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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녹취문: 팔복, 제5복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_태승철 (마5: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8.08|조회수222 목록 댓글 0

제5복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

(마 5:7)

 

 

오늘 8복 중에 제5복을 우리가 함께합니다. 다음 주까지 여덟 개의 복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며 이번 주는 제5복으로 마치게 되겠습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는 자의 복, 우리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마5:7]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다섯 번째 복의 내용은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내용의 이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엘레오스에서 파생된 복수 형태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제 그 70인역이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렇죠? 히브리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이라고 했는데 이 엘레오스라고 하는 그리스 말이 구약성경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보니까 구약성경에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는 헤세드라고 하는 단어와 같이 쓰이기도 하고, 또 ‘라하임’ 동정한다 그런 단어와도 같이 쓰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이라는 게 자비, 동정, 사랑 뭐가 그렇게 그 미묘한 차이를 전 잘 모르겠어요. 자비와 긍휼이 뭐가 다른 것이며 또 동정과 우리가 값싼 동정이라는 말도 합니다마는 뭐 동정이라는 말에 굳이 값싸다는 말을 붙일 필요 있어요? 동정이 좋은 거지요. 따뜻한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잘 돌보는 게 동정이니까 나쁜 거 아니죠. 뭔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긍휼이든 자비든 사랑이든 이 모든 단어 속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마음가짐이 있다 이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비도 불쌍히 여김이 있고, 긍휼도 불쌍히 여김이 있고, 사랑도 그리고 동정도 불쌍히 여김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인이 종에게 하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구약의 헤세드라고 그러면 불쌍히 여김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 하는 것은 핵심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어떤 포인트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게 뭐냐 하면 <落差>에요. 낙차…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이 그 놓인 처지가 너무 안 되고 가여워서 안타깝게 여기는 거예요. 그렇죠? 그 처지가.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기 위해서는 분명히 불쌍히 여기는 자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 간에 처지의 낙차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처지의 차이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처지가 비스듬한 사람들끼리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말이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 선민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와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비유할 때 헤세드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게 긍휼이거든요. 또 같은 단어로 쓰고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이거지요.

이제 새해가 시작됐고 이제 또 얼마 안 있으면 구정이 됩니다. 구정이 되면 대한민국 사람들 풍습이 있어요. 세배라는 풍습이 있는데 세배는 자식들이 부모에게 해서 자식이 아무리 늙어도 부모님 앞에서는 세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이 90세고 자식이 70세라도 세배는 해야 되지요.

그런데 이 세뱃돈에 차이가 있는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자식들이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게 됩니다. 또 그거는 40대 노총각이라도 세뱃돈을 줘요. 결혼을 안 하면.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면 세뱃돈이 끝나요. 세배는 하지만.

왜 그래요? 결혼을 했다는 것은 이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 가정의 경제생활과 모든 제반 살림을 떠맡아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부모님과 똑같기 때문에 이제는 한 가정을 이끄는 중심에 서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처지가 똑같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 점에서는. 가정의 가장인 면에서는 처지가 똑같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뱃돈을 안 주는 거지요.

 

낙차가 있어야 내려오는 겁니다. 긍휼이라는 게. 

그런데 이 긍휼이 여김이 이렇게 인간 세상에서 보여지는 긍휼이 여김과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심의 어떤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그러면 뭘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어떤 교회에서 집사님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교육전도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자주 집시님들 집에 초청받아서 식사도 하고 그랬는데 특별하게 눈에 들어오는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얼굴도 고우시고 남편도 또 특별한 일을 하십니다. 이런 걸 다 직종을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특별한 일을 하시고 아주 부유하게 잘 사십니다.

그런데 항상 전 맨 처음에 진짜 자매인 줄 알았어요. 그 집사님에게 언제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집사님이 언니! 언니! 집사님이라고도 안 그래요. 언니! 언니! 하면서. 난 친언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그냥 그분도 집사님이신데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세요. 붙어 다니시면서 보면 지난 주에 그 집사님이 입었던 옷인데 다음 다음 주 되어보면 이 집사님이 입고 다니시는 거예요. 옷도 그렇고 백도 그렇고 심지어는 어디 여행을 간다고 그러면 이 집사님이 돈을 내서 이 동생 집사님을 데리고 가시기도 하시고 그렇게 혈육보다 더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갑자기 냉기류가 흐르는 거예요. 싸늘한 거예요. 두 분 사이가.

그래서 왜 그런가 기도도 해봐도 모르겠고 그러더니 그 측근에 있는 분들에게 말을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이 동생이라고 하는 집사님이 친동생 아니잖아요? 이 동생 집사님이 남편의 일이 갑자기 잘 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이 언니 집사님이 사 입는 고급 옷들을 사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어요.

쉽게 말하면 흥! 네까짓 게 언제부터 그런 옷 입고 다녔어? 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마음이. 그러니까 이분이 동생에게 자기가 입던 옷 새 옷들을 주고 이랬던 것은 그 처지가 밑에 있는 한, 나보다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베풀어졌던 자비였다는 겁니다. 긍휼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이 여러분 어떤 긍휼이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그대로 밟아오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은 낙차가 있습니다. 천국과 땅이라고 하는 낙차,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 곳은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계시면서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땅에 사는 사람이 불쌍하지 않으실 수가 없으신 거지요. 하나님 마음에는.  

이 땅에서 어떤 입장에 있으면 천국에 계시고 보좌에 계시고 천군천사가 둘러쳐 계시고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사랑 가운데 화답하고 일체가 되어 계시는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가 불쌍하지 않게 느껴지는 상태가 이 땅에 있겠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이 낙차. 천국과 이 땅의 형편이라는 차이에서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우리를 기어코 당신이 계신 천국의 처지까지 끌어 올리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고 결국 이 긍휼을 입게 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지금 그 보좌의 주변 천국 처지 그 천국의 환경까지 나를 끌어 올리셔야 끝이 나는 긍휼이라는 거예요. 하늘의 긍휼의 여기심이라는 게.

그러니까 여러분, 다른 거지요?

  

하나님께서 전 이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해주셨으면 좋겠냐?

그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조금 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조금 덜어주셨으면 좋겠다. 약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5복 있잖아요. 5복. 전통적인 복. 헌 복 있잖아요. 헌 복. 그 헌 복을 그렇게 원하는 것만큼 누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5복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이 하나님께 불쌍해 보이지만 돈 없고 건강이 안 좋고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고 헐벗고 달동네에 사는 거 이런 것이 불쌍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 더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5복에 취해서 이 땅에 머물고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마음을 먹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더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왜? 천국에서 지금 보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는 천국에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5복에 머물러 있는 것이 땅을 치며 불쌍해하시는 일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5복에 빈약하게 사는 거예요.

왜? 마음에 내가 거기에 묶여버릴까 봐.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조금만 덜 불쌍하게 여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천국의 일은 나중의 일이고 하나님은 지금 나를 보고 계셔서 지금 불쌍하게 여기셔서 이렇게 나한테 돈을 주시기에 인색하시고 건강을 주시기에 인색하세요. 건강 조금 주면 우리가 그 건강 가지고 뭐하냐? 벤츠 타고 돌아다니니까. 건강 주셔가지고 다리몽둥이 분질러서 침대에 눕혀놔야 기도라도 하니까 하나님이 그러고 계신다는 거예요. 다리몽둥이 분질러져서 아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 멀쩡해가지고 돌아다니며 하나님 잊어버리고 이 땅에 취해서 사는 걸 더 불쌍하게 여기신다는 데 우리가 이 세상 사는데 비극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 어려움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의 입자에서 불쌍히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쌍히 보고 계시는 이 마음은 빌 게이츠를 향해서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빌 게이츠의 대저택에 산다고 하나님께서 빌 게이츠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신다고 그러면, 그러면 빌 게이츠의 저택이 곧 천국과 비슷하다는 얘기에요. 그건 있을 수가 없지요. 천국을 우리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있을 수가 없지요. 빌 게이츠의 저택이 한 섬이래요. 섬.

그리고 그 집에 곳곳에 사진들을 이렇게 인터넷에 누가 올려 놨더라구요. 그건 집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에요. 궁궐도 그런 궁궐이 없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게이츠가 그런 집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빌 게이츠를 볼 때 불쌍한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면 난 천국 안 가요. 내가 빌 게이츠 집에 가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 집에 살고 싶지도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빌 게이츠를 볼 때 불쌍히 여김이 없어질 정도로 천국이 그런 처지라고 그러면 난 천국 안 갑니다. 그냥 지금 내가 사는 이 아파트 이 집이 그냥 좋아요.

여러분, 스티브 잡스가 하나님이 볼 때 안 불쌍하겠습니까? 워랜 버핏이 안 불쌍하겠습니까? 이건희씨가 안 불쌍하겠습니까? 구인회씨가 안 불쌍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천국에서 보실 때.  

이 불쌍히 여기시는 이것 때문에 세상에는 재벌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 거예요.

왜? 마음이 이 세상의 헌 복에 취해가지고 그냥 이 땅에 머물러있고 이 땅에 묶여 있을까 봐. 그래서 천국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면서 지금 그 천국으로 하나님이 보시듯이 우리도 천국을 바라보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땅을 보시듯이 천국에서.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잖아요? 그 긍휼히 여기심이 어떻게 발동되느냐?

“야! 돈 없는 거 보지 말고 천국 봐. 이놈아.” 하나님 마음이 그렇다 이겁니다. “야! 너 몸이 좀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고 몸이 아픈 걸 기회로 삼아서 이 땅에서 갖고 싶었던 것들 좀 떨어뜨리고 그 마음으로 천국 봐.”

이 마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못 사는 겁니다. 5복에 있어서 이렇게 빈약하게 사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돈을 보는 우리의 마음의 눈, 건강을 보는 우리 마음의 눈, 5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천국 쪽으로 돌리라고, 왜냐하면 그 속에서 5복을 가지고 씨름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니까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정도로 안타까우니까 제발 좀 천국을 봐라 천국을 봐라 이러고 계시는 겁니다.

  

이 긍휼히 여기심을 입을 때 천국이 우리 것이 되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심을 입는다는 거는 하나님의 처지, 보좌에 계신 그 하나님의 처지까지 땅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이 땅의 처지로부터 끌어 올리시겠다는 겁니다. 바로 지금 우리 마음이 천국을 갖게 해주시겠다는 거예요. 느끼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어휴! 빌 게이츠가 집에 들어갈 때 문이 주욱 열리면 차 타고 한참 가야 자기 침실로 갑니다. 대단한 집 아닙니까? 그걸 보면서 어떤 성취감을 느끼실 수 있죠?

천국을 내 집으로 느끼게 해주시겠다는 거예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게 바로 그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처지까지 끌어 올리겠다. 

그러면 다 됐네요. 모든 사람을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지금 금방 은행 강도가 막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행 강도만 피해서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길을 걸어갈 때 그 사람을 피해서 햇볕을 쬐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처지인 하늘나라 보좌 앞까지 우리를 끌어 올리시려는 긍휼하심은 이 땅에 사는 누구든지 다 전과 20범에게까지 다 똑같이 임하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이질 않는 거예요.

속담 중에 그런 속담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복 들어오는 날 문 닫는다. 복 들어오는 날 문을 닫아버리는 거예요. 복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닫아버리는 겁니다. 굴러온 복을 발로 차내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긍휼히 여기심의 복 천국의 처지까지 지금 현재 우리 마음을 끌어 올리시려고 하는 그 긍휼히 여기심의 복을 발로 찰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된다는 거예요. 이건 또 뭔 소리입니까?

사실 여러분 불쌍히 보인다는 건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불쌍히 보여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게 우리에게 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낙차가 있어야 됩니다. 불쌍히 여기려면.

우리보고 불쌍히 여기시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불쌍히 여기심이 끝까지 성취가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나를 하나님의 처지인 천국까지 끌어 올리실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내가 누구를 긍휼이 여겨야. 불쌍히 여겨야.

  

그런데 이 문장에 문제가 있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라는 이 단어는 내가 긍휼히 여겨야 될 사람에 대한 어떤 제한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빈민을 향해서는 내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나 같이 사는 게 아프리카 빈민하고만 같이 사는 게 아니에요. 동시대인들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재벌들도 있고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겨야 된다는 마음이 유보되는 겁니까? 그거 어찌해야 되는 겁니까?  

 

사도 바울 얘기를 한번 들어보면 우리가 확실히 알아요.

제가 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용합니다마는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다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랬어요.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당신들 처지가 지금 내 처지보다 못하다. 당신들 처지가 내 처지에 미치지 못하니까 얼른 내 처지까지 올라오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게 바로 긍휼이에요. 왕 앞에서 총독 앞에서 바울이 다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처지가 당신 처지보다 높으니까 올라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지요.

 

이 말을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건희씨를 이건희씨 얘기 또 해요. 왜? 또 신문에 나왔어요. 뭐가 나왔냐면 이건희씨가 이재용씨를 삼성전자의 사장으로 승진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리고 딸들은 신라호텔의 사장이고 누군 뭐 그렇게… 그게 또 그렇게 신문에 났어요. 그리고서는 재벌들의 얘기를 해도 꼭 삼성이 대표에요. 그 다음에 다른 재벌가들에서도 자식들을 2세 3세를 대거 승진을 시켜서 점점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 무슨 수로 이건희씨를 긍휼히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을 긍휼히 여긴 걸 보면 나도 이건희씨를 긍휼히 여겨야 될 거 같은데 나라고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은 계열로 비교를 합시다.

 

예를 들면 동네에서 편의점을 하나 겨우겨우 20년 번 돈으로 동네에 편의점 하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근근이 아르바이트생도 가급적이면 적게 쓰고 하면서 거기서 번 돈으로 한 가족이 근근이 먹고살아요. 그럼 이 사람이 어떻게 이건희씨를 긍휼히 여길 수가 있고 불쌍히 여길 수가 있겠냐 이겁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라는 건 무차별적인 거예요. 어떤 제한과 대상이 없는 거예요.

또 사도 바울도 그렇게 살았더라구요. 왕 앞에서도 왕이여 내가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랬더라니까요. 결박한 거 외에는. 결박한 것만 문제입니까? 돈이 있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기업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도한다고 돌아다니는 거지인데. 길거리 행상보다도 못한데. 그런데 불쌍하다는 거예요. 아그립바 왕한테.

이게 안 되면 하나님이 천국까지 끌어 오시려는 긍휼하심을 끝까지 완수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긍휼히 여김이 안 되면, 낙차를 발견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긍휼히 여기라는 말은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너는 낙차를 발견해라 라는 겁니다.

 

여러분, 왕 얘기도 했지만 예를 들어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이나 오바마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말 구인회씨나 무슨 정몽준씨나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된다는 거예요. 달동네 사는 사람만 불쌍히 여기고 구걸하는 사람만 불쌍히 여기고 집이 없어 쫓겨난 사람만 불쌍히 여기고 구제역 때문에 소를 다 살처분시켜야 되는 농부만 불쌍히 여길 게 아니라 몽땅 다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너는 천국으로 끌어 올리려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지 못할 거라는 겁니다. 낙차를 발견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낙차를 발견합니까?

어떻게 내가 이건희씨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만큼 이건희씨보다 더 좋은 처지로 올라가겠습니까?

간단해요. 여러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이건희씨는 이 땅에 있는 봉우리에요. 이명박 대통령 봉우리에요. 오바마 대통령 이 땅에서 봉우리에요. 이 땅에서 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선 사람들입니다. 노벨 물리학상 받는 사람 이 땅에서 봉우리에요. 장동건씨 김태희씨 이 땅에서 봉우리에요. 그러나 봉우리가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 뫼입니다. 

하늘 올라가는 게 뭐가 어려워요? 비행기 타면 되는데. 그냥 땅에서 이륙하면 됩니다. 그러면 땅과 하늘의 차이가 생기는 거예요.

 

결국은 이 세상 동시대인들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을 긍휼이 여길 수 있기 위해서는 낙차를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 낙차가 이 땅에서 최고봉을 이룬 사람들에게까지 사도 바울처럼 왕에게까지 미치려면 결국은 나는 이 땅을 벗어나서 하늘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이겁니다. 하늘 위로 올라가야 내 마음이 적어도 이 땅에 있는 어느 것이 좋아서 이 땅에 있는 5복 중에 어느 것이 좋아가지고 그것에 묻혀있는 한 하늘로 못 올라가지요. 낙차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재벌들을 긍휼히 여기는 대신에 어떤 일이 나타납니까? 부러워하게 됩니다.

왜? 그들은 봉우리고 나는 산 밑에 있어요. 산 밑에 어느 지점에 와 있으니까. 산 중턱에 와 있으면 큰 중소기업의 사장님 된 거겠지요. 거기서 더 올라가면 준재벌이 되는 거겠지요. 그러니까 삼성이 부럽고 엘지가 부러운 이유는 이 땅에서 올라가서 그렇습니다.

 

부러우면 망합니다. 왜요? 왜 망합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할 수가 없어요. 긍휼하심은 임했는데 그 긍휼하심이 성취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으니까.

왜 브레이크를 걸어요? 이 땅을 꽉 잡고 있거든요. 이 땅에서 헌 복들을 꽉 마음으로 잡고 있으니까.

  

그럼 어떡해야 긍휼합니까?

내 마음이 이 긍휼의 여김의 잣대에서 천국이라는 눈금에 가 있지 않으면 하늘이라는 눈금에 가 있지 않으면 이 땅에 사는 동시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긍휼히 여길 수가 없다 이겁니다. 긍휼히 여길 수가 없어요. 낙차가 안 생기니까.

내 마음이 하늘에 오를 때라야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을 누구든 상관없이 그가 박사든 아니면 구걸하는 사람이든 지게를 지시는 분이든 재벌 총수든 누구든 상관없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늘에 올라가서 생기는 낙차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이 낙차는 그냥 우리가 마음에 천국 천국 하면 되는 겁니까?

천국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라고 그랬어요. 이슬람교도들도 천국을 얘기합니다. 그냥 천국 천국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 천국 천국 한다고 그러면 미친놈인 줄 알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내가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나에 죽었다는 거예요. 세상이 나에 대해 죽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이야기는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인데 죽었다는 게 뭡니까?

비행기가 땅에서 이륙하는 거, 이게 땅에 대해서 죽은 거예요. 땅에 대해서 죽을 때 땅 위로 뜨더라는 거예요. 땅에 대해서 죽을 때 바다로 나갈 수도 있지요.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 지신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땅에 대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땅에서 이륙하게 된다는 겁니다. 5복의 자력으로부터 벗어나서 5복이 우리 마음을 잡아 끄르지 않습니까? 잡아끌고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각 분야의 정상들을 바라볼 때 늘 부러워요. 그걸 부러워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그쪽을 향해서 부러워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 처지보다 아래 사람을 볼 겨를도 없어요. 왜냐하면 마음을 위로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건희씨가 불쌍해 보이면 구걸하는 사람까지 불쌍해 보이는 것이고 이건희씨가 불쌍해 보이지 않고 부러워 보이면 구걸하는 사람에게도 불쌍한 마음이 안 생기는 겁니다.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면 어떤 마음? 그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면서 나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불쌍함 밖에는 안 된다 이거에요. 뭔 소리인지 아시겠습니까?

워랜 버핏이 불쌍해 보이지 않으면 달동네 사람이 불쌍해 보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달동네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참으로 긍휼히 여기려면 워랜 버핏까지 불쌍해 보여야 된다 이거에요. 단, 그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천국을 모르고 있는 한.  

십자가 붙잡고 천국을 아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어요. 그들은 불쌍히 여길 자들이 아니라 힘을 합친 동역자요 천국의 형제자매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라면 대통령 아니라 재벌 아니라 뭐라도 그들을 향한 긍휼이 없으면 진짜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에 대한 긍휼도 가짜라 이겁니다. 그 긍휼은 나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내가 그보다는 높다. 그리고 위를 보면 그를 부러워하고 그보다는 못하구나. 땅에서 그러고 있는 상태라 이겁니다.

 

그러므로 위를 보면 부러워하면서 자기 스스로 낙차를 느끼는 거예요. 아래 있는 걸로. 그러니까 가서 ‘잘 좀 부탁합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아니, 천국을 가진 자들이 이 세상 재벌에게 잘 부탁하게 생겼습니까? 재벌들이 천국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되지요. 그런데 천국을 갖고 싶지 않으니까 부탁을 안 하는 거뿐이지 부탁이라는 일이 일어나려면 그들이 나한테 부탁해야 된다 이겁니다. 아! 어떻게 천국을 어떻게 소유해야 되는지…

우리가 돈 번 사람들에게 물어보잖아요. 돈을 어떻게 많이 벌었는지. 마찬가지로 그들이 천국을 어떻게 가졌는지 가르쳐 주세요. 좀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렇게 말해야 정상인데 천국을 모르니까 그러니까 더 불쌍한 거 아닙니까? 5복에 마음이 취해있고 5복의 자력에 묶여 있으니까.

 

 

여러분!

오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은 우린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선행을 생각하고 내가 노력과 수고를 해서 정말 내 처지보다 못한 사람들을 잘 도와야 그런 게 어디 기독교입니까? 그런 게 어디 기독교예요?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복, 이 복이 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느냐? 이 뜻을 잘 헤아려야지요.

긍휼히 여긴다는 행위를 하면 내가 천국까지 끌어 올리시려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겁니까? 그건 믿음이 아니잖아요. 그런 행위를 통해서 긍휼하심을 얻어요? 아니잖아요.

 

그럼 그 뜻이 뭐겠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았더니 오!오!오! 세상에 대해 죽어요. 세상에 대해 죽더니 세상에서 이륙해버립니다. 자식 문제에서 이륙해버리고, 돈 문제에서 이륙하고, 배우자 간의 문제에서 이륙하고, 사업문제에서 이륙하고, 5복의 자력으로부터 이륙을 해버립니다. 이륙을 해서 마음이 딱 뜨게 됩니다. 하늘에 떠서 어디를 봐요. 자꾸 하나님 쪽으로 향해요. 왜냐하면 세상에 대해서 죽었으니까.

 

첫 번째 복이 뭐였어요? 마음이 가난한 자. 세상에 대해 마음이 지불하지 않으니까 그 마음 다 어디다 쓰겠어요? 그 마음 다 어디다 써요? 다 하나님께 쓰는 거예요. 위로 하나님 마음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그래서 첫 절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얻는다는 거는 내가 천국을 얻는다는 얘기를 해주신 것이고, 오늘은 그렇게 마음이 천국에 머무르게 될 경우에 마음이 천국에 다가갈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이건희씨를 보는데 갑자기 낙차가 느껴지는 거예요. 이건희씨가 저 아래 보이는 거예요. 아이구! 불쌍해라.

이명박 대통령을 보는데 저 아래로 보이는 거예요. 갑자기. 십자가만 붙잡았을 뿐인데. 뭐 돈 번 것도 아니고 뭐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별난 걸 한 게 아니고 십자가 붙잡고 주님이 죽은 것처럼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내 마음이 죽게 해주세요, 죽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말씀 듣고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전부 아래로 보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처럼 되라는 말이 오기였겠습니까? 객기였겠습니까? 내려다보이는 거예요. 아그립바 왕이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데 자기 딴에는 왕이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이 볼 때는 내려다보이는 거예요. 머리꼭지가 보이는 겁니다. “이리 올라오세요. 아그립바 왕!” 이러고 있는 겁니다. “이건희씨 올라오세요. 이명박씨 올라오세요. 빌 게이츠씨 올라오세요. 위로!”그래서 십자가 봤더니 붙잡았더니 위로 올라갔더니 낙차가 생겼더라. 그 말씀을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라고 말한 거지요.

 

내가 애써서 선행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돕고 이런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빌 게이츠가 불쌍해 보이지 않으면 달동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도덕적 향락주의거나 우월감을 확인하는 가짜 긍휼입니다. 천국을 모르고 있는 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모르고 있는 한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무턱대고 무조건적으로 부르조아 식으로 다 불쌍해야 돼요. 그렇게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면 난 지금 믿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거예요. 뭐가 기가 막히냐? 주님의 십자가가.

저는 이제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 십자가 나도 안다 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1년 365일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로 살고 있고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도저히 내 죄악을 이길 수도 없어서 십자가, 십자가 노래 노래 하고 있는 저도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십자가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60억 인구가 있다고 그러면 60억 인구가 살아가는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삶의 형편 하나하나,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강도 깡패 노벨평화상 받는 사람 별의 별 사람 다 있는데 그 사람들의 모든 삶에 모든 순간에 모든 해답으로 다 카운트하시고 60억 인구의 일생의 초 단위로 다 카운트하시고 1초 1분 다 카운트하시고 그 모든 순간에 해답으로 주신 것이 모든 문제의 직별로 해답으로 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단순해보이지요? 십자가가? 다 나를 위해서 대속해서 죽으신 것이 십자가다. 그러고 끝나면 끝나는 걸로 알지요? 여러분? 그래서 사순절 기간 동안에 십자가 얘기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지요?

  

8복은 십자가를 붙잡았을 때 주어지는 복의 여덟 면을 말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복음의 사건을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셨는데 그 복음의 사건과 그 십자가를 향해 가시기 위한 첫걸음에 말씀하신 이 8복이 연관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울역에서 탈 때 아예 목포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는 겁니다. 목포를 보고 서울역에서 목포 기차를 타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복음의 사건을 볼 때 그 복음의 사건을 붙잡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바로 8복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8복을 십자가 복의 8면체라고 보는 주석서를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중에서는. 다른 데 있을지 모르겠어요.

난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그 연구의 방향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보세요. 여러분!

예수님은 시한부 인생을 사셨어요. 시한부라는 것은 죽음을 보면서 사는 겁니다. 늘… 언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니까. 그 십자가가 고려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한 마디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하신 말씀과 행동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향해 가니까. 그것도 모르고 가시다가 탁 나타난 십자가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를 향해 의도적으로 가고 계셨으니까. 그것과 연관 없는 사건과 말씀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앞에 있는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계없는 말씀이 없는 겁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았더니 오늘 말씀은 하늘에 떴더라는 거예요. 하늘에 뜨고 보니까 오! 이 낙차 이게 뭐야. 아니 갑자기 재벌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해? 아니 대통령이 불쌍해지기 시작해? 아이구, 이거 말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웃겠다. 내가 이건희씨를 불쌍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런데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복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십자가로 불쌍히 여겼다는 게 무슨 증거입니까?

너는 천국 올라갈 수 있는 또 지금 살았어도 스테반이 천국 보듯이 천국을 지금 느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어떻게 주어지느냐?

긍휼히 여겨야 되는데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낙차가 필요하다. 낙차가 필요한데 어떻게 최고봉까지 다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겠느냐? 주님의 십자가로 이 땅에서 이륙해라. 하늘로 떠라. 왜? 전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니까. 동시대인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거지요.

 

불쌍히 여긴다는 게 또 뭐예요? 여러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지금 천국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을 천국의 눈금에 마음에 두고 보고 있으니까. 내가 마음을 천국의 눈금에 맞추고 보고 있으니까 만날 때마다 천국이 활성화되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쉽게 말하면 네가 지금 현재 천국을 네 마음에 활성화시키고 살아가냐?

그럼 넌 반드시 엘지 회장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엘지 회장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냐? 그러면 넌 지금 천국으로까지 끌어 올리려는 하나님의 긍휼을 네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므로.

 

 

2011년 사시는 동안에 십자가 붙잡고 5복의 자력을 끊어내고 이륙합시다!!

그리고 TV를 볼 때 신문을 볼 때 인터넷을 볼 때 이 세상의 최고봉이 보일 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 확인해보시기 바래요.

그들이 불쌍해지면 진정으로 안 보였던 작은 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2011년에는 가득가득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을 이륙하여 이 세상의 최고봉들에 대해서조차도 낙차를 이룰 수 있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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