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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주신 특권을 좀 써먹자>의 줄거리:
하늘 형제회 사람들은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 땅에서는 작은 자이기를 자처하고 천국에서는 큰 자로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하늘형제들에게 이 땅에서 행사하도록 무려 세 가지나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잘못된 특권의식이 바리새인을 만들었듯이 주신 특권 사용하지 않음이 불신앙인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주신 특권을 좀 써먹자
(마태복음 18:18~20)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주신 특권을 좀 써먹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주신 특권을 좀 써먹자’
유머로 말씀을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천국에 올라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반드시 천국에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이고, 두 번째는 결코 천국에 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버젓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 있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한 동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놀람은 천국이 아닌 땅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정말로 놀라는 것은 누가 천국에 왔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기에 날짜의 개념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천국에도 날짜가 있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좋으심에 놀랄 것입니다. 오늘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다고 느꼈다가 다음 날 하나님을 뵈면 또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정말로 놀랄만한 유일한 이유일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유머에서 누군가가 천국에 있거나 없음으로 인해 놀란다는 것은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앞서 등장했던 형제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 단체로써의 형제단과 구분하기 위해 하늘 형제회라고 지칭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의 특권 중에는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천국에 갈 것인지 못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15~17절에서 형제에게 세 번을 권고하여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의 18절 말씀은 이 땅에 있는 형제들이 천국에 못 들어갈 자로 결정한다면 하늘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통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명백하게 천국 입성의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만 보더라도 그 조건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의 3절 말씀이 그 조건을 잘 드러내줍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땅에서 이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형제들이라면 죄를 범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죄란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삶의 형태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 천국에 갈 사람인지 못 갈 사람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올라가서야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기준에 비추어보자면 천국에는 올라갈 사람만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천국에 올라간다면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해서 놀랄 수 있을 뿐이지 새삼스럽게 오기로 되었던 사람이 못 와서 놀라거나 못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와서 놀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오게 되었을까를 놀라워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역사 또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놀라는 것도 땅에서나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땅에서 살아갈 동안 이러한 놀람이 없는 이유는 구원을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천국에 갈 것인가 못 갈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을 형제들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얼핏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으신데 형제들이 모여서 고자질하듯이 ‘저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라고 결정하면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일까요? 물론 본문의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형제들이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형제들이 어떤 사람을 가리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길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판단과 분별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 못 오리라는 것을 판단하셨다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가진 형제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의 특권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특권을 사용하는 것이 신앙이고 쓰지 못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잘못된 특권의식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 특권을 쓰지 못한다면 불신앙을 드러내는 반증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윤리적 덕목으로써의 겸손을 강조하신 것이 아님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라는 것은 겸손하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윤리적으로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볼 때에 겸손한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겸손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오해하는 것입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가리는 기준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 크기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말과 행동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서 기쁘고 만족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세상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 가치를 많이 가지게 된 이유는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천국에서 큰 사람은 마음에 세상 가치를 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쁨과 만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 대신에 마음을 하늘의 가치로 채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 채워져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의 가치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천국에서 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작은 사람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만 있으면 행복해하는 존재입니다. 어린 아이는 이 세상의 가치를 획득해서 마음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존재감이 가장 작은 존재입니다. 세상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이 세상 가치를 마음에서 떨쳐냄으로써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가진 재산을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벌이라도 마음에서 세상 가치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져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로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세상 가치를 붙잡고 “10년 뒤에는 부자가 되고야 말리라”는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고 천국에도 갈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천국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산 아래의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머물기만을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세상 가치가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천사와 같은 얼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육체가 돌에 맞아 죽어간다는 사실조차도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 끼어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또한 이러한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사로는 비유였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새 한국교계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입니다. 최근에도 출석 교인이 10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의 세습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으나 결국 유야무야되어서 세습을 인정하고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예배당의 당회장 목사님이 워낙 거물이시니 총회에서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경우에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 형제의 특권을 적용해본다면 어떨까요? 대형교회 목사님의 마음에도 하나님 크기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10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 교회를 세습해줘야만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를 고집하고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세 번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의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하였고 신학생과 교수들이 반대하였으며 교인들 또한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세습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우리는 이렇게 큰 목회가 아니면 기쁘고 만족할 수 없게 된 목사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마음, 순교하신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진 이 상태를 이방인과 세리로 취급할 수 없다면 이것이야 말로 불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세습 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형제의 특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10만 명 중에 몇 명이나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출 수 있을지, 몇 명이나 하늘 형제회에 속한 사람들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기대할 수 없습니다. 10만 명의 교인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아버지 목사님, 그 목사님의 목회를 물려받아야만 기쁠 수 있는 아들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믿는 교인들이라면 그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에 포함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이러한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이방인과 세리들 중에서도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들은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 세상 가치를 포기했으니 낮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삼으려고 한다면 이들을 형제라 부르고 천국에 들어갈 자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결정과도 일치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이 특권을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돈이나 건강과 같은 세상 가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세상 가치들은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을 속성으로 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일임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기쁨과 만족에 기여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에는 자녀의 형통도 있고 건강도 있으며 노후의 보장 등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가치를 마음에서 박탈해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연금을 많이 받는 삶을 가치 있다고 여깁니다. 서울대 입학을 높은 가치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높다고 여기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건강이든 돈이든 세상 가치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필요한 만큼 주어질 것입니다. 얼마나 주어질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형제들에게는 소원기도와 합심기도의 특권이 주어집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부르신 형제들이 합심하여 기도한다면 다 이루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형제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형제는 이 세상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 돈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자들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돈이 아닌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몸을 입고 살아가는 한 세상에 대한 끌림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끌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합심해서 기도한다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일까요?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마음에서 세상 가치가 필요 없는 상태에서만 여호와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생겨나는 소원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로 기뻐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빌립보서에서는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에 소원이 생긴다면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에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질 때에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는 곧 나를 위해 세상 가치를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뜻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을 향한 소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느냐 육체로부터 나왔느냐의 차이가 극명합니다.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내가 구원을 이룬 상태인가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기뻐하고 있다면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라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대형교회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세상에 더욱 빠졌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마약 중독자들이 점점 더 많고 빈번한 투약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큰 목회현장이 아니고서야 기뻐할 수 없다면 세상 가치라는 마약에 깊이 중독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의 논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셔서 이렇게 큰 예배당이 되었는데 무엇이 문제냐? 이 예배당을 자녀에게 세습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닙니다. 예배당이라는 이름의 마약에 중독된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상태에서는 세상의 가치들은 배설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히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장은 하나님을 충분히 체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믿음으로써 구원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밤에 경포대에 나가면 거울 경(鏡)자에 어울리도록 잔잔한 수면에 달이 비칩니다. 호수가 달빛을 온전히 반사하듯이 십자가에서 이 세상 가치에 대해서 계속 죽을 때에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비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초점은 ‘합심해서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을 구하게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의 특권입니다. 형제는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고 하나님만이 마음의 기쁨이 된 사람이며 적어도 하나님만이 기쁨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세상에 대한 끌림을 극복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비춰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10절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마음에 비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합심한다는 것은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경포대에 비친 달과 강릉 앞 바다에 비친 달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같은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기에 합심하여 기도할 수고 같은 일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에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뜻을 숨기시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예수 이름입니다.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은 존재를 가리키는 표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방법이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을 통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동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동선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형제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입니다. 돈 문제를 해결해서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높아져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갈망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할 때에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돈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넘어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혔음을 인정할 때에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삶은 이루어지게 되고 마음은 천국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동선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낮추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낮추기 위해서는 세상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편에 앉으신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린 아이처럼 세상 가치를 버리고 세상에서 낮아진 자가 된다면 하늘에서는 거목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거목인 형제들의 모임에 반드시 참여하십니다. 창조주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참여하시는 모임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UN총회나 백악관의 국무회의나 중국 인민회의조차도 예수님 오시기에 합당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며 세상에서 낮은 자를 자처하는 두 거목들이 모이는 자리에 오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교회의 핵심입니다. 그 누가 창조주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초청할 수 있겠습니까?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천국의 모습으로 변하셨을 때에 영광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논의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천상의 거물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천국의 정상회의 같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거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 변화산의 사건을 재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동선을 통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기를 자처하는 형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 가지 특권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천국 입성을 결정하는 특권, 합심 기도의 특권, 예수님의 초정 특권을 날마다 사용하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나를 낮추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심으로써 천국의 거목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