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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1>의 줄거리: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재림이 내일도 될 수 있고 모레도 될 수 있다는 뜻인데. 그렇게 이천년이 지났어도 아직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언뜻 불면증을 연상하게 하는, 참으로 어렵고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 재림 향해 깨어있는 겁니다.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 1
(마태복음 24:32~44)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 1>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 1’
지난 시간에 이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살펴보면서 특히 43절의 ‘깨어있으라’는 부분의 의미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 24장은 소묵시록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들이 나타나는 내용 때문에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마태복음 24장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이 너무도 큰 은혜의 덩어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에 종말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믿음차원의 역사라면 물리적 환경적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은 종말과 재림입니다. 29절을 보면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종말은 무서운 일이 되리라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으로써 재림과 종말을 상징하는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진정으로 깨어있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코로나19로 인해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전래된 이래 처음으로 예배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종말과 재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다면 막연한 불안과 위기의식에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4~36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역사의 진행과정을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세대(this generation)가 있습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대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 세대란 단순히 한 사람이 살다가 죽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로부터 생겨난 오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재림을 아름답고 은혜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대로 번역된 헬라어 게네아(γενεά)는 족속, 가문, 후손, 시대, 동시대 사람들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이 세대를 시간적 개념으로 해석하고자 하였습니다. 한 세대를 30~40년 정도로 잡아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살았던 세대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늦어도 30~40년 후에는 재림이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고 학자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의 임박한 종말의식으로부터 생겨난 오해나 착각이었다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써는 예수님께서 착각을 하셨다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 세대란 아담 이후로부터 예수님의 재림직전까지 태어나게 될 마지막 아기까지 포함된 모든 사람을 일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이 세대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아담 이후의 전 인류의 역사가 재림으로 끝날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왜 이 세대라고 하셨을까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세계에서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 살게 될 것이고 다음으로 재림을 기점으로 무(無)시간과 무(無)공간적 비(非)물리적인 차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서의 삶의 차원을 이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재림을 통해서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세종대왕도 죽고 가까이는 박정희 대통령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우리의 아들딸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인생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잠시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자녀를 앞세운 부모가 있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자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감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겠지만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끝을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대가 끝날 때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가게 될 곳이 지옥이냐 천국이냐는 것입니다. 살아서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다면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를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 또한 분명해집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종말에 대한 결론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주어진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재림을 향해 깨어 있게 하기 위하여 나는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씻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시간에 살펴보았던 32~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란 큰 환난을 핵심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큰 환란의 특징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입니다. 그리고 본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큰 환난을 봄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을 가까이 느낄 수 있고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란 물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이기에 좋아하고 기다리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은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한편 몸으로 살고 있는 물리적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재림이 가깝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큰 환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 이후 노아 홍수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환난이 있는 것을 보면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그 동안 우리는 이 큰 환난을 물리적 시간적 환경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로는 깨어있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재림 직전에 일어날 큰 환난이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일들이라면 굳이 깨어있으라 말씀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 깨어있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2001년 9월 11일에 미국 뉴욕에서 테러가 발생하였고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 때에 3,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응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노아 대홍수에 비하면 미미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환난이란 창조 이래 견줄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노아 홍수보다도 더 할 것입니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에 3억 5천만 미국인들이 이를 종말의 전조로 여기고 예배당을 찾아가는 기현상도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각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편 노아 홍수보다 더 큰 환난이 벌어진다면 깨어있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착각에서 빚어진 오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환난은 결코 물리적 환경적 차원에서의 기근이나 지진 같은 재난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난이라면 깨어있으라는 말처럼 불필요한 소리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풍랑을 만났던 때를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깜깜한 밤에 조각배를 타고 갈릴리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살인적인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쫓기며 살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환난이 풍랑 같은 환경적인 재난이라면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환난이 물리적 환경적 차원에서의 재난이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환난을 볼 수 있어야 재림을 가까이 느낄 수 있고 재림을 가까이 느낄 수 있어야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의 오해를 씻어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무섭고 두려운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큰 환난이 물리적 환경적 재난이었다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풍랑만난 배에서 주무셨듯이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큰 환란 속에서도 평안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바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어있어야 할 대상은 세상의 재난이나 일들이 아닙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지만 육체의 감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감염입니다. 마냥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가운데 마음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에서만 깨어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풍랑만난 배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하기에 앞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40~41절을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는 모습에서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여인들’과 같은 평온함이 엿보입니다. 모든 일상이 평범하게 반복되는 가운데 큰 환난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도 생겨납니다. 큰 환난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상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재림과 종말에 대해 큰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로인해 체감할 수도 없었습니다.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잠들어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수 있다면 염려하고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큰 환난은 하나님을 등진 상태에서 직면하게 되는 마음의 공허함입니다. 이 큰 환난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을 세상의 가치들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 거짓 희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큰 환난임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이 환난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없음을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차라리 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체가 죽으면 더 이상 마음을 채울 대상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마음을 채우려고 추구해오던 세상의 모든 가치가 헛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이 분명해지기에 차라리 몸이 죽는 것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16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자들이 재림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보겠지만,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닫고 느끼는 절망이 이와 같으리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마음의 지성소에 서있는 상태가 죄악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 10억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가면 기쁠 텐데, 승진하면 좋을 텐데, 결혼하면 행복할 텐데, 국회의원이 되면 좋을 텐데, 암에서 낫기만 하면 좋을 텐데, 목회현장이 부흥하면 좋을 텐데, 예배당을 새로 지으면 좋을 텐데 등의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붙든 마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거짓 희망에 사로잡힌 상태이며 깨어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그릇이라고 한다면 해와 달과 별과 우주까지도 그릇 안에 담긴 내용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건이든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듦으로써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마음을 물과 기름처럼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 세대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자들만이 깨어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세상의 가치가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세대에 대해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체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세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력질주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재림이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여러분 스스로 체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심으로써 육신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중에도 마음은 예수님의 재림과 맞닿을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