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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간관계는 섬겨야 제맛이다>의 줄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간관계,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인간관계를 하면 할수록 보람 있고 즐겁고 인생이 살맛나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만나는 상대방에게 종이 되어 그를 섬기면 됩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얻으려하거나 만족과 기쁨을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그리고 보람과 즐거움이 함께 주어지는 섬김의 길을 살펴봅니다.
인간관계는 섬겨야 제맛이다
(마태복음 20:17~28)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간관계는 섬겨야 제맛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간관계는 섬겨야 제 맛이다’
본문 17~19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가 나옵니다. 그리고 20~28절까지는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유명한 말씀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0~21절을 보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이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함께 변화산 사건에도 참여했던 예수님과 특히 가까운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어머니였던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자매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이었고 그 어머니인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인 셈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준비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다른 이유로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유대민족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군중들을 이끄시고 다윗 왕국의 전성기 시절을 회복하시리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모였던 살로메는 직접 찾아와서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실 때에 자신의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간청을 합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우의정이나 좌의정으로 삼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간청에 대해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대업이 시작될 때에 친족관계를 이용해서 한 자리 거머쥐겠다는 물밑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아질지를 두고 내심 경쟁하고 있었는데 친족관계로 선수를 치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 25~27절 말씀을 통해 그들의 오해를 푸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위계질서를 따라 높은 자리를 탐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남을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이야말로 크고 높게 여겨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 길이 바로 섬기는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에 즐겁고 기쁠 수 있는 이유가 이로부터 생겨납니다. 만나는 사람을 섬길 때마다 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종이 되고 섬긴다는 마땅한 명분이 있기에 삶 자체가 보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공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 됨과 섬김은 비단 천국에서만 보응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삶에서 인간관계를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길이 제시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에 마더 테레사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고독감과 괴로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회고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낮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성자처럼 대우를 받지만 혼자 밤에 있을 때에는 외롭고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낸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법이 주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 말씀을 오해할 때에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는 올바른 섬김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테레사 수녀와 같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처럼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로 종처럼 타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고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요? 먼저 우리는 섬김과 복종의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을 맹목적인 복종으로 오해하고는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인간관계는 섬기는 맛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섬김이 정말 머슴 같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세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첫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실 하실 때에 베드로가 만류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만류하는 베드로를 향해 23절에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섬김을 강조하셨습니다.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태도에서는 도무지 섬김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으로 명령하시는 것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는 것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요구를 따르시지 않고 십자가 사건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시면서 섬김을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심지어 제자들뿐만이 아니라 본문 28절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다윗 왕국을 재현시키기를 기대했습니다. 굳건한 나라를 건설하는 임금으로써의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가실 것을 반복하여 예고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목숨을 받고자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라지도 않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겠다고 하시고는 이것을 섬김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광경이 마치 이솝 우화의 여우와 두루미의 한 장면 같습니다.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하고는 접시에 스프를 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부리를 가졌던 두루미는 접시에 있는 스프를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하심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다만 앞서 나타난 25~26절을 보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주관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삶이 달라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의 의미가 이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임의로 주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주인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요구를 단지 들어주기만 하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섬기셨던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란 이 세상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복종한다는 의미의 섬김이나 종 됨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드시고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서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채찍으로 뒤엎으신 일은 표면적으로는 분노이고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서는 이것이 그들에 대한 섬김이었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장사를 하게 해주고 상인들에게서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질책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따르셨던 것입니다.
섬김은 곧 그 사람에게 최고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최고인지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최고의 행동은 바로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멈추기 위해서는 질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코 대제사장과 상인들이 원하는 대로 복종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의 방식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며 삶에서 무조건 인내하고자 합니다. 갑질하는 손님에게 종업원이 참듯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매사에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도 있고 받아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같을지라도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갑질하는 손님에게 찬물을 한 바가지 부어버리는 것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진정한 섬김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타인에 대한 섬김은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오늘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그저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그들을 대면할 때에 섬김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이러한 섬김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하자면 섬김이란 남편이 아내 말에 귀 기울이고 아내가 남편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에 대한 섬김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배우자에 대한 뜻을 받드는 것으로써 나타납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이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은 현세와 내세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천국이나 지옥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천국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시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그를 섬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기에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은 바로 천국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천국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는 곧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는 인간 세상의 어떤 일도 가치 있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의식의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지식과 출신배경을 배설물로 여겼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천국의 좋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천국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류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섬기고자 하신 예수님의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막겠다는 것은 지옥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에 따르셔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베드로에게도 재앙이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지옥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섬김 또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은 현세에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좋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 잘하고, 인기를 얻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천국을 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가 천국을 살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정확하게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한 말씀이 달리 없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백분 활용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때에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서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천국이 가장 좋다는 것은 대명제입니다. 다만 사람들을 만날 때에 천국이 좋다는 말만 반복해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대명제를 기반으로 회사에서 가정에서 상황마다 섬김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해나가야만 합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하루치 일당을 받은 품꾼의 기쁨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이 될 때에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생각을 받아서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한편 온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열심히 일한만큼의 대가를 얻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12시간을 일해서 자신의 몫을 받고도 부당하다 여긴 품꾼과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지옥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의 특징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입니다. 반면 천국의 특징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충족감입니다. 죽어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천국의 특징을 그대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지옥의 특징을 그대로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살지 않으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서 타인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결핍감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빨대를 꽂고 기쁨과 만족을 빨아들이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관자들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아랫사람들도 윗사람을 이용해 기쁨과 만족을 빨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과장이 있습니다. 사장은 과장을 이용해서 회사를 돌리고 때로는 성질도 부리며 기쁨과 만족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과장도 마냥 착취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장은 죽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돈을 버는 이유는 그 돈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이용하는 관계에서 섬김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장이 사장의 명령에 따라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용에는 지침과 곤핍함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따라올 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이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이 갑질 손님의 모욕을 참는 이유는 손님을 섬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갑질 손님을 이용해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게 만들면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지옥의 연장선상입니다.
반대로 천국을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지만 사장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 회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나를 들여보내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장의 명령을 따르고 회사의 내규와 규정을 지킬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함입니다. 사장의 부당한 명령에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진다면 마땅히 거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해고당한다고 해도 억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회사에 대한 뜻이 다했다고 여길 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사는 차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삶에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부족함이 없음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완벽함과 부족함이 없는 삶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충족함이 샘솟듯이 넘쳐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부활이며 승천이고 보좌 우편에 올라가심입니다. 이 길을 따르며 마음을 천국에 머무르게 할 때에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거리가 가깝게 유지될수록 마음은 천국을 느끼며 충족감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시에 온 품꾼의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타인을 대할 때에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 타인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굴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이기고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때에 타인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자 하는 섬김의 삶 또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마음가짐이 되면서 하나님의 뜻의 주파수가 맞고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어떤 일들이 이루어져갈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현세에서 천국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일당을 받은 품꾼의 마음을 유지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루 일당을 벌었다고 여겼지만 끝내는 결핍감을 느끼고야 말았던 12시간 일한 품꾼의 마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여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천국을 사는 마음을 유지할 때에 인간관계는 즐거워집니다. 그 사람을 향한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알고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섬겨야 제 맛입니다. 마음으로는 천국을 살고 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전달하며 살아가는 멋있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생활화로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물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한 가지 일에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현세에서도 천국을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국을 사는 자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최선을 알려주시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섬김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섬기는 종의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