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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생과 영벌의 시력검사>의 줄거리:
예수님의 재림으로 최후 심판이 벌어질 때 천국행과 지옥행의 결정이 바로 시력검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작은 글자를 잘 볼수록 시력은 좋게 나옵니다. 이처럼 검사한 결과 영생은 시력이 좋은 사람이, 영벌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어떤 눈이 영생을 얻는 좋은 시력의 눈일까요? '지극히 작은 자'가 보여야 합니다.
영생과 영벌의 시력검사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생과 영벌의 시력검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생과 영벌의 시력검사’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많은 행위와 사건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이어 나타나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공식적인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41절 부터는 염소로 비유된 자들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벌에 처해지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영생에 들어가거나 영벌을 받게 될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마치 시력검사와 같습니다. 시력검사는 작은 글씨를 잘 볼수록 좋은 수치를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시력이 좋다는 기준을 2정도로 보지만, 몽고의 유목민들은 시력이 4~6에 이른다고 합니다. 광활한 평원 끝에 점과 같은 것이 사람인지 말인지를 파악하다 보니 시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하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영생으로 들어갈 것인가 영벌로 들어갈 것인가는 신앙의 시력검사로 결정됩니다. 이 시력검사는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시력을 가진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고,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없는 마음의 시력을 가진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 영벌에 처해지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전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고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돈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며 예수를 믿는다면 자녀의 형통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가 본문 비유를 이해하기에 도움이 됩니다.
본문에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베푸는 선행이 언급됩니다. 35~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0절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살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얼핏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행위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말씀을 공생애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시점에서 하셨다는 것이 더욱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우리의 신앙에 큰 의미를 제시합니다.
앞서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선행은 앞선 비유들과 같이 재림과 종말을 염두에 둘 때에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선행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이 가지는 의미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때에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수면 아래에 있는 큰 빙산은 앞서 나타난 열 처녀와 달란트의 비유와 재림과 종말에 대한 24장의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행실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선행입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비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기름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디 오는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등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자면 기름은 우리의 의식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묶여서 예수님의 재림까지 도달할 수 없다면 더디 오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영생과 영벌에 대한 기준은 이미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삶의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는 돈이나 가족 혹은 건강문제 같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들의 공통점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재림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끝내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묶여있다면 예수님의 재림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의식이 삶의 문제를 향하는 이유는 곧 마음의 공백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제대로 의식할 수 없습니다.
한편 그 해결책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내 마음을 빼앗는 문제는 달란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나의 의식이 예수님의 재림에 닿을 수 있느냐를 점검하는 것이었다면,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 이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빼앗는 대상들을 달란트로 삼아 마음을 벌어들이고 벌어들인 마음을 하나님께 이익으로 드립니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달란트로 삼았던 문제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십자가 생활화와 일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마음을 회수하여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아내 사라와 적자 이삭을 마음에서 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회수한 마음만큼을 하나님께 이익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처럼 세상의 문제로부터 마음을 회수하여 하나님께 드릴 때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넉넉하게 기름을 준비한 상태가 됩니다. 의식이 충분히 예수님의 재림을 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받으시고 이익으로 여기시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상을 향하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이익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의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버시는 만큼 나도 하나님을 벌게 됩니다. 이것이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바로 빙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면 아래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수면 윗부분의 빙산으로써의 선행은 작은 자를 보게 됨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선행들을 예수님께 베푼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마실 것이 없어서 목마르고, 나그네가 되었거나, 옷이 없어 헐벗었거나, 병들었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가 언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자’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큰 자’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많이 가진 자입니다. 재산, 권력, 명예, 인기, 외모, 건강 등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상을 많이 받든지 집안이 좋든지 스펙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좋아한다면 마음의 공백을 돈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추구할 때에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이 크게 보입니다. 우러러보고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고자 하고 목표로 삼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큰 자들을 보고 있는 동안에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녀가 이제 대학입학시험을 봐야하는 상황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세 가지 보기를 제시하시며 그 중에 하나를 들어주신다고 제안을 하셨다고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입니다. 두 번째는 자녀가 고졸로 머무르기입니다. 세 번째는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하기입니다.
무슨 답을 골라도 손해가 없는 전제라면 많은 분들이 첫 번째 답을 고를 것입니다. 두 번째를 고르는 사람은 그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세 번째도 괜찮게 여겨지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서울대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가치관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는 첫 번째 대답도 두 번째 대답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택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명백한 이득과 손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대답을 골랐든 두 번째 대답을 골랐든 지옥을 선택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 번째를 고를 수 없다면 차라리 문제 풀기를 포기하는 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과연 서울대 입학이 자녀를 위해 옳은 일인가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불행한 인생을 살수도 있고, 고졸로 살지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미래를 알지 못함에도 서울대 입학을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채워짐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로써 자녀의 서울대 입학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려는 시도가 무용지물임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과 한 끼 식사를 하는 대가로 수십억 원을 기부하게 됩니다. 본래 이 행사는 기부에 목적이 있으나 워렌 버핏과의 대화에 특별한 가치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기획은 세워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에서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워렌 버핏이야 말로 평생의 스승이며 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크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우러러보는 마음가짐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가치들이 무용지물처럼 여겨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없는 자들을 지극히 작은 자로 여깁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돈이 없습니다. 외모도 뛰어나지 않습니다. 학력이나 스펙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치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크게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폐지를 줍는 노인과 고급외제차를 타는 재벌회장이 눈앞에 있다면 재벌회장을 우선하는 게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영생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폐지 줍는 노인을 더 귀중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재벌회장을 더 귀중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가치관은 사람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사람의 마음만큼 귀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이 우주가 무한하고 대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 사람의 마음보다 값진 것이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위일체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대상이 바로 한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도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우는 용도로는 무용지물입니다. 재벌이든 총장이든 대통령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큰 자일 수 없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장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유용하게 쓰일 수가 있습니다. 다만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라는 용도에 대해서만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이러한 가치들을 많이 가진 사람이 크게 여겨집니다. 재물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로 취급합니다. 앞서 자녀가 서울대 가는 문제에 대한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밤새 고민해서라도 하나님 뜻대로 살게만 해달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고졸로 살더라도 감사할 것이고 서울대 가더라도 감사하겠지만 서울대는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크다고 여겨지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잘했다고 박수쳐 줄 때에 자녀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더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서울대에 들어간 것을 박수를 받고 칭찬받을 일이라고 착각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교만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과 영벌의 시력검사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작은 자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뉴스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늘 재력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가치관을 마주하는 동안 어느덧 내 자녀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의 시력은 나빠져서 돈 없고 배경 없고 학력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볼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를 재벌회장보다 크게 볼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선행에 대한 강요가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 사람이 작게 보여서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 있는 마음이 있음을 볼 때에 그 사람을 크게 보며 도울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무용지물임을 알기 때문에 대통령을 보든 재벌회장을 보든 크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본문 말씀의 초점이 되는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크게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그 말뜻대로 세상의 가치가 결여된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크게 볼 수 있을 때에 결과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선행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작은 자들을 볼 수 있습니까? 아직도 큰 자들을 우러러보고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시력을 검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여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작은 자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40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민중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민중은 그리스도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돕고 선행을 베풂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에 민중이야말로 그리스도라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궤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뜻으로 스스로를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좋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작은 자를 세상에서 큰 자보다 크게 볼 수 있으리라는 내용입니다. 작은 사람을 크게 볼 수 있는 시력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이 작은 자를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세상의 가치에 대해 죽은 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드려진 마음은 하나님께 이익이 되고 나는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마음은 세상의 가치들에 물들고 찌들게 됩니다. 마음에서 돈을 추구하였다면 돈 번 사람이 크게 보입니다. 스스로 돈을 벌었다면 자신을 제일 크게 보게 되고 돈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발언을 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고위공무원이 있었습니다. 결국 사과했지만 그 사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권력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갖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을 내심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율법사나 혹은 사두개인들 같은 자들이 이러한 부류입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붙잡고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세상가치들을 갖지 못한 국민들을 절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 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과를 하는 쇼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작은 자가 보이지 않는 마음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사회주의나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은 다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채우려는 세상적인 방법의 한 가지일 뿐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구제를 함으로써 보람과 만족을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워서 작은 자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마음의 시력검사는 당장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가치가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보이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40절에서 ‘여기 내 형제 중에’라고 하셨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만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마태복음 5장 46~47절을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비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작게 여겨지는 모든 자를 향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세상에서 크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염려스럽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가치에 그만큼 물들고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번이나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반복될수록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지극히 작은 자들이 점점 더 크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창세 이래 준비되었던 천국의 주인은 여러분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야 할 시력을 늘 스스로 검사하게 해주셔서 세상에서 작은 자를 크게 볼 수 있게 하시고, 세상에서 큰 자들을 작게 보는 마음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십자가 생활화에 매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에 묶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