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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종교에는 최소한 구원은 없다>의 줄거리:
'기독교'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한자 표기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 본인이신 예수님께서 멸망을 선언하셨다는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예언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멸망을 동시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종교에는 최소한 구원은 없다
(마태복음 24:1~14)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종교에는 최소한 구원은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종교에는 최소한 구원은 없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마태복음 24장은 소위 작은 묵시록이라고 불리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예루살렘 성과 성전 파괴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14절까지의 말씀가운데 우리는 특별히 1~2절 말씀을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대상으로 지목하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곧 유대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존재의미는 왜곡되었고 이로 인하여 일반 종교와 동일한 속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교는 하나님이 아닌 성전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조직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멸망을 궁극적 목적지로 삼게 된 종교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과 종교의 차이를 알아야하며 돌이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진리와 구원이 있기에 종교 간에 대화가 필요하고 상호존중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불가능하며 불신앙적인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멸망을 향해가는 종교들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습니다. 멸망이라는 부정적 측면에서만큼은 종교다원주의는 옳습니다. 진리와 구원이 없다는 공통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생활에는 궁극적인 진리와 구원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 한 진리도 구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종교로 전락하게 된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백은 할 수 있을지라도 진리와 구원은 찾을 수 없습니다.
종교는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초월자인 신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마음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가치들입니다. 반면 복음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여 하나님을 찾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수련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세상의 가치를 멀리하고자 하지만 결국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세상을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에 반해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꿈꿉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독립적인 자신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꾀하지 않습니다. 혹은 세상의 가치를 많이 얻고자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기완성이나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을 좋아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합니다.
사도들에게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뺀다면 시장 잡배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사도일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자기수련의 측면에서 볼 때에 이들의 삶은 아주 형편없는 차원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하늘 보좌에 이르기까지의 동선을 따랐기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추구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꿈꾸는 것이고 이 연합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가능해졌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에 반에 종교는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초월자의 힘을 이용하려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천국 복음이 전파 된 것일까요?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쉽게 연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추가되어야만 합니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이 좋아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가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보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예수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 복음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때에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복음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우리의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장갑이자 가면으로 쓰임 받는 모습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복음은 전해지지도 않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천국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또한 전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복음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함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말로는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간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함이 유지되었습니다. 복음이 종교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오직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할 때에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종교가 된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타난 대로 종교가 되어버린 복음에는 멸망과 파괴가 주어질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민의 선민 됨을 상징하는 성전이 이토록 완벽하게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때의 성전은 제3성전이었습니다. 제1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은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제2성전은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바벨론의 포로귀환자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고 소박했습니다. 제3성전은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벨 성전을 개축하여 지은 것이었습니다. BC.19년에 시작된 이 성전 개축은 AD.6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제3성전의 개축 작업이 약 50년 동안 진행되었던 때였습니다. 상당 부분 개축이 이루어졌기에 스룹바벨 성전의 소박함은 사라지고 크고 화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3장 후반에서부터 24장에 걸쳐 아직 짓지도 못한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리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러한 예언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이 예언에 대해 제자들이 묻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AD.63년에 완성된 지 7년 만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토록 성전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쌓을 때에 돌과 돌 사이에 보석을 넣었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보석을 찾기 위해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다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앞으로 있을 일을 예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로 전락하게 된 복음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는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 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를 두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완성과 복지의 완성된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였고 유대교라는 성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건물로서의 성전은 모든 선민들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선민들은 이 성전 건물을 떠올림을 통해서 마음속에서 자가용 성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구조대로 마음을 움직여 갈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상태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다윗은 이러한 임마누엘의 상황을 사무엘상 25장 29절에서 생명싸개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싸개가 되어주셨듯이 성전 생활화를 통하여 선민들의 마음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성전을 생활화하는 모든 선민의 입에서 나올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존재했습니다. 이는 곧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주기도의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마음에 붙잡게 됩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돈을 붙잡고 있는 나, 건강과 장수를 붙잡고 있는 나, 권력과 승진을 붙잡고 있는 나, 자녀의 형통을 붙잡고 있는 나를 번제단에서 죽일 때에 깨끗해진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제 기도를 뜻하는 분향단의 의미대로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름을 붙잡고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만족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보고 더 크게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자가용 성전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신앙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이역만리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상태를 이루어 복지를 살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성전이 자가용이 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독립적인 신앙체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한다면 세상을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선민들에게는 애초에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좋은 상태에서 성전을 바라보자 성전은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얻게 해줄 수단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합을 위한 지도역할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한 지도역할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종교로 바뀐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멸망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전의 존재의미는 완성되었기에 건물로써의 성전이 존재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성전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연합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성전의 존재의미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하는 이유와 동기를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온 성전의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을 선언 받게 됩니다. 이 선언은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한 멸망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직화되어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점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맞는 말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신 동선 안에만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구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생겨나는 이유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일치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출연하게 되는 이유는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거짓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죄사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에 집중해서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의 정체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구원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직한 상태로의 전환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나쁜 처지에서 좋은 처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쁜 처지와 좋은 처지가 무엇인지에 따라 구원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돈이 없어서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구원은 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구원은 건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식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모에게 구원은 자녀의 형통입니다. 승진이 막혀서 괴로운 사람에게 구원은 승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좋은데도 하나님을 가질 수 없어서 미치도록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구원이 예수님이 주시려고 했던 구원과 일치할까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출세를 못해서, 승진을 못해서, 자녀가 형통치 못해서, 건강이 안 좋은 것에서 구원을 찾으려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환경적 변화로써의 구원을 찾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복음은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에 대한 수요로부터 거짓 그리스도가 생겨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신다고 믿는다면 예수님 외에 다른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소식이 되십니다.
그러나 몸은 예배당에 와 있을지라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환경이 바뀌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수요에 맞춰 그들이 바라는 것을 약속해주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키우는 자들은 거짓 구원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이단이 성행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거짓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을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님을 좋아하는지를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고 하나님을 많이 갖는 부자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싶어도 자꾸만 세상에 끌리는 원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원죄의 성향을 가진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십자가 생활화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은 하늘을 향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사랑하여 복음을 종교로 만드는 자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는 것처럼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자들만이 참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며 구원을 얻을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었던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삶을 끝낼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 복음의 길을 가게 하시고 종교가 아닌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로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