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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대량실업시대 십자가생활화>의 줄거리:
'대량실업'을 넘어 '완전실업'이라는 말이 슬금슬금 고개를 듭니다. 학자들은 2030년을 전후로 하여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한 대량실업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합니다. 거의 모든 전문직과 근로직이 로봇에게로 넘어가고 나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이 어려운 질문에도 왜 십자가생활화가 답인지 알아봅니다.
대량실업시대 십자가생활화
(마태복음 21장 18절~22절)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대량실업시대 십자가생활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대량실업시대 십자가생활화’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잎만 무성하여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죽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번역상의 어감의 차이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보자면 ‘이상히 여겨’는 의문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몹시 놀라고 경탄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찌하여’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셨기에‘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1~22절에 나타납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겨우 무화과나무가 마르게 된 것에 놀라거나 감탄하지 마라.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다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이나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이나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일이나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이런 일들을 기적이라며 놀라워하는 제자들의 태도야말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는 바로 기도의 진짜 의미를 아느냐 모르냐에 있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며 성전을 “기도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곧 선민들이 성전방식의 기도를 위한 장치였습니다. 성전방식의 기도란 마음의 구조가 성전의 구조와 일치함을 알고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음에서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와 휘장으로 구분된 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돌판이 담긴 법궤가 있었고, 속죄소라 불리는 덮개로 덮여있었습니다. 성소에는 향을 피워 올리는 분향단이 있었고 분향단에서 바라볼 때에 왼쪽에는 떡상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 바깥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이 시설들이 갖는 의미를 따라 기도할 때에 기도는 온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번제단으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이름이 들어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한 죄의 상태를 번제단에서 죽일 때에 물두멍이 의미하는 대로 마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도록 깨끗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도 상통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방식의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밀착되는 것이 22절의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에 부합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뜻과 생각과 감정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선민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선민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된 열매가 맺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삼으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선민들에게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열매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자 선민들에게서 성전방식의 기도는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밀착 또한 이루어질 수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 또한 열매 맺을 수 없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곧 성전방식의 기도가 멈춤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의 열매가 없는 선민들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성전방식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과 밀착되면 모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열매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화과나무가 마르거나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각하신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도 그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뿐이니 놀라고 감탄할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선민들의 상태를 지적하시고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의도가 있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민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성전방식의 기도이고 이는 곧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때에 삶에서는 무화과나무가 말라죽는 것 이상의 기적들 또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기적들은 내 바람이나 소원 혹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고 구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연결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기적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뜻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던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대량실업시대를 언급했습니다. 요새 세간의 화제는 4차 산업혁명입니다. 긍정적인 전망도 있는 가운데 대량실업시대가 오리라는 부정적 예측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전방식의 기도 즉 십자가 생활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 또한 성전기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이라고 합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바둑을 둔 이후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도입되고 있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2030년을 전후로 인공지능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 영향중의 하나가 대량실업입니다. 고작 10년 안에 많은 직업들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될 것이고 드디어 대량실업을 넘어서 완전실업이 이루어 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실업이 기존의 실업과 다른 점은 부양능력에 있습니다. 옛날에 귀족들에게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제 인공지능이 노예의 역할을 하며 사람을 귀족처럼 부양하게 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혜택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소수의 상위층만이 혜택을 받고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일자리만 잃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벌써 로봇이 3분 내에 수제커피를 만들어주는 카페가 생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인공지능 로봇이 설법을 해주는 사찰도 생겼습니다. 2019년 2월에 로봇이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25분 동안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로봇이 셰프가 되어서 40여개의 메뉴를 만드는 식당이 문을 연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공지능은 생활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변호사를 대체하여 판례를 분석해서 법률 상담을 해주는 시스템이 시험되고 있습니다. 이 인공지능의 적중률이 실제 변호사를 앞섰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고급직종으로 여겨지던 변호사, 판사, 의사 등의 직업까지도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대량실업이 예측된다고 해서 인공지능 발전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를 두고 마부가 마차를 잃지 않기 위해 자동자 개발을 방해할 수 없다는 비유를 들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자리가 10년 안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일자리라면 일시적인 효과밖에는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량실업에 대비하는 합당한 조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다면 대량실업이든 완전실업이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을 놀랍게 여겼으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일들이 누구에게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전방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는 어떠한 전문적 지식이나 자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전방식으로 기도를 일상화하는 십자가 생활화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의 직업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마음이 간격 없는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직업의식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합니다. 직업의식을 우선시한다면 대량실업시대는 엄청난 위기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보고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는 사람들은 대량실업도 두려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가족이나 삶의 문제들보다도 하나님을 최우선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성전방식의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밀착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시키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는 것이 직업입니다.
우리가 지금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직장을 다니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직업은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밀착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이켜보자면 우리는 인생을 잘못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이나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왔습니다. 사회적 조직 안에서 역할을 맡고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돈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실 대상입니다. 결코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성인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사람이 해야 될 기본적인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꼭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고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어야 비로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라면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대로 명하면 무화과나무는 마를 것입니다. 감람산에게 명해서 지중해에 빠지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명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학에 들어갈 만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해서 공무원을 하라고 하신다면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써 할 일은 무엇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대로 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은 성전방식의 기도,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면서 하나님과 밀착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이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 번제단에서 그러한 나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대표적 인물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이 되고자 노력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밀착해 있는 동안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다윗의 증조할머니였던 룻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써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스라엘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삶은 형통치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빈민들이 하는 대로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이나 주울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중 보아스의 눈에 띄어 다윗 가문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을 따르던 중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계십니까? 실업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이 있어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직업이 없어도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느 직장에 가기를 바라셔서 응모할 마음을 주신다면 그대로 행하면 합격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대량실업시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평생의 사명입니다. 이 직업과 사명에 목숨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밀착상태를 유지하는 이 한 가지 일을 애쓸 때에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감정이 말과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성전방식의 기도 즉 십자가 생활화를 통한 하나님과의 밀착입니다. 이 밀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배우자도 자녀도 대면해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서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를 대하기 전에,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밀착상태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밀착상태에서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동안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직장 일도 할 수 있고 장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시면 판검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대통령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십자가 생활화,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대량실업이든 완전실업이든 걱정하지 않는 삶은 시작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성전방식 기도의 의미를 온전히 충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하나님과 밀착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뜻과 생각과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열매 맺으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