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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실제 삶인가 만화인가_태승철 (마태복음 21:33~4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07|조회수9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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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제 삶인가 만화인가?>의 줄거리:

현실 속 한 여성이 인기 웹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만화 속 주인공과 벌이는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영화를 관람하던 소년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 형사의 파트너로 활약하게 되는 내용을 다룬 영화도 있습니다. 현대판 호접지몽이지요.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삶이 실제로는 만화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실제 삶인가, 만화인가?

(마태복음 21:33~46)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실제 삶인가 만화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실제 삶인가 만화인가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더블유(W)”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었습니다. 현실 세계의 여의사가 인기절정인 웹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만화 속 내용이 현실이 되어서 여의사는 만화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할리우드 영화중에 마지막 액션 히어로(Last Action Hero)”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마법의 티켓을 써서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다 알고 있던 소년은 동경하던 슬레이터 형사의 동료가 되어 사건을 해결해나갑니다. 그러던 중 악당이 소년이 바깥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법 티켓을 빼앗아 현실 세계로 달아납니다. 결국 슬레이터 형사는 소년과 함께 현실 세계로 나와 범인을 쫓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영화 속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속의 내용만은 아닙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다면 실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영화나 만화 같은 허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지라도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황을 느끼고 결단과 의지를 갖는 것이 바로 주인 됨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입니다. 피조의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젖혀둔 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주인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모습이 마치 코스프레 같습니다. 코스프레는 복장놀이(costume play)의 일본식 줄임말로 영화나 만화의 주인공처럼 차려입고 즐기는 역할극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조의 세계 속에서 주인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갑니다.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삶을 연기하며 사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삶이 너무 힘들어서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이 삶이 나의 것이라는 주인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조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피조물 중에서는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화가가 작품을 그릴 때에 작중인물에게 몰입하듯이 삶을 살아가는 중에 주인으로써의 역할에 몰입하게 된 것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 마지막 액션 히어로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슬레이터 형사는 영화 밖으로 뛰어나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영화 속 인물이라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영화 속 세상이야 말로 실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실제로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이러한 삶의 허구성을 잘 드러내줍니다. 장자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꿈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꿈이 현실인지 깨어난 현실이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모른다면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며 꿈과 현실을 혼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멀리 타국으로 떠나기 위해 밭을 잘 정비하여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열매 거둘 때가 되어서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주인을 배신하고 찾아온 종들을 죽였습니다.

이 비유의 중심 소재는 주인의 소유권입니다. 38절을 보면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라 하였습니다. 악한 농부들이 탐했던 것은 포도원의 열매가 아니라 포도원 자체의 소유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42절 이후를 보면 내용이 전환되어 열매가 주요 소재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성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투는 곳은 바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이 비유는 비단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선민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화를 읽을 때에는 감정을 이입하여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지만 다 보고 난 후에는 현실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 삶에 대한 주인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실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내 주인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 삶으로 돌이킬 수 없다면 그 결과는 죽임당한 농부들과 같고 44절의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근처 바닷가에 나가보면 소나무 숲이 있습니다. 소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늘 같은 잎사귀로부터 시작해서 가지와 뿌리까지 하나님의 주인 됨을 받아들이지 않은 부분이 한 곳도 없습니다. 파도가 칠 때에 물방울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먼저 문제가 생겼다는 판단이 생기고 그로부터 근심걱정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고 의지를 통해 결단합니다. 이러한 행동과정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만 하나님의 주인 되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앙적으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주인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일종의 코스프레입니다. 이제 삶은 만화와 같은 가상의 현실에 돌입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슬퍼할 일이 아닌데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려니 걱정근심에 휩싸여 슬퍼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대단한 문제가 아닌데도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려니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져 고민하게 됩니다. 만화가가 과장된 기법을 통해 감정을 극대화하여 전달하듯이 주인 행세를 하는 동안에 과장된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결코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가상이 아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삶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의지가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의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대신 나의 계획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생각대신 나의 생각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디자인하신 삶이 아닌 내가 디자인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주인 된 삶은 실제가 될 수 없습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이 피조의 세계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없던 일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이라는 종이 위에 스스로 만화를 그려가고자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합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상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계획과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실제 삶입니다.

주인 코스프레는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계획하고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간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은 만화를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 미래의 비전은 만화의 줄거리인 셈입니다. 만화 속 이야기를 현실로 여기는 동안에는 진짜 현실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주인 코스프레의 대가는 진멸당한 악한 농부와 같을 것이며 돌이 깨지고 가루가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진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 4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22~2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편 118편은 다윗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추종자들에 의해 쫓겨 광야를 헤매다가 심지어 이방나라 블레셋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중심이 된 인간사회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축자가 버린 돌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세상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처지 또한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바로 세상에서 버려진 돌이 되신 사건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를 정점으로 하는 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을 버린 돌로 여겼습니다. 유대 땅에 예수님의 설 자리는 없었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십니다.

그러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삶에 대한 주인 코스프레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 때문에 마음에 슬픔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은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의 내용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슬픔은 스스로 지어낸 만화의 스토리와 같습니다. 자녀가 세상의 기준으로 형통치 못한 것이 정말로 슬퍼할 일인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생각 속에 들어있지 않은 일들은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만화나 영화나 게임을 실감나게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주인이 된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삶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결심하는 나의 모습은 주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 코스프레를 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진짜 삶은 세워집니다. 내 생각이 죽은 자리에 하나님의 생각이 임하고, 나의 감정이 죽은 자리에 하나님의 감정이 임하며, 나의 의지가 죽은 자리에 하나님의 의지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상이 아닌 실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바깥에서 일어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삶은 나의 소유권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인격적 주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나의 삶은 이미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할 때에 비로소 삶은 실제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만화의 줄거리 같은 삶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슬레이터 형사는 영화 바깥으로 뛰쳐나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화 바깥으로 뛰어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삶의 소유권을 쥐고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영화나 게임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실감나도 영화나 게임은 스위치가 꺼지면 사라질 세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무너지고 깨지고 가루가 되는 심판의 자리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 코스프레를 한 악한 농부들과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 때문에 근심걱정하고 있다면 만화 속 스토리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신 현재 상황에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암에 걸렸더라도 그 또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면 만화 속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실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암이 걸린 몸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주어진 일이라면 그 속에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의 속성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누군가 죽게 되었을지라도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죽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인 척하고 삶에서 뜻하고 계획하고 느끼고자 한다면 실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생은 끝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만화나 영화나 게임 속의 주인공을 연기하시겠습니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주인 코스프레를 하게 만드는 원죄의 체질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셔서 그 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생애를 건축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주인 코스프레를 하게 하는 원죄의 체질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인 되셔서 보시기에 좋도록 건축해 가실 나의 생애를 기대하며 살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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