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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녹취문: 올여름 내가 만난 정말 특이한 종족_태승철 (고후 4:3~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8.19|조회수5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올여름 내가 만난 정말 특이한 종족>의 줄거리 :

올여름 휴무 기간에 저는 정말 특이한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사람들입니다. ‘종족’이란 “같은 부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피붙이”입니다. 제가 만난 이 종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로 날마다 제사하는 피붙이입니다. 이들의 정말 특이하고도 이상한 특징들을 살펴봅니다.

 

올여름 내가 만난 정말 특이한 종족

 

(고린도후서 4:3~12)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적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영상을 통해 만나지 못한 모든 시간 동안에도 우리의 마음만큼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모여있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휴무 기간을 끝내고 오늘부터 다시 십자가 복음 방송의 본래 스케줄을 따라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시즌3의 순서를 따라 말씀을 전하지 않고 휴무 기간에 동서남북 교회들을 돌아보며 가졌던 귀한 만남을 보고하는 의도를 담아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4장 3~12절까지의 말씀 중심으로 ‘올여름 내가 만난 정말 특이한 종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종족’을 “같은 부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피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날마다 제사 지내는 피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서남북 교회들을 만나며 결과적으로 갖게 된 하나의 정의입니다.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이나 참여하고 있지 않더라도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들이 다 이러한 종족이라 여겨집니다. 동서남북 교회에서 만난 몇몇 분들은 현재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참여하는 분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전에서는 ‘종족’을 “같은 부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피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휴무 기간에 만난 분들에게 이러한 정의를 적용해 보자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 아버지께 날마다 십자가 예수님으로 제사를 드리는 피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들에게 종족이라는 표현을 붙인 이유는 그만한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릉에 찾아오시는 분들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와는 달리 이번 휴무 기간에는 동서남북 교인들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마음에 ‘이들은 하나의 종족이다. 하나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난다.’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휴무 기간을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연속해서 1부는 아랫지방의 분들을 만났고 2부는 윗지방의 분들을 만났습니다. 동서남북 교인들을 만나고 보니 제 마음에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마음에서 느낀 특징들을 단순히 보고하는 것에 그친다면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특징들을 하나로 묶어서 포함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찾다가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내용들은 제가 휴무 기간 동안 만난 이상한 종족의 특징들을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들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상한 종족에 속한 동서남북 교인들이나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들은 스스로 내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종족에 속했다는 의식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나는 상대방은 저를 한번 만났지만 저는 계속해서 동서남북 교인들을 만났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서남북 교인들이 개별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느낌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이상한 종족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굉장히 큰 두려움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굉장히 큰 능력의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7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몸은 질그릇입니다. 사람들이 태승철이라는 사람을 바라볼 때 저의 육체는 질그릇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육체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 보배로서 마음에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질그릇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늘 의식으로 붙잡고 있는 상태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달리 표현하면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오장육부는 항상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이루신 죽음이란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오장육부에 하나를 더한 오장칠부처럼 되어서,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이 죽음이 같이 다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예수님을 보배로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 첫 번째 특징은 두려움입니다. 다시 본문 3절을 보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음인 십자가 예수님이 가려지는 이유가 4절에 이어집니다.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망하는 자들의 상태는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혼미케 되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이 내 의식에서 잊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십자가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면 망하는 자들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망하는 자들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의식에서 지금 나의 죽음의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지금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망하는 자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내 의식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나의 죽음의 사건임을 지금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다면 망하는 자의 상태인 것입니다. 육체가 오장육부를 담고 있듯이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질그릇에 보배가 담긴 상태입니다. 우리 의식에 십자가를 담을 수 없다면 망하는 자의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것일까요? 그 대답이 4절에 이어집니다. 이 세상의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유일한 신이심을 압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도 신이시지만 예수님과 성령님은 당신의 주체성을 아버지 앞에서 포기하심으로써 오직 아버지의 주체성으로 통일되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모두 인격적인 신이시지만 우리가 한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자발적으로 당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삼위일체로서 한 분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모순되게 들릴 수 있지만 모순이 아닌 놀라운 신비인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의 주체성만이 삼위 하나님을 통일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신이란 어떤 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을 기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이 참 신이시며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기에 다른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며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감의 느낌과 좋음을 욕구함이라는 영역에서 세상의 신이라 부를만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해야 할 마음으로 배우자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나 형제자매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껴야 되는데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느낌으로써 그 대상을 신격화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옆에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옆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의 존재감을 느낄 때 내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신에 의해 혼미케 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서는 이것을 망하는 자들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려움이 발생합니다. 제가 휴무 기간에 만난 분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들의 존재감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먼저 느낌으로써 그것들을 신처럼 여기며 마음이 혼미케 되는 상태를 제일 두려워하는 종족입니다. 지구상에 80억 인구가 있다지만 그 누구도 눈에 보이는 대상의 존재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을 신으로 격상시키고 신이 되어버린 존재들의 존재감과 좋음을 욕구하며 혼미케 된 상태로 십자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이 세상 신에 의해 마음이 사로잡히고 혼미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종족이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 중에서 내 마음에 존재감을 느끼게 하고 좋음을 느끼게 하는 것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동서남북 교회로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도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기대하면서 모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언어 체계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이상한 종족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보배로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 두 번째 특징은 심히 큰 능력입니다. 심히 큰 능력은 여러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8~9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 속에 심히 큰 능력에 대한 여러 측면이 담겨 있습니다. 앞서 이상한 종족의 특징은 세상 신에 의해 마음이 혼미케 되는 것에 대해 심히 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심히 큰 능력을 8~9절의 내용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이 실제로 제가 만난 종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어떤 식으로 확인되었을까요? 그것은 삶의 환경과 조건이 어떻든, 어떤 문제가 있든, 삶의 조건이 아무리 열악하고 힘들지라도, 모두가 다 공통된 고백을 하였습니다. ‘지금 내 삶의 모든 상황과 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 꼭 일어나야 할 일들이었다.’라는 고백입니다. 꼭 이 문장대로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의 언어 속에서 저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것이 내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라는 사건이 벌어지면 똑같은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최고의 일이 마음에서 느껴졌다면 그 외의 모든 일은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남들이 나쁘다고 하고, 불쌍하다고 하고, 불행하다고 하고, 심지어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라도 내게 최고의 일이 일어났다고 느끼는 당사자는 불행해 보이고 저주 같아 보이는 일조차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보게 됩니다.

누가 봐도 실패이고 불행이고 안 좋은 일처럼 보이는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생애에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고 보배로 느끼는 종족이라면 그것은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도 욱여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를 거꾸러뜨리는 일은 내 마음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한 일일 뿐입니다. 나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꼭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고 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에 의한 나의 죽음을 진짜 있음이고 진짜 좋음인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보배라고 느끼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욱여쌀 수 없고 무엇으로도 넘어뜨려서 낙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배로 붙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들은 세상의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들의 마음을 둘러싸고 거꾸러뜨리고 낙심시킬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 신에 의해 혼미케 되는 나의 죽음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망하게 되는 상태를 없애시기 위해 나의 죽음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좋음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나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생애의 최고의 사건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 최고의 사건이 느껴지는 자는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세상의 신에 의해서 나의 마음이 혼미케 되는 상태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악착같이 붙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배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그 마음을 답답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갇혔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과 조건과 문제들로는 욱여쌀 수 없습니다.

실제로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는 분들의 고백을 보면 굉장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문제가 없는 분이 없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무어라 맞장구쳐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끔찍한 일들을 계속 경험하고 계신 분들도 다수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방실방실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도대체 이 이상한 종족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열등함을 허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을 알렸던 것과 같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그동안 자기의 열등함과 부끄러움과 수치에 해당했던 부분을 두려워했습니다. 실제로 그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했고 자기도 동네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그렇기에 물을 긷기 위해 정오에 혼자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오히려 자기의 부끄러움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매개로 삼아 예수님을 전했는데 동서남북 교회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상한 종족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당신 저주받은 거야. 당신은 열등한 사람이야. 이건 당신에게 일어난 너무 큰 불행이야. 당신이 잘못했으니 이런 큰 불행이 덮친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당을 다니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 세상 사람들의 합의와 공감을 통하여 좋다고 여겨지는 복들을 예배당에서도 좋아합니다. 이들은 예배당에 다니지만 십자가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망하게 되는 상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세상 신들의 존재감과 좋음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옆에 계심에도 자녀의 존재감을 먼저 느낀다면 자녀가 마음을 혼미케 하는 세상 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린 상태임에도 그것이 망하게 된 상태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신에 의해 혼미케 된 사람들의 특징은 예배당 안에서조차 세상의 복들을 좋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이 주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제대로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망한 사람은 예배당 안에서 두 번째 망한 자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제가 동서남북 교인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반대였습니다. 무슨 자랑도 될 수 없는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거나 열등감 때문에 입으로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마치 수가성 여인이라도 된 것처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합니다. 듣는 사람들도 그것을 허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바보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오히려 그런 허물이 있었기에 내 생애 최고의 사건인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다고 받아들입니다. 이게 능력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 모두가 허물로 여기고, 열등함으로 여기고, 나쁘게 여기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거나 잃는 것을 제일 두려운 일로 여기며 십자가를 붙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상한 종족들에게는 하나도 허물이 되지 않고, 단점이 되지 않고, 열등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종족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제가 만난 동서남북 교인들 중에 70%는 처음 뵙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분들도 그저 아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닌 동서남북 교인으로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부자도 있고 시쳇말로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에 욱여쌈을 당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도 가난함에 그 마음이 욱여쌈을 당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그 특성이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나타나고 마음은 항상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아버지를 직면합니다.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고 아버지의 좋음을 욕구합니다. 그 결과 재산이 많든 적든 그 상황에 욱여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재산에 욱여쌈을 당하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최고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십자가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은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자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에 둘러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에서 부자는 부자의 티를 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티를 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서남북 교인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보아서는 누가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올여름 휴무 기간에 이렇게 이상한 종족을 만났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세상 신에 혼미하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 마음의 존재감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세상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신이 됩니다. 내 마음에서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과 좋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신입니다. 회사에서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존재감을 더 우선으로 느낀다면 사장님이 나의 신이 된 것이고 그 순간 십자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에게서는 삶에서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본문을 기준으로 볼 때 동서남북 교인들에게서 아직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특징에도 개인차는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많이 나타나고, 어떤 분은 적게 나타나고, 어떤 분은 이제 싹이 나기 시작한 정도입니다. 10절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시는 분들 그리고 아직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은 모두가 세상 신에 혼미케 되지 않으려 십자가를 붙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버둥 치는 가운데 이 세상을 이기는 탁월한 능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모든 부족한 상황조차도 최고의 사건인 십자가를 붙잡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고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 중에 문제가 있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 그들이 악역을 담당한다고까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였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나 저주받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안 좋은 일조차도 각자가 서로 허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죽음에 나를 내어주었다면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 몸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을 위한 노력과 소망의 결과는 보였습니다. 이제 소망의 단계를 지나서 이 땅에 남아있는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공생애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주변으로의 파급력이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임을 느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신에 의해서 혼미케 되는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입니다. 이 종족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 공포심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려고 발버둥 침에 따라서 이 세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서로 허물이 없는 종족이 됩니다. 세상에서의 부족함은 더 이상 허물이 되지 않고, 거꾸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랑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상한 종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파급력으로 보일 수 있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짐이 철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내 몸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죽음에 내어줍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몸에는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관계들을 통하여 영향력과 파급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단계까지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이상한 종족이 성숙하게 되기를 여름 내내 기도하였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놓치고 세상 신에 혼미케 되는 상태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세상 가치 앞에서 세상을 이기는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나는 종족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무더위도 서서히 식어가고 가을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에게 앞에서 말씀드린 두려움과 심히 큰 능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파급력과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성숙함이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유례없는 이상한 종족 여러분 파이팅!!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부계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드리는 제사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상한 종족으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이상한 종족의 두려움의 특징과 심히 큰 능력의 특징을 더욱 더 강하게 유지하게 하시고, 드디어 예수님의 생명이 몸에 나타나는 파급력의 특징까지도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열매로 확인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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