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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달란트 재고조사와 활용법>의 줄거리:
소위 달란트 비유는 유명한 그 만큼 오해도 많고 이해가 어려운 비유입니다. 비유 이해를 위한 포인트는 도대체 달란트가 무엇이냐 하는 것과 종의 입장인 내가 어떻게 그 달란트로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익을 창출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달란트 재고조사와 활용법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달란트 재고조사와 활용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달란트 재고조사와 활용법’
오늘 본문은 모르시는 분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9절 이후의 내용을 보면 결국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으므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재고조사는 팔려고 만든 물건이 창고에 남아있는 상태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용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비품들의 상태와 수량을 확인하는 것을 일컫기도 하고, 기계장치라든지 건물 등 다양한 형태의 재화의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서 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재고조사의 개념은 오늘 달란트 비유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한 달란트를 주셨는가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내가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100%의 이익을 내서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익이 창출되지 않았기에 쫓겨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자체의 내용은 우리 삶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식적인 상황입니다. 자본금을 받아서 장사를 하고 이윤을 많이 남겼더니 칭찬을 받았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 담긴 신앙적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석을 보면 이 달란트의 의미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혹은 재능이나 특기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막연한 이야기입니다. 은사란 무엇일까요? 재능이나 특기와 비교되는 은사의 차이점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만 행사할 결정권이 내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 은사는 나를 통해 나타나지만 하나님께 결정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나의 이익을 위해 쓸 수는 없습니다. 행여 그러한 시도를 한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은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달란트를 재능이나 특기로 해석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가진 모든 재능과 특기를 동원해도 먹고 살기가 빠듯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재능과 특기를 활용해서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익을 남겨야만 하는 예수 믿기였다면 이처럼 부담스러운 말씀은 달리 없을 것이며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달란트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하나님을 위해 남겨야 하는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이익을 만들어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익이란 간단히 말해 받는 이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가치 있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지으셨고 지금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께는 설령 한 나라를 통째로 드린다고 해도 이익으로 여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그 나라도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재벌그룹이 총 자산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익이라 여기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공산주의만큼이나 악한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이 내 것이라고 믿는 생각자체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수준에 그칠 뿐이지 결코 이익을 창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간단치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비유 자체는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 익숙한 상황 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달란트는 화폐의 단위입니다. 한 달란트의 가치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에 일용직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루 품삯이 10만 원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한 달란트는 6억 원에 상응하는 큰돈입니다. 하루 10만 원을 버는 사람이 한 푼도 쓰지 않고 약 2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두 달란트는 40년이 걸리고 다섯 달란트는 100년이 걸립니다. 이 비유에서 종들이 받은 달란트는 당시로써는 비현실적인 금액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처럼 비현실적으로 큰 가치의 무언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이익창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이익이 될 만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이 비유는 세상에서 근면하게 활동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8장 28절에서는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은 스스로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예수님 속에 계시며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남기신 이익은 결코 경제적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달란트를 재능이나 특기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결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와 같은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피조세계에서 하나님께 이익이 될 만한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일 뿐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신이 되어버린 인간들에게 내린 형벌이 대홍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이 육신이 될 때에 하나님은 이익을 보실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익을 보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독자적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격 즉 마음은 본래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다만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유일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이익을 드리기 위해서는 독자적 인격체인 마음을 스스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다만 자발적으로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피조물은 오직 사람뿐입니다. 창조라는 비용을 들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받으실 때에 비로소 이익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마음을 드리라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달란트를 비유로 삼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을 드린다는 신앙적 개념이 어떤 매개물이 없이 누구에게나 마음에 와 닿고 실천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이 실천적으로 적용된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입니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있으니 그것으로 내 마음을 벌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버는데 달란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일은 돈을 많이 벌거나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명예를 벌어들여서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벌어들여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한 달란트는 일용직 노동자가 약 20년 간 쓰지도 않고 모아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두 달란트면 40년 다섯 달란트라면 무려 100년을 모아야 합니다. 이처럼 비현실적으로 크고도 소중한 가치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빼앗고 정복하는 대상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것들이 모두 달란트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 중에서 내 마음을 빼앗고 좌우하고 정복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쉽게 말해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대상들이 바로 마음의 재고목록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마음을 벌어서 하나님께 이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일대기는 창세기 12장에서 25장까지 굉장히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대기를 들여다보자면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긴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일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주어진 달란트를 팔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마음에서 버리고 떠났습니다. 왕들이 탐할 정도로 미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백세나 되어서 겨우 얻은 적자인 이삭을 번제단에 바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버리며 아브라함은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버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지금 우리의 고향과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지금은 기차타고 버스타고 자가용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자리를 옮겨 살 수 있지만 느닷없이 타지로 떠나야 한다면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이러한 발상은 터무니없는 행위였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고향은 말 그대로 백년을 모아야 얻을 수 있는 액수만큼 소중한 가치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소중한 고향집을 떠납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집의 가치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왕들도 탐내는 미모의 아내인 사라를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사랑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달란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사라를 마음에서 버립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 사라라는 달란트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삭은 백년 만에 얻은 적자로써 비할 바 없는 값어치를 지닌 달란트였습니다. 그런데 이삭마저도 하나님께 드리고자 지불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달란트를 활용해서 하나님께 이익을 창출해내는 모습입니다. 내가 축구를 잘하니까 축구로 유명해져서 하나님께 이익을 돌리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축구를 잘하게 된 것조차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익이 아닙니다. 축구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실 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결코 내가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마음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내가 신경 쓰는 배우자는 사용해야 될 달란트입니다. 배우자의 값어치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왕 큰 값을 상징하는 달란트를 비유로 삼으시려거든 두 배씩이 아니라 서너 배씩 벌었다고 하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다섯 달란트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배우자를 마음에서 버린 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다만 본래 다섯 달란트의 배우자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마음이 다섯 달란트이므로 십 달란트를 드린 것이 됩니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이익으로 다섯 달란트를 보태 돌려드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마음에서는 자녀들이 마음도둑입니다. 외동딸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외동딸에게 빼앗기던 마음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외동딸 값어치만큼의 마음을 이익으로 드렸고, 본래 하나님의 것인 외동딸은 더불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배우자나 외동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본금입니다. 이 자본금으로 마음을 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빼앗긴 마음만큼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마음만큼이 하나님께 이익이 되고, 또한 배우자나 외동딸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던 만큼 하나님께로 돌려드리게 됩니다.
이로부터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흔히 이 비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제일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자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동일하게 배우자나 외동딸만큼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달란트를 활용해서 하나님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활동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한 것은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외동딸이 달란트로 주어졌는데 마음을 빼앗아가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본래였다면 외동딸 값어치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했지만 하나님께 보낸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외동딸에게 마음이 붙어버린 상태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대단히 부지런해보일 수 있습니다. 외동딸을 위해서 생각하고 계획을 합니다.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돈을 벌고 각종 학원이나 강의에 끌고 다니면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영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전혀 이익을 돌리지 못하고 있기에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몸이 가장 큰 달란트일 수 있습니다. 몸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몸에 대해 죽어서 그만큼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몸을 위해 마음을 쏟는 일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세상의 관점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몸을 위해 헬스를 다니고, 각종 영양제를 사서 먹고, 식단을 조절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는 이 또한 하나님을 향해 이익을 창출할 줄을 모르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입니다.
나이가 찬 처녀나 총각들은 결혼을 간절하게 바라게 됩니다. 이 바람은 실제 결혼한 것보다 더 강력한 달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바라는 만큼 그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일 때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마음도 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께서 부흥을 바라는 마음도 강력한 달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부흥을 십자가에서 죽일 때에 그만큼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순간순간 지나가는 작은 소원들까지도 가치 있는 달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그 만큼의 마음을 벌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주어졌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 세상의 달란트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그 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이익을 창출해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으로 기쁨을 누리시고, 예수님 또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리십니다. 이 삼위일체의 기쁨 안에 우리 또한 참여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성령으로 삼위일체가 되시어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면서 그 영원한 즐거움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란 복잡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주어진 달란트만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을 하면 사장님을 신경 쓰게 됩니다. 이때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떠올리며 사장님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직장에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내게 주어지고 내가 관계하는 모든 달란트의 값어치만큼 하나님께 마음을 이익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드려진 달란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며 내 삶을 움직여져 가실 것입니다. 이제 달란트를 활용해서 하나님의 이익을 창출해가는 창조적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 마음을 빼앗고 정복하고 움직일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재고조사를 하듯이 이 모든 달란트의 목록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시고,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그 달란트들만큼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그 달란트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는 복된 삶을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