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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꿈꾸어야 구원받는다_태승철 (마태복음 22:41~4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14|조회수6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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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꿈꾸어야 구원받는다>의 줄거리: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꿈꾸지 않으면 이 믿음이 성립될 수 없게 됩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있듯이 코리안 드림이 있듯이, 참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더 월드 드림'이 있습니다. 이 더 월드 드림이 없이 예수님 믿음은 다 헛것이 되거나 오해로 끝나고 맙니다. 구원을 위한 꿈이 무엇일까요?


꿈꾸어야 구원받는다

(마태복음 22:41~46)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꿈꾸어야 구원받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꿈꾸어야 구원받는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꿈꾸지 않으면 믿음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이란 단순한 바람이나 소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아메리칸 드림이 유행이었고 요즘은 코리안 드림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경제적 성공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한편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꿈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꿈꿀 수 없다면 믿음은 성립될 수 없고 구원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을 예수님을 꿈꾸어야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코리안 드림과 같이 구원을 이루는 꿈꾸기에 이름을 붙이자면 월드 드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이민자들이 가질 수 있는 꿈입니다. 코리안 드림은 한국에 이민 온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꿈입니다. 월드 드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꿈입니다. 하늘의 천사는 이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수성가하겠다는 바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월드 드림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난 월드 드림은 마치 성전방식의 삶과 닮았습니다.

성전의 성소에는 분향단을 중심으로 왼쪽에 떡상과 오른 쪽에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떡상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을 통한 배부름이었습니다. 선민은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월드 드림은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만족함으로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를 꿈꾸는 것입니다. 한편 금촛대는 하나님을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보는 마음의 밝음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월드 드림은 세상에 살면서도 육체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볼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월드 드림을 꿈꾸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바람을 갖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또 어떤 대상보다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세상에 살면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꿈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시며, 이 꿈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배우자나 자녀보다도 하나님을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7절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도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지금까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에게 받았던 질문에서 느끼셨던 바를 종합하여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부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통렬하고도 맹렬한 저주가 내려지게 됩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전환점이 바로 이 질문이기에 이 내용은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이루어진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믿느냐 마느냐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잘못된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며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3절을 보면 세례요한조차도 감옥에 갇혔을 때에 시험에 들어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애초에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셔야 하는지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던 바리새인들은 더욱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졌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전제가 시작부터 틀렸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책임질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담겨진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말을 꺼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본문 44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곧 시편 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향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타나고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로 칭하였습니다. 자신의 자손을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관용적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기에 예수님은 이를 지적하십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구세주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를 모른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혹은 다윗의 자손이시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바리새인들의 상태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구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가져오신 구원은 마음이 세상 즉 시간과 공간 밖으로 나가야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육체를 떠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디까지나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수족관 같습니다. 수족관에는 각종 물고기와 해양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수족관의 생물들은 결코 바깥세상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에서 볼 때에 이 세상은 물 대신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차있는 수족관입니다. 지난 시간에 육체에서 비롯된 사회적 신분의식은 일시적인 가면과 같고 인격적 알맹이인 마음은 영원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음을 육체라는 수족관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입니다.

43절을 보면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수족관 안에서 육체를 입고 살 때에는 바깥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통해 수족관 바깥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1000년 뒤에 자신의 족보에서 육체를 입고 수족관 안으로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자손으로 여길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수족관 바깥은 천국입니다. 마음이 몸이라는 수족관을 벗어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알았던 영적인 사실관계에 대해 정작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였고,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구원이 주어질 수도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2절을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죽은 자는 사회적 신분의식이었습니다.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의 남편으로써의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로써의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사라의 남편으로써 이삭의 아버지로써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사회적 신분의식에 대해서 죽을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인격적 알맹이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만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4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인격적 알맹이 즉 마음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아브라함이 4000년을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죽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4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여겨지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어서는 단 1초도 지나지 않은 셈입니다. 우리 마음도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연상케 하는 광경입니다만 이것은 영적인 사실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이 세상의 시공간의 개념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늙어갑니다. 머리도 하얗게 되고 피부도 주름져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까지 늙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육신이 죽어서 사라진 4000년 전의 아브라함이나 2000년 전의 사도들이나 이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효과가 이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로 우리의 인격적 알맹이를 끌고 가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영역인 세상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몸이 죽지 않는 부활로써의 구원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시려고 했던 구원이 몸을 떠나 얻게 되는 영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육체의 신분을 영원한 것으로 보존하고자 할 정도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깊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애초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보다도 더 악하게 여겨졌던 이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로 접하는 일시적인 세상에 영원이라는 속성이 임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몸이 죽은 다음에 부활하게 되면 인격적 알맹이가 영화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다시 육체로 부활할 것을 원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 때문에 부활의 교리를 믿고 있었어도 이 세상에서 죽을 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특권을 가진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이 특권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기에 육체의 죽음이 누구보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부활의 교리를 만들어서 믿었던 것입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특히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 장에 이어지게 됩니다.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한 바리새인들이 선민들을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의 진리를 독점하고자 했던 모습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일까요? 덕분에 인간의 과제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는 것이 되어야만 했고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습니다. 마치 병 주시고 약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결코 병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았던 사람들은 미국을 자수성가를 추구해 볼만한 기회의 땅으로 여겼던 것과 같습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을 사랑해볼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천국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며 베드로처럼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은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에 사로잡힐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제공된 기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세상에는 마음을 빼앗아갈 대상이 참으로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에 기뻐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대상들은 육체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해서 접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느끼고자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꿈이 있다면 하나님 사랑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어야할 월드 드림입니다. 세상의 어떤 대상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갖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꿈입니다. 이 꿈을 꾸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따라야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 꿈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백날 소리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작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체의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시간과 공간 바깥의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로 배부르기를 꿈꿀 수 없다면 예수님을 따라갈 이유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고 그 능력만을 이용하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만족해졌으면 좋겠다!”는 꿈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대상보다도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보고 싶다!”는 꿈이 있기에 예수님을 믿을 필요성도 생겨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졌던 모든 꿈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인 이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고자 했고 그리스도도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를 입고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우리의 인격적 알맹이 즉 마음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울타리를 빠져나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갖고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때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보다도 더 먼저 보이고 더 크게 보이는 마음이 되기를 꿈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꿈을 꾸는 구원 받은 자들의 삶을 통해서 이웃사랑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월드 드림은 세상에 태어난 자만이 꿈꿀 수 있는 것임을 알았으니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기어코 몸이 죽기 전에 이 꿈을 이루어서 구원의 충만한 맛을 느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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