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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근로, 소득, 십일조의 의미_태승철 (마태복음 23:23~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20|조회수9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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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근로, 소득, 십일조의 의미>의 줄거리:

근로 소득의 십일조를 헌금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서 예배당을 다니는 모두가 십일조를 드리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사리 마음먹고 기꺼이 십일조를 바치는데 가짜 십일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짜 십일조는 근로와 소득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 됩니다. 십일조가 진짜가 되게 하는 근로와 소득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근로, 소득, 십일조의 의미

(마태복음 23:23~24)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근로, 소득, 십일조의 의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근로, 소득, 십일조의 의미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드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백만 원 벌 때에 십만 원을 드리는 것과 천만 원 벌 때에 백만 원 드리는 것이 다르고, 일억을 벌 때에 천만 원 드리는 것이 또 다릅니다. 소득이 커질수록 십일조의 양이 커지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어렵사리 결정하여 자발적 십일조를 드렸더라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가짜 십일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예배당 조직에서는 동기가 어떻든 많은 십일조를 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예배당의 예산이 늘어나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십일조를 드릴 바에는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진 십일조는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행하고 따로 십일조도 드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일조라는 행위에는 반드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따라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상태는 하루아침에 생기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근로와 소득 그리고 십일조의 바탕에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마음가짐이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가운데 근로를 하고 소득을 얻으며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율법조항은 잊어버려도 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십일조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아닌 십일조 본래의 의미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강박감에 시달리는 것은 24절에서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말씀하신대로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를 삼키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즉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하루살이를 삼키는 것이라면 십일조가 가진 정의 긍휼 믿음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은 셈입니다. 하루살이와 낙타는 모두 성경에서 규정한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하루살이는 부정하다고 걸러내면서도 거대한 낙타는 삼키려는 모습은 모순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이러한 모순적 태도가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바쳐지는 십일조는 대부분 토지의 소산이었습니다. 신명기에도 곡식과 포도와 감람유에 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언급하십니다. 이것들은 주식으로는 쓰이지 않는 사소한 향신료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중들 앞에서는 이러한 향신료의 십일조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마음에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루살이를 걸러내듯 철저히 율법을 지켰으나 정작 마음은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은 모순적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근로와 소득과 십일조의 의미 또한 저절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이들의 위선이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줄줄이 꿰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을 좋아했습니다. 이로부터 위선에 반대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의란 마음이 하나님 한 분으로 기쁘고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물건을 마주할지라도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성전의 떡상이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상징하고, 금촛대가 하나님을 더 먼저보고 더 크게 봄을 상징함과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는 모든 일은 정의로운 일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뿌리 깊은 부정부패는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의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사회적으로 발전해나가면서 근로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근로는 정의의 연장선상에 있어야만 합니다. 근로를 통해 얻은 소득으로 세상의 가치를 소유함으로써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불의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근로는 결코 신성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져서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쁨과 만족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 근로는 신성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의가 유지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근로의 모습입니다.

근로는 하나님 좋아하기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 일을 할 때에 돈 벌어서 기쁘고 만족하려고 한다면 불의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직장에 나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치 군인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총과 탄약을 챙기는 것처럼 우리는 직장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챙겨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직장에 나갈 때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이 근로를 통해 표현되게 됩니다.

일은 내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소득은 내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없다면 직장에 나가서 하는 모든 일도 정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총과 총알처럼 챙겨서 직장에 나가 상사나 부하에게 또한 일에 대해 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기쁨과 만족을 기관총으로 쏘는 직장생활은 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기회이자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근로를 말씀드린 이유는 십일조가 근로의 결과인 소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정의로운 근로가 반드시 요구됩니다. 정의로운 근로가 이루어질 때에 십일조의 문제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강요할 때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땀 흘리고 고생해서 돈을 벌었는데 그 중에 십분의 일이나 내놓으라니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근로의 개념부터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근로는 정의로워야합니다. 정의는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에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일과 손대는 사물들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모든 대상들을 향해 쏘는 것이 정의로운 근로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소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정의로운 근로를 하는 사람에게 소득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땀을 흘리고 노동한 결과로 주어지는 대가가 소득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을 마음에 채움으로 생기는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기회가 근로이기 때문에 근로는 고생이 아닙니다. 근로 자체가 은혜이기에 그 대가로 주어지는 소득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공짜로 주어진 선물이니 많이 받든 적게 받든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득이 생겼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월급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월급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받아들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도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월급에 대해서는 일 원짜리 하나에까지 오직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될 때에 소득은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득이 지출되도록 정해놓으신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쓰일 지출도 있을 것이며 십일조도 있습니다. 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했고 소득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으니 그 사용처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쓰며 망하는 이유는 돈이 기쁨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돈이 많아서 잘 쓰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못 쓰는 사람보다 망하기 쉽고 지옥에 가기 쉽습니다. 그러한 소득의 쓰임새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돈이 많은 것처럼 큰 저주는 달리 없습니다. 정의롭게 소득을 사용하지 못할 바에는 소득이 적어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이로부터 십일조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곧 소득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증거입니다. 신명기 813~14절을 보면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소득에 대해 정의롭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소득이 생길 때에 하나님! 이 돈을 써서 기쁠 일이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 기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소득의 사용은 나를 망하게 할 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십일조는 이러한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외의 모든 쓰임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명품이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길지라도 명품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구하지도 않았던 부귀영화를 주셨고, 목동이었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끌게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세상의 기준대로 잘 풀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다가 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이 명품을 산다고 해서 검소하지 못하다고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이루시고 싶은 일이 있으셔서 명품을 사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명품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가 하는 일에 명품이 전혀 필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소득에 대해 정의로운 마음가짐이며 십일조의 의미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십일조는 대단한 희생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근로가 무엇이고 소득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십일조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음을 예수님께 드려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무르게 되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고자 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지속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삶을 살아갈 때에 긍휼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 생활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불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마음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마음을 움켜쥐고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노숙자나 재벌회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모은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다면 이렇게 마음이 굶주린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늘과 땅 차이로부터 생기는 마음상태가 긍휼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죽어가는 스데반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마음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몸을 돌로 치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긍휼이 무조건적인 포용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처럼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을 포용하신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대사회의 엘리트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을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똑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계셨습니다. 상황에 따라 긍휼의 모습이 다른 형태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213~14절을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억울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쌀쌀맞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은 그저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냉정함이야말로 유산에 마음이 사로잡혔던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긍휼이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을 때에는 24절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들에 대해 이렇게 모질게 말씀하신 이유 또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단순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하나님과 붙어있는 마음이 땅에 붙어 있는 마음을 바라볼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긍휼은 마음이 땅에서 떨어져서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럴 때에 그 마음이 때로는 세리와 창기들에 대한 포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는 저주하시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긍휼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장님을 대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사장님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배우자나 자녀를 대할 때에도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갖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따뜻하게 감싸줄 때도 있으며 어떨 때에는 냉정하게 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여기는 마음은 동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직장이나 배우자나 자녀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쁘고 만족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삶에서 긍휼히 여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근로하는 동안에도 긍휼은 나타나야 하고, 소득을 얻었을 때에도 긍휼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해 사용되며 또한 구제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긍휼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했고 소득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으니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 또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게 되는 신뢰를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한 사람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긍휼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러한 마음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면 주변에 그에 합당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신뢰성이 때로는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는 일도 있겠지만 때로는 바위 같은 마음을 파고드는 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습이 회사에서는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승진을 해도 못해도 기뻐하고 만족하는 모습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누구나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탄압을 받던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쫓겨 왔을 때에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전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안디옥 사람들은 감명을 받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신뢰성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근로와 소득과 십일조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좋아하기로부터 이 세상에 표현되는 열매들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동안 일을 하고 생계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지출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바로 복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좋아하기를 완성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근로와 소득과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셔서 온전히 은혜로 주어지는 복지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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