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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예배의 인디언 보호구역_태승철 (마태복음 26: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3.11|조회수12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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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배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줄거리:

예수님이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와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비교해 보면, 이 요술 램프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아니 내가 무엇인가를 원하는 일 자체를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 죽음이 세상에서 제일 맛 좋은 이유입니다.


예배의 인디언 보호구역

(마태복음 26:1~16)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배의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배의 인디언 보호구역

마치 인디언을 보호라는 명목아래 가두었던 것처럼 예배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사태가 하루빨리 진정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예배가 중단되는 일들도 많아지는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최근에 친구 목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제가 부목사로 섬겼던 영락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영락교회는 교회가 창립된 이후로 예배를 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를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지속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예배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길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에 저는 남선교회의 45~55세 모임과 여전도회의 55~60세 모임을 지도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한 그분들께 예배를 굉장히 강조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배를 강조했던 이유는 단지 예배 자체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분들은 예배당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셨고 맡은 역할이 무척 많은 분들이었기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지 다른 활동을 하러 오는지가 불분명한 지경에 놓여있었습니다. 즉 예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배당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그 생각은 역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허락하신 진리의 기준에서 볼 때에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의미와 기능과 영향에 대해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3년 있다가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의 객원 연구원(Visiting Scholar)1년간 가게 되었습니다. 주로 예배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때에 저는 전반전으로 예배가 과장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말들로 수식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이론과 논리가 많아서야 일반 교인들이 예배를 제대로 알고 드리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의 순서마다 몇 십 페이지씩 의미를 부여하며 설명을 하는 일이 정말로 필요할까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예배가 예배다울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이틀 뒤면 십자가 수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이러한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행동이 제자들이 보기에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향유 한 옥합은 요한복음 125절에서 삼백 데나리온이라 언급이 됩니다. 옥합은 조그마한 화장품 병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한 해 연봉에 해당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삼천 만원의 값어치는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이 제자들의 눈에는 너무도 철없고 정신 나간 낭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괴롭게 한다는 말은 때리거나 쳐서 고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마리아를 극단적으로 몰아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화를 냈던 명분은 9절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 중 유다가 마리아를 비난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 나오는 유다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명분은 거짓된 말들이었습니다. 단지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네 번이나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앞뒤 정황은 파악하지 못하였겠지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죽음이 확정적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서 마리아는 죽으실 예수님께 삼천 만원어치의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여기서 마음가짐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죽으실 예수님을 향해 귀한 향유를 아끼지 않았던 마리아의 마음과 귀한 향유가 아깝다고 마리아를 비난했던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이며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전체 내용을 간단히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귀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은 귀한 향유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독립시킬 왕으로써의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국을 재현하실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귀한 향유는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옳게 여기셔서 1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이 나타나는 사도행전을 보면 특별히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이는 단순히 마리아의 행동이 귀감으로 전승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마리아와 같은 마음가짐이 나타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귀한 무엇인가가 낭비되고 사용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격분할 정도로 아까운 향유를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가짐으로부터 예배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배의 오해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예배는 습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배당에 다 같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중지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습관 때문입니다. 대충이라도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습관이 무섭습니다.

인간의 삶 전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사실은 참된 예배당은 지구 외에는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고,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지구는 유일하게 참된 예배당이고 우리의 삶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예배가 예배당에서만 드려져야 한다는 발상은 다소 불순합니다. 예배의 장소를 지구로부터 한정된 예배당이라는 건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삶 전체를 통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예배를 예배당에 가두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인디언을 보호한답시고 구역을 정해서 가두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 지구 전체가 예배당이고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 전체가 예배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배가 갖추어야 될 기본 조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내게 오실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만남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본 조건입니다. 예배는 일방적인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주심과 드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고,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주심과 드림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만남으로써의 예배는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거리를 두신 채로 능력이나 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들어오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가면이 되고 지정의의 능력은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삶이 예배의 연장이고 결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나의 삶을 살아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현장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만 하나님을 주심에는 의미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몸을 가면 삼으시고 지정의를 장갑 삼으셔서 움직여 가시는 일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예배당에서만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발상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의 과정에서 송영, 묵도, 기도, 교독문, 설교, 헌금, 축도와 같은 형식은 습관적으로 고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과정을 습관적으로 해나가는 것은 예배를 미신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배는 이러한 순서를 따를 때에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주시려는 것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릴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럼으로써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예배는 온전할 수 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유지하려했던 것처럼 모여야만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형식을 따른 예배를 통해 보람을 느낀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받은 적이 없으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가면과 장갑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렸다고 여기고 있으니 미신인 것입니다. 마리아를 비난했던 제자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남미에서 가톨릭이 보편화되었지만 토속신앙과 섞여 가지가지 우상을 함께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만이 미신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질서 있게 드려지는 예배도 마음상태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미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까운 것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낭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드림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드림을 통해 하나님을 받는 온전한 만남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의 것을 담은 마음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아까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까워해야만 하는 대상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담을 수 있도록 지음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면 그토록 아까운 일은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지금 마음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들을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까워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썼던 것처럼, 우리가 아까워하는 것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를 생각해봅니다. 그 때에 창세기 2211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을 멈춰 세우십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사라는 형식이 아니라 아깝게 여기는 것을 바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과 동일합니다.

하나님 외에 무엇인가가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아까워하는 대상을 빼서 하나님께 드리고 대신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마음에서 아까워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 생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물이란 단지 살아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약동하는 모든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치는 일관된 하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으며 상황과 판도가 급변하기 때문에 오늘 다 죽었다 싶어도 살아나는 일이 있고 승승장구하더라도 한 번 실수로 몰락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아깝게 여겨지는 대상들을 생물처럼 여기며 이것들이 들어온 마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다 써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아깝게 여기는 세상의 가치들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명품을 샀을 때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아깝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는 아깝게 여겨지지 않아 남에게 줘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더는 마음에서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운 것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다 드려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써의 예배는 성립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고 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아깝게 여기는 것들은 모두 삶의 현장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것도 삶의 현장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중대한 계약을 앞두고 있습니다. 계약에 성공하면 3억을 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서는 지금 3억이 가장 아까운 대상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아깝게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습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삶의 현장에서 예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잠시 시간을 내서라도 3억을 아깝게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3억을 아깝게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쓰이게 됩니다. 단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고백을 했을 뿐인데 어느덧 마음에서는 3억에 대한 아까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마음에서 아까운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배우자가 마음에서 아까운 대상입니다. 설령 서로에게 화를 낼 때에도 아깝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로 산 차가 아깝고 은행에 넣어둔 적금이 아깝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까운 것들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예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쓰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아까운 것이 없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에 아까운 것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이 아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까운 것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한다면 가룟 유다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아까운 대상으로 붙잡을 때마다 예수님은 버려집니다. 이러한 마음을 유지한 채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 천 명이 모이든 만 명이 모이든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마음에서 아깝게 여기던 세상의 가치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와 같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한다면 예수님의 기적을 좋아할 수는 있을지언정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배당에 모일지라도 온전한 예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장 한 복판에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아까운 대상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동안 예배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받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워주실 것이며 삶을 뜻대로 움직여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진실을 깨달을 때에 삶은 예배가 되고 재미있고 즐거워집니다. 아까운 대상이 생겨날 때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다 써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서 흔적도 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실 때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죽은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삶이 예배 장소로 바뀌게 됩니다. 예배당을 고집하는 것은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가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배를 가두어 둘 때에 우리 삶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삶이 예배가 아닌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이 임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무엇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모든 삶은 예배의 연장이고 예배의 결과가 됩니다. 이제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든 아까운 마음이 들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다 써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주시려는 의도를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하나님을 받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시지는 너무도 쉽고 즐겁고 행복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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