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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내 신분은 하나님의 페르소나_태승철 (마태복음 22:34~4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13|조회수8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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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신분은 하나님의 페르소나>의 줄거리:

페르소나(persona)는 헬라어 어원을 가진 라틴어로서 '가면'이라는 뜻입니다. 배우들이 역할을 위해 가면을 쓰는 가면극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자아의 대 사회적인 신분의식이나 역할의식을 일컫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분이 하나님의 페르소나가 될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신분은 하나님의 페르소나

(마태복음 22:34~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신분은 하나님의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신분은 하나님의 페르소나

페르소나(persona)는 헬라어에 어원을 둔 라틴어로서 가면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person은 바로 페르소나와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은 역할에 따라 가면을 썼습니다. 황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황제의 가면을 쓰고, 검투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검투사의 가면을 씁니다.

한편 페르소나가 심리학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 사회적인 자아의식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 설 때에는 대통령으로써의 페르소나를 쓰고, 아내 앞에서는 남편으로써의 페르소나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식을 페르소나 즉 가면이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이 신분의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내재된 무의식이나 잠재의식과는 별개로 사회적인 관계에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이 페르소나가 영화계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감독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배우를 페르소나라고 부릅니다. 배우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는 감독인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의 작품에 다수 출연한 감독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아이리시맨(Irishman)에서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을 떠도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로써 미국의 중앙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채 권력과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모습을 잘 연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물상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면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또 홍콩의 오우삼(吳宇森) 감독 같은 경우는 의리를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협객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역할을 주윤발(周潤發)이 맡음으로써 감독의 페르소나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쓸면서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페르소나가 등장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의식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페르소나가 바로 송강호 씨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의식이 송강호라는 배우를 가면으로 쓰고 영화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신앙적으로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긴밀한 관계성이 잘 드러납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의도를 고려해보자면 단순히 큰 계명이 몇 개나 되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계명을 말씀해주십니다.

첫 번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였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다만 39절을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말씀하신 계명 또한 첫째 계명과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순서상의 차이는 있지만 무게상의 차이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늘 하나님을 우선시하시는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계명이 지켜질 때에 둘째 계명도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가지 상황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관점과 하늘에서 땅을 향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땅에서 하늘을 향할 때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땅을 향할 때에 나타나는 것은 이웃사랑입니다. 한 가지 사랑을 하지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의도에서 질문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 질문은 신앙적으로 매우 유익한 요소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는 달리 수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의 유대사회에서는 율법의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613개로 나누어진 세세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613개는 십계명의 히브리어 글자 수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내용이고 나머지는 하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율이 너무도 세세하다보니 오히려 삶에 적용을 시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율법의 정신을 규합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랍비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37~40절에서 두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먼저 3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분의식을 언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은 죽었으나 그것은 세상에 대한 신분의식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라의 남편으로써 죽은 것이고, 이삭의 아버지로써 죽은 것이고, 롯의 삼촌으로써 죽은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인격적 알맹이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인격적 알맹이란 곧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크기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숨은 호흡을 하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은 호흡을 하듯이 매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 때문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뜻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해력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과 상통하는 의미입니다. 생각의 능력을 다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삶의 이유가 되셔야 하며,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생각의 이유가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대체 어떻게 하나님만을 바라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둘째 문제이고 할 수나 있느냐가 우선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을 통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말씀에서 32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죽을 자에 대해서 앞당겨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신분의식에 대한 죽음입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내의 남편이라는 신분에 대해 죽습니다. 또한 자녀의 아버지라는 신분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는 신분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녀로써도 죽고, 형제들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친구나 동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신분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영원히 살아있게 될 인격적 알맹이로써의 마음이 하늘로 빠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세상의 신분의식에 대해 죽고 부활함으로써만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남편으로써의 모습, 자녀의 아버지로써의 모습, 직장인으로써의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적 신분의식에서 생겨난 가면입니다.

이렇게 가면을 쓴 상태 즉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셈입니다. 죽을 자의 신분을 영원히 살아있는 나의 인격과 동일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분의식을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십자가에서 사회적 신분의식에 대해 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인격의 알맹이만 남게 됩니다. 또한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도 참여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시작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부모로써 가정을 책임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로써 배우자의 역할을 위함도 아닙니다. 자녀로써 부모를 위해 살기 위함도 아닙니다. 회사의 직원으로 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 모든 사회적 신분의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함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땅에서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않으니 목숨을 다하는 것이며, 하늘을 생각하며 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니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 될 사람이라고 믿는 것과, 이 세상에서 부여된 신분과 역할이 죽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나타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첫째 계명과 동일하게 중요한 계명으로써의 이웃사랑입니다.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도 여전히 육신은 살아있습니다. 배우자의 남편과 아내라는 신분은 존재하며, 자녀의 부모라는 신분이 존재하며, 직장에서 일하는 사원으로써의 신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분의식이 죽은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의식이 영화 속에서 배우 송강호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듯이,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의식이 배우 로버트 드로니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듯이, 감독 오우삼의 의식이 배우 주윤발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의 가면을 쓰실 것입니다. 나 자신의 가면을 쓰신 하나님이 배우자를 대하실 것이고 자녀를 대하실 것이며 회사에서 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감독들의 뜻이 배우들을 통해 영화의 장면들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 표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사회적 신분은 죽을 육체에 비롯된 일시적인 가면과 같습니다. 이 일시적인 가면을 나 자신으로 알고 사는 동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도 영원성을 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면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인격의 알맹이 즉 마음만이 남게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첫째 계명으로써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첫째 계명과 동일하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지켜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받아들이시고 나의 신분을 가면으로 쓰시고 활동해나가시게 됩니다.

두 계명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향해서 바라볼 때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늘에서 땅을 바라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가면으로 쓰시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 두 계명은 38~39절에서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대로 동일한 중요성을 가진 하나의 계명과도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분과 역할을 가면으로 쓰시고 활동하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사랑의 대상으로써 이웃과 자신이 등장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신분의식에 대해 죽었다면 사랑할 수도 없으며 사랑할 이유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곧 나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길이며, 가장 적절하게 사랑하는 길이며 반드시 사랑하는 길입니다. 또한 이웃을 최고로 사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꿈과 비전을 이루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자신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였다면 나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 나 자신을 사랑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써 자녀를 잘 키워서 보람을 느끼는 것을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기 위함입니다. 자녀에게서 느끼는 보람과 하나님 중에 어느 편이 마음을 더 채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왜 최고의 자기 사랑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 아닌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에는 자녀를 통해 마음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자녀를 이용하고자 했을 뿐이고 나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모라는 신분의식에 대해서 죽을 때에 더는 자녀에게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자녀에게 드러내게 됩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의 논리는 세상의 기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웃도 대통령이 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 명 뿐이기에 나와 이웃이 함께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모든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 여기고, 모든 이웃에게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면으로 쓰시고 이웃들을 만나실 것이고, 나의 이웃들도 하나님의 가면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볼 때에 배우 송강호 씨의 가면을 통해 봉준호 감독의 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들은 나라는 가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내 인격의 알맹이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갖게 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라는 가면을 통해 이웃들을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최고의 이웃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에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인격의 알맹이 즉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땅에 남아있는 몸에 기대되는 신분과 역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가면으로 쓰시고 활동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이웃들은 내가 하나님을 만났듯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가능케 하는 십자가 생활화 이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임을 기억하므로 이 세 가지 사랑을 한 번에 이루는 십자가 생활화를 언제 어디서나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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