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관심, 무관심, 죽인 관심>의 줄거리:
욕하고 비난해도 관심이 무관심보다는 낫다고들 합니다. 또 한편에서는 과도한 관심이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관심'이 가져오는 문제는 주체에게도 대상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보자면 관심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합니다. 관심의 주체도 대상도 모두 잘 되는 길이 십자가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관심, 무관심, 죽인 관심
(마태복음 19:27~30)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3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관심, 무관심, 죽인 관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관심, 무관심, 죽인 관심’
많은 사람들이 관심 얻기를 소원합니다.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조사하거나 정치인들이 지지도를 조사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목회현장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것이 바로 목회의 성공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신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않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도의 힌두교인이든 태국의 불교인이든 모든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호랑이와 사자나 나무와 꽃들은 하나님의 관심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관심에 대한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 같은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끼리 관심을 얻고자 하는 시도들은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은 하나님의 관심에 호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세상일들을 처리해야만 합니다. 나 스스로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하는 주체가 되어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말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길을 날마다 반복해서 가는 사람입니다. 다만 나는 육체를 입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세상에서 관심을 끄는 대상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성경 사본에는 형제 앞에 아내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아내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족과 재산까지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족과 재산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의 대상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에서 관심을 가지게 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관심의 대상들에 대한 대처 방법을 명확히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앞에서 등장한 부자 청년의 일화를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은 16절에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가지고 있던 영생의 기준에 맞추어서 계명을 지킬 것과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재산을 팔라는 말씀을 구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첫 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의 연장선상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다른 신으로 섬기고 좋아하고 있었기에 결국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진리가 교회 안에서 악용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오해 없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좋아서”라는 말을 함께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돈을 좋아하면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살아서는 돈을 많이 벌고 죽은 다음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 속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세상의 관심거리들을 버림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마귀는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관심거리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영생도 얻을 수 있다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관심거리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기는커녕 유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좋아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싶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구원과 영생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하나님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변화 과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와 같은 관심거리들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멈출 때에 재물이든 가족이든 세상의 대상들에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이 하늘에서부터 끌려 내려와 땅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이 관심의 대상들을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붙잡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세상의 대상은 버려질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삼일 동안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하나님 우편에 머물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세상의 관심거리에 마음을 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를 때 일어나는 일이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관심거리를 버렸는데 다시 이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게 된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여러 배’로 번역 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보자면 백배입니다. 어떤 사본에서는 오십 배라고 나오기도 합니다만 의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재물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백배가 와 닿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 백배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관심거리가 생겼을 때에 그것을 버려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관심을 유지한 채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믿는 효과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한다면 가족이든 재물이든 세상의 관심거리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라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백배를 받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 안 듣는 배우자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더니 말 안 듣는 것이 백배나 더 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이런 삶은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자 재물의 관심에 대해 죽었음을 십자가에서 고백했는데 그 재물을 백배나 더 받는다고 한들 하나님을 좋아함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하자면 백배를 버리면 그것이 다시 백배가 되니 처음의 만 배가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순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관심거리에 대해 죽으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남은 대상들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죽인 관심”의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 대한 관심을 십자가에서 죽였으면 배우자는 내가 관계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이 관계하실 대상이 됩니다. 물론 내 육체가 있는 한 부부라는 법적인 관계는 엄연히 유지될 것입니다. 다만 마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대면하시며 일어날 일들은 내가 직접 대면할 때보다 백배나 더 큰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써 자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자녀에 대한 관심에 끌려가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이름을 위해서 자녀에 대한 관심조차 십자가에서 죽일 때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관심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모역할을 하게 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나는 부모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납니다. 나의 기준대로 자녀를 양육할 때와 하나님께서 자녀를 양육하실 때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서 백배의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관심거리에 대한 죽음이 요청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좋아할 수도 없으며 만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심거리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죽인 관심”의 상태가 된다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갖고 세상의 일들도 은혜롭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이해를 전제로 할 때에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물이 백배로 늘어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백배의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결과로 주어지고 쓰여 지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관심거리에 대해 죽으면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죽인 관심”의 세상 대상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백배의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29절의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들은 예수 이름을 위하여 세상의 관심거리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 “죽인 관심”의 대상이 된 배우자나 자녀와 같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집이나 전토 같은 재물이 될 수도 있으며 직장이나 결혼 같은 삶의 문제들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이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되고 내가 직접 관심할 때보다 백배나 더한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백배 더 은총스럽게 살자, 백배 더 축복스럽게 살자, 백배 더 감사스럽게 살자는 말은 문법적으로 어색합니다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관심을 유발하는 모든 대상들은 내 마음에서 “죽인 관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관심거리들은 하나님의 과녁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자 하실 때에 내 마음에 관심거리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아내가 내 마음에 관심거리가 됩니다. 이때에 아내를 관심거리를 끌어안는다면 하나님은 아내를 과녁 삼으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아내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 관심이 되는 상태를 향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관심거리였던 아내는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셔서 관계해 가실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직장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장문제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개입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관심거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십자가에서 직장문제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죽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직장문제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직장문제를 해결해 나가실 것입니다. 내가 대면할 때보다 백배나 은총스럽고 축복스럽고 감사스럽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죽인 관심” 만들기를 반복해 나가는 삶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삶에서 관심거리가 생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실 과녁으로 삼으셨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손과 발과 오감각과 생각을 장갑 삼으셔서 주권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그것들을 “죽은 관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한편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는 무관심의 대상들은 하나님이 적어도 나를 통해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개입하시거나 창조주로써 섭리적인 차원에서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관심거리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는 한 버리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은 선민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선민은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가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기준이 바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의 방식이 기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얻을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족도 생계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반복해서 말씀드렸던 대로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면서 앞으로 부자가 되고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모두 좌절되게 됩니다.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모으시고 승천하심으로 하늘로 가져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도 재물도 “죽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백배의 은총스러움과 축복스러움과 감사스러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마음에서는 돈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기준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육체로 이 세상을 살다보면 관심거리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뉴스만 봐도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생깁니다. 비록 이러한 일들이 순간의 관심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순간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서 이를 “죽인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해나가실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만큼 개입해나가십니다.
물론 정치 문제에 대해 나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생겨날 여파는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 100만 명이 정치 문제를 “죽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100만 명의 관심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권에서 백배나 은총스럽고 축복스럽고 감사스러운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관심을 유지하면 재앙입니다. 관심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빌딩에 불이 나면 소방관들이 창문 쪽에 에어매트를 설치합니다. 그러면 에어매트 위로 뛰어내린 사람들은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빌딩은 우리의 마음이고 세상의 대상을 향한 관심이 지속될 때에 마음에는 불이 난 것입니다. 마음의 관심들을 창밖으로 떨어뜨리면 하나님의 주권이 에어매트처럼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빌딩 안에 계속 품고자 한다면 모두 불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심이 유지되고 지속되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인 관심”으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가 무관심한 대상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원수가 관심의 대상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원수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혼찌검이 나야만 한다면 그대로 될 것이고, 잘못을 깨닫게 하신다면 더 이상 원수로 여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듯이 이 원리로 가장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열두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기준이 되어서 천국에 갈 사람과 못 갈 사람들이 나누어 질 것이기 때문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관심이 생기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해야 될 일은 관심이 유지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생기면 십자가에서 “죽인 관심”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관심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는 과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자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에게 관심거리를 주십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0절을 보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문제의 해결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이용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나의 가치관이나 생각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갈 때에 때로는 이 세상 기준에서 별 볼일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다면 세상에 대해 “죽인 관심”의 상태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해결사로 생각하는 마음은 중지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될 때에 우리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게 잘 하시는지 눈여겨 볼 생각은 접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 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 명확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관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심이 지속된다면 하나님을 향할 수 없습니다. 관심은 십자가에서 “죽인 관심”으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관심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실 과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관심이 생겼을 때에 예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고 죽는다면 마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인 관심”의 대상들은 백배로 은총스럽고 축복스럽고 감사스럽게 되어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몸을 입고 사노라면 온갖 대상들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러한 관심을 복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죽인 관심”으로 바꾸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가득 가지게 하시고, 이 땅에서는 “죽인 관심”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백배로 은총스럽고 축복스럽고 감사스러운 상황들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