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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이크영성과 불교적 영성>의 줄거리:
모성이 여자가 자식을 관계할 때 생기는 마음의 성질을 뜻하듯이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을 관계할 때 생기는 마음의 성질입니다. 복음을 바로 받아들인 사람의 영성은 비유컨데 마이크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관계하긴 하는데 꼭 불교적인 마음가짐으로 관계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불교적 영성의 기독교인!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지요. 이 구분을 명확히 해봅니다.
마이크영성과 불교적 영성
(요7:10~24)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마이크 영성과 불교적 영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할 때 생기는 마음의 성질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모성이라고 하면 한 여자가 자녀와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꼭 성(性)자가 아니더라도 애국심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관계에서 갖게 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성이라는 것은 관계로 인해서 생기는 마음의 상태, 마음가짐, 마음의 성질.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안에 마이크 영성이 있고 불교적 영성이 있다는 겁니다.
마이크 영성은 복음적 영성입니다, 복음을 바로 받아들였을 때 생기는 영성이고, 불교적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을 관계한다고는 하는데, 불교적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거예요.
비일비재하다는 얘깁니다.
자, 그렇다면 마이크 영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
이렇게 예를 한번 들어봅니다.
대학교에 천 명 이상이 들어가는 대 강의실이 있습니다.
이 강의실은 어느 한 과에서 점유하지 못하고 온 대학의 중요한 행사나 강연이 있을 때마다 사용됩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마이크를 갖다 두었습니다.
20년 30년 40년이 지나도 이 마이크만큼 좋은 마이크가 없어서 그 마이크를 계속 씁니다.
이럴 경우 사회 각계각층의 VIP들을 모셔다가 강연을 듣게 될 때 하버드의 경제학석학께서 오셔서 경제학 강연을 합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도 오셔서 세계정세에 대하여 강연을 하셨습니다.
또 때로는, 예술계의 달인, 예를 들어 조수미 씨 같은 분들이 와서 노래도 하고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연을 또한 하게 됩니다.
천 명이 다 감명을 받습니다.
그래도 마이크를 향하여 박수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경제학 강연을 해도 마이크는 경제학을 모르고, 세계정세에 대해서 얘기해도 마이크는 모르고, 예술에 대해서 얘기해도 마이크는 모릅니다.
마이크가 없으면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연에 감명을 받고 마이크를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마이크 영성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명절에 형제들과 올라가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하시다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내가 교통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올라가라고 하는 큐~ 사인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나는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 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다시 말해 너희는 언제나 습관과 관습을 따라하는 것이고 규정을 따라하는 것이니까 언제나 너희의 때는 마련이 돼있지만 내 때는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게 큐~ 사인을 주셔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그러시던 예수님께서 결국은 혼자 형제들이 모르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그 초막절 8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간쯤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전해집니다.
이때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거예요.
놀란다는 것은 갈릴리에서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하셨는지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겠어요?
또 예수님이 유명해지니까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자꾸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어떤 집안의 사람이고 어떤 교육을 받았다, 또 목수였다… 등등
사람들이 듣다보니 기가 막힌 겁니다, 도저히 요셉과 마리아라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갈릴리의 나사렛 촌구석에서 목수 일을 하다가 나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만큼 유식하거든요.
그러니 다들 기절을 하는 겁니다, ‘아니, 이 사람이 배우지 못한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유식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
당시 유대사회의 학문이라는 것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학문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오해했다, 지금 나는 나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이크일 뿐이다, 나는 마이크로서 마이크인 나를 붙잡고 하나님께서 연사가 되셔서 너희들에게 강연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만약에 너희가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갖고 살고 있었더라면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마이크삼아 하나님이 강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너희가 마이크 영성으로 살았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마이크를 붙잡듯이 그런 관계를 위해 살았다면, 내가 지금 말하는 것도 나는 마이크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주님은 스스로 말씀하셨다 해도 지금 사람들이 놀라는 만큼 살아있는 지식으로 충만한 말씀을 하시고도 남을 분이지마는,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이크이시기를 자처하셨다 이겁니다.
이게 바로 마이크 영성이에요.
그러면 이것과 대별해서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여러분, 불교에서 이런 전설이 내려오지요.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발걸음을 떼면서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생략하지 않고 정확하게 다 얘기하자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삼계개고(三界皆苦)’ 세 가지 세계에 고통이 가득하다, ‘아당안지(我當安之)’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천상천하유아독존, ‘천상천하에 있는 삼라만상이 모두 내 안에 들어있으므로 삼계에 고통이 가득 있다고 해도 그 고통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서 편안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라는 얘깁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삼라만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혼자 ‘나’라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삼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존귀하냐? 이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적 영성’에서 ‘불교적’이라고 하는 말은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된다는 겁니다.
나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걸 좀 더 쉽게 말하면, 스승과 제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자는 스승과 같은 인격을 배우고 스승과 같은 실력을 배웁니다.
무술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스승이 갖고 있는 무술의 경지에 내가 도달하는 것, 그래서 내가 향상되고, 내가 깨닫고, 내가 나아지고, 나 자신이 훌륭한 사람으로 되는 것을 원하는 것, 이걸 바로 ‘불교적’이라고 크게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의 훌륭함, 내 인격의 완성, 나의 개선,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불교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을 관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내가 훌륭해지는 것,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나의 인격이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인격이 되는 것, 이게 바로 불교적 영성이라는 겁니다.
‘어? 언뜻 듣기에 아무 무리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내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인격이 되는 것,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인가?’
이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관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서 내가 훌륭한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나의 인격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화(聖化)를 얘기해도 그것은 연합한 결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의 인격의 성화를 목표로 해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서 내가 성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죄 사함을 받아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나의 자격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으로 변하는 것, 이게 바로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내가 죄 사함 받고 깨끗해지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내가 깨끗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을 위해서 죄 사함의 깨끗함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어지고 나면, 다시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죄 없는 존재가 되어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 연합에서 떨어지면 나는 당장에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이크 영성이에요, 마이크 영성.
오늘 본문에 보니까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찾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 일을 하시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학석학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불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는 것과 복음적 마이크 영성으로 관계하는 것,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르냐?
먼저, 마이크 영성, 복음적 영성으로 관계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지금 연결이 돼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제학석학이지만 자기가 이제껏 배우고 알아왔고 가르쳐왔던 석학으로서의 지식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마이크 삼으시기 때문에, 나는 이제까지 석학다운 모든 지식이 제로가 되어야 마이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연합관계라는 거예요.
반면에 불교적 영성을 갖고 있는 경제학석학은 어떻게 합니까?
논문을 발표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로 야기되는 하나님나라와 미국경제현실의 상관관계’ 이런 식으로.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나의 완성, 내 이론의 완성, 내 경제학 체계의 완성을 위하여 내가 사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논문을 보고, “야아! 신학과 경제학의 조우, 기가 막히다! 경제학의 빈틈을 신학으로 보완했구나! 완벽한 경제학 체계다!” 그 사람을 칭찬합니다.
이게 바로 스스로 영광을 받기를 원하는 불교적 영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나를 세워 가느냐? 어떻게 나를 개선해 가느냐?
반면에 복음적 영성은 어떻게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느냐? 하나님과 친해지느냐? 하나님을 깊이 사귀느냐? 하나님과 견고한 연합관계로 들어가느냐?
이게 바로 복음적 영성이라는 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주님이 지금 초막절에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배우지 못한 사람이 저렇게 굉장한 말씀을 전할 수가 있느냐?’
주님의 위치는 유식과 무식이 필요가 없는 위치입니다.
주님을 마이크삼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유식하시면 유식하신 것이지,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유식하시지만 주님 스스로가 마이크이심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마이크인 위치에서는 유무식이 상관이 없습니다.
마이크 자체의 능력은 상관이 없습니다, 유능과 무능이 상관이 없습니다.
마이크 자체는 빈부가 상관없는 거예요, 재벌의 총수가 얘기하든 노숙자가 얘기하든 마이크 자체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가 이제껏 쌓아온 인생의 자격, 능력, 학벌, 인맥, 이런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마이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 생각을 다 제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마이크와 연사의 연합과 같은 연합이 돼야 되는데, 왜냐하면 오늘 주님께서,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이 연합을 위해서는 조건이 있어요.
마이크가 되려면 내 생각이 다 제로가 돼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사건이 필요한 거예요.
주님은 죄 없으시면서 스스로 마이크가 될 수 있었지마는 우리는 죄의 본성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입시키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이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봉사하셔야 되는 상황으로 처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내 생각이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마이크와 연사의 관계로 연합할 수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제까지 많이 배웠습니까? 못 배웠습니까? 상관없어요.
경제학석학도 십자가에서 제로가 돼야 되고, 시골의 일자무식 할머니도 십자가에서 제로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마이크로 붙잡으시면 석학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고, 또 경제학석학을 하나님이 마이크로 잡으시면 너무너무 시골 할머니 같은 소박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내가 이제까지 부자로 살았습니까?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도덕적으로 살았습니까? 부도덕하게 살아서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같이 제로가 돼야 됩니다.
유식하든 무식하든,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부자건 가난하건, 여자건 남자건, 다 제로가 되어서 마이크와 연사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적 영성의 참 신앙인이다 이겁니다.
그러지 않고 불교적 영성은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완성시켜가려고 하는 것,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게 너무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밖에 안 된다니, 내가 더 나아져야 될 텐데…, 이게 다 불교적 영성의 후회요 뉘우침이라는 겁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조차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내가 훌륭한 인격을 성화과정을 통하여 이룬 다음에 그 훌륭한 인격을 통하여 행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근본을 다 들여다보면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이러이러한 행동들이 열매로 맺어질 수 있도록 주님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하라는 말씀이 핵심이라 이겁니다.
마이크 영성과 불교적 영성을 구분하셔서,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마이크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철저하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머리에 가시면류관이 쓰여 있는 것을 생각하고, 내 손과 발에 못이 박혔음을 기억하면서 철저하게 죽은 자임을 깨치고, 죽은 자임을 고수하고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마이크로 쓰시는 대역사를 확인하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전혀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나 스스로에게 깊이깊이 깨우치고, 24시간 이 깨우침이 유지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이크가 되어, 하나님과 연합하는 참된 복음적 영성 안에서 살아가게 해주시고, 다시는 불교적 영성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