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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S)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_태승철 (마태복음 23:29~3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18|조회수2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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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의 줄거리:

이 제목은 마치 복음을 받아들이고 따름을 자가용 자동차 갖기처럼 하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 된다는 의미로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복음은 처음부터 자가용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복음을 자가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 조직의 지도자들이 이 복음의 자가용 속성을 덮어 버렸지요.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

(마태복음 23:29~39)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

자가용하면 자동차가 먼저 떠오릅니다만 개인적으로 쓰이는 물건이라는 본래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주변의 많은 대상이 자가용입니다자가용 발전기도 있을 수 있고 자가용 비행기나 자가용 요트를 소유한 부자들도 있습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한 가정에 몇 대씩 자가용차가 있게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당시에 차를 가진 사람은 천연기념물 같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제는 차가 없는 집이 오히려 천연기념물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차가 없는 사람들도 돈이 없어서 차를 사지 않기보다는 환경오염이나 교통에 대한 철학이 달라서 필요로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심지어 요즘은 자가용 비행기나 헬기를 생각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자가용은 차도 비행기도 발전기도 아닌 복음입니다복음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막을 만들었던 3500년 전부터 자가용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복음의 자가용 시대 개막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복음의 본래 성격을 망각한 채 역이나 정류장에 가야만 탈 수 있는 대중교통처럼 여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오히려 기독교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덮고 속이고 감추어왔습니다기독교라는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또 자신들의 특권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자가용 복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덮어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당이나 기독교 단체에 소속이 되어야만 구원도 얻을 수 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할 수 있는 것으로 배워왔습니다그러나 복음의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렇게 종교단체나 예배당 조직에 신앙을 위탁하는 한 구원은 요원합니다복음은 자가용이 되어야만 합니다각자에게 주어진 자가용으로써의 복음을 수용하고 따를 때에 참 구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또한 그럴 때에 비로소 전체이자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에 소속될 수 있습니다자가용 복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에 속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닙니다무교회주의는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제가 기존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해 비판을 하자 무교회주의와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이 목사님께서는 예배당과 교회를 일치시키는 전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입니다그리고 무교회주의도 존재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베드로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말씀이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무교회주의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교회를 예배당 조직이 대체하는 일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굳이 말하자면 참교회주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참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예배당을 구호처럼 외쳐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현실입니다예배당 조직에 신앙을 의존하는 한 복음은 자가용으로 수용될 수가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회 또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교회는 복음을 자가용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사람들 전체입니다.

교부 키프리안(Cyprianus, 200~258)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이 신학적 공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회 밖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라기보다는 교회 밖에는 구원 받은 자가 없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구원받은 자 전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교회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교회라는 조직에 회원으로 등록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오직 복음을 자가용으로 수용하고 따를 때에만 구원은 이루어질 수 있고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당연히 예배당 조직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느냐예배당 조직의 행사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느냐예배당 조직에서 얼마나 시간을 많이 보내느냐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인들이 직분에 구애받고 행사참여에 열을 내며 시간투자에 대해 고민합니다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의 시작부터 잘못 배웠고 잘못 가르쳐 왔습니다그런데 이 잘못 됨의 양상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예수님께서 일곱 번에 걸쳐 저주를 내리고 계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의 행태가 우리의 예배당 중심의 삶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입니다그렇기에 일곱 가지 저주 선언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끊으셨듯이 우리는 예배당 끊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오늘은 예배당 끊기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저주 선언을 자가용 복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매듭지어보고자 합니다예배당을 끊은 자들에게 복음은 필연적으로 자가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읽은 내용을 뒤에서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여기서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가 저주를 받을 대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합니다이들이 가진 위선의 열매가 선지자들과 파송된 자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들이 실제로 선지자들을 죽인 장본인은 아니었습니다이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비석을 장식하는 일에 공을 들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에서 이들의 위선을 발견하시고 지적하십니다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선지자들을 기렸던 이유가 무엇일까요이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배척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악한 조상들과 거리를 두고 선지자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선지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선지자들을 기리고자 했다면 무덤과 비석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만 했습니다선지자들의 일은 말씀을 통하여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밀착된 상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진정으로 선지자들이 간 길을 따르고자 했다면 무덤과 비석을 꾸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를 이루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보다 이 세상의 성공과 형통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아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하십니다다만 여기서 부르신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닙니다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이라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하여 택하신 장소입니다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고 휘장 바깥쪽에는 성소가 있었습니다성소에는 향을 피우는 분향단이 있었고 분향단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떡상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금촛대가 있었습니다그리고 성소 바깥에는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의 구조와 기구들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합니다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전의 방식을 따라야 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 기도를 할 때에 성전의 방식을 따라야 했고 성전 관계자들은 성전의 방식을 따라 백성들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그런데 마음으로 성전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관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으며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듣지도 않으십니다다시 말해 성전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일은 위선이고 가식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성전은 예루살렘 사람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선민은 어느 곳에서 살아가든지 하나님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세상이 끼어들지 않아야 합니다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성전은 모든 선민들의 마음에 자가용으로 받아들이도록 준비된 장소였습니다만약 300백만 명의 선민이 있었다면 300백만 개의 자가용 성전을 창출하기 위한 의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의 하는 일을 생각해보도록 합니다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갑니다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소에 있는 분향단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웠습니다매 안식일마다 열두 개의 새 떡을 떡상에 올렸습니다또 매일 아침이면 성소에 햇빛이 들어오게 문을 열었고해가 지면 금촛대에 불을 밝혀서 성소에 항상 빛이 있게 하였습니다성소 바깥의 번제단에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이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제사장들의 업무였습니다모든 선민들이 이러한 일이 성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다만 성전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어디에 살든지 성전을 마음에 새겨 자가용으로 받아들이며 그 의미를 생활화해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향을 피우고 있으며하나님으로 만족함을 상징하는 떡상에는 매안식일마다 떡이 올라가고 있고하나님만 추구함을 상징하는 금촛대가 불을 밝히고 있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성전을 생활화하지 못했다면 아침저녁으로 번제단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이 죽어가고 있음을 기억합니다이렇게 성전을 자가용으로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모든 조건은 갖추어지게 됩니다성전 이상의 다른 조건이 필요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진짜 성전은 이미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고다니엘은 바벨론의 신하로써 왕을 섬기던 때였습니다그러나 다니엘의 마음에서 성전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마음속에서 성전의 구조와 기구들이 상징하는 바를 떠올리며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성소의 법궤는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겨야 함을 상징합니다마음에 돈이나 자녀의 형통 같은 세상 가치들의 이름이 들어왔다면 하나님 대신에 그것들로 기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다니엘도 때로는 왕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마음에서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번제단을 떠올립니다어린 양과 함께 자신의 마음이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던 것입니다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상징하는 바를 떠올리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를 기도하고 왕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보기를 기도합니다다니엘은 이처럼 성전을 자가용으로 확보함으로써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도 완벽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다니엘에게는 참가할 회당도 없었으며 절기를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다만 마음에서 성전을 기억하고 성전을 자가용으로 삼을 수 있었기에 우상의 소굴인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대제사장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선민에게 성전을 자가용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중앙집권적 조직을 만들었습니다이들은 조직의 정점에서 특권을 누리며 선민들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습니다성전을 선민들에게서 빼앗고 독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는 중에 613가지의 규정도 나타나게 되었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파벌로 나뉘어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당 조직에서도 이러한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그러나 예배당 조직은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가톨릭의 조직 또한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구원을 받으면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주권이 활성화되고 있는 가운데 복지를 살아가게 됩니다이러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전의 존재의미를 완성시키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자가용이 있으면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으로 갈 필요가 없듯이구원에 이르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십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예배당 조직이 교인들로부터 이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을 수 없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저 또한 유아세례를 받던 시절부터 신학교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배웠고 또한 배운 대로 가르쳤습니다예배당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제가 사기꾼의 선봉장이었습니다그러나 구원은 결코 예배당 조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탄식이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을 수 있도록 성전을 허락해주셨습니다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담게 된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다시 태어나서 성전의 방식대로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밀착상태입니다마음에 돈이나 자녀의 형통이나 배우자의 문제를 담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다면 이 거리를 좁혀야만 합니다이것이 일어나는 곳이 성전의 번제단이었고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사건이 번제단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일찍이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선지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꾸몄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위선을 보였습니다이 세상과 마음이 밀착해 있는 상태를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해 33절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저주를 선언하십니다정말로 선지자들을 존중하였다면 무덤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어야 했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성전구조의 의미를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추구함을 통해 밀착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성전을 자가용 삼지도 못했으며선민들이 성전을 자가용 삼을 수 있도록 돕지도 않았습니다오직 성전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조직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모든 선민들에게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요구하였습니다이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선민들 또한 결코 다니엘과 같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었고 삶에서 복지를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다니엘이 성전을 자가용 삼아 신앙을 지키면서도 바벨론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추앙받으며 복지를 누렸던 것과 대비됩니다.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 자가용 신앙체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뿐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성전의 존재의미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그렇게 하늘을 향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릴 때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담겨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무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이것이 계속해서 말씀드린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는 것입니다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면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셨으니 나의 마음도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으니 사위일체가 가능해집니다이렇게 하늘에서 사위일체를 이루는 구원이 일어날 때에 이 땅에서는 몸으로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이 주권이 임하게 됩니다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이며나의 지정의를 장갑과 가면으로 삼으셔서 역사해 가실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사위일체 구원을 이루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나의 지정의는 하나님의 장갑과 가면으로 쓰임 받는 구원의 상태가 십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을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하늘의 구원과 땅의 구원을 동시에 이룬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이 세우신 단 하나의 교회의 일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만 교인들의 모임도 가치를 갖게 됩니다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이렇게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고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혹시 시험에 들거나 믿음이 약해진 사람이 있다면 복음을 자가용으로 활용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밀착관계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아침마다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십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활용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교회에서 교인들 간의 만남에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우리가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홀로 무인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끔 서로 돕는 것이 모임의 목적이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입니다.

조직에 헌신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종교라는 단체는 구원과는 관련이 없습니다예배당 조직 또한 구원과 관련이 없습니다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미 전체가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 안에 소속된 것입니다이 구원은 오직 성전의 존재의미를 완성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고 따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제는 복음의 자가용 시대를 시작해야만 합니다복음은 본래 3500년 전에 성막이 만들어질 때부터 자가용이었습니다성막과 성전은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기 위한 상징물이었습니다성전을 자가용으로 삼아 믿음을 지켰던 다니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입니다.

오케스트라는 각기 다른 악기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룹니다그러나 오케스트라는 무턱대고 모이는 일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모든 악기의 주자들이 곡을 이해하고 소화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에 비로소 오케스트라로써의 모임이 시작됩니다예수님의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각자가 복음을 자가용으로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을 주자로 삼아 아름다운 조화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복음의 자가용 시대를 함께 열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복음의 자가용 시대를 위하여 오늘도 언제 어디서든지 십자가 생활화를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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