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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의 줄거리: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든 통화를 하십니까? 하나님과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살아 있어서 '생물(生物) 핸드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의 이 생물 핸드폰이 시체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해 이 생물 핸드폰을 살려야 합니다.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
(마태복음 23:27~28)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일곱 가지 저주 중에 여섯 번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속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함을 회칠한 무덤의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유월절이 되면 많게는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이때에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는 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동굴에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에 막벨라 동굴이라는 곳에 장사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도 동굴 어귀의 돌을 옮기게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매장 풍습이 있었던 이스라엘에는 동굴이 무덤임을 알리기 위한 표식이 필요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심야에 헤매다가 무덤과 접촉을 하게 된다면 일주일간 부정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눈에 잘 띄도록 하얗게 무덤에 석회를 발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석회를 바른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얗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무덤이기에 그 안에는 시체가 썩어가면서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내면이 바로 이런 상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행위는 석회를 바른 것처럼 깨끗하지만 마음은 시체가 썩는 것처럼 온갖 더러움과 부패와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상당히 과격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위선적이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저주를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의 어떤 위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러한 저주의 말씀을 하시게끔 만들었던 것일까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예배당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결코 남의 일이라 여기며 허투로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때에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용해야만 하는 일곱 개의 반박문을 23장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다만 마음에 불법 즉 죄악이 가득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를 깨끗하다 여기는 외식 즉 위선으로 뭉쳐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선민들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삽니다. 기쁨과 만족을 얻는 평강의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법의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613개로 확장시킨 규정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이들의 마음이 썩은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처럼 되어버렸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법의 의미에 대해 좀 더 풀어보자면 가정과 직장과 사회생활 같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하여 관계할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빠짐없이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된 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뜻은 각자에게 독립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언부언하는 것을 이방인의 기도라 말씀하시며 경계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생각과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의 생각과 뜻을 늘어놓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내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여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법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불법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이루어지고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핸드폰에 비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핸드폰 요금제 중에는 통화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무제한 요금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하나님과 무제한으로 연결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통화량이 많지 않기에 제일 저렴한 요금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긴 통화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통화량이 다 떨어져서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가끔 한 번씩 있는 긴 통화를 위해 비싼 요금제를 사용하기도 아까운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듯이 매순간 하나님과의 연결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서 불법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구체적인 생각과 뜻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핸드폰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정의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핸드폰이 됩니다. 지정의(知情意)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정의를 갖게 하신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며 살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기 위한 용도로 인간의 지정의는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생물핸드폰이라고 붙여보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스스로의 생각을 담고 감정을 담고 뜻을 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생물핸드폰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곧 마음에서 불법을 피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무제한 연결을 이루며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끄고 켬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세상 좋아하기 모드를 끄고 하나님 좋아하기 모드를 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겠다는 믿음과 결심으로 마음의 모드를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은 채워지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흡입력이 좋아함으로 나타납니다. 그 좋아함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나의 지정의는 하나님과 교신하는 핸드폰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아가기에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땅에 있는 보이는 대상들에게 마음을 내주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강한 경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향성을 깨고 하나님을 향해 지정의의 핸드폰을 켤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대상들을 좋아하게 된 상태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좋아하는 모드를 끄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모드는 켜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안에 머물기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안에 머물며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모르기에 주님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에 내가 달린 모습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과 연합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땅에 대해 마음이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지속되는 동안에 나의 지정의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는 핸드폰으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과의 연결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예배당 안에서의 교육이나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에 바치던 열정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에 나가 사장님과 대화할 때에 마음에서 십자가를 놓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지정의는 하나님과의 교신을 이루는 생물핸드폰이 되어서 사장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장 오늘 하나님과의 연결에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내일 다시 십자가 생활화를 시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경건의 연습”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건의 연습을 삶의 현장에서 반복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교육에 참여하고 그 결과로 직분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배당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마음이 되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기억하는 동안에만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땅에 있는 모든 일은 내가 관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에 붙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바라봄을 지속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하나님의 마음이시며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음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지정의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심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고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예수님을 통해 표현되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불법을 행하지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는 생물핸드폰이 되지못하여 불법을 행하는 것을 시체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못하는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지정의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제목에서처럼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시체는 피조의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흘러들어갑니다. 들에 핀 백합화나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도 하나님의 뜻은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해안가에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뜻은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시체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이 흘러가는 일이 멈췄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을 때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지정의를 받아 살도록 지음 받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의미가 더욱 크게 작용합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담지 않고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살아있음에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놓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시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체에는 하나님의 뜻도 감정도 의지도 흘러들어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을 좋아하는 불법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시체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생각은 시체의 생각이고, 나의 감정은 시체의 감정이고, 나의 의지 또한 시체의 의지입니다. 내가 열심히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모든 일들은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에서 악취를 풍기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았다면 슬픔도 기쁨도 악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았다면 추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일들이 더러움의 확산에 불과합니다.
요즘 신종 코로나19가 확산되어 난리가 났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몰라서 시체가 되어버린다면 그 더러움은 주변으로 확산되어 나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더 큰 돈을 벌기 위하여 퇴직금을 쏟아 부어서 사업을 시작하여 원하는 대로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만 신앙적 관점에서는 시체가 썩어가며 악취가 진동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신이 끊어진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체에서 나오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향한 일이었기에 부패하고 악취가 나며 더러움을 확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신이 끊어진 상태에서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격리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법을 어긴 사람을 격리하여 교도소에 들여보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으로 준비하신 에덴으로부터 격리되게 됩니다. 시체인 상태에서 스스로 에덴을 만들어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만족과 평강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불법은 하나님과의 교신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는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면 누구나 시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한다면 생물핸드폰으로써 하나님과의 연결은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전달되는 삶을 경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절을 다시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중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옳게 여겼기에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 속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고 인기 얻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중들 또한 시체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지정의가 하나님과의 교신이 끊어진 시체가 된 생물핸드폰이었습니다. 시체가 시체를 인정하고, 시체가 시체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예배당 조직 내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십만 명이 출석하는 대형 예배당 조직이 시체들의 모임으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는 자아의식이 없다면 십만 명이 모일지라도 부흥이 아닙니다. 십만 구의 시체가 모인 공동묘지에 불과합니다. 시체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한다면 목회자 또한 시체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수고하고 노력한다면 부패와 악취를 퍼뜨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십만 명 중에서 한 명이라도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면 그 사람만이 부흥을 이룬 것입니다. 생물핸드폰이 되어서 하나님과 연결을 이루고 하나님의 지정의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부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배당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외식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은 땅에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권합니다.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의 박수를 받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체들이 모인 자리에 부흥은 존재할 수 없으며 멸망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결된 생물핸드폰으로써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흘러들어올 수 없고 생물핸드폰은 시체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의 지정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실현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악취를 향기라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동안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던 진짜 모습은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러한 신앙생활을 해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생물핸드폰을 십자가 생활화로 켜시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어코 에덴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나의 지정의가 하나님과 연결된 생물핸드폰이 되게 해주셔서 매순간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 열매 맺는 복중의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