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보다 나아보이는 곳에 서라
전 7:1-29(10)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목요일 오늘의 번제 하나님 말씀 함께 봅니다. 전도서 7장 말씀 보겠습니다. 전도서 7장 아주 길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29절까지 우리는 1절부터 10절까지만 읽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각자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시작.
①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②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③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④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⑤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⑥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솔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⑦탐욕이 지혜자를 우매자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⑧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⑨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⑩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슬픔이 기쁨보다 나아보이는 곳에 서라’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제 고인이 되신 함석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 너무나 유명합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으다.
유교는 맨날 예를 갖추어서 제사만 드리고, 불교는 그저 목탁 두드리며 향을 피워놓으니까 초상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기독교는 교회를 가면 언제나 찬양소리가 들리고 하니까 잔칫집 같으다.
좋은 의미요 또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바울 같은 분은 항상 기뻐라하고 말씀하시고 또 빌립보서 같은 경우는 아예 기쁨의 복음이다, 희락의 복음이다 라고 얘기힙니다.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희락이 들어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성경의 한 부분인 전도서가 오늘 처음부터 정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재수 없는 말들을 합니다. 아침부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말보다 나으며(1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절).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3절).
그리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8절).
또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10절).
이런 좀 우리가 상식적으로 또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고 배우고 있는 그런 지식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입장의 다 뒤집어엎어버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오늘 전도자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심오한 본문 이예요.
지혜자라는 말이 여기서 또 나오는데 소위 그 지혜자, 여기서는 그냥 참신앙인이라고 바꿔서 얘기합시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지혜자를 말씀하고 계시니까. 성경이..
그러면 참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슬픔이 기쁨보다 더 낫게 여겨지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슬픔이 기쁨보다 더 나아보이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참신앙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참 영적 지혜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태어남보다 죽은 것이 더 나아보이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거예요.
이 자리에 서야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자리에 선다는 말이...
제가 언젠가 본 영화인데 기억도 안 납니다. 자세한 내용도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데 대충 인상 깊은 장면이 있어요.
뭐냐 하면요, 형사가 범인을 잡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범인이 담겨져 있는 동영상을 범죄현장이 아니고 오히려 범인의 어렸을 때의 동영상. 아빠가 찍어준 것 같습니다. 그 동영상을 입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동영상을 보고 있다가 범인이 어렸을 때니까 뭐, 특별히 범죄현장과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심코 몇 번이고 돌려 보다가 같이 이렇게 조수 같은 사람한테 동료 파트너한테 “스톱. 다시 돌려봐. 다시 돌려봐.” 몇 번이고 다시 돌려서 봐요. 한 장면을. 그러니까 파트너가 왜 그러느냐고...
근데 이 분이 그 범죄자가 범인이 어렸을 때 아빠가 비디오카메라로 찍어 주는데 그 아이가 놀고 있는 장면 저 너머로 자유의 여신상이 한 두시 방향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도대체 뉴욕근처 허드슨 강너머 뉴저지 근처 어디에서 보면 자유의 여신상이 두시 방향으로 보이느냐 이겁니다. 그 자유의 여신상이 두시 방향으로 보이는 그 자리를 찾아냅니다. 인공위성으로 경도와 위도를 찾고 이래갖고. 찾을 수 있잖아요. 자유의 여신상이 경도 위도가 어디다 그러면 그것이 두시 방향이 될 수 있는 각도가 도대체 뉴저지 쪽으로 뉴욕 쪽에 어디 쯤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범인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장소를 찾아냅니다.
바로 그거예요.
도대체 어느 지점에 서 있기에 지금 솔로몬의 눈에는 슬픔이 웃음보다 낫게 여겨지고, 지금 출생하는 것보다 지금 죽는 게 낫게 여겨지느냐 이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2절에 보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초상집이 더 낫다. 잔칫집보다.. 다 죽는다. 이것을 마음에 두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앞으로 죽을 그 지점에 마음이 가서 서 있다는 것이에요. 죽을 때에 미리 가서 서 있는 겁니다. 죽을 때 미리 가서 서 있으면서 그곳에서부터 거꾸로 이 세상의 삶을 내다봅니다.
그러니까 죽음과 관계되어서 태도가 여러분, 몇 가지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갑니다. 우리 마음이 죽음을 거부하기도 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멀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태도가 있습니까?
삶이 힘들고 괴로워서 내가 죽음으로 뛰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자살 이예요.
그런데 오늘 솔로몬은 자기가 죽을 때에 미리 가서 이 세상을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원튼 원치 않든, 또 잊어버리고 있든 의식하고 있든 그것이 아니라 아예 죽음의 자리로 가서 죽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자살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죽음으로 뛰어 든다는 얘기가 아니라 죽을 자리에 가서 서서 거꾸로 이 세상의 삶을 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슬픔이 기쁨보다 더 낫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더 낫게 여겨진다는 것이에요.
바로 이 지점에 서지 않으면 신앙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여러분,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를 한번 짚어볼 수가 있어요.
목사님들 전도사님들한테 많이 듣고 저도 한두 번 설교 중에 한 두 번 이야기 한 거지요.
스코틀랜드 어느 목동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그 양떼들을 몰고가다 보니까 협곡과 협곡을 가로질러 이어주는 철교가 간밤에 쏟아 붓는 장맛비 때문에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언덕 아래에서 듣자하니 언덕 위에 저쪽 철길 위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합니까. 막 뛰어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차를 저지하는데 이 목동아이는 기차에 치어서 죽고 기차에 탄 사람들은 다 산다.
감동적인 이야기지요.
지금 이 목동아이가 철교가 끊어진 자리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보는 겁니다. 기차에 탄 사람들은 앞에 바로 죽음이 직면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그 기차에는 신혼부부도 있었을 것이에요.
런던을 가는 기차였다고 하면 하여간 그 곳에 신혼부부도 있었을 것이고, 또 옥스퍼드대학에서 주임교수로 초청을 해서 콜링을 받고 가는 젊은 교수님도 있었을 것이고, 또 런던 의회에 진출하는 정계에서 유망주 국회의원도 있었을 것이고 하원의원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철교가 끊어진 자리에서 볼 때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들에게 임할 슬픔의 양이 커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슬퍼하는 게 더 낫다 이거에요.
신혼부부가 정말정말 사랑하다가 꿈같은 가정을 꾸리기 위하여 계획하고 결혼하고 이제 신혼여행을 가고 있는 중인데 너무너무 행복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어요. 우리가 신혼여행가서 뭐하고 갔다오면 어떤 집을... 그렇게 행복해보이는 그 정말 잔치 분위기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신혼부부의 행복함이 크면 클수록 죽음의 자리에서 보게 될 때는 비참함이 더 커지는 것이에요.
왜 일이 시작보다 끝이 낫다 이렇게 얘기합니까?
바로 그 죽음의 자리에 서 있으니까.
이건 쉽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이 인생의 끝이 시작보다 나은 이유는 졸업식이 입학식 보다 낫다. 더 실감이 나려면 제대가 입대보다 낫다 이 말입니다. 제대가 입대가 낫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진 윌리스 라고 하는 분이 쓴 동화책에 ‘거꾸로 박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들판에 박쥐 한 마리가 이사를 옵니다. 그러니까 그 들판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환영을 하면서 그 동네의 가장 유식한 올빼미 박사님께서 아기 동물들을 시켜서 환영의 뜻으로 선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선물할까 묻고 오라고 시킵니다. 그래서 아기 동물들이 와서 물어요.
“뭘 선물하면 좋을까.”
박쥐가 대답합니다.
“우산을 주었으면 좋겠다. 선물로.. 비가 오면 발이 젖으니까.”
이 말을 듣고 돌아오다가 아기 동물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비가 오면 머리가 젖지 왜 다리가 젖지? 애이, 말을 실수 한 거겠지.”
그래서 우산을 갖다 줍니다.
우산을 피면서 박쥐가 뭐라고 하느냐면
“아우, 저 발밑으로 하늘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비가 곧 올 것 같다.”
아기 동물들이 또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하늘은 머리 위에 있지 왜 저 발 아래로 있다고 얘기하느냐?”
얘기가 이렇게 진전이 되는 거예요.
그래 박쥐의 모자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왜 저렇게 풀 밭 아래로 떨어지지?”
풀밭 아래로 떨어지는 거예요. 모자가 풀밭 위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다 미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올빼미 박사님이 박쥐에게 와서 진단을 시작하고 거꾸로 매달려 있어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모두가 다 거꾸로 매달려 보니까 진짜 하늘이 저 발아래에 있는 거예요. 저 발아래 하늘이.. 거꾸로 세상이..
바로 죽음의 자리에 미리 가서 서서 거꾸로 이 세상을 보면 슬픔이 기쁨보다 낫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끝난다면 기독교가 아니에요. 그렇죠? 여러분. 여기서 끝난다면 기독교가 아니지요.
자, 자유의 여신상이 두시 방향으로 보이는 그 자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면 바로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미리 가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 미리 가서 서게 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와 접촉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죽어야만 가는 세상에서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이제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빌립보서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계속... 희락의 복음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기뻐하라는 얘기가 지금 전도자가 말하고 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잔칫집이라고 얘기되고 있는 이 잔칫집의 기쁨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이 뭐예요?
바로 여기서 우리가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죽음이 다가올 그 자리에 미리 가서 서 있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와 만나는 만남의 기운 가운데에 기뻐하고 있고 기뻐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죽음의 자리에 서지 않고 은근히 말은 천국갈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이라는 걸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무서워하는 가운데,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가운데 기쁨을 자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자꾸 기쁨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런 혼돈이 너무 자연스럽게 자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 중에 누가 죽을 때 그 자리에 가서 서서 지금 솔로몬처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적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 해 위의 세계, 하늘 위의 세계,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와 내 마음이 지금 연결이 되려면 바로 솔로몬이 오늘 얘기하고 있는 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뻐하는 것 보면 마음이 유감스러워야 되요. 차라리 죽음 이후의 세계, 하늘 위의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 바에는 일이 안 되고, 일이 꼬이고 그래서 슬퍼할 일이 생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다.
왜? 이 땅에 마음 붙이는 강도가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으니까. 일이 안 될 때..
해 위의 세계, 죽음 이후의 세계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 과정을 다 지나고 삶의 과정을 지나고 죽는 자가 더 낫다는 겁니다. 그럴 바에는...
근데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은 얘기하지 맙시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중에 누가 과연 내가 죽는 순간에 미리 가서 서 있으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몇 사람이나..
우린 모두가 다 믿지 않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잖아요. 그리고 어떡하든지 과제는 이 땅의 일이에요. 이 땅의 삶이에요.
이 땅에서 뭐 성공하자, 형통하자. 이 땅에서 뭐 서로 사랑하자, 뭐 어떠자.. 계속 이 땅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 땅을 해결하고 이 땅을 개선하고 이 땅의 삶을 증진시키는데 모든 마음이 다 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만나지십니까?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기적 얘기하지요? 응답 얘기하지요?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교 경전을 읽어보면 기적 이야기가 쌨어요. 석가모니가 기적을 일으켰어요. 많이... 일반종교에서 많이 일어나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신명기에서 말씀하셨어요. 거짓선지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내가 기적을 허락한다.
왜? 기적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거짓선지자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응답? 그게 응답인지 어떻게 아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듣고 해주시는 응답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아! 응답받았다..
내가 뭐 자전거를 꿈을 꾸었더니 자전거가 주어졌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자전거 꿈 꾸었더니 자전거 안 주어집디까?
그거 아니지요.
문제는 하나님하고 진짜 하나님과 만나야 되요.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된다, 만다 하기 전에 이 세상 삶이 끝나는 자리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근데 저보고 자꾸 왜 죽는 얘기만 하냐고 그래요. 왜 제로 얘기만 하느냐..
예수님은 부활도 하시지 않았냐...
여러분, 부활은 예수님이 힘 쓰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 뜻을 따라 제대로 죽으시니까 부활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지요.
우리가 힘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언급은 자꾸 하나님께 맡겨지는 것이지 부활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요.
왜 죽음을 이야기합니까?
죽음 자리에 서야 하나님을 만나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피둥피둥 살아있는 마음 갖고는, 왜?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세상에 대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마음 갖고는 절대 하나님이 안 마나지니까.
왜 번제가 상번제로 드려집니까? 왜 상번제로 드려지는 이유가 뭡니까?
깡그리 죽어야 이 세상과 얽혀있는 나의 인격과 생각과 계획과 인생에 대한 포부가 다 죽어야 하나님이 만나지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데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모양 그대로 가서 만나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왜 기독교가 잔칫집 같습니까?
이 땅에서의 잔치가 아니에요. 하늘의 잔치의 기운이 이 땅으로 밀려 내려오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그 하늘의 잔치 기운을 받아들이려면 인공위성으로부터 전파를 받아들여 텔레비전을 보는 인공위성 접시를 달듯이, 하늘의 죽음 이후의 세계, 하늘 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잔치의 분위기를 받아들이려면 죽음의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내 생각과 계획이 죽은 자인 것처럼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을 모를 바에는 슬픔이 나아보이는 그 자리에 서야. 기쁨보다 나아보이는 자리에 서야 이제 참 신앙의 맛은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전도자의 7장 말씀 집에서 다 한번 읽어보십니다마는 십자가의 의미와 중요성을 아주 강렬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자리가 어떤 자리에요?
바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해 아래와 해 위의 경계선상에 서 있습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하늘 위와 연관 짓고 관계 맺고 살아 갈 수가 없어요.
지금 전도자는 슬픔이 기쁨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나아 보이는 지점을 이야기하는데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자리는 주님의 십자가 자리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왜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낫습니까?
잔칫집에 가면 그 잔치를 이루게 되는 잔치가 일어나게 된 이유인 이 세상에서의 업적이 이야기 될 뿐이에요.
그러나 초상집에 가면 이제 죽음 이후의 세계와 아주 근접하게 다가가는 겁니다.
왜? 나도 나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초상집이 더 낫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해 위의 세계를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해 위의 세계와 어떤 통로가 뚫리지 않고 해 아래로만 패쇄되어 있는 한 차라리 슬퍼하라는 겁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빠져나오게 하면서 내가 죽을 그 자리에 서게 해주시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오는 기운을 받아서 거꾸로 이 세상의 기운을 밀어가면서 사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리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의 능력과 힘과 기운으로 이 세상을 밀고 들어가 사는 것이에요. 죽음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이게 바로 기독교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0,1)복음이라고 붙인 거예요.
유일하게 참되신 존재되신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지려면 이 땅에 대해서 내가 제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해요.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좀 얘기해주면 좋겠다. 뭐 이럴 때는 사랑하고 뭐 이럴 때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서로 뭐 용납하고 서로 화해하고. 또 이럴ㄹ 때는 지혜롭게 어떻게 하고....
여러분, 그러니까 기독교가 아직 기독교의 운도 못 띠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런 얘기를 하니까...
모세가 출애굽하고 나갈 때에 홍해를 어떻게 건널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까? 너희가 홍해를 만나거든 뒤에서 애굽군대가 쫓아오는 그런 진퇴양난의 문제에 부딪치거든 이렇게 행동을 해라.
모세가 2주면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40년을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걸 미리 설교를 합니까?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데 까지만 설교자는 이끄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뒤에 나 개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있고 어떻게 이끄시는 가는 여러분들 각자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가세요!
예를 들어서 용서하라, 용납하라 그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7번씩 49번이라도 용서해라.
그러면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들을 거부하십니까?
용납하라는 그 말은 실지로 나가서 마귀새끼도 용납하라는 그런 말아 아니라, 우리는 자꾸 어떤 원리를 자꾸 기다려요. 세상에 나가서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을 해달라 원리를 기다려요.
왜 원리를 기다립니까? 당신 옆에 계신 하나님한테 묻지...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용납하라는 그 49번이라도 용납하라는 그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가짐을 얘기하는 거지요.
주님께서 조차도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얘기합니다. 지옥을 얘기하세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전도자 말합니다.
슬픔이 기쁨보다 나아보이는 그 자리에 서라고 얘기합니다.
죽음이 출생보다 나아보이는 그 자리,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내가 죽을 그곳에 미리 가 서 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요.
그럼 어떻게 갑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서의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름이 기름보다 낫다. 1절에 그렇게 나오잖아요.
기름이 뭡니까? 부유층에서 사치스럽게 몸에다 바르는 향유였고 또 의료용이고 방부제고. 이게 다 몸을 위한 거예요.
그러므로 기름이란 건 몸이 끝나면서 끝납니다. 기름의 용도가...
그러나 이름은 죽음을 넘어가기 때문에 1절에 그렇게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죽음을 넘어가는 세상을 향하여 관계를 맺고 살아가려면 슬픔이 기쁨보다 나아보이는 내가 죽어야 될 그 자리에 미리 가서 서서 이 세상을 바라보라!
그러면 이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연결되고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오는 기운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될 텐데 그럴 때 사도바울처럼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통한다 이겁니다.
우린 이렇게 생각해요. 돈을 벌 때든지 안 벌 때든지 기뻐하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에요.
돈이 벌리고 안 벌리고 간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바라보며 좌우되라는 말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는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 때문에, 하늘로부터 기뻐지고 있는데 돈이 안 벌렸어요. 근데 기쁜 거예요.
하늘로부터 오는 기운 때문에 기뻤는데 근데 돈이 벌렸어요. 상관없이 기쁜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고 기독교가 잔칫집 같다는 의미는 바로 이미 초상집을 지나고 난 뒤에 생기는 잔칫집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조차도 기독교의 잔칫성을 깨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오는 기쁨이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 그 자리에서 삶을 돌아보면 슬픔이 차라리 기쁨보다 낫고 또 일이 끝나는 것이 시작보다 낫고, 출생보다 죽는 것이 더 나아보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삶이 비관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절대적인 낙관의 힘이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주어짐을 오늘 하루 우리가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주님의 골고다의 십자가 자리를 기억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