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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복음과 교회와 재림 되찾기_태승철 (마태복음 25:1~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3.06|조회수9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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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과 교회와 재림 되찾기>의 줄거리:

이단 사이비들로부터 그리고 소위 정통 교단의 거짓 된 예배당 종교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복음과 교회와 재림을 되찾아 와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이 버려지고 교회라는 이름이 유린되고 재림이 악용 되거나 아니면 폐기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되찾기 위해 거창한 구호와 결집이 필요 없습니다. 나 하나가 바로 알면 됩니다.


복음과 교회와 재림 되찾기

(마태복음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과 교회와 재림 되찾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과 교회와 재림 되찾기

오늘 본문의 말씀도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재림에 대해 깨어 있으라는 요청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 안에는 복음과 교회와 재림과 구원에 관한 주제들이 복합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앞서 23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저주하신 이유는 그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위선은 우리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절대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끊어내셨듯이 우리는 예배당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예배당 조직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잘못된 신앙관을 끊어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렇게 시작된 말씀이 종말과 재림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지다가 복음과 교회와 재림과 구원이라는 복합적 주제를 포함한 비유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열 처녀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전체를 상징합니다. 애초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 자들은 구원의 가능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도의 대상일 수는 있으나 구원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항상 교인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명은 예수님의 교회에 속한 교인이며, 미련한 다섯 명은 예수님의 교회를 사칭하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요즘 재림과 종말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소위 정통교단들에서 재림에 대한 언급은 거의 포기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재림은 오히려 이단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입맛에 맞게 예수님의 재림을 이용하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되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예배당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 전체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믿고 삶의 현장에서 이 마음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 때에 구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모든 사람은 각자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설령 예배당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전도를 받아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구원은 이룰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예배당 조직이 이를 가르치기보다는 조직에 대한 헌신과 참여를 중요시합니다. 저 또한 그러한 사기행각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책임감을 느끼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복음은 자가용이 되어야하고 십자가도 자가용이 되어야 합니다. 자가용 십자가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두 세 사람을 기본단위로 해서 갖는 모임이 교회의 모임입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예배당 조직이 끼어들어서 복음의 진리를 종교로 바꾸는 바람에 다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 조직의 지도자들은 귀담아 들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종교로 전락시킬 때에 예배당도 망하고 출석하는 사람들도 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홀로 길을 걷는 도중에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앞서 2415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각자에게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전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전도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와 관련하여 본문의 열 처녀 비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저녁 무렵에 시작이 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서 결혼에 관련된 여러 예식과 잔치를 벌이고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없었고 치안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신랑이 먼 곳에서 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중에 발생하는 사건사고로 지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연락을 해주면 기다리는 사람도 마음이 편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연락할 길도 없었기에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신랑의 도착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등불을 들고 동네 어귀에 나가서 신랑을 맞이해서 신부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때에 신랑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기에 등불을 밝히기 위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오늘 비유에서는 신랑이 늦어질 것을 생각지 못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신랑의 도착을 알 수 없는 상태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오리라는 예상시간만 생각하고 만에 하나 늦어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여분의 기름을 갖지 않은 이 상태를 예수님이 주목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기름이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주제와 특화된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혹은 성령을 나의 슬기로움을 통해 준비할 수 있으리라는 오해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온전한 은혜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인격적 성령님을 준비하고 싶다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고 장악하시고 이끌어 가실 수는 있지만 나의 주체성으로 성령의 역사를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참 유명한 비유이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감추어진 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히 하고 말씀에도 철저히 적용하다 보면 대부분의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본문은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성하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어제 말씀에서 살펴보았던 역사의 진행과정을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이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있는 우주가 있고 그 속에 지구가 있으며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어느 날 갑자기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져버리면서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진행과정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수 없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회사에서 중역들이 회의를 하다가 회장님이 등장하면 모든 의식을 회장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의식이 당면한 삶의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의 재림까지 의식이 도달할 수 없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가 집을 나갔다면 부모로써는 그 자녀를 계속 의식하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자녀를 걱정하는 선에서 의식이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 상태는 등을 밝히기에 기름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자녀 걱정을 넘어서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삶의 문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디 오는 신랑을 예측하듯이 우리의 의식은 삶의 문제의 위치를 넘어서 재림 예수님의 위치까지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문제를 생각하다가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우선적으로 의식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절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의식이 막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등불은 깜깜한 밤에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등불과 같습니다. 사람이 잠이 들거나 기절하게 되면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곧 깜깜한 밤과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은 깜깜한 밤에 등불을 켠 것과 같습니다. 이 등불은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분의 기름은 삶의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세상이라는 위치에서 의식이 막혀서는 안 됩니다.

 

어제 깨어 있음의 세 가지 효과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가 책받침 빼기 효과였습니다.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벌칙을 주는데 남녀가 책받침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책받침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사회자가 짓궂게도 책받침을 싹 빼버렸고 서로 입맞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재림 사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의식 사이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책받침처럼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재정문제가 생겼다면 이 문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이 시간과 공간이 끝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에서 재정문제를 빼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정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시간과 공간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책받침을 빼버리듯이 빼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깨어있음의 상태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동일시는 곧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깨어 있기의 첫 번째로 물과 기름의 효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기쁨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만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마음이 섞인 상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역겨워하시는 상태이며 내게는 노아의 홍수보다 더 두려워해야 될 환난이 덮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곧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마음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과 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하늘에 올라간 마음이 의식할 수 있는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재림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는 나의 기쁨과 만족이라는 용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문제, 건강문제, 승진문제를 비롯한 어떠한 세상의 문제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 한 그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마음이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별도의 쓰임새가 있겠지만 마음 채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게 하시는 재림은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재림을 너무나 등한시해왔고 온갖 이단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용하여 사기를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등한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넘어서 재림에 도달할 수 없다면 복음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임박한 종말의식을 똑같이 가질 수 없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 번째 효과인 하나님 주권의 효과는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진행되는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5,00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동계올림픽 이후로 강릉에 관광객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장사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큰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머물러야 할 곳은 코로나19 현황도 아니고 장사가 안 되는 현실도 아닙니다. 세상에 의식을 머무르게 한다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와 다름없습니다. 먼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문제들을 책받침 빼듯이 빼버릴 때에 재림을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순간의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깨어나서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의식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시간과 공간을 빼버리고 재림을 의식하는 일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여분의 기름을 마련하여 등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넘어서 의식을 예수님의 재림에 닿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참 논리적입니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의 재림을 첫 번째 의식의 대상으로 만들어줍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책받침을 빼듯이 통째로 빼낼 때에 예수님의 재림과 나의 마음이 맞닿게 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문제가 포함된 시간과 공간을 통째로 빼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의식해야 될 것은 삶의 모든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럴 때에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맡아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책받침 빼듯이 통째로 빼버리게 해주셔서 의식하는 첫 번째 문제로 예수님의 재림을 끝까지 유지해나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럴 때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게 된 세상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도맡아 해나가시는 놀라운 역사들이 있게 하셔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억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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