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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_태승철 (마태복음 23:16~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19|조회수4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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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의 줄거리:

영적 위선의 일곱가지 열매 중에 세 번째는 마음의 눈이 머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전혀 못 보는 상태입니다. 이 맹인 됨의 영적인 문제점이 아주 잘 드러나는 상황이 바로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맹세의 현장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마음의 맹인 됨이 치유 되는 기적을 경험하여 하나님이 보이면서 사는 빛의 삶을 기대해 봅니다.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

(마태복음 23:16~22)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

오늘 본문에서는 위선의 일곱 가지 열매 중 세 번째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매 순간을 인질 되신 하나님을 구출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맹세가 중요 어구로 등장하였지만 맹세가 본문의 주제는 아닙니다. 맹세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로써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이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독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마음으로 좋아했던 것은 돈과 명예와 성공 같은 세상의 가치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선에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열매를 지적하셨는데 본문에서는 눈멂 즉 마음의 맹인 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본문 17절에서 어리석은 맹인들이여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위선자로써 살아가는 마음의 눈먼 사람들이여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위선이나 외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위선자이기에 눈먼 자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에서 맹인이란 눈멀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못 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맹인 상태가 너무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잘못을 잘못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하여 맹세의 현장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실이 요구되는 맹세의 현장이기에 위선은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했던 영적 위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에 대해 그만치 맹인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잘못된 맹세의 몇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맹세를 하게 된 위선의 마음가짐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위선을 일상에서 전혀 깨달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맹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막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전의 구조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분명한 지침이 되어줍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선민의 사명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 좋아함이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하기로 나타날 수 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한 기준이 성전의 떡상과 금촛대로 제시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떡상은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의미하고, 금촛대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크게 보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주일설교에서 살펴보았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은 떡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만족이 있는 장소이고 지옥은 영원한 결핍의 장소입니다. 다만 이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얼마든지 천국과 지옥을 앞당겨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금촛대의 기준을 염두에 둘 때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맹인 즉 눈이 멀었다는 것은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금촛대 역시 불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금촛대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크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 솔레미오(O sole mio)!”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 나의 태양이여라는 뜻입니다. 애인이 생겼을 때에 마음에서 그 사람이 태양처럼 보이는 모습을 잘 드러낸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만을 태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서 우선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돈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마음에는 승진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도 마음에서는 이렇게 세상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질책하시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삼으신 맹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오 솔레미오!”라고 고백할 수 없는 눈먼 상태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맹세의 현장이 나타납니다.

16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라고 하셨고, 18절에서는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금과 제단 위의 예물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이고 제단은 하나님 이외의 이름을 담은 마음을 죽이는 곳입니다. 즉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맹세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전과 제단의 의미는 상실한 채 금과 예물로 맹세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환원하면 돈으로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과 100만원의 가치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루도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잃는 대상도 아니고 벌을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침에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지 않으면 100만 원 씩 벌금을 내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그 맹세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실제로 해보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범인들이 으레 “I swear to God. Trust me.”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믿어달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맹세는 지키려고 하는 의도가 조금도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맹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맹세를 하는 사람은 약속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담보나 인질을 볼모로 제공할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임을 상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릴 때에 은행은 집을 담보로 요구합니다. 빌리는 돈 이상의 가치를 담보로 하고 반드시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치 가치 있는 분임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으로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아무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범죄자들이 아내를 납치해서 몸값으로 3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장 집을 담보로 잡혀서라도 현금을 마련해오라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돈을 마련할 생각이 없습니다. 경찰에 알려서 아내를 구출할 생각도 없습니다. 아내를 전혀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범죄자들에 의해 아내는 죽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질로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맹세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하나님을 놓치기 싫어서라도 약속은 지켜야만 합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만이 인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잃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가치만이 인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위선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소중한척 여겨서 인질로 제공해놓고는 전혀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하나님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돈을 두고 맹세를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지킵니다. 이러한 위선적 마음가짐이 바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맹인이 된 마음입니다.

아내가 와 닿지 않는 분이라면 자녀가 인질로 잡혔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자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돈을 아까워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내나 자녀는 고사하고 돈만큼도 아까워할 줄을 모릅니다.

 

이러한 맹인의 마음가짐은 삶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금과 예물 즉 재물에 비교하고 계십니다.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이제 돈 문제에 절어서 장아찌가 되어버립니다. 자녀의 형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자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녀 문제에 대해 장아찌가 됩니다. 이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장아찌가 된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세상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예배당에서는 문제를 가져오라, 하나님께 털어 놓으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이러한 태도가 위선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돈이나 자녀 문제를 받아들여서 마음이 문제의 장아찌가 되었다면 이미 하나님에 대해 맹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놓치고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라고 말씀하셨고 19절에서는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보자면 돈이나 자녀의 문제가 크냐? 이 모든 문제를 포함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크냐?”라고 묻고 계신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입으로 하는 대답이 아니라 마음에서 정말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문제의 장아찌가 된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크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찾게 되는 하나님은 종교의 하나님입니다. 인격적으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오 솔레미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세상의 문제들을 향해 오 솔레미오!”를 외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자이며 맹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돈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돈 문제가 태양이 됩니다. 돈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가 너무 귀해서 자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큰 것은 자녀 문제입니까? 아니면 자녀를 주셨고 자녀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까? 혹은 여러분의 건강이 큽니까? 여러분의 건강을 책임지시고 죽을 날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이 크십니까?

하나님이 더 크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맹세의 현장을 비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보다 돈 문제를 먼저 보는 마음은 자녀가 납치되었는데도 몸값부터 계산하려는 부모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자녀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신앙인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삶에는 아무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신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일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할 것 없이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이 이 위선의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을 좋아함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 등의 각종 문제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의 현장에서만 하나님을 좋아할 기회는 주어지게 됩니다. 선민도 교인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문제들보다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예배당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훌륭한 교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배당에 출석을 잘해도 삶의 문제에 찌들어 살고 있다면 위선자일 뿐입니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버려진 것입니다. 돈이 아까워서 납치당한 자녀를 포기하듯이 돈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포기한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 하나님을 전하고 그것을 복음이라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문제를 먼저 본다면 인질 되신 하나님을 포기한 것입니다.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없어도 상관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질 되신 하나님 구출작전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건강이 염려되고, 자녀에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걱정이 됩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세상의 문제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태를 묵인하고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죄악임을 알고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금촛대가 상징하듯 하나님을 먼저 보고 크게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은 인질이 되어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문제를 먼저 보고 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먼저 보게 된다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로 여겨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과정임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또한 주어진 상황마다 어떻게 말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하게 주어지는 것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십자가 생활화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돈 버는 노력, 승진하려고 했던 노력의 만분의 일만 있더라도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먼저 보고 크게 보았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태양으로 바라보기를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는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문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분노하시며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시기도 하셨고, 자비로움으로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기도 하셨으며, 바리새인들과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향하여 질책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이 상황에 따라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분이 돈 벌기 위해 했던 노력, 자녀를 키우기 위해 했던 노력의 백분의 일이나 천분의 일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제일 쉬운 일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제일 먼저 보고 제일 크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 오 솔레미오!”의 고백이 나올 때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주기도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가면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상황마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이 복된 삶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크게 바라볼 수 없다면 인질로 잡힌 자녀를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이 일어나지 않도록 십자가를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언제나 하나님만이 나의 태양이 되시는 상태가 유지되게 하여 주셔서 납치된 가족을 버리듯이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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