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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

(사53:4-6) 십자가, 나의 깨어짐과 죽음

작성자플레로쓰데|작성시간14.02.08|조회수613 목록 댓글 3

                          (사53:4-6) 십자가, 나의 깨어짐과 죽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십자가, 나의 깨어짐과 죽음>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이제 십자가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그 십자가가 효과를 내려면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우리가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그림들을 연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십자가로 인해서 일어나는 효과는 '나'라고 하는 기본 틀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에요.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그림을 보면서 도대체 '십자가에서 나의 깨어짐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봅니다. 그림 3a를 먼저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림에 나와 있는 대로 마음이 마음자체로는 '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걸 꼭 아셔야 됩니다. 나로 되어 질 가능성 '나'라고 하는 의식이 우리 인격 아닙니까? 인격체라고 할 때 '나'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서 인격체가 되는데 마음만으로는 '나'라는 의식이 생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고 하는 의식이 어느 때 생기는가 하면, 내 마음이 너를 발견할 때 대상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나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없는 한, 선생은 나타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제자라고 하는 너가 없는 한 절대로 선생은 나타날 수가 없고, 17년 동안 아이를 못 낳고 있던 상태에서 저의 집 사람은 아내도 되었고 여인이지만 절대로 엄마가 되지 못했습니다. 너라는 자리에 자식이 들어와야만 엄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엄마가 아이를 낳지만 적어도 맏아들이나 맏딸은 한 여인을 엄마로 낳습니다. 그 첫째들이 엄마로 낳아 주지 않는 한 엄마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선생이 제자를 만들어 가지만 제자 역시 선생을 낳습니다. 제자가 없으면 선생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틀이 이렇게 내 몸을 대상으로 보면서 나를 찾게 되고 가정의 가족들을 보면서 나를 찾게 되고 또 돈, 돈이라고 하는 대상을 보면서 나를 찾게 됩니다. ‘내가 돈이 많은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다.’ 

일도 마찬가지이고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와서든지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든지, 대한민국이라는 것도 너가 되어서 나를 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가 하는 일은 그 마음, 그렇게 몸과 가정과 돈과 일과 이웃을 너로 삼아서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 마음자체가 십자가에 걸려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오해라고 하는 데서 그림 2에서 보면, 십자가의 위치가 성경공부를 할 때든지 교리공부를 할 때든지 보면, 지금 마음이 가정과 몸, 이웃, 일, 돈, 이런 것을 너로 삼아서 '나'라고 형성된 이 틀을 그대로 유지해 놓고 그 틀 바깥에 까맣게 죄가 묻어있는 것을 보혈이 씻어준다고 신앙생활하면서 이해할 때가 있는데, 이렇게 이해하면 큰일 난다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것들이 너가 되어서 나를 찾는 상태로는 절대로 죄 사함이라는 게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림 3a로 넘어가면,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걸려 있습니까?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방금 전에 본 그림 2에서 본 그런 식의 하나님과 지금 가정과 돈과 몸과 일, 이웃 이런 것으로 이루어진 나와 분리된 상태 가운데서 위치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나로서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벌어진 그 사이에 십자가가 위치해서 이렇게 형성된 나와 하나님과 만나는 게 아니라, 십자가는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면서 내 마음이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다 깨버리는 겁니다. 다 끊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내 죽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가정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성경에 마10:37절에 보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라고 나옵니다. 이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과 맞물려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표현한 말이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라는 이 말은 부정적 측면에서 똑같은 사항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가정을 사랑하는 이 관계, 이걸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눅14: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이 받아들이면서, 마음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가정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가 받아들여져야 되는 정확한 포인트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가정을 사랑하고 있는 내가 가정에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구합니다. 사랑하는 채로 그 틀을 유지하면서 구하는 것은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기도한다고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내가 지금 문제의식을 느끼며 걱정하고 있는 가정과의 관계가 마음에서 끊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진짜 이혼하고 집을 떠나라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가정에 대한 사랑의 줄이 끊어져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몸도 마찬가지이고 돈도, 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나와서 그 문제를 안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럴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어, 네가 네 딸을 그렇게 사랑하느냐? 굉장하네.’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딸 때문에 온통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 때문에 생기는 기쁨은 어디가고, 딸을 더 사랑한다는 겁니까? 하여간 하나님보다 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를 보면,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딸 때문에 걱정하고 아들 때문에 걱정하고 돈 때문에 걱정하잖아요.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나에게 걱정을 주고 있는 그 이유를 더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거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지?’ 


여러분!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을, 이사야서 53:4-6, 갈라디아서 6:14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다시 한 번 더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내가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면 가족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을 그림에서 보았는데, 그 끊어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 그림3을 보면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림3을 봅니다. 



자, 죄로 살찐 인간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그림을 그려 놨습니다. 

보면 가운데 마음이 있고 행, 불행을 느끼고 희로애락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다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만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가정이나 돈이나 일이나 몸이나 이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이 잘못될 때 슬프고 염려가 되고 해서 희로애락의 근거가 바로 사랑하는 대상들로부터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여러분! 마음을 점선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바깥의 원이 죄악의 살이 돼 버린 상태입니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마음과 붙어서 마음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살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왜? 내 살이 돼 버렸기 때문에. 

또, 내 돈의 문제가 생기면 내 마음이 아파요. 왜? 내 마음에 살이 돼 버렸기 때문에. 이웃에 내가 사랑하는 친지나 대한민국에 문제가 생기면 걱정이 됩니다. 내 살이 돼 버렸기 때문에. 몸과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태가 극복되는 것이 십자가의 과제입니다. 십자가복음의 효과입니다. 


그러면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으로부터 바깥에 둘러 쳐져있는 마음의 색깔과 똑같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마음의 살이 돼 버린 다른 것에 대한 사랑들, 예를 들어 딸이 나가 될 수는 없어요. 딸이 내 마음에 살이 될 수는 없는데, 딸을 사랑하는 그 사랑하는 마음이 살이 돼 버린 상태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되는 마음이 딸을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이게 살이 돼 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상으로 돌리는 것이 복음의 효과요, 죄 사함의 효과인데, 그 죄 사함의 효과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마음에 붙어 있는 살들을 찢어내는 겁니다. 마음은 지금 다른 것들을 사랑해서 이상한 죄악의 살이 엉겨 붙었잖아요. 그 엉겨 붙은 살을 찢어내서 본래의 마음으로 돌려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53: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허물'이라는 게 뭔가 하면 '배반'을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을 했기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배반은 하나님께 우리의 등을 돌리는 것을 말하고, 죄악은 등을 돌리고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껴안은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대상을 사랑한 거예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다른 대상을 껴안은 것을 말합니다. 


다시 그 그림으로 돌려주세요. 보면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단절이라고 되어 있는 하나님께 등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게 바로 허물이라는 겁니다. 등을 돌렸고 그 다음에 하나님 대신에 가정 전체를 사랑합니다. 이게 죄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허물을 위하여 그가 찔렸다. 

지금 마음과 붙어 있는 살을 찢어내기 위해서 점점점으로 가시로 찔러 버리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마음이다. 지금 다 찔러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사랑하고 있는데 내 딸과 아들을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경계를 하나님이 아시고 바늘로 찔러서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관을 쓰신 아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생각 중에 어디까지 내 마음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그러신 것처럼 점점점 찔러서 다 경계를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상함으로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리고 손과 발에 못 박히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이 점점점 가시로 찔린 이 상태의 경계를 다 도륙해 내는 겁니다. 다 도륙해 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 마음에서 완전히 사시미 칼로 뜨듯이 내 마음의 살이 돼 버린 내 아들 딸을 찢어내고 내 일을 찢어내고 내 돈을 찢어내고 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죄악의 살이 찐 상태와 예수님의 몸을 등가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을 찌르시고 예수님의 몸을 찢으신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하고 있고 일을 사랑하고 있고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 그런 사랑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내가 죄악으로 물들었다가 이 ‘나’가 유지되고 있는데 지금 보혈로 내 죄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런 말씀이 빤히 이렇게 성경에 있는데,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기도와 간구와 모든 목표가 다 가정을 잘 되게 하고, 일을 잘되게 하고, 돈을 잘 벌게 하고, 나라를 잘 되게 하고, 몸을 잘되게 하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이렇게 신앙이 바뀌었냐는 겁니다. 그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찢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과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등가로 하나님이 여기셔서, 내 마음에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찢어내고 일을 찢어내고 돈을 찢어내는 그 찢어지는 아픔을 예수님의 몸에다가 퍼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내 자신이 직접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내 가정이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내가 사랑하는 일이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비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사건이 ‘내 죄 사함 받았네.’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만을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다시 복귀되는 게 십자가사건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잘 되고 이런 게 아니라. 


여러분! 이러한 십자가의 내부설계도를 점점점 허물 때문에 찌르시지요. 찌른 부분을 다 도륙해 냅니다. 채찍에 맞아서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듯이 찢어 냅니다. 창으로 배를 찔러서 찢어 내지요. 손에 못이 박히듯이 찢어내는 과정, 그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인데, 이 십자가의 내부설계도와 같이, 아주 명확하게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성경의 기록이 있다는 겁니다. 욥기서. 욥기서는 뭐, 이래저래 얘기하고 있습니다마는 주님의 십자가로 성경을 해석해야 된다는 대원칙 하에서 보자면 무슨 의인의 고난 이런 게 아닙니다. 


욥기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자, 욥에게서 하나님이 재산을 찢어 내십니다. 자식을 찢어 내십니다. 실제로 없애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누가복음14장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보면 욥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재산을 찢어내시고 내 자식을 찢어내시고 그리고 내 건강을 찢어 내시고 친구, 아내를 다 찢어내십니다. 아내가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무슨 사회적으로 일이 주어지겠습니까? 일도 다 찢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욥이 몸도 다 망가지고 마음 하나 달랑 남았습니다. 건강을 바라고 자시고 할 처지도 못될 정도로 몸도 다 찢어내십니다. 마음 하나 달랑 남았을 때 욥이 고백합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욥기1:21절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나님 달랑 한 분 남게 됩니다. 이게 십자가사건입니다. 


다시 그림 3a로 넘어가 봅니다. 내 마음이 십자가에 걸리면서 욥에게 일어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차이가 있다면, 욥은 진짜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내가 도망가고 아들딸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아들이 죽지 않고 있는데, 아들에 대한 내 마음의 사랑이 끊어지고 찢어지는 겁니다. 돈, 재산 욥은 실제로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욥이 당하는 그 고통을 주님께서 살이 찢어지면서 당하시는 바람에, 우리가 고통 없이도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붙잡으면 이 돈에 대한 사랑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한다. 계획한다. 직장에 다닌다. 무슨 일이든지 일에 대한 사랑이 욥이 잃어버린 것처럼 잃어버리는데, 다른 것은 주님이 고통을 당하셨으므로 내가 일을 마음에서 잊어버리는 고통이 내 마음에 느껴지지 않은 채로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내부설계도입니다. 이 욥의 상황이.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자식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그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는 그렇게 믿지 맙시다. 자식 때문에 걱정이 생기면 ‘아, 내가 지금 자식을 더 사랑하고 있구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라는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자식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은 아, 내가 벌써 마음이 돌아가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문제가 있는 자식에게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 때문에 내가 지금 슬퍼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은 제쳐놓고 자식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은 결국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깨달으란 말입니다. 이렇게라도 알기라도 알아야지요. 그래야 신앙이 바른 방향으로 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 마음이 걸리는 겁니다. 

왜? 주님의 몸과 우리의 죄악 된 마음, 허물 된 마음, 허물이 뭐라고요? 하나님을 등진 것. 죄악 된 마음은,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을 주님의 몸과 등가로 여기셔서 같은 값으로 치셔서,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시고 찌르시고 상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상하게 하심으로서 내 마음에 살이 돼 버린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여러분! 그래서 말입니다. 여기서 또 신앙적으로 자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을 접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매스컴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오도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저께 신앙의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오해 중에 맡긴다는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도 맡긴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성경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흐름에서 위배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맡긴다 라든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려놓음이라든지, 또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더 내려놓음이라는 말들. 욥이 한 말들을 생각해 보세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다.’

이게 내가 맡긴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취해버리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이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가정과 내 몸과 일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주인의 입장에서 내가 무엇을 맡긴다든지 은행에 deposit 하듯이 맡긴다든지 내가 뭘 내려놓는다든지 내가 주체가 돼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내가 맡길 수가 없어요. 내 것이 아니니까. 법적으로 맡긴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취하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취해 가시는 겁니다. 자식,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취해 가시는 사건입니다. 내가 내려놓는다는 것, 맡기는 게 아니에요. 

‘내려놓는다, 맡긴다.’ 말의 의미가 뭡니까? 내려놓는 주체가 나입니다. 맡기는 주체가 나에요. 내가 주인이 되었어요. 그러자니 자꾸 하는 얘기가 ‘맡기면 하나님이 더 크게 해주시더라. 내려놓으니 하나님이 내 것으로 확고하게 해 주시더라.’ 자꾸 이렇게 오해가 될 말들을 사용한단 말입니다. 그 책 전체내용이 오해로 돼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언어의 사용들이 참으로 위험한 것은 나중에는 책 내용 다 잊어버리고 책 제목만 남거든요. 

제가 하나 기가 막힌 것을 읽었어요. 그 내려놓음이라고 하는 책 저자의 개인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더니, 내려놓음이라고 하는 책을 자기는 내려놓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책을 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원고의 제목을 그렇게 내려놓음이라고 정했고, 내려놓음이라는 주제를 연구한 것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출판된 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출판사에서 그렇게 만들어 간 겁니다. 출판사에서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을 붙일 때 내려놓음이라는 단어자체가 뭔지 알고나 붙이느냐는 겁니다. 그 내려놓음이라는 말은 뭐든지 내가 주체로 서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욥의 십자가의 내부설계도가 될 수 있는 욥의 고백을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사건은 내려놓음의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강도짓을 해서 자식을 내 것으로 탈취하고 있던 우리로부터 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던 욥, 자식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고 나면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을까봐, 이게 이사야에 나오는 허물이에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받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했을까봐 하나, 하나를 불러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이 취해 가셨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아무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맡길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니까. 법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데 맡기는 자가 누구고 강도가 훔쳐간 자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거기에는 회수만 있을 뿐입니다. 회수, 하나님이 취하시는 사건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사건은 뭐냐? 내가 내려놓는 게 아니고 내가 맡기는 게 아니라, 내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취해 가버리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회수해 버리시는 겁니다.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내 것을 마치 내가 과외선생을 찾아서 자식을 맡겨서 결과적으로 수학을 잘 하는 아이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과외선생에게 자식을 맡기는 것 같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죽어버리는 것이고 끝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 비전, 비전하지 말라. 목적, 목적하지 말라고 하는 게 왜 그런지 아십니까? 결국 우리의 비전이 뭡니까? 몸과 가정과 돈과 일과 이웃에 대한 이 관계 안에서 비전이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옆의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복음을 전해야지 뭐해야지, 뭐해야지, 하는 게 비전 아니겠습니까? 목적.언제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맡겼냐고요? 내 일로. 그러면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이런 말이 왜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뭐라고 하셨느냐? 주님은 십자가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어요.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심지어 구약에서조차도 이런 영적인 신비한 연합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고 아직 모형적으로 나타나는 구약에서조차도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도 전부 기록이 어떻게 돼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리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냥 무슨 일에든지 앞에 가서 서는 겁니다. 내일 이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일로 당신이 take off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것으로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6:14절에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무 자랑할 것이 없어졌어요.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어요. 예수 믿으면 자랑거리가 없어요. 십자가 말고는.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다시 그림 3a를 보면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자, 갈라디아서 6:14절을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왜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돌려주니까. 하나님아버지가 제일 좋아서. 하나님아버지가 내 기업의 끝이니까. 하나님아버지가 내 인생에 꽃의 마지막이니까. 그런데 그것을 십자가가 내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까. 어떻게 만들어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 세상이 뭡니까? 

세상의 풍조를 말하는 것 같아요? 풍조를 포함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게 가정, 돈, 일, 이웃, 몸이 세상 아닙니까?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사랑의 끈이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give and take, 주고받던 사랑의 줄이 관계의 줄이 다 끊어져 버렸어요. 


여러분! 이제 끝난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면 이제 여러분이 더 원할 게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죽었어요. 여러분이 죽었어요. 장사지내 버렸어요. 뭘 더 바라고 말고가 없어요. 뭐, 맡겼더니 하나님이 크게 해주셨다. 내려놓았더니 하나님이 내 것으로 형통하게 만들어주셨다. 뭐, 또 정직하면 형통한다. 이런 제목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 아니라고요. 끝났어요. 여러분의 마음이 더 이상 하나님 바깥으로 나갈 필요도 없고 나가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은 자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내일 얘기 하자는 겁니다. 내일 얘기하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은 자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또, 왜 사는 것인가? 하나님을 얻었으면 끝나는 것인데, 살아야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사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내일 함께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주님! 십자가를 통하여 내 것으로 강도질하고 도둑질해서 내 마음의 소유로 삼았던 것들, 그러느라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땅히 하나님을 마음을 다 쏟아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주면서 죄악 된 삶을 살았던 저희들을 우리 주님 십자가를 통하여 그 마음에서부터 죄악 된 살을 죄악으로 얼룩진 살들을 다 찢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모든 고통은 다 받으셨고 우리는 고통 없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마음으로 껴안으면 도둑질하여 살이 돼 버린 모든 죄악의 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데도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무진 오해와 또 주님의 십자가를 전혀 기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죄악 된 삶에 죄악 된 나를 유지하고 사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역사가,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을 상대해서 하나님을 너로 당신으로 삼아 나로 태어나는 역사가 있는 오늘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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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플레로쓰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2.09 이 말씀은 2008년도 신년 인터넷 사경회 말씀입니다.

  • 작성자네잎클로바 | 작성시간 14.02.0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선한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
  • 작성자제로원 | 작성시간 14.02.11 도표가 아주 멋지게 그려졌네요, 플레로쓰데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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