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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에 눈뜨면 다 된 건데>의 줄거리:
직접 지옥을 향해서 눈 뜨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출세에 눈 뜨고, 권력에 눈 뜨고, 명예나 인기에 눈 뜨고, 돈에 눈 뜨고, 이성에 눈 뜨는 등, 이 세상 것들에 눈 뜨면서 현세에서 지옥 살기가 시작됩니다. 출세 권력 명예 인기 돈 이성 등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문제가 단 한 방에 다 해결되는 길이 있습니다. 천국에 눈 뜨기만 하면 됩니다.
천국에 눈뜨면 다 된 건데
(마태복음 20:29~34)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에 눈뜨면 다 된 건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에 눈뜨면 다 된 건데’
우리는 마음의 상태를 보거나 맛보는 등의 감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돈이나 인기의 좋음을 깨달았을 때에 “돈에 눈을 떴다” 혹은 “인기의 맛을 알았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도 이렇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지옥에 눈을 뜨고 지옥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이 세상의 가치들에 눈을 뜨고 맛보기 시작하면서 지옥의 삶은 시작되게 됩니다. 원치 않아도 지옥에 눈 뜨고 지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옥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에 시달리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벌이든 대통령이든 인기연예인이든 결핍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분을 가졌든 어떤 처지에 있든 이 세상 것에 눈뜨고 있는 한 이 결핍감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교정선교라고 합니다. 이 교정선교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전과 7범의 소매치기 죄수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죄수를 전도하시던 중에 질문을 하나 하셨습니다. 소매치기로 한두 번 감옥살이를 했으면 지겨워서라도 그만둘 텐데 계속해서 같은 범죄를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죄수가 대답하기를 소매치기를 그만두고자 손목을 잘라버릴까도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만 둘 수 없었던 이유는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어도 그 사람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지갑이 마음의 눈에 보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지갑의 두께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이니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감춰진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면 소매치기의 자격도 없다는 셈입니다.
이번 설 연휴 때에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수학천재가 나오는 오래된 영화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청소를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위 있는 상을 받으신 수학과 교수님이 방학을 맞이하며 학생들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방학 내내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보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 하루 만에 풀리게 됩니다. 이 청년이 저녁 때 청소를 하다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보고는 즉석으로 해답을 써둔 것입니다. 다음 날 그 문제를 누가 풀었냐는 것으로 온 학교가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청년이 문제를 풀었음이 드러나게 되고 교수 눈에 들어서 재능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환경을 제공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교수님이 10년이 걸려도 풀지 못한 문제를 청년이 하루 만에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너무도 놀라워하는 중에 이 청년은 갑자기 그 종이를 불태워버립니다. 교수님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불을 끄려고 했지만 청년은 교수님이 한심해보였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그 문제의 풀이과정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모차르트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모습과 이어집니다. 모차르트는 골머리를 짜내어 악곡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악상이 눈에 보이듯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이 보여야만 할까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마음에 보이기 시작하면 큰일입니다. 돈, 건강, 권력, 명예, 인기, 이성 등이 보인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감추어진 지갑이 보이는 사람은 소매치기가 됩니다. 한편 천국이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선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맹인이 고침 받는 사건이 바로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열두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다윗 왕국을 재현하는 대업을 시작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대업이 이루어질 때에 임금이 되실 예수님 좌우편에 누가 앉을 것이냐를 두고 갈등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이루어진 뒤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마태는 이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며 안타깝게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이었던 열두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온 천국에 대해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가까이 온 천국에 대해 완전히 맹인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기껏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도 헛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심을 다윗 왕국의 재현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 여겼던 것은 천국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여겨진 제자들조차도 천국에 눈뜨지 못하면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는 두 맹인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건을 떠올리며 이러한 깨달음을 되살려 곱씹고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중심 내용은 단순히 두 맹인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좌우편에 누가 앉을 것이냐를 두고 갈등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이 모습이 바로 맹인과 다름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백 번 천 번 말씀하셨던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이토록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가에 대한 깊은 참회가 담겨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오늘 본문의 사건이 나타납니다만 관점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마가와 누가에는 각각 한 사람의 맹인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관계성에 집중하여 이 사건을 바라본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두 사람이 찾아왔음을 드러내고 바디매오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의 인격성이 아닌 그가 가진 맹인이라는 상태에 집중한 것입니다.
32~33절을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맹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눈을 뜨게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신앙적 측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 마태의 관점에 집중하며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천국을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목적은 죄 사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죄 사함이 필요했던 이유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맛에 눈뜨고 천국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죄 사함을 통해 인격적인 완성을 목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바깥에 있는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 눈뜨게 하시고 맛보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사건의 최종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 건강, 권력, 이성 등과 같은 세상의 가치에 눈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눈을 뜨기 위해서는 세상에 눈길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가치에 눈길을 주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천국에 눈을 뜨면 세상의 문제 또한 모두 해결되게 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천국에 눈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뼈아프게 기억하며 성령의 감동하심 아래에 이 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눈을 뜰 때에 일어나는 일은 바로 현세에서 천국 살기입니다. 천국 살기는 전적으로 천국에 대해 눈뜸으로써 시작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에서 지옥에 눈뜨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 눈 뜰 때에 지옥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돈, 건강, 권력, 이성, 명품 등과 같은 세상에 마음이 눈을 뜨고 그 맛을 알게 되면서 삶은 지옥이 됩니다. 문학과 예술은 남녀 간의 사랑을 마냥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만 천국을 바라볼 수 없다면 실질적으로는 지옥의 삶이 시작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옥의 특징은 영원한 결핍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결핍감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결코 세상에 눈을 떠서는 안 됩니다. 오직 천국에 눈을 떠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있는 한 천국에 대해 눈 뜰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만물을 보게 하는 햇빛이 있는 한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깜깜해 질 때에 비로소 별이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대해 눈을 감을 때에 천국에 대해서 눈 뜨게 됩니다.
세상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맛있어 보여서 더 먹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출세와 명예가 맛있어 보이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눈 뜨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천국에 대해 말하고 들을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백 번 천 번 천국에 대해 들었어도 마음으로 눈뜨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천국에 눈뜬 사람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로 마음의 차원이 있고 두 번째는 육체의 차원이고 세 번째는 타인과 맺는 인간관계의 차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세상에 눈뜬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세상에 대해서 밤으로 만들면 하늘의 별이 보이듯이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마음에서 천국이라는 별을 보도록 밤을 만들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마음의 차원에서 천국을 살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십자가 생활화의 어려움을 토로하십니다. 이때에 자주 발생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내가 나의 죽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해가 생겨나는 이유는 마음이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 건강, 자녀, 배우자, 나라 등과 관련된 문제들을 마음이 바라보는 중에 이것들에 대해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십자가 생활화라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바로 마음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으로는 죽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죽지도 못한 채로 괴로움의 상태가 지속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십자가 생활화가 말하는 세상에 대한 죽음은 눈을 감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 성에서 탈출 할 때에 천사가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남겨두고 온 재산이 아까워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앞에 돈 문제가 벌어졌을 때에 마음이 그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마음으로 돈 문제를 바라보는 대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내가 나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를 바라보던 마음을 돌이켜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곧 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마음이 계속해서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벌어진 문제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누가 관심을 가져줄까?”라고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마음이 천국을 바라볼 수 없게 합니다. 롯의 아내와 같은 마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문제를 바라볼 때에 지옥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눈뜨고 싶다면 십자가 바라보기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모세가 구리 뱀 장대를 들었을 때에 바라보았던 자들만이 불 뱀의 독으로부터 나을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라본다는 선택이 그들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천국에 눈뜨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마음싸개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를 예로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실 때의 마음을 내게도 허락해주세요.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느낌을 내 마음에도 허락해주세요.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느끼신 모든 느낌이 다 내 것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에서 천국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란 삶의 문제를 보려는 마음을 애써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를 바라보던 눈길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삶의 차원에서 천국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으로 문제 바라보기를 등질 때에 몸으로 사는 현장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속성은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최선이고 최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했지만 온전한 하루 일당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삶에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부족함과 결핍감이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써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설령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결핍감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12시간 일한 사람이 자신의 합당한 몫을 받고도 불평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수 없으며 결핍감 또한 결코 해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삶의 문제들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천국을 보고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일당을 받은 품꾼이 기쁘고 감사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19장 20절에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시간을 일하고도 12배를 받는 은총의 삶, 12배 축복의 삶, 12배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타인과 맺는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천국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서 천국에 눈뜨게 되면 예수님이 느끼는 천국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는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타인을 만날 때에는 타인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눈뜨게 되면 내 마음의 기쁨과 삶의 만족을 위해서는 더 이상 필요로 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럴 때에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 33~34절을 보면 맹인들이 눈 뜨기를 간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마음의 눈 뜨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계시록 3장 17절에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향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코트 안에 숨겨진 지갑을 볼 수 없다면 소매치기로써 죽은 것입니다. 악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죽은 음악가입니다. 수학 문제에 대한 풀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수학자로써 죽은 것입니다. 신앙인이 천국을 볼 수 없다면 죽은 신앙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천국을 볼 수 없는 신앙인입니다.
천국만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방면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것을 느끼며 은총과 축복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타인을 대할 때에 그 사람이 천국을 보지 못함을 느꼈다면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설령 대통령이나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눈뜨지 못하고 있다면 불쌍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대통령이라도 재벌이라도 결핍감이 해결되지 않는 지옥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지만 충족감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로인해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중보의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 내가 만나는 이 사람이 천국에 눈뜨지 못하고 있으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이거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눈뜨지 못한 사람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주파수 맞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파수가 맞을 때에 진정한 의미의 섬김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표현 할 때에 인간관계에서도 천국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대해서든 이웃을 대해서든 가장 불쌍한 일이 있다면 천국에 눈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천국에 눈떠서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십자가에서 세상에 눈 뜬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세상에 등 돌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천국을 세 가지 차원에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서 천국에 눈뜨고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할 때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긍휼히 여기고 섬김으로써 인간관계 역시 천국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눈뜨면 다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나 자신부터 세 가지 차원의 천국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서도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하게 하시며 모든 인간관계에서 섬기는 동안에 그들 또한 천국에 눈뜨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