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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승천 후 재림까지의 상황_태승철 (마태복음 24장 23절~2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2.28|조회수7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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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승천 후 재림까지의 상황>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승천 후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기간의 영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가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재림하실 예수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며 어떻게 관계하게 될까요?


승천 후 재림까지의 상황

(마태복음 2423~28)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승천 후 재림까지의 상황>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승천 후 재림까지의 상황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걱정과 긴장 상태에 놓인 분들이 많이 계신 줄로 압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씀의 총화이신 예수님께로 마음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육체로 살아가는 현실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져 가실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 후 재림까지의 중간에 영적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이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표적과 기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 이러한 일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나타났듯이 큰 표적과 기사는 택한 자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일 것입니다. “저런 기적을 베풀다니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가 아닐까? 혹시 오신다고 했던 그리스도는 아닌가?”라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앞으로 나타날 일은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로 항상 존재했습니다. 쉽게 말해 거짓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하나님이나 재림 예수나 성령으로 칭하는 이단의 교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 관련 이단들이 성행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정통교단 내에 있는 교역자들 중에서 복음에 반대되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재림까지 나타나는 특징은 정통교단으로 불리는 기독교 단체 안에 속해 있는 교역자들 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승천 후 재림까지의 특징을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도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는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담고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노아 홍수 때에 진노하신 것보다 더 큰 진노를 내리실 정도로 가증스럽고 역겨워하십니다. 실제로 노아 홍수 때보다 더 큰 재난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가장 역겨워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하셔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사람이 실제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혹은 마음의 지성소에 자녀의 형통을 담고 실제로 이루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나 자녀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어떠한 세상의 가치도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엇이 담기든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러한 상태를 역겨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역겨운 상태를 왜 참고 방치해두시는 것일까요?

예배당 강대상에 절에 있는 사천왕상과 같은 기괴한 형상을 가져다 놓았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고 역겨운 광경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세상의 가치를 담을 때 하나님께서는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본래라면 이러한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노아 홍수 때처럼 진노의 환난이 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별일 없이 죽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살아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모든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때로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의 환난은 아닙니다. 진짜 환난은 모조리 예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한 인식 또한 명확해야 할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은 바로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지성소에 법궤가 상징하던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대상으로 믿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의 성소인 지정의를 통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 세상의 가치를 담고 살아갑니다. , 자녀의 형통, 건강, 친구, 연인, 취미 등과 같은 이름들을 담고 기쁨과 만족을 찾고자 합니다. 이때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간과하고 묵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역겨운 상황임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의 가치를 얻는 도구로 삼게 하고, 거짓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등하다 속이며 마음에 그 이름을 담게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정통교단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마음상태를 묵인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는 거룩한 마음의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시키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며 택한 자들의 마음까지도 유혹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등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 후 재림까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곧 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온 이름을 끊임없이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고 목적이셨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거짓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해 낼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의 양상을 정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27절을 보면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거짓 그리스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 특유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러한 과정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번개가 번쩍이면 사람들이 놀라서 다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시야에서 번갯불을 조금씩 나누어 갖지 않습니다. 백만 명이 보아도 모든 사람의 시야에는 온전한 번갯불의 모습이 비칩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75억 명이 어디에 살든지 동시에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주장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요구는 한 가지 뿐입니다. 사람들이 방에 있든지 들에 있든지 산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누구에게나 동시에 마주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리스도로 인정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동시에 드러낼 수는 인간은 없기에 다 거짓말쟁이며 장사꾼이고 도둑놈이고 강도이고 악당일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악질들에게 마음이 사로잡혀서 추종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습니다. 앞서 거짓 선지자는 마음의 지성소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들어온 상태를 간과하고 묵인하다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께 역겹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들여놓고 사업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장로님에게 멸망의 가증한 것을 담은 상태를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축복의 기도를 해줍니다. 마치 예배당 강대상에 사천왕상이나 기괴한 온갖 형상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고 역겨운 일이 지금 예배당에서 교역자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역겨운 일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바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번개와 같으실 것입니다. 티벳의 라마불교 승려에게도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사업가에게도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에게도 예수님은 일대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시고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직장에서 회의를 하는 도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까요? 몸이 직장에 있다고 해서 마음에 업무를 담았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곳에 담았으니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장난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일도 아니며 협박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상태가 유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는 상태는 지옥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에 갇혀 사는 인간의 사고력과 언어능력으로는 이 놀라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에 대해서는 적합하게 표현할 방도가 없습니다. 제가 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희미하게 보입니다. 윤곽이 또렷하지는 않아도 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재림이 어떠할지 부분적으로나마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미 죽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누가복음 234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하였고, 부자는 음부에서 괴로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육체를 벗는 것을 죽은 자로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음부에서 잠을 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육체가 죽으면 인격적 알맹이는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하나님 품안에서 잠든 것처럼 지내게 될 것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마음에 담았던 사람들 또한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음부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에 깨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깨어날 때에는 죽는 순간의 의식으로부터 1초도 지나지 않은 상태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바깥의 하나님 품에서 잠든 것과 같은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안식을 누린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 살았든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에는 죽는 순간의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마주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마음상태를 가지고 있다면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캘빈과 루터는 이 주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며 몰려드는 독수리들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저 또한 이 해석에 동감합니다. 독수리는 시체를 파먹는 짐승이기에 비유자체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비유는 합당한 비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이루신 단 하나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마음상태를 가진 나의 죽음을 대신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5절에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틈만 나면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가치들을 담고 추구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겹게 여기는 일이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합니다. 주검에 몰려드는 독수리처럼 되어야 한다는 비유는 참 살벌하고도 삭막합니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이 지속될 때에만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마음상태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까지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날마다 먹고 마심을 지속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매순간 먹음으로써 이 자아의식을 유지될 수 없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장 역겨워하시는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그곳에 하늘에 속한 독수리들이 모여서 그 죽음을 날마다 먹을 것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 재림까지의 시간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역겹게 여기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마음상태로부터 떠나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과 마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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