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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의 피날레는 재림>의 줄거리:
아브라함도 세종대왕도 이승만 대통령도 아직 인생의 피날레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생의 대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인생의 진정한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내 인생의 피날레로서 예수님의 재림이 인생 최고의 이벤트가 될지 아니면 인생 최악의 이벤트가 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내 인생의 피날레는 재림
(마태복음 24:29~31)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인생의 피날레는 재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인생의 피날레는 재림’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음으로 인생의 피날레를 맞이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세종대왕도 이승만 대통령도 아직 인생의 피날레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인생의 피날레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야말로 인생의 피날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4000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노아나 에녹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들 모두의 인생의 끝이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나의 인생의 끝이기도 합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써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에 사로잡힌 노예들이 외치던 말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개선장군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혜자로 여겨집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에 생각과 태도가 바뀌며 인생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은 기억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재림을 기억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재림은 헬라어로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어드밴투스(Adventus)라고 합니다. 라틴어 문법이 정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의미에 맞추어 메멘토 모리를 바꾸어보자면 메멘토 어드밴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100미터의 코스라고 한다면 죽음은 100미터 지점이 아닙니다. 실은 90미터쯤에 죽음은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나머지 10미터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90미터 지점을 끝이라고 생각하여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오류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100미터 코스에서 90미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것과, 90미터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다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다른 예로 경부선 열차를 인생이라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 만나는 역들이 삶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끝은 경주역 즈음에 있고 예수님의 재림은 종착역인 부산입니다. 같은 경부선 열차를 탔더라도 경주를 목적지로 삼은 사람은 부산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삶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오늘 2020년 2월 28일이 본래 100미터인 코스를 달리고 있는 중인지 혹은 90미터 코스를 달리는 중인지를 생각해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90미터 코스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100미터 코스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셈입니다. 완전히 다른 목적지를 둔 코스이기에 삶의 내용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젠가 일어나게 될 막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2020년 2월 28일을 살고 있는 오늘로부터 예수님 재림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서 살아간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질 때에 진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가짜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확신하며 예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피날레가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재림이라 믿는다면 앞으로 남은 삶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른 속성의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까지는 채 2~3일이 남지 않은 시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재림을 계산에 넣고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야 함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달리 해석하자면 재림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재림이 인생의 피날레라고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환난의 예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환난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야 할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가장 역겨워 하시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래라면 모든 사람이 노아 홍수 때보다도 더 큰 진노의 환난을 당해야만 하지만 이 모든 환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22절에 나타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환난을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에게 임하는 환난은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는 환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29절을 보면 ‘그 날 환난 후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직역해보면 ‘그 환난의 날들이 끝나자마자’라는 뜻이 됩니다. 정확히는 환난이 끝났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기에 환난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체의 균형자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상황을 베드로후서 3장12절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단단한 쇠가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내리듯이 자연의 구조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산과 들과 태양과 달과 별은 언제까지라도 존재할 것 같은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용광로에 들어간 쇠처럼 녹아내리는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30절을 보면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보이겠다는 말씀의 의미가 참으로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재림 때에 모든 사람들이 번갯불을 보듯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 표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후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다가 3년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분이심을 드러낼 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징조는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라는 헬라어로 기적을 말할 때에 사용되는 표적이라는 단어로도 번역이 됩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25절에서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 모습으로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십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천국에서의 영화로운 모습이 되시기도 하셨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와는 또 다른 영화로운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과 관계할 때에 우리에게 맞추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으로 보이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이 따랐던 분과 동일하다는 인격의 연속성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마주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심을 깨달을 표식이 존재할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방법이 없지만 예수님이 제자들 때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재림하실 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말씀 속에는 아주 중요한 보물 같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10~11절을 보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인자의 징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길을 따라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함으로써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시는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 길을 통해서 내려오시며 인자의 징조로써 십자가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은 세상의 어떤 사상가나 종교의 창시자나 위인들이 제시할 수 없었던 길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이 만드신 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날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이 길로 어떻게 돌아오신다는 것일까요?
29절을 다시 보면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시간과 공간의 틀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때에 보이지 않던 징조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십자가 길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만 따를 수 있었던 그 길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바다가 갈라져 길이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해와 달과 별들의 천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녹아 없어지는 상황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구름을 타시고 능력과 큰 영광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었던 그 분이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까지 이어지는 통로의 입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 길을 따라 십자가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등장을 하십니다. 십자가는 시간과 공간을 열고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과는 다릅니다. 이들의 부활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되돌아온 일임에 비해 예수님의 부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이미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자들과도 만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는 천국으로 가신 그 길이 또한 재림하실 길이 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물질의 틀이 무너지고 균형이 깨지고 모든 것들이 녹아 없어지게 될 때에 그 동안 우리가 믿음으로만 붙잡던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은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난 길을 따라서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와 마주하실 것입니다.
30절의 하반부를 보면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족속’이란 지역과 종교를 넘어서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또 31절을 보면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택하신 자들’이란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자칭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고 천주교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였다면 재림하실 예수님을 보며 통곡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의 틀이 무너지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녹아 없어지는 동시에 나타날 십자가로부터 하늘로 이어진 길을 평생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가 될 십자가의 대문으로 발을 들여놓을 자격이 박탈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죽은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이 길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성전을 생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번제단을 문으로 삼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번제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존재자체가 십자가 복음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이들의 통곡이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서 산 아래에서 좋다고 여기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볼 수만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께서 우주의 주인이심을 알고 그 모습에 황홀해하겠지만 자신들이 결코 예수님과 같은 길로 갈 수 없는 무관한 자들임을 깨닫고 비참함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택함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상태를 역겨워하시듯이 이러한 상태를 역겨워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대신 세상의 가치들의 이름을 담고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배당 강대상에 불상을 세워두고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얼마나 역겨운 광경일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그러한 일을 간과하고 묵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따라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바쳤기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뱀이 평생을 땅에 배를 붙이고 기어 다니듯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십자가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본 적이 없으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그 길을 따라갈 자격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택하신 자들은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한 성도들입니다. 살아있을 동안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로 마음을 보냈던 자들이 택한 자들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시기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재림이라는 끝이 이르기 전에 잠시 잠자는 기간입니다. 육체가 죽는 순간 시간 바깥에 머무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인생을 살아가던 인격 그대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육체의 죽음을 피할 사람은 있을지언정 예수님의 재림 자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재림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지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녹아 없어질 그 때에 예수님이 만드신 십자가로부터 보좌 우편까지의 길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볼 수는 있어도 갈 수가 없음을 깨달을 때에 비참하게 통곡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대신 세상의 가치를 마음의 기쁨과 만족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기뻐하고자 했고 건강과 장수로 만족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자녀의 형통, 승진, 명예, 권력에 마음을 주는 동안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겨운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재림을 맞이한다면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인생의 피날레이자 최대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 최대의 사건이 최고의 이벤트가 될지 최악의 이벤트가 될지는 십자가 생활화에 달렸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대문으로부터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을 내셨습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이 길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모든 인류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따라 십자가 문을 열고 재림하실 때에 살아서 믿음으로 그 길로 마음을 보냈던 자들만이 택한 자로 거두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나의 길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인생의 끝임을 아는 사람으로서 오늘도 마음으로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피날레인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의 재림 때에 드러날 십자가의 길을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으로 따르며 보좌 우편까지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