이고, 승진의 기준에 받아들여지면 내가 배불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5복이라고 하는 게 조금 있으면 또 배고파집니다.
반면, 주님께서 갖고 오신 배부름의 복이 뭐냐?
서울대학의 기준도 아니고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부자라는 기준도 아니고 달나라와 별나라와 은하계를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지구의 미생물까지도 다 관장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그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 이겁니다. 배부르다 못해 터져버리잖아요.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
서울대학이 너 내 마음에 든다. 째지는 겁니다. 남편이 너 내 마음에 든다. 부인이 째지는 겁니다. 이 세상의 기준이 너 부자의 기준에 마음에 든다. 터지는 거예요. 그 기준에 마음에 든다는 말이 의라는 겁니다. 내 마음에 든다…
하나님께서 쫓아다니시며 너 내 마음에 든다, 너 내 마음에 든다, 너 내 마음에 든다. 내 배가 불러오는 것이 느껴진다는 겁니다. 진짜로…
어떨 때마다 내 배가 불러짐을 느낍니까?
하나님이 너 내 마음에 든다. 어떨 때 그러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요.
돈이 고파요. 그럴 때 돈이 아무리 급해 보여도 내 마음이 돈을 갈급해하는 것은 이건 오해다. 이건 속임수다. 내 마음이 지금 고픈 이유는 내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의가 없기 때문에 내 배가 고픈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내 배가 고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 이러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에 들 만큼 우리에게 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이 뭔지 누가 알아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요.
어떨 때?
돈이 필요할 때 돈 대신에 십자가를 봅니다. 자식이 잘됐으면 할 때 자식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건강이 안 좋을 때 건강에 굶주려 있을 때 건강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지금 배가 고픈 이유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니다. 십자가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야 될 만큼 내게 의가 없다. 저렇게 비참한 저주를 받으셔야 될 만큼 내게 의가 없고 하나님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없다.”
세리의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 구석이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있고 내가 배가 고픈 것을 자꾸 돈이 없는 줄 알고 착각합니다. 자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내가 자꾸 배고파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받으신 그 저주가 내게 합당할 만큼 내게는 하나님 마음에 들 구석이 없음을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겁니다.
나는 의를 추구할 수 없어요. 단지 내 배고픔이 드러날 때 어떻게 드러난다구요? 이 세상의 5복과 연관돼서 드러납니다. 5복과 연관되어서 내 배고픔이 드러날 때 그 5복을 싹 거둬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아! 십자가에서 저런 저주를 받으실 만큼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어떨 때마다 이런 고백을 하라구요?
5복과 연결되어서 내 마음이 세상의 5복에 결핍을 느낄 때마다. 매번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마음이 결핍이 느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너 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계시는 순간이거든요. 너 지금 내 마음에 안 들어, 그러시는 순간이라구요. 그러시는 순간에 우리는 돈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5복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 보고 내게 의가 없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맞았어. 바로 그거야. 네가 지금 그만큼 너에게 아무것도 내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네가 이제 깨달았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때 하나님이 맞다 라고 인정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만지는 것마다 다 죄가 되니까. 돈도 내가 만지면 더러워져요. 자식도 더러워져요. 다 더러워져요.
그래서 의에 목마르다는 것은 이렇게 내가 의가 없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 라고 말씀하실 때 배가 불러지는 겁니다.
이렇게 배가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5복이 들어올 때 5복을 먹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돈 들어오면 돈을 여기다 갖다 줍니다. 오래 살아서 시간이 많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내 취미, 내 기쁨, 난 더이상 기쁠 필요도 없어요. 더 기쁠 수도 없어요. 그래서 그냥 내 모든 인생의 시간들을 여기다 쓰고 저기다 쓰고 혹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갑니다. 그 높은 자리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당장이라도 귀찮아서 내려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꾸 올려보내셨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저 이 사람 위해서 저 사람 위해서 다 쓰게 돼요.
이게 배부름의 복이라는 겁니다.
이 배부름의 복을 2011년 내내 마치 쌍둥이를 밴 것같이 배가 불러서 2011년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배고픔이 비밀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그 어떤 복과 연관되기 이전에 이미 내 안에 배고픔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배고픔이 드러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가 배고픈 이유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배고픔이 생긴 것이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시고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