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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S)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_태승철 (마태복음 23:13~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17|조회수5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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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의 줄거리:

온전치는 못해도 아무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래도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존재와 천사와 부활 등을 믿고 누구보다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사람들인데, 천국 문을 닫기까지야 하겠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더 나가서 사람들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까지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좀 공감이 가십니까?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

(마태복음 23:13~15)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일곱 가지 저주가 나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저주와 두 번째 저주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천국문을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전도한 사람을 자신들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저를 포함하여 기존의 기독교가 보여 왔던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이 마치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예배당 조직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함께 살기 위한 길을 말씀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국문 닫고 지옥문 열기라는 제목은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셨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은 신앙생활을 고수한다면 천국문은 닫힐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천국문이 닫히다니 끔찍한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가지 저주를 내리십니다. 이 저주의 이유에는 위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선이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하고 잔치나 모임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종교지도자로써 돈이나 인기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신앙을 가진 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가르치는 일을 독점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며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받은 일곱 가지 저주는 위선의 일곱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문제가 무척 중요합니다. 바로 천국문을 닫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참 특이합니다. 우리 생각에 천국의 문을 열거나 닫는 것은 천국의 역할이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리아래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 천국문이 어디에 있기에 땅에 사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천국문을 닫을 수 있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일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다르게 천국과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고 가르치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적어도 우리만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믿는 자들이 천국문을 닫았다고 하니 참 의아한 내용입니다. 심지어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전도한 사람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들 또한 전도활동을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문 15절에 나타난 교인이란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방인으로써 유대교로 전향한 개종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전도하여 유대교로 개종시켰지만 그 결과 이들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애초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 죽었으면 단지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도를 받아 유대교를 믿게 된 자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위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두 배나 더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마태복음 213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이보다 더 격정적인 감정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천국과 부활과 천사를 믿었습니다. 율법을 생활 속에서 지키고자 613가지의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으니 그 의지는 인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애초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 죽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 더 가까운 것 아닐까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던 자들이 천국문을 닫고 전도한 자들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을 향한 저주가 아닙니다. 이 저주는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 자신이 이들과 같지 않은가에 대해 고민해봐야만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듯이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냥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악했다는 사실로만 알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지고 오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천국은 기본적으로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부여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고 조건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이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이 우리를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을 가기 위한 첫 번째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기 위한 필수조건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도 믿는 것입니다. 당장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곧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십니까? 그러면 참 잘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에게 마음을 향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천국을 향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향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에 무슨 예비가 필요했다는 것일까요?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했던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천국을 가까이 가져오신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필요한 분이셨습니다.

그저 예수만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위선에 빠질 위험성이 커집니다. 마음으로는 돈을 사랑하면서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태의 문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본 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인기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스타처럼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예수님을 믿으니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의 함정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위선적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예배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국문을 닫는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들의 마음을 끌고 하늘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 천국문은 눈앞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안달하는 마음에 대해 예수님은 길이 되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천국문에서 이어지는 길을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돈과 인기와 명예를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속한 기독교계에서도 얼마든지 드러납니다. 교단총회를 할 때마다 회장직을 놓고 목사님들이 다툼을 벌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대한민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현실이 크다보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안 믿을 수는 없으니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총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에 나가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당 밖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로부터 보좌우편까지 이르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초에 예배당 조직이나 총회조직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구애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조직들은 실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조직에 목숨을 겁니다. 예배당에 안 나가면 큰일이 나는 줄로만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에 빠지게 된 이유는 목회자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똑같은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를 가르쳐준 적이 없고 예배당 좋아하기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좋아하기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좋아하기가 이루어지는 곳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가 사는 땅은 안정된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났다는 것은 안정된 삶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인 장면에서 비겁한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에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떠날 때에 이미 사라를 마음에서 내놓았던 것입니다. 사라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몇 차례에 걸쳐 상속자에 대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독하게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약속하시는데 감히 몸종 엘리에셀이 상속자라 하고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잘 살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어여삐 여기십니다. 그 마음에서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태어나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따릅니다.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끝내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좋아하기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좋음을 비교해가면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하나님 좋아하기의 커트라인입니다.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을 때에 천국에 합격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몸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내게 주신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할 수 있을 때에 천국문은 열리게 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천국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들과 관계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우자를 주신 것은 남편과 아내를 마냥 사랑하며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보다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연금을 받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그 돈으로 노후를 잘 살아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연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보라는 것입니다. 연금이 없는 분이라면 다른 가치들이 하나님 사랑의 커트라인으로 제공되고 시험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지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몸 하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커트라인이 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몸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건강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좋아하기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떡상과 금촛대가 신앙의 기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동안 노력하여 은행에 저축한 돈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저금은 말 그대로 피와 땀의 결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돈이 천국문을 열 것이냐 닫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천국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 저금보다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떡상과 금촛대의 기준을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떡상은 배부름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으로 마음이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금이 다 없어지더라도 마음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21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천국문이 열리기 위해서는 자녀의 형통과는 상관없이 마음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하게 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 자녀와 관계하시게 되고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일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녀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고 묵인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돈을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묵인한다면 설령 613가지의 규정을 모두 지킬지라도 위선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본 적이 없고 하나님을 좋아하려고 하지도 않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천국문을 닫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서 천국을 향하지 않는데 천국문이 열릴 수는 없습니다. 천국을 가까이 가져오신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예배당 조직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613가지의 규정을 정하듯이 예배당 조직을 위한 충성과 봉사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그 목적이 예배당 조직을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들이 이방인을 전도하여 개종시키면서까지 바랬던 것은 랍비로써 선생으로써 존경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목사님들이 목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를 추종하고 설교말씀에 열광하기를 기대합니다. 이 의식에서 자유로운 목사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목사로써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분명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못 박지 못한다면 죄악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날마다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이야기를 날마다 전하고 날마다 듣는 이유는 우리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일에 날마다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만하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이러한 가르침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성과를 내고 승진에 목숨을 겁니다. 사장님과 임원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더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떡상과 금촛대의 기준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승진 한 번 못하더라도 고속승진을 하는 동료보다 기쁠 수 있게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하나님 좋아하기를 해나가는 직장인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당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으며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승진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면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일이 은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면서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감사한 적은 있었지, 하나님이 좋아서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상태에서는 천국문은 닫힐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좋아해서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데 천국문이 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조직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묵인하고 가르쳐왔습니다. 저 또한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던 바리새인이었고 서기관이었습니다. 배워온 대로 가르쳤고 천국은 죽은 다음에야 가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15절에서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결핍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몸이 살아 있어야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몸이 죽으면 마음을 채우던 모든 가치들을 상실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음에 채울 것이 없다는 것은 마치 우주복 하나에 의지한 채 공허한 우주 속을 떠돌아다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은 거짓된 희망에 차있는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간다면 이 거짓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없음을 깨닫고 영원한 결핍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음부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여 형제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돌아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결코 가질 수 없음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채울 대상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결핍과 절망과 고독 속에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애초에 하나님을 몰랐으니 후회할 수도 없습니다.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늘 하나님을 말하고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잘 알면서도 정작 마음으로는 한 번도 하나님을 좋아해본 일이 없으니 통탄할 수밖에 없고 후회 때문에 두 배나 더 지옥의 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전도 받아 그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조직에서는 오직 확장을 목표로 전도를 강조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을 좋아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한 전도를 하는 예배당 조직을 찾기란 요원합니다.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천국문이 열려서 하나님이 배우자와 상대하셔야 함을 가르치는 예배당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예배당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돈과 건강과 장수와 자녀의 형통을 좋아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뿐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말씀 듣고 희생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십일조하면 세상의 가치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서는 구원 또한 요원하며 지옥에 가서도 억울함과 후회만이 배는 더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돈과 인기와 건강과 장수를 하나님보다 좋아했습니다. 이제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원죄의 체질이 있기에 자꾸만 시선이 세상의 가치들을 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젖혀두고 듣고도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분들께는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놓으라고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좋아하는 돈을 더 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장수하고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 가치들을 얻으며 형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빌게이츠나 마윈이 십자가 생활화를 해서 부자 된 것 아닙니다. 세상 것을 선택하시려거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놔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가르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해서도 용서하시고 창녀도 받아들일 정도로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분개하셨던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당 조직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멈추고 십자가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음을 알면서도 원죄의 체질로 말미암아 자꾸만 세상을 향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이라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천국문은 열리고 지옥문은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 천국문은 닫히고 지옥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악하고 어리석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전도를 한답시고 가는 곳마다 천국문을 닫고 지옥문을 여는 삶을 살았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가는 곳마다 하나님 좋아하기를 실천함으로써 천국문을 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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