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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림 불감증의 이유>의 줄거리: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인생에서 일어날 일 중에서 재림처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그랬듯이 마라나타를 외치며 내 마음이 재림을 앞서서 체감하면 할수록 내 인생 전체의 하루하루는 최고의 순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상태는 재림 불감증 환자와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림 불감증의 이유
(마태복음 24:32~41)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재림 불감증의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재림 불감증의 이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육체를 입고 태어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어도, 세계적 굴지의 기업의 회장이 되었어도, 유명한 대학의 총장이 되었어도 인생의 정점을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노숙자로 살고 있거나 혹은 교도소에서 수십 년을 있더라도 대통령이나 회장님이나 총장님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의 인생의 정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은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이승만 대통령도 모두 죽었지만 실은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인생이 어떠했는가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평가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실감하며 살 수 있다면 하루하루를 최고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개입하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재림사건을 이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에 오셨다며 구원의 티켓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불감증적 수준으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제껏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를 우리에게 줍니다. 해와 달과 별 사이에서 떠도는 이 지구에서 시간과 공간 안의 삼라만상, 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재림이 주는 기운을 받는 것입니다. 이 자유의 기운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재림을 체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재림을 체감하는 사람은 삶에서 구속감과 억압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시달리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온전한 자유로 충만하여 말과 행동이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자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재림에 대한 말씀을 이토록 자세하게 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재림을 불감증적 수준으로 관계해왔습니다.
본문 32~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 어휘는 바로 ‘보거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예수님의 재림을 예표하는 일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재림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재림이 임박했을 때에 이러한 예표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는 것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점을 놓치기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분분합니다.
이어서 3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잘 알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신약학박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이 말씀을 임박한 종말의식에서 생겨난 예수님의 착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한 세대가 끝나도록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세대’를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세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해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 מרנא ת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며 산 초대교인들의 인사였습니다. 다만 이들의 임박한 재림의식은 단순히 시간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인 상태란 시간과 공간의 차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표면적인 이해밖에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와 철쭉이 피고 더 지나면 장미도 필 것이며 어느덧 여름이 가까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꽃이 피는 것만 봐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예표를 봄으로써 체감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재림의 예표는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시간적 변화에 따라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것일까요? 앞서 15~22절에서는 큰 환난이 언급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란 이러한 큰 환난을 볼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큰 환난이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고 인생 최고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럴 때에 예수님의 재림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이 매사에 관여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먼저 큰 환난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을 보면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큰 환난을 역사 속에서 일어나게 될 특별한 사건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중세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전의 역사에서 찾으려 하였고, 현대에 사는 신학자들이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오신 후로 2000년 간 일어났던 사건들 속에서 큰 환난을 찾고자 합니다. 혹은 이 환난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서 미래에 있을 막연한 일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원자폭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전쟁이나 강력한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또는 대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난이나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환난이라는 말들이 나왔다가 잊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큰 환난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에 의해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 큰 환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멸망시킬 것 같았던 흑사병은 진정되었고 오히려 르네상스를 비롯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말에 일본에 두 발의 핵폭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재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모두 재건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6.25전쟁으로 전국토가 초토화 되었을 때에 이보다 더 큰 재난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놀라운 재건을 이루어내게 되었습니다. 911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미국 전역의 예배당이 들끓었습니다. 종말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는 신앙적 각성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또한 지나가고 신앙도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역사는 이러한 행태를 반복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짜 큰 환난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합리적 의심을 통하여 이 큰 환난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7~39절을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홍수에 빗대어 예수님 재림 직전의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40~41절을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밭일을 하고 맷돌질을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평범한 일상이 진행되는 중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은 큰 환난의 기운이 느껴지기는커녕 평온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나거나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대재난이 일어나고서야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어도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33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환난의 의미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와도 같습니다. 자살이란 스스로 자기의 육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육체의 죽음을 구원의 길로 느낄 때에 자살을 결심하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보다도 더 두렵게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육체를 죽임으로써 그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그 두려움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마음의 공허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때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 몸을 죽여서라도 마음의 공허함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게 됩니다.
자살과 관련하여 마릴린 먼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들은 최고의 명예와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명예와 인기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들의 정점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명예와 인기 같은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마음이 채워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들을 얻고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자 추구해왔던 가치들이 가짜 희망임을 깨닫고 공허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육체를 죽여서라도 공허함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총알이 귓가를 스치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살고 싶어 몸부림칩니다. 기근이 일어나면 들풀이라도 뜯어먹어가며 생존하려고 합니다. 몸에 암이 생기면 모질고 고통스러운 모든 치료를 견디면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처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살기위해 기를 쓰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본능까지도 포기하게 만드는 두려움이 바로 마음의 공허함을 직면하는 순간에 생겨납니다. 더 이상 마음을 채울 거리가 없다고 느낄 때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육체를 죽여서라도 공포에서 도망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환난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큰 환난은 전쟁도 아니고 기근이나 지진 같은 재난도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육체적으로는 최대의 환난과 마주한 셈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육체의 죽음을 환난으로 여기지 않았고 마음의 평강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환난은 마음이 텅 비었음을 발견하는 것이고 채울 수 있는 대상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럴 때에 자살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육체를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큰 환난을 말씀하시며 먼저 언급하신 것이 15절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수 있어야 그것을 큰 환난으로 여길 수 있으며, 그러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재림 또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만이 존재했습니다. 다른 것들을 들여놓는다면 지성소가 더렵혀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성소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담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담도록 지음 받았고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마릴린 먼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명예나 인기라는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 상태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역겨워하시는 상태이기에 동시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로 두려워 할 환난이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명예와 인기도 재산도 얻었습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의 가치를 얻었기에 이제 마음은 채워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혀 채워지지 않았음을 느꼈고 더는 채울 것을 추구할 수도 없음을 깨달았기에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환난이 있을 수가 없기에 육체를 죽여서라도 도망하고자 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존본능을 꺾는 것은 전쟁도 기근도 전염병도 아닙니다. 육체로 겪는 어떤 환난도 마음의 공허함보다 더 큰 환난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릴린 먼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주변의 누군가가 이러한 진실을 알았다면 그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지금 하나님이 제일 역겨워하시는 상태를 걷고 있고, 그러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는 환난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일깨워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의 육체를 죽여야만 할 정도로 두려운 환난이 임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면서, 밭일을 하면서, 맷돌을 갈면서, 사업을 하면서, 가정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 깨달음은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설 때에 가장 두려운 환난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환난의 원인은 바로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역겨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환난을 바로 보는 사람만이 이미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재림을 인생 최고의 사건으로 알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할 때에 마치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로부터 마음은 자유로워집니다.
오늘은 큰 환난이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예수님의 재림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세대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환난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있었지만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마음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미 큰 환난 속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자기 속의 공허함을 직면하는 것보다 더 큰 환난은 없습니다. 이 큰 환난을 보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재림을 인생 최고의 사건으로 체감할 것이고 또한 매순간을 예수님의 재림이 주는 최고의 기운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셔서 큰 환난의 정체를 밝히 봄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하여 주시고 오신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기운에 사로잡혀 사는 영적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